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냇물아
최성각 지음 / 녹색평론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작가 최성각은 소설가란다. 미안하게도 나는 그의 작품을 읽어본 일이 없고, 그가 쓴 소설집의 이름을 들었어도 아는 바가 없었다.

이 글들을 읽다 보니, 앞으로 그의 소설이 깊어질 법도 하단 생각을 한다.

모든 운동은 서로 통한다.
어느 비꼬인 놈이 '운동할 것이 없으니 환경 운동한다'고 했던가.
운동할 것이 없는 게 아니라, 먹고 사는 데 급급했던 70년대만 해도, 그리하여 최소한의 인권을 되찾겠다고 나선 80년대만 해도, 사람이 죽어갈 판인데 자연을 이야기할 여유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90년대 이후, 과학은 기술의 발전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적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고, 미국이란 초강대국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으며, 한국처럼 아류 제국주의 국가들도 미국의 본을 받는 데 열심인 게 현실이다.

최성각이 여기 저기 실었던 글들을 모은 책이다.

64쪽에서 그가 말한다.

민주화 세력들이 싸우던 때를 회고하는 걸 꼬투리 잡으면서, 그때 싸운 것은 외로운 사람을 위하여, 더 좋은 삶을 위하여,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위하여 싸운 것임을 말하고, 이 노골적인 토건 국가의 '약한 존재'인 '산천과 갯벌과, 철새들과 늪들'을 개혁이란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개발하려는 자들과 맞서 싸우는 일은 당연한 일임을 말한다.

내가 별 생각없이 부르기 좋아하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던 징그런 노래를 요즘엔 부르지 않는다. 그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지렁이가 나와서 '사람이 더 징그러워요.'했다는... 그래, 사람은 지렁이보다 더 징그럽다. 옳다. 태안 앞바다에서 죽어간 고래들과 굴들에게 징그러운 사람들은 미안해 해야한다.

찬드라 구릉이란 네팔 여인을 정신병동에 가뒀던 미개국이 있었다. 그 여인은 이주 노동자로 일하러 왔다가 라면을 사먹고 라면값을 잃어버려 경찰서로 갔다가 바로 정신병원으로 직행하여 6년을 갇혀 산다. 네팔사람이라며 버벅거리는 한국어를 했다는 것이 정신병의 근거였다. 풀꽃나라 사람들은 한국이란 미개국을 대표하여 찬드라 구릉에게 미안함을 표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리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미개국.

오늘 정말 정신병 걸린 어린이집 교사 한 명이 5세 여아를 최고기온 영하 1도였던 어느 날 발가벗긴 채 비상구 난간으로 쫓아낸 사진을 외국인이 찍어서 고발한 사건이 있었다. 처음에 취재를 갔더니, 그 미친 계집은 아이가 제 분을 못이겨서 막 옷을 벗었다고 했다. (젠장, 애가 술이라고 취했단 말여?) 나중에 학부모가 따지자 머리를 처박았다. 아, 인간을 돈 버는 수단으로 보는 것들에게 아이를 맡긴 엄마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정말 짐승같은 나라다. 그 사진 찍은 외국인이 얼마나 미개국 운운하며 다닐까... 이 인테넷 세상에서 이 아동 학대 사진은 얼마나 전 세계로 떠돌며 미개국의 국위를 선양할 것인가... 핸드볼 잘 하고 축구 잘 한다고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핵 쓰레기장을 핵 폐기장으로, 나중엔 방사성폐기물 관리 시설로, 원전 수거물 센터로 핵심을 빗겨 나가는 것을 '수사법'이라 한다. 미화법의 하나겠다. 쓰레기 소각장은 자원회수시설이라 미화하고, 대량강제감원을 구조조정이란 미화어를 쓰는 것은 국가의 폭력이다. 하긴 이 나라의 '군인과 경찰'은 모든 <정의> 앞에 가면을 쓰고 나오는 폭력배의 모습이다. 부안 핵쓰레기장 시설에서, 상계동 쓰레기 소각장 다이옥신 발생장치 앞에서... 그들은 방패를 갈고, 열심히 찍어 댄다.

IMF이전 우리 국민의 환경 의식은, 환경 문제를 자기 삶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50% 이상이었으나, 2000년에는 5%로 줄었다.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생존만이 중요한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사회는 정부의 개발을 저지할 건강성을 잃는다... <시민의 신문> 오성규 차장(271)

이제 새로운 정부는 오로지 효율만을 이야기한다. 무조건 경제 발전, 개발만을 이야기한다. 그 안에는 인간도 환경도 없다. 지금 당장 이득이 되는 것이라면 눈을 까뒤집고 다 한다. 무섭다.

그나마 성성적적하게 깨어있는 최성각같은 이가 거위에게 등을 맡겨두고, 거위의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마음으로 서늘한 글을 던져 주기에, 그 그늘에서 가끔 환경을 떠올리게 되기도 하여 고맙다.

