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2
안재성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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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평전도 잘 쓰면 예술이 되지만, 잘못 쓰면 논문처럼 되어 버린다.
안재성의 이 책은 예술에 속할 것 같고, 내가 읽다읽다 놓아버린 김수영 평전이 논문같은 글이다.

이 소설은 꼭 이현상의 평전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현상이라는 사람이 왜 지리산 빨치산 대장이 되어 살았고 죽어갔는지를 그리기 위해 그 배경을 자세히 그리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하긴 작가가 애초에 추구했던 것이 이현상이란 개인이 아니라 해방 정국의 한라산과 여순 반란 사건을 공부하던 것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작가는 이현상을 '선생님'으로 추앙받는 인격자로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불굴의 의지를 가진 투사로 표현하며, 역사적 판단을 정확하게 하는 사상가로 평하려 한다.

그런데, 이 글을 읽으면서, 안 그래도 사랑하는 맘이 개코도 없었던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정체성에 대하여 너무도 지독한 회의와 실망에 휩싸였다.
내가 어려서 듣고 들었던 빨갱이들의 악랄하고 잔인한 만행도 간혹 등장하지만, 정말 금수만도 못한 것들은 친일파의 맥을 그대로 이은 경찰들이었고, 이승만 정권이었다.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역사다. 아니, 이런 것은 역사도 아니다.

차라리,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되어, 원주민 학살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삼고 싶은 생각이 뼈에 사무쳤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었을까... 하긴, 하얀 가면 쓴 넘들은 노란 인종을 손쉽게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노란 인종끼리, 툭하면 애국심을 이야기하고, 민족을 이야기하는 나라에서, 이건 너무 심한 일이다... 싶은 페이지로 한국 현대사는 점철되어 있다.

저질스런 창작으로 일관하는 남한의 '문필가연 하는 사기꾼들'의 속임수는 아직도 남한 국민들의 시선을 '애국심'이란 미명의 '눈가리개' 속으로 감추인 채 진실이 햇빛을 보는 일을 극구 반대하고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하리라.

자본의 힘은 역사를 '욕망'의 진화라고 이해하고, 모든 인간은 욕망의 노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세상에는 그런 욕망의 사슬을 과감하게 끊어내고, 진정한 인간의 힘을 보여주는 실례가 참으로 많다. 한국이란 땅만큼 사상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데 저항하기 위하여 처절하게 투쟁한 공간도 이 좁은 푸른별에 드물 것이다. 이 책의 이현상은 그런 사례로 되살아 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름답고도 눈물겨운 이야기다.

이현상 평전을 읽고, 이제 경성 트로이카를 공부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몰라도 너무 몰랐던 현대사를 이제라도 조금씩 읽고 눈을 떠야 하겠다는 생각뿐이다.

어제 밤을 새워 불타오르던 숭례문을 지켜보았다.
국보 1호의 몰락은 왠지 자꾸 한국의 몰락과 오버랩되어 비쳤고, 벌건 불빛이 자꾸 눈물을 자아내려고 했다.

두잉 베스트... 해야 한다던 잘난 놈들의 덕담 아닌 덕담이 재수없던 날, 화마와 수마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제풀에 폭삭 고꾸라지던 국보 1호의 모습을 보던 내 맘엔 왠지 나라를 잃었다는 말에 아편을 물고 죽어갔다던 구한말의 고지식한 학자들이 자꾸 떠올랐다. 두잉 마이 베스트를 할 의욕은 어디로 소실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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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8-02-11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타는 숭례문을 보는 순간의 놀라움을 어떻게 말로 할까요.
가슴 아픈 뉴스로 시작한 하루였습니다.

개학 첫 날부터 받아쓰기를 했습니다.
방학 동안 영어 단어 외우기를 자율 선택 과제로 해 온 아이들이 많더군요.
숙제 검사하면서 단어를 물어보니 대답을 잘 하더군요.
그래서 내친 김에 한글도 얼마나 잘 아는지 평가해 보자고 했지요.
5학년인데, 교과서 범위를 정해주고 받아쓰기 하는 데도 60점 이하가 수두룩 하더군요.
(20문제를 냈을 뿐인데)
불타 없어지는 것이 숭례문 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못 가르친 우리들 죄이겠지요._()_

글샘 2008-02-12 16:22   좋아요 0 | URL
저도 내일은 받아쓰기를 좀 시켜볼까 합니다.
정말 진작에 불타 없어졌는지도 모르는 한글 쓰기를 생각해 보려고요...

2008-02-11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08-02-12 16:25   좋아요 0 | URL
물론 남쪽 정부가 족같고 북쪽 정부가 아름답다는 찬사를 보내려던 글은 아니었습니다. 워낙 해방 정국에서 보여준 남쪽 정부의 행태가 거지 같아서 지껄여 본 것이지요.
산다는 일이 '별이 보일 때'보다 '별조차 보이지 않을 때' 더 힘들지 않겠습니까? 이현상 선생을 생각하면, 아무리 힘들었더러도 별을 보며 가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순오기 2008-02-11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언어든 문화든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이 생기는 교육이어야 하는데, 우리 것을 쓰레기통에 처박지 못해서 안날이 났으니~~~~ 자라나는 아이들이 사랑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기를 소원합니다!

글샘 2008-02-12 16:28   좋아요 0 | URL
우리 것이 소중하다고 강조하는 일이 갖는 한계도 물론 있지만... 너무 옛날의 중국 것, 근대의 서양 것, 일본 것에 익숙해 있는 현실을 보면, 제 것을 강조하는 일은 필요하지요.
더군다나 언어처럼 버릴 수 없는 관념문화의 경우에는 더한 것이고요.
영어가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소중하다면 숭례문 새로 세울 게 아니고, 영어탑을 그 자리에 세워야죠. LIBERTY OF ENGLISH!

달빛푸른고개 2008-02-19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두고 있던 책을 님의 서평을 통해 구매하게 되었네요.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글샘 2008-02-20 09:09   좋아요 0 | URL
평전 치고는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라 생각해요.
역사적 고찰도 충분한 것 같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