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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51인의 젊은 시인들 - 50인의 평론가가 추천한 ㅣ 서정시학 시인선 31
김경주 외 지음 / 서정시학 / 2009년 3월
평점 :
시어가 팔딱대는 시집이 있고, 착 갈앉은 시집이 있다.
이 시집은 단연 팔뜨닥대는 핏줄의 혈압을 강하게 동맥처럼 느낄 수 있는 그것이다.
어쩌면, 싸구려 커피를 마시면서
낮은 하늘에 머리라도 꿍! 찧을 것같은 나날을 보낼지도 모를
시인들의 펜 끝에서, 자판 위에서 살아나온 언어들은
이 초라한 세상을 유영하기에 피로감을 가득 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팔뜨닥대면서 들뛰는 시어들은 그래서 고독하기도 하다.
시집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한다.
첫 번째 생각. 시를 쓰는 일은 거울 속 자신을 보는 일이란 생각.
거울 속의 자신은 자신이 아니다.
그리고 거울을 볼 땐, 자신의 가장 멋진 표정을 지어 보이며 웃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걸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시뮬라시옹, 세상이 그런 것일까?
시뮬라시옹 안의 시뮬라크르... 가상 현실을 읽는 일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는 우리의 착각을 들흔들고 일깨우는 일이 될 것이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요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 거울 전문>
시뮬라시옹 세상 속의 시뮬라크르를 바라보는 시로 이상의 '거울'만한 것이 또 있을까?
조금 다른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 정도?
고향에 돌아온 날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두운 밤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쫒는 것일 게다
가자가자
쫒기우는 사람 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윤동주, 또 다른 고향 전문>
내 거울 옆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고 나무는 자신의 나이테를 거울 안으로 옮기는 중이다.(김경주, 거울 속 나이테 부분)
이렇게 거울과 나무와 나이테와 자신의 나이를 넘나드는 생각이 시 쓰기의 한 끝이다.
사방이 거울이다 거울이 바라보는 거울 그 미궁 속을 헤매다 아침이 되면 파란 곰팡이로 부활하는 여자 여자의 모서리로 거미가 빨려 들어간다 여자가 남겨진 거미줄에 물을 준다 모서리가 점점 커진다 쨍하고 거울이 깨진다 시간을 질주하던 오토바이가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등이 굽은 백발의 소녀가 깨진 거울 밖으로 튕겨져 나와 여자에게 오버랩된다 더 이상 허수아비와 십자가를 구분하지 못하는 여자는 죽음에 집중할 수가 없다 죽음보다 집중이 더 중요한 여자 여자는 바늘과 섹스라도 하듯 항상 엄지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 손가락으로 하나, 둘 셋을 세다 너무 힘들어 네 번째 손가락을 굽히지 못한 채 깨진 거울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여자 여자가 거미줄에 걸려 있다(장승리, 모서리가 자란다 전문)
시를 쓰는 사람.
내지는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늘, 시뮬라시옹 세상 속의 시뮬라크르 존재인 자기를 응시한다.
그 거울 속 세상, 유사현실은 그 세상 속의 자신은 왠지 낯설기도 하다.
시간은 질주하다가 거울이 깨지는 소리 따위에 급정거 하기도 하지만,
등이 굽은 백발처럼 소녀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도 그 세상 속엔 가득하다.
시를 쓰는 사람은, 늘 바늘과 섹스라도 하듯,
그렇게 엄지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거울 속 세상으로 빨려들어가고
거미줄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좋은 시들이다.
시를 읽으면서 챙기는 두번째 생각. 언어를 살려쓰는 활발한 두뇌 활동이다.
뭘 세워야 한다면 좆...
동정은 싫어 등정도 지랄, 애당초 깃발은 없었어...
삽입이 안 되었지 삶에도 죽음에도 헛발질만 했어(김이듬, 등단 칠 년 부분)
시 쓰고, 등단한 지 7년된 작가가, 비속어를 뒤섞어 자조적 어조로 돌아본 시.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류인서, 전갈 부분)
사랑했다 치자
죽을 만큼 울었다 치자
그러다 죽었다 치자
내가 널 죽였다 치자...
