봄이 곧 올 것 같구나.
날이 포근하다.  

오늘은 군사 독재에 저항했던 시인 김수영.
'풀'로써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의 희망을 주었던 시인 김수영.
그의 시 중, 읽기 어려운 시가 있다면 단연 '공자의 생활난'이란 시다.
읽기 어려운 시는 상상력을 충분히 넣어 말랑말랑하게 무르도록 만들 필요가 있단다.
그렇지만 이 시에는 의미가 쉽사리 통하지 않는 한자어들이 제법 등장하여 좀 어렵기도 해.
우선 시를 한번 읽어 보렴. 

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었을 때
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는 발산(發散)한 형상(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作戰)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ㅡ 이태리어(語)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의 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는 바로 보마.
사물(事物)과 사물의 생리(生理)와
사물의 수량(數量)과 한도(限度)와
사물의 우매(愚昧)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

그리고 는 죽을 것이다. <김수영, 공자의 생활난>

스물아홉 김수영 시인의 데뷔작이라고 알려진 이 시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금세 전달되지가 않아서, '난해시'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단다.
그렇지만, 김수영이 <거칠게 지었고 넘치게 표현했다, 조제남조 粗製濫造>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지만,
김수영은 무슨 이야긴가를 담고자했을 것이다.
부드러운 입에 씹기 단단해 보이는 것도 오래 머금고 있으면 물러지듯, 이 시를 골똘히 들여다보면 물러질 거야.  

이 시는 1945년에 발표된 시라고 하니, 일제 강점기의 고난을 염두에 두고 썼을 수도 있겠어. 

제목이 '공자의 생활난'이니 공자와도 관련이 있겠고 말이지.
'공자'는 누구나 아는 사람이잖아.
공자는 옳게 사는 길을 제시하려 노력한 정치철학자인데,
그에게 '생활난'을 '먹고 살기 어렵다'고 들이미는 것은 조금 우스워보인단다. 

4연에서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라고 했고, 마지막 연에서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란 표현을 했지.
이런 것들과 연관지어 본다면, 
논어에 실린 유명한 말 '조문도 석사가의 朝聞道 夕死可矣'란 구절이 떠오른다.
아침에 진리(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의미지. 

1~3연은 해석이 구구하고 복잡해.
사람들 누구도 이 구절을 확실하게 해석한 사람은 없단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야.
그렇지만 마지막 두 연은 의미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단다. 

3연까지의 이야기는 <세상의 사물을 바로 보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로 보면 될 거야.
유학에서 <격물치지 格物致知>란 참 중요한 말이거든.
<사물, 대상>을 연구하여 <앎>에 이른다는 말이야.
<앎>은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란 거지.
그 <앎>은 무언가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인생일 수도 있고,
자연의 변화일 수도 있고,
인간의 역사일 수도 있어.
그런 것들을 통해 깨닫게 되는 <관조>의 경지도 격물치지의 한 부분일 수 있겠다.

<이제 나는 바로 보겠다>는 화자의 강한 의지,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같은 말의 연속은,
공자가 세상 이치를 <격물치지>의 원리로 바로 보고자 하고,
바로 보는 도를 깨닫는다면 죽어도 좋다는 이야기를 즉각적으로 불러오려는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뭘 바로 보냐면 말이지.
사물!
봐, 격물치지하고 관련되는 거야.
사물의 생리! 
사물이 어떤 원리가 그렇게 되었는지.
소설을 읽으면, 인간이 왜 그렇게 변했는지 알게 되고,
역사를 읽으면, 인간들은 왜 그렇게 싸우는지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야.
종교, 철학서들을 읽으면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도 따지게 되는 것처럼...
삶과 사물의 원리를 따질 필요가 있다고 본 거지. 

사물의 수량과 한도!
수량의 많고 적음, 한도의 길고 짧음.
많은 것이 적은 것보다 낫기만 한 것도 아니고,
한도가 긴 것이 짧은 것보다 좋기만 한 것도 아님을... 바로 보고 싶대.
세상은 그런 원리로 이뤄진다는 것을 말이야.
일제 강점기에 돈이 많았던 넘들, 해방되고 벌벌 떨었잖아.
인간이 오래 살고 싶지만, 더러운 꼴을 보면서 오래 사는 건 더 힘든 일이잖아.
수량과 한도, 그것들은 많고 긴 것이 좋기만 하진 않음을 바로 보고자 한단 거지. 