태안 앞바다에 수천 톤의 원유를 뒤집어 엎은 것이 어언 두 달이 다 되어간다. 백만에 이르는 이들이 기름을 퍼내고 닦아내지만, 기름을 뒤집어쓴 갯벌이 살아남는 일은 얼마나 멀고 멀 것인지... 죽어 나오는 바닷가재와 돌고래와 바닷새들에게 미안하고, 미안할 뿐이다.

그럼에도 반성할 줄 모르고, 공동 과실이라서 다행이라는 삼성의 지랄같은 작태에 분노가 끓지만, 온갖 특검이 난무해도 성공한 쿠데타, 사기꾼이나 돈놀이 등은 <무죄 방면>한다는 대한민국 법조계의 관습법에 따라 휠체어를 타고 큰 돈을 환원(이 말이 도무지 무엇을 어찌한다는 것인지를 한국이란 나라에선 누구도 모르지만...)하시어 큰 복을 받으실 것임이 불보듯 번하다는 생각이 들면 정말 부끄럽다.

그럼에도 내 자식이 잘 먹고 잘 살기만을 바랄 일인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너나 잘 먹고 잘 사세요' 의 금자씨 철학을 가르칠 일인가? 깊이 고민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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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1-3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동할 것 없어서 환경운동한다'는 말하는 주체의 위치에 따라서 다르게 읽힙니다.전통적인 우파 개발론자들의 '운동'에 대한 혐오로 읽히는것이 우선입니다.그들은 80년대 운동하던 놈들 다 환경운동한다 라고 들 말하지요.
그런데...이렇게 이야기하면 비비꼬인 놈이 될 듯도 하지만 '환경운동의 탈정치화' 라는 측면에서 보면 '주류환경운동'에는 또한 '탈정치화'의 한계가 분명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수구정당도,좌파진보정당도 '환경'을 공약 사항에 집어넣고 있습니다.또한 어떤 정치 지평을 갖던지 '환경'담론에는 딴지를 걸지 않지요.

결국 '환경운동'이 '정치적 옳바름'을 의미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군요.

언젠가 페이퍼에도 썻듯이 불행하게도 나치도 환경운동에 열심이었습니다.환경과 정치가 괴리를 빚어내면서 만들어지는 일종의 '에코파시즘'이라고 하더군요.

많은 이들이 이미 노력하고 있듯이 '환경'과 '정치'가 어떤 지점에서 관계 맺는가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노장철학에 바탕을 둔 전통사회적인 환경론은 어떤면에서 상당히 급진적이면서도 또한 토대를 넗히기 어려운 한계가 있어서 -현실적입장에서-'탈정치적'담론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농후합니다.저 개인적으로 '환경'을 환경대로 이야기하고 '정치'를 정치대로 이야기하는 방식의 소통방식 대해 고민합니다.

물의 흐름들을 한가닥으로 모아내기...환경운동도 그런 소통문제를 고려해야 할때겠지요.

대중적인 신자유주의 최고비판자는 삼성과의 대타협을 대안이라고 말하고...태안에서 돌을 닦는 사람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더 많은 쓰레기와 욕망의 배설물들을 뿜어낼 겁니다.

이렇듯 조약돌의 무늬처럼 하나가 되어 있는 복잡한 가치들이 어떻게 분리되고 또 어떻게 종합시켜야 하는지 늘 고민입니다.

글샘 2008-01-30 15:26   좋아요 0 | URL
그래요. 저도 쓰레기 분리 배출하면서 늘...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만, 그렇다고 쓰레기를 안만들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이율배반적 생태를 생각하죠.
이 조그만 나라도 이렇게 복잡한데... 그런 걸 한 가지 논리로 풀어낼 수는 없는 거겠죠.
그 사회의 타협점과 지향점에 대해 공감하고, 그런 걸 교육하는 것이 필요한데요. 이 사회는 국가가 <제시하는> 그런 지점이 없지요. 무조건 각자 잘 벌어서 잘 살아라. 이러니 교육하기도 힘들고요. 쉽지 않은 문제지만, 놓을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혜덕화 2008-01-3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성각이란 이름을 읽는 순간, 아, 그 엽편 소설 작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인 줄 알았더니, 님의 리뷰를 읽으니 같은 사람이군요.
그에게서 잎사귀처럼 짧은 소설의 매력을 한껏 느끼며 그의 글을 읽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환경운동과 정치에 대한 논의는 잘 모르겠고, 드팀전님의 댓글도 제겐 너무 어렵지만, <그냥 불편한대로 살기>가 제겐 환경운동의 하나일 뿐입니다. 소극적이고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지만 불편함을 편리함으로 바꾸는 단계가 발전이 아닌가 싶어, 인간만을 위한 편리함은 조금씩 덜어내며 살아야지, 생각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