치자꽃 한 송이만 피어도
엄마는 소녀였다
마당 가득 엄마 향이 그득했다
그랬다, 치자 (정영, 치자 부분)
전갈과 치자가 중의적으로 쓰여서 재미있던 시.
신혼의 행복은 가구에서 나온다...
신혼부부는 새 가구에서 나오는 본드냄새의 힘으로 산다...
신혼의 행복은 가구의 위대한 힘에서 나온다 (박성우, 신혼가구의 힘)
웅덩이로 뛰어드는 빗방울은
동그라미를 그리다가 동그라미가 된다
동그라미가 되어 동그라미 안에 갇히고
동그라미가 되어 동그라미 안을 가둔다
안에 갇히고 안을 가두는 발 빠른 동그라미가 된다 (박성우, 동그라미 부분)
박성우의 통찰력은 역시 돋보이는 시를 만든다.
아름답다. 동그라미를 바라보는 관조의 시선 조차도...
들숨과 날숨
달콤한 말들
되짚어보면 나의 충고는 부끄러웠네
그야말로 별꼴이 반짝이었네...
혼숙의 밤을 보내고도
나는 너의 얼굴을 모르네 (박홍점,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부분)
옥수수 씨눈으로 기름을 짰다구?
눈에서 나온 액체라?
그럼 눈물인가?...
눈물은 뜨겁다...
눈물에 데인다...
눈물은 더이상 눈물이 아니다...
찔러대는 아픔이다...
눈물이 끝내 눈물을 밀어내고 만다 (박홍점, 씨눈 부분)
박홍점의 시어 부리기도 재치있고 상큼하다.
이 한 몸
저 민중의 바다에 던져?
껄껄껄 낄낄낄 웃다 보면
생의 완성은
다만 저 혁명의 완수에만 있지 않아
쓰라림을 씻는 녹슨 눈물처럼
오늘도 화안히 열리는 마산항
붉은 새벽 노을 (송경동, 마산항 새벽 복국 부분)
송경동의 실천문학 시들은 마음을 울리는 복국 국물 상큼한 맛을 담고 있다.
시원하다. 뜨끈한 국물이...
- 많이 아픈가?
- 그래 아주 많이.
- 어다기 제일 아픈가?
- 인생. (신동옥, 브라스의 계절 부분)
인생, 그게 제일 아프다.
읽는 나도 많이 아프다.
살림, 이라는 말을 풍선껌처럼 불어본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실패하고 얼어 죽기엔 충분한...
음악이 흐른다 빨래가 마른다...
미모사 향기가 나던 연두, 라는 말을 아끼던
살림, 이라는 말을 빨고 빨고 또 빨아 (안현미, 실내악 부분)
안현미의 시는 왠지, 소설을 한 편 읽은 것 같은 독후감이 나올 것 같고,
책 수만 권을 읽어봤자 별 것 없다
많은 사람과 성교한 게 업적이 아니듯
돈만 밝히는 이는 천박한 것처럼 (이승원, 인더스트리아의 시민 부분)
뜨끔하다. 수만 권 읽진 않았지만...
눈화장이 잘 되는 날은 그렇게
기분이 좋다 (하재연, 종이 인형들의 세계 부분)
화장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 기분을 알 것이다.
악착같이 꿈꾸면서 악착같이 전진하면 악착 같은 현실이 기다리겠지요
눈물을 질질 흘려야 우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랑을 모르면서 사랑했다고 말하고
이별을 모르면서 이별했다고 말하고
살아있으면서 지난 새벽에 죽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개새끼들...
고독은 무엇입니까 고독 속에서
당신도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까 (황병승, 육체쇼와 전집 부분)
육체를 달고 쇼를 하는 인생.
그 책이 몇 권 될지는 모르지만, 전집을 생각한다면...
모르면서, 모르면서... 말하는... 개새끼들이
다시 육체를 달고 쇼를 한다. 슬프게, 외롭게...
이런 시집을 읽는 일은 버겁고,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