사물의 우매함과 명석성!
인간이 명석하다고 난리를 치지만 말이야.
옛날처럼 낮은 집을 짓고 원시인처럼 살던 시절엔 지진이 나도 건물에 깔려 죽진 않았을지 몰라.
어제 강도 8이 넘는 엄청난 지진이 일본을 휩쓸었단다.
그런데,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되어 방사능 유출도 있었다지 뭐냐.
원자력 같은 거, 인간의 <명석함>이 발견한 문명의 이기 利器지만,
지진나니깐 그 명석함때문에 피해를 입는 <우매함>의 결과를 낳게도 되는 거야.
핵폭탄이든, 교통사고든, 인간의 명석함이 우매함의 결과를 빚는 거지. 

공자님도 살기(생활) 어렵던 시대지만,
화자도 살기(생활) 어렵던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올바로 보기 힘든 시대였을 거야.
친일부역자가 잘 살고, 독립군 가족은 핍박받던 시대였지.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가 생각나는구나. 

캡틴 이인국, 캡틴을 러시어말로 꺼삐딴이라 부른대.
이인국은 일제 강점기 의사가 되어 해방된 뒤에도 소련치하에서도 미군 치하에서도 잘 사는
카멜레온 같은 인간이지.
과연 그처럼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인간이 잘 적응하며 살아가는 이런 세상.
화자는 고민했을 거야.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하고 말이지. 

그러다 이런 시를 썼겠지.

   
  <나는 바로 보마>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ㅡ 공자처럼...   
   

이제 앞부분의 단단한 내용을 곱씹어 보자.
거기서 화자인 <나>와 청자인 <너>를 나눠볼 수 있어.
<나>는 세상 이치를 바로 보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랬잖아.
<너>는 세상 이치따위엔 관심도 없이, 그저 권세와 돈에 빌붙는 그런 존재,
꺼삐딴 리의 <이인국>같은 카멜레온으로 볼 수도 있겠다. 

제 1연.
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었을 때 
이 구절은 모순을 표현한 것 같아.
꽃은 나무의 생식기관이잖아.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나무가 온 에너지를 꽃가루의 가루받이가 이뤄지도록 돕기 위해
곤충을 부르려고 아름다운 색과 빛깔, 향기까지를 퍼뜨리는 거란다.
그 꽃이 가루받이가 되면 꽃은 시들고,
곧 수분된 씨앗이 자라서 열매가 되는 거야.
꽃이 열매의 위에 피었을 때, 이런 시대는 <말도 안 되는 시대>란 표현이 아닐까?
일제 강점기처럼 모순의 시대 말이지.

그런 시대에 <너>는 장난만 치고 있대.
고민하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깨달으려 공부하지 않고 장난만 치는 <너>. 
화자가 <부정적으로 느끼는 상대>란다.
친일파, 친러파, 친미파... 이런 놈들 내지는 스파이, 끄나풀... 

옛날에 이런 노래(참요)가 있었대. 

국놈 믿지 말고,
련놈에 지 말자.
본놈 어난다.
선 사람 심하자.

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언어 유희지.
바로 살려고 고민하지 않고,
오늘 죽어도 올바로 살 길을 찾지 않고,
격물 치지의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장난 삼아> 사는 자들을 상대로 쓴 글이겠지. 

2연에서 <나>는 진실을 구하려 노력하고 있어.
그렇지만, 그것은 또 구하기 어려운 거야. 

3연에서 <나>는 <반란성>을 가진 존재일까? 의문부호를 붙이고 있단다. 

