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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행 ㅣ 창비시선 12
이성부 지음 / 창비 / 1977년 7월
평점 :
품절
70년대에 쓴 이성부의 초기 시집이다.
시의 입김은 뜨겁고, 그의 팔뚝은 강건함을 추구한다.
그러나 세상은 냉혹하기 그지없고, 눈가리고 귀막고 입다물고 살라하는 겨울공화국, 유신시대.
벌판에는 오직 한 사람이 산다
밤에도 불 켜지 않는다
물도없이
한 조각 마른 떡도 없이
까칠한 수염 날리며
밤새도록 검은 늑대의 울음을 운다('벌판' 부분)
마치 황야에 울부짖는 한 마리 이리와도 같은 야성이 부르짖는다.
이 시집의 이성부는 같은 시대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한 마리 늑대였을 것이다.
불 켜지지 않는 밤.
까칠한 수염 날리며 밤새도록 울어야 했던 시대.
누룩 한 덩이가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저 혼자 무력(無力)함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어디 한 군데로 나자빠져 있다가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알겠느냐.
누룩의 사랑에 대한 인식
오가는 발길들 여기 멈추어
밤새도록 우는 울음을 들었느냐.
저 혼자서 찾는 길이
여럿이서도 찾는 길임을
엄동설한 칼별은 알고 있나니.
무르팍 으깨져도 꽃피는 가슴.
그 가슴 울림 들었느냐.
속 깊이 쌓이는 기다림
삭고 삭아 부서지는 일 보았느냐.
고통을 이겨내려는 누룩의 강인한 의지
지가 죽어 썩어 문드러져
우리 고향 좋은 물 만나면
덩달아서 함께 끓는 마음을 알겠느냐.
춤도 되고 기쁨도 되고
해 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을 알겠느냐.
미래를 위한 누룩의 희생의지
아 지금 감춰둔 누룩 뜨나니.
냄새 퍼지나니.
역사의 미래에 대한 희망('누룩' 전문)
미래에 대한 희망은 '누룩'의 '희생'에서만 열매맺는 것이라 생각했던 어두운 시대.
그 누룩은 '전태일'의 곰팡이를 이어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불에 몸을 맡겨
지금 시커멓게 누워버린 청년은
결코 죽음으로
쫓겨간 것은 아니다.
잿더미 위에
그는 하나로 죽어 있었지만
어두움의 入口에, 깊고 깊은 파멸의
처음 쪽에, 그는 짐승처럼 그슬려 누워 있었지만
그의 입은 뭉개져서 말할 수 없었지만
그는 끝끝내 타버린 눈으로 볼 수도 없었지만
그때 다른 곳에서는
단 한 사람의 自由의 짓밟힘도 世界를 아프게 만드는,
더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의 뭉친 울림이
하나가 되어 벌판을 자꾸 흔들고만 있었다.
굳게굳게 들려오는 큰 발자국 소리,
세계의 생각을 뭉쳐오는 소리,
사람들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아무도 지켜보지 않았지만
불을 몸을 맡겨
지금 시커멓게 누워있는 청년은
죽음을 보듬고도
결코 죽음으로
쫓겨 간 것은 아니다. <1970, '전태일군' 전문>
전태일군은 결코 죽음으로 쫓겨간 것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누룩의 변화는 결코 부패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무가치의 결과물이 아님과 같다.
누룩의 발효는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희망의 꽃송이로 곰팡이를 승화시키는 성스러운 작업인 것이다.
잘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만들다가
담배만 자꾸 피워 물다가
시가 이처럼 문문히 넘어갈 것은 아닌데
하고 뉘우치면
이미 늦다.
더 갚은 거짓말 속으로
빠졌다가 나와 본들
무슨 역사에 보태질 수 있으랴.('겨울 밤에', 부분)
시를 쓰는 일은 문문하지(만만하지) 않다.
종이가 없이 시를 기다릴 때가 있다.
볼펜도 없이 물도 없이 가슴도 없이
다급한 마음들은 나를 붙들고
나를 두번 배반하고 떠나간다.
... 어둠 속에서 아름다운 어휘들과
한가지 골똘한 생각을 버리고도 남는
찌꺼기 찌꺼기 찌꺼기, 그런 기다림의 시.(슬픔)
마음에 들지 않는 시는, 찌꺼기같다. 시를 기다려도 찌꺼기만 남는... 시인의 슬픔.
시를 쓰는 일은 이렇게 치열하지만,
시를 읽는 일은 얼마나 편하냐. 얼마나 쉬우냐. 많이 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