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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일반판) ㅣ 문학동네 시인선 2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허수경의 시집은 처음 읽었다.
그의 시를 몇 편 만난 적은 있었지만, 이런 느낌까지는 아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왠지 시라고 부르기엔 좀 낯선 것들이었다.
최영미가 욕설 같은 것들을 남발하는 시를 써서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 사람도 그런 부류인가 생각했던 선입견은,
빌어먹을... 시를 읽으면서 이해로 바뀌었고, 금세 공감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건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을 읽고서였다.
다른 시들은 그가 독일에 살고 있고, 연구하는 분야가 고고학(고대근동 이라는데, 근동은 어딜까? 터키에 가서 발굴한다는데, 거긴 중동보다 유럽에 가까운 동양이라 근동이라 부를까? 맘에 안 드는 용어다.)이라 그런지, 짧은 고고학에 얽힌 단상들을 적은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게 한다.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이름 없는 것들이지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
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
아님, 말 못 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말하던
근대 입구의 세월 속에
당신, 아직도 울고 있나요?
오늘도 콜레라가 창궐하는 도읍을 지나
신시(新市)를 짓는 장군들을 보았어요
나는 그 장군들이 이 지상에 올 때
신시의 해안에 살던
도룡뇽 새끼가 저문 눈을 껌벅거리며
달의 운석처럼 낯선 시간처럼
날 바라보는 것을 보았어요
그때면 나는 당신이 바라보던 달걀 프라이였어요
내가 태어나 당신이 죽고
죽은 당신의 단백질과 기름으로
말하는 짐승인 내가 자라는 거지요
이거 긴 세기의 이야기지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이야기지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구제역 걸렸다고 소를 땅에다가 그냥 묻어버리면,
소의 위에서 발생하는 가스로 인하여 땅 속에서 폭탄 터지듯 펑펑 터진단다.
그래서 낫으로 소의 위장을 쳐내고 묻어야(아, 정말 빌어먹을, 차가운 나라가 아닌가) 된다고 하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동물을 사랑해서 수의학을 공부한 사람들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빌어먹을, 차가운 행위다.
시에다가 '빌어먹을, 차가운' 같은 용어를 쓰는 것은 좀 낯설다.
하필이면 미국산 소고기 수입과 관련된 문제가 불거졌을 때, 전국을 휩쓸었던 구제역으로 난리가 아닌데,
텔레비전은 어디서 울궈먹을 거 없나 눈에 불을 켜고 있을 때,
아덴만으로 이동한 한국군의 용맹은 '빌어먹을, 차가운' 뉴스를 화끈하게 달구려고 난리 법석이었다.
정말 '빌어먹게 차가운' 1월을 보낸 사람들에게,
'아덴만의 여명'이란 수백 억 짜리 영화까지 만들어 보여주겠다는 정부의 <빌어먹을, 차가운> 작전을 바라보는 일은,
'빌어먹을, 차가운' 놈들이라는 욕이 목구멍을 급기야 탈출해서 방언의 경지에 금세 도달하게 만든다.
허수경의 이 시집을 내가 구입한 것은, '빌어먹게도 환장하게 이쁜' 빨강이 표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 원 더 비싼 책은 어떨지 몰라고, 천 원 싼 이 책은 아무래도 불안하다.
시집을 읽는 맛 중에 하나는,
시집의 사이즈가 일반 도서보다 길쭘하여 손에 잡기가 좋고,
처음 읽는 시집을 펼쳤을 때, 책갈피와 책갈피 사이의 접착력으로 인한 강한 긴장감이 양 면을 끌어당기듯 펼쳐지지 않으려는 저항을 보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유난히 하얀 표백제처럼 탈색된 종이에,
유난히 작은 글자가 가득 들어앉은 페이지들은 긴장감없이 훌쩍훌쩍 넘어가버려 책을 만지는 손맛을 실망시키고 말았다.
그의 이 시집은 어쩌면 외국 시집을 번안하여 읽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낯선 형식과 낯선 상황들을 많이 만나게 하였는데, 과연 그의 이 시집을 한국 문학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인가를 나는 무척이나 느끼면서 이 시들을 읽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