장난처럼 세상은 오로지 <무력>으로 <권력>으로 밀어붙이는 부조리한 자들이 득세하고,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국가가 우리에게 해 준게 뭐가 있냐!
이렇게 <술 푸게 하는 세상>이었을 거잖아. 일제 강점기.
그렇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세상에서도 평화롭고 즐겁게 살고 있었어.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이 쓴 수필의 일부분을 읽어 보면,
도무지 <술 푸게 하는 일제 강점기>에 쓴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구절도 있단다.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 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피어야 하고 주전자의 물은 펄펄 끓어야 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낱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그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 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색전등도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 하고 계획도 해 보곤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이효석, 낙엽을 태우면서, 부분>

1907년~1942년, 이 극심한 일제 강점기에 이런 수필을 적은 사람도 있음을 신기해할 필요도 없다.
삶은 늘 그런 모순의 양면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황순원의 불후의 명작 <소나기>는 한국 전쟁이 치열하던 1951년에 창작된 작품이기도 하고. 

국수ㅡ 이 한국적인 발음을 이태리어로 마카로니로 바꿔가며 이국 음식을 먹기도 하는 이도 그 당시엔 있었겠다.
1930년대 이후 서양풍의 모더니즘이 들어오면서 서양식 의복, 서양식 음식 들을
쉽사리 익숙하게 먹게도 되었으리라. 

화자도 마카로니라는 이국 음식을 <먹기 쉬운> 계층이었을 수도 있다.
원래 지식인 계층 옆에서는 <진리의 가시 면류관>와 <부정하고 기름진 돈>이
<옳음을 따라야 하는 마음>과 <권력의 달콤함>이
<감옥>과 <권좌>의 갈림길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으니 말이야.  

김수영이 어떤 것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여겼고,
어떤 것들을 <바로 보아야 할 것>으로 여겼는지 이 시만으로는 분명하지 않아. 

하지만, 화자는 <발산(發散)한 형상(形象)을 구하였>다고 했어.
그것은 무슨 <
작전(作戰)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고도 했고.
발산한 형상이란 말은 조금 어색한 한국어라 볼 수 있는데,
어쨌든 자유롭게 확산되는 삶을 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작전 펼치듯 힘들게 해야 하는 것이라면 발산하기도 쉽지 않지. 

김수영이 나중에 <폭포>를 쓰거든.
<폭포>는 <곧은 소리>잖아.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이런 정신이 <발산의 정신>이라 볼 수도 있겠지. 

이 시에서 <너>는 올바로 사는 것보다는 장난을 즐기고 마카로니를 즐기는 이로 보인다.
반면 <나>는 그런 현실에, 너와 함께 마카로니를 먹기 쉬운 상황에서
바로 보려는 노력을 하는 이같이 느껴지거든. 

화자는 <반란성>을 느끼고 있어.
뭔가 자기 본성에 반대되는 짓을 하고 있는 존재처럼 스스로 느껴졌나봐.
편하게 살고, 부유하게 살고, 우아하게 살고, 번지르르하게 사는 사람들.
일제 강점기에도 그런 사람들이 부럽게 마련이지.
친일파니 뭐니를 떠나서,
배고프고 가난하고 병들고 누추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게 마련이란다. 

그러나, 그런 동물적 본성을 벗어나, <반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아빠는 본다.
그래서 <이제 나는 바로 보겠다>는 발언을 하는 거로 말이야. 

부르기 쉽고 먹기 쉬운 국수를 이태리어로 마카로니라고 보는 전도된(뒤집힌)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하여 <다르게 보고, 뒤집어 보기>의 다른 말. 반란. 

김수영이 이 시를 쓴 바탕에는 <삶의 가난>이 깔려있는 것 같아.
그리고 공자의 <죽어도 좋으니 도를 듣고 싶다>는 치열한 정신을 떠올리면서,
자기는 공자처럼 훌륭하지 못한 사람임을 부끄러워했을 것 같기도 하구나.
가난하면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기 쉽거든.
비루하고 추한 일, 더럽고 비겁한 일도 하게 되기 쉽거든.
그래서 화자는 마지막에서 먹고 사는 데 얽매이진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를 쓴 것 같구나.


또 이야기를 하나 지어 볼까? 

