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化果는 없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35
김해자 지음 / 실천문학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무화과...
꽃이 없는 과일...
그렇지만 무화과에도 꽃은 있다. 그 과일처럼 보이는 육질 안에 가득한 것이 꽃이다. 

세상의 이치는 그렇다.
무엇 하나 없으면 안 되는 것.
겉으로 없어 보이지만, 사실 다 있는 것. 완전하고 온전한 것. 그렇다. 

그렇지만, 또 세상 이치는 이렇다.
길거리엔 똥물 시궁창물 구정물 가득 끓어 넘치지만
뉴스엔 살인 강간 절도 수뢰 똥물 구정물보다 더러운 소식들로 박이 터지지만
나이 따윈 잊으라는 탈렌트 한 마디에 수십 만원 짜리 크림은 불티가 나고
술집을 나갈지언정 명품 백은 옆구리를 장식해야 하는 사람들로 네온사인은 붉게 물든다. 

그리하여 세상 이치를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도 모순되기에,
그리고 그 모든 미시사를 역사적으로 기록하기엔 역사학자가 너무도 부족하기에,
거기 문학이란 불량품이 기생할 틈이 놓인다.
문학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지만, 칼날같은 철학과 무쇠같은 역사가 적지 못하는 것들을 부드러운 인절미마냥 담고 앉은 것이다. 

삼백 날이 다가오도록 일기 한 장 쓰지 못한 나는
삼백 날이 넘도록 울면서 시 한 줄 쓰지 못한 나는
그래서 하루의 무용담을 노래하지 못하는 나는
일 년 삼백 예순 날 누군가를 위해 울지 못한 나는
이 밤중에 나의 누추를 운다 

고개 돌려 나의 상처에 귀기울인 동안
겨울이 가고 어느새 나뭇잎은 무성해지고
누군가는 또 병들었다
내 앞의, 내 안의, 또 내 뒤의 고단함에 지쳐 
병석에서 뱃살만 늘려온 나는 죄만 늘려온 나는
아니다 아니다 고개만 흔들어온 나는
지금 한밤중이다 (한밤중, 전문) 

이런 시를 읽으면, 나도 아프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던 날, 플라톤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앓아 누웠던 것이다.
김해자 시를 읽노라면, 김진숙이 떠오른다.

http://www.youtube.com/watch?v=7w3TTUjecos 
(김진숙 지도위원의 타워크레인 인터뷰) 왜 그는 타워크레인에 올라갔는가?

다음 생엔 꼭 내 속으로 들어와 열 달 뱃속 품어 고이고이 길러 내 배 앓아 엄마를 낳아줄게 배탈나면 차조 메조 눈 많은 곡기 끓여 기저귀에 꾹 짜서 한 입 한 입 먹여줄게 한참 자랄 땐 새벽시장 콩물 받아다 노란 주전자 가득 머리맡에 놓아줄게 입맛 없을 적엔 산낙지 사다 식초 설탕 간장 넣어 염포탕도 해주고 석화 넣어 훌훌 넘어가는 매생이국도 끓여줄게 한평생 서서 밥상 고이 차려줄게 늘 앉아서 밥상만 받은 몸이 (어머니의 밥상, 부분) 

김해자의 시는 전설이고, 추억이고, 아련한 옛 이야기를 끌어내지만,
또 한켠 날카로운 종잇장에라도 베인 듯 아릿한 슬픔도 자아낸다. 

깎을 만큼 깎고 견딜 만큼 견뎠는데
기다리라 해서 기다려도 봤는데
돌아가다 말다 하던 콘베어벨트는 끝내 멈췄다
마이너스 통장도 깨서 쓸 적금도 이제 없다
누비라는 거리를 잘도 누비는데
낡은 작업복은 누비고 다닐 데가 없가나
붕토를 접어볼까 아내 앞에 꿇어앉아
한 판에 40원짜리 컴퓨터 키보드라도 끼워볼까
셔터 내려진 부평 거리 갈 곳 없는
사내 하나 부평초로 떠돈다(대우우중, 大宇雨中, 부분) 

제목부터 풍자가 가득하다.
대우의 김우중이는 배부르게 잘 사는데, 노동자는 다 자르듯,
큰 비 내리는데 노동자는 갈 곳이 없이 잘렸다.
대우 누비라는 누빌 곳도 많지만 늙은 노동자는 일터가 없다.
결국 부평초가 되고 만 신세.
신자유주의 세상의 인간이다. 

어두운 한낮 산사에 갔다  

해탈문 지나 무량수전 처마 밑에
죽지 접고 졸고 있는 새의 무연한 시선에 
풍경 소리 날아와 부딪히는데
그 순간 석가모니처럼 반개한
새의 눈에 엷은 미소가 번졌는데
나는 왜 배롱꽃처럼 얼굴 붉혔을까 

내 평생 더듬거리다 보면
절로 안겨오는 노래 부를 수 있을까
온몸이 귀가 되고 눈이 되어
제 말이 없어진 천수천안보살처럼
다 타고도 바람 속에 묻어나는 향
울려퍼지는 풍경 빚을 수 있을까
말 속에 절이 깃들듯
절 속에 말이 숨쉬듯 (言 寺, 전문) 

시의 제목 '언  사'는 합치면 '시'가 된다. '말과 절'이 합쳐서 시가 된 것. 

절로 안겨오는 노래가 시가 되는 이치를,
말 속에 절이 깃들고, 절 속에 말이 숨쉬어야 남들에게 들려줄 시가 되는 이치를
그는 볼 수 있게 된 것이 언제부터일까?
배롱나무처럼 얼굴 붉힐 줄 아는 이라야 말 속의 절과 절 속의 말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김해자의 시를 읽는 일은 아프면서도 아릿한 성장통이 몸의 이쪽저쪽에서 싹틔우는 느낌을 주는 일이다.
밤늦게 김해자를 읽는 일.
말 속에 절을 깃들이는 일과 같고,
절 속에 숨쉬는 말을 읽는 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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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1-30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십일동안 성당에 가지 않은 나는
그저 휴식기간이라고 나름 변명을 하던 나는
묵주반지를 끼고 온 타인의 손가락을 보면서
그만 성당엘 가고 싶어진다.

첫번째 시 읽으며 문득 생각났어요.

전 살아오면서 억지로라도 긍정적인 성격을 가지려 노력했나봐요.
세번째 글, 이런 글 보면 외면하고 싶어지니 참 못 되었죠?

글샘 2011-02-01 21:51   좋아요 0 | URL
와~ 새해에 시심이 솟아나시나 봅니다. ^^
억지로 긍정적 성격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일도 좋긴 하죠.
그치만 가끔은 자기를 확 비워버리고 풀어놓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
신경림 시에 '석 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가 되어...' 이런 구절이 있거든요.
좋지 않나요? 한 일주일 바보가 되는, 진짜 휴가...
설 잘 쇠세요~

세실 2011-02-02 08:01   좋아요 0 | URL
^*^

sslmo 2011-02-01 0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해자, 참 좋죠?
그렇네요, 김해자와 김진숙...닮았네요.

명절 잘 보내시라고 인사 드리러 왔다가, 무방비 상태에서 후두둑이예요~

글샘 2011-02-01 21:52   좋아요 0 | URL
설 잘 쇠고 오세요. ^^

김해자나 김진숙이나 참 짠한 사람들입니다.
어쩌자고 그렇게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가고 있는지...
집사람 직장가는 길에 김진숙이 올라가있는 타워가 있는데요... 지나칠 때마다 마음이 짠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