김수영은 가난한 시인이었다.
늘 배고프고 수중엔 십 전짜리 한 푼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가장이었어.
집에는 까슬하게 여윈 아내와,
난 지 두어 달 남짓 되었지만 아직도 발육 상태가 나쁜,
정말 고것이, 그 핏덩이가 백일까지 살 지 걱정되는 아기가 기다리겠지. 

김수영은 골방에서 곰방대에 넣을 담배마저 떨어진 참에 거리로 나섰어.
길거리엔 온통 가난한 냄새 뿐이었단다.
때는 양력 5월, 곧 보리가 누르익으면 춘궁기는 넘기련만,
어느 집 하나 불 때서 죽이라도 넉넉히 끓이는 집이 없었지. 

길을 나선 김수영이 읍내로 들어선 것은 점심 나절이었어.
읍내 국민학교 앞 복덕방 모퉁이에서 동네 영감들이 힘없이 장기를 두고 있어
하릴없이 그 구경이나 하고 있었나봐. 

뒤에서 옆구리를 쿡 찌르는 기척에 돌아보니
머리엔 구찌 기름을 반지르 하게 바른 춘삼이가 웃고 있었어.
춘삼이는 면사무소에서 서기를 하고 있는 녀석이야.
어려서부터 공부엔 소질이 영 없어서 교실에서 구박받던 녀석인데,
어찌 줄을 섰는지 면서기가 돼서 제법 네꾸따이도 매고 다니니 세상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나봐. 

춘삼이가 점심을 사겠다며 김수영을 데리고 갔어.
김수영은 배고픈 김에 국밥이나 한 그릇 얻어 걸릴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춘삼이는 읍내 제법 번지르르한 식당이자 술집인 명옥헌으로 들어섰대.
실내는 제법 널찍하게 차려졌는데,
종업원보고 하는 소리가 <마카로니>를 두 그릇 달래는 거야. 

"야, 마카로니가 뭐냐?" 묻는 김수영과,
"어, 그거 서양 국수야, 양국수, ㅋㅋ , 어이, 여기 막걸리 한 주전자 줘 봐~"
막 대놓고 반말 지꺼리인 춘삼이. 

잠시 후 막걸리 한 사발 기울이고 있는데,
종업원이 내온 것은 칼국수 치고는 너무 두툼하고,
그렇다고 가래떡보다는 얇은 양국수가 불그데데한 양념에 비벼져 있었겠지.
"야, 이거 한 번 먹어봐. 양국수라는데 맛이 그냥저냥 먹을만 해."
김수영은 영 그 양념 색이 못마땅해서 막걸리만 내쳐 두 잔을 마셨어.
속이 좀 든든해 졌지만, 그래도 음식을 남길 수는 없어서 그 양국수란 걸 집어 먹어봤대.
근데, 양국수가 굵어 보이지만, 속이 비어있으면서 씹히는 맛도 쫄깃거리고
입에도 착착 달라붙는 것이 희한한 거였어. 

"야, 춘삼아, 이게 이름이 마... 마차... 뭐랬냐?"
"아, 그거 마카로니에요. 마,카,로,니..."
보리차 나르던 사환 애 녀석이 아는 체를 한다.
"야, 수영아, 근데 일본 사람들 세상이 끝내 준단다. ㅎㅎ
내가 일본 세상 아니었음 어떻게 면서기를 다 하겠니.
또 면서기 아니었음 어떻게 마카로니도 다 먹어봤을 거구. 허허허" 

계산을 치르는 춘삼이를 무추름하게 보고 있던 수영은 그 값이 비싼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어찌어찌 춘삼이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엔 수영의 주머니에 춘삼이 사서 찔러준 '럭키' 담배가 한 갑 들어있었다.
럭키 담배, 돌돌 잘 말린 궐련 한 개비를 피워물고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수영.
왠지 사는 게 거꾸로인 거 같았다. 

일본 세상이 더 좋은 사람, 춘삼이.
물구나무 선 세상인가?
물구나무 선 춘삼이는 물구나무 선 세상이 더 자유로운지도 모르겠다.
꽃이 핀 석류 나무를 보면서,
이거 원, 세상이 <열매 윗부분에 꽃이 핀> 것처럼 부조리한 거나 아닌가 생각한다.
물구나무 선 세상에서 즐겁게 <줄넘기 장난>을 하는 춘삼이가 정상인 건가? 

수영은 자신이 '자유로운 영혼을 드러낸 시'를 쓰고자 했지만,
그러기에 세상은 전쟁터처럼 혼란스러워,
무슨 '작전이라도 펼쳐야 할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국수 ㅡ 이태리어(語)로는 마카로니라고
그런 낯선 것도 잘도 넘어가던 자신을 생각한다.
나의 안에 담겨있는 <반란성>은 어디로 간 걸까? 

공자를 떠올린다.
조문도 석사가의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을 정도로 진리를 찾던 사람.
오늘 아침에만 해도 공자처럼 <죽어도 옳은 길을 사랑하는 인생>을 살겠다고 생각했거늘,
배고픔과 <생활난> 앞에서 그 마음은 언제 사라졌던 것일까. 

끝까지 타버린 럭키 담배 꽁초를 버리면서, 수영은 생각한다.
세상을 바로 볼 수 있을까?
배고픔을 뛰어넘는 진리를 위하여 명석하게 살 수 있을까?
그래, 마카로니의 달착지근한 부드러움에 금세 비굴해진 내 혀를 부끄러워하자.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살자.
배고픔에 져버리면 나는 더이상 공자의 후예가 아니다.  

춘삼이가 주머니에 억지로 넣어준 십 전짜리 지쩐으로
보리쌀과 옥수수를 두어 되 사서 아내에게 안기고 수영은 골방으로 들어가 부리나케 펜을 들었다.
럭키에 불을 붙일 여유도 없이,
불붙지 않은 담배만 한 개비 물고 시를 쓴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事物)과 사물의 생리(生理)와
사물의 수량(數量)과 한도(限度)와
사물의 우매(愚昧)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누운 수영은
스스로가 몹시 부끄럽다.
모순된 세상만큼 모순된 자신의 모습이...
깜깜한 방이 점점 작아지고,
자신의 육신도 점점 작아지고...
깜깜한 방의 담뱃불만 바알갛게 반짝거리고...

난해시로 유명한 시를 이야기하다 보니 너무 길어졌나보다.
그렇지만, 딱딱한 무기질같은 시도 이렇게 말랑말랑하게 읽어내는 일은
문학이 우리 삶에 주는 것이 무엇진지
생각해 보게도 해 준단다. 

삶에서 수학처럼 공식이 달린 일만 일어나진 않거든.
배배꼬인 일이 우리 인생에 달려들 때는,
딱딱한 시를 입에 물고 한참 불리는 때를 기억해 보려무나. 

아까 국수 이야기가 나왔으니, 다음 시를 한번 보렴.
'여승'의 시인 '백 석'의 시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은 무엇일까?'
스무고개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재미있는 시야.
토속적인 삶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참 아름다운 그런 시.
한번 읽어 봐.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룻밤 뽀오얀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연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던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느 하룻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옛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버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순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의젓한 사람들과 살뜰하니 친한 것은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 국수>

♣ 김치가재미:북쪽 지역에서 겨울철에 김치를 넣어 두는 움막, 헛간
♣ 양지귀 : 햇살 바른 가장자리
♣ 은댕기 : 가장자리
♣ 예대가리밭 :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 산멍에 : 이무기의 평안도 말
♣ 큰마니 : 할머니의 평안도 말
♣ 집등색이 : 짚등석, 짚이나 칡덩굴로 만든 자리
♣ 자채기 : 재채기
♣ 희수무레하고 : 희끄무레하고
♣ 삿방 : 삿(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을 깐 방
♣ 아르궅 : 아랫목
♣ 고담(枯淡):(글, 그림, 인품 따위가) 속되지 아니하고 아취가 있음

평안도 사투리가 구수한 이 시에서 하나의 답을 요구하며 밀어붙이는 이것은?
바로 제목인 <국수>란다.
구수한 국수의 내음새를 통하여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지.
백석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잃어버리고 있는 <민족 공동체의 삶>을 시로나마 남기려고 노력한 시인이야.
이 시에선 그저 <국수>를 떠올리는 게 아니라,
국수를 삶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구수함,
그 공간과 시간 속의 모든 것들을 눈감고 상상하는 화자의 마음을 잘 쓰고 있는 것 같아. 

백석의 이 시에서 음식물은 단순히 허기를 때우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특수한 시적 기능,  
즉 민족과 민족성 그 자체를 의미해.
음식이란 민족마다 문화의 독특한 영역을 차지하면서 그 음식물을 먹는 사람들의 체질이나 성격을 결정짓기도 하고,
백석이 전 국토를 유랑하면서 음식물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바로 이런 데 있어.
국수를 먹으면서 어린 시절 국수와 얽힌 추억들을 통해 우리의 본래적인 삶을 상기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습성이 바로 우리의 민족성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시로 볼 수 있지. 

어쩌면 백석이 이렇게 국수 한 그릇을 마시다가
굵은 눈물이라도 한 방울 주륵, 흘렸을지 모르겠다.
백석에게 춘삼이같은 친구가 다가와서 마카로니를 먹였다가는
절교를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야. 

요즘 일본에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몰려와서 난리도 아니더구나.
아빤 평소에 일본 놈들을 지긋지긋하게 저주하는 사람이야.
일본 때문에 아무 죄도 없던 한국이 반토막으로 잘렸고,
그래서 지금도 쓸데없는 국방비에 수십 조를 퍼부어야 하고,
미국놈 앞잡이처럼 살아야 하는 거니깐 말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역사가 미운 거지,
일본인들이 수천 명이 죽고, 고통을 당하고 아이들이 우는 걸 보니 마음이 아프더라.
무엇이든 김수영의 <공자의 생활난>처럼 <바로 보기>는 어려운 모양이야.
마음 속에 콩깍지가 되어 가려졌던 일본에 대한 증오심은 일본에 대한 진심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암튼 우리 사는 땅은 지진이 거의 없어서 다행은 다행이다.
주말 잘 보내고, 새로운 한 주를 준비하자.
밤이 늦었다.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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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3-13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무지 해독이 안 되던 <공자의 생활난>이 이 글을 읽으니 말씀처럼 조금 말랑해 지는 느낌이에요. 고맙습니다.

글샘 2011-03-14 08:38   좋아요 0 | URL
조금 말랑해 졌나요? ㅎㅎ
스스로도 거칠고 넘친다고 한 시니깐...
한때 해석이 안 되는 시가 미덕이던 때도 있었겠죠. ㅎㅎㅎ

양철나무꾼 2011-03-16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보다는 해몽이라고, 시도 좋지만 해석이 넘 좋아요.^^
근데 궁금한게요, 요즘 고딩들은 문과 이과 상관없이 저렇게 두루두루 섭렵해야 하나요?
이 '글샘의 문학수업'을 읽다보면, 수업을 듣다보면...저 고딩 때는 모르던 것들이 태반이어서 말이죠~

글샘 2011-03-16 08:55   좋아요 0 | URL
요즘엔 언어영역에 별 것이 다 나오니
많이 들어두면 도움이 되죠. ^^
사실은 저도 모르던 것들입니다. ㅎㅎ

몽유 2012-01-07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대박대박대박!!
예비고3인데요 이 시를 발견해서 으아아얼강겨미;나름댜ㅣ;검ㅇ,ㅡ러 으엉강ㄱ거ㅏㄱ어걱ㅇㄱ 이건무어야!!!!;ㅣㅏ더ㅑㅐ;ㅁㅇ 이러고있었는데 오호,,? 오옷!! 우와아아아!!!! 감동해서 댓글올리려 했는데 아이디 없어서 알라딘 회원가입했어요ㅎㅎ 도움많이많이 됬어요ㅎ,, 저 나름 말랑하다고 생각했었는데ㅠ 아 쨉도안되ㅠ,, 여튼! 감사합니다~~^-^//

글샘 2012-01-12 11:24   좋아요 0 | URL
이 시는 난해시예요. 난해한 시...
난해하니깐, 제대로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겠죠. ㅎㅎ
제 나름대로 풀어본 거니깐,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