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이 특이했다. 원 제목을 봐도 그대로다.
시끄러운 건 이해가 간다 해도 가까운은 또 뭔가 싶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미국인, 유태인, 그리고 일본인....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해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겐 공통적으로 <피해의식>이란 망상증이 있다. 그것이 심각해도 아주 심각한 것이 탈이다.

이천 년 전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잃어버리고 유랑해야했던 디아스포라의 슬픔을 어찌 우리가 이해할 수 있으리오마는, 팔레스타인의 피울음은 그들의 피해의식을 상쇄하기엔 너무도 긴 숙제다.

원자 폭탄을 맞았다고 731부대의 만행이, 중국인들의 머리통을 톡톡 잘라놓구는 시신에 담배꽁초를 물려 놓고는 시시덕대던, 조선의 여인들을 데려다 성노예로 삼았던 과거가 한방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9/11은 충분히 슬픈 일이고, 충분히 공분을 살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세계 무역 센터와 펜타곤에 비행기가 꼬라박혔다고 해도, 그걸 기회로 아프가니스탄의 가스와 이라크의 석유를 뺏으러 전쟁을 벌이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

반성할 줄 모르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9/11은 충분히 시끄러웠던 사건이었고, 그들에겐 믿을수없을 정도로 죽음과 이별이 가까이서 느껴졌던 일이었겠지만, 왜 그 사건이 <자작설>이란 소리가 날 정도로 그 이후 일련의 사태가 질서정연한 폭력 일변도였던가를 그들은 돌아봐야 한다.

포어의 소설은 마치 다양한 재료를 합성하여 구성한 오브제와 같은 느낌을 주는 신선한 형식이다. 마지막에 거꺼로 배열된 사진이라든가, 컬러로 구성된 글씨들, 중간에 빨간펜으로 마구 교정이 된 원고 등... 신선한 형식에 비해, 그 내용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웠던 9/11의 한쪽 면만을, 그것도 미국인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쪽의 한쪽 면만을 지나치게 접근한 건 아닌지...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07-06-27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딜레마죠. 폭력의 피해자로서 보편적으로 느껴야 마땅할 슬픔의 공감과 분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또다른 아니 더 큰 폭력의 행사자의 슬픔이라는데서 오는 망설임.... 뭐 잘해봤자 양비론밖에는 안될 소재죠. 그럼에도 말예요. 이 책을 읽으면서는 거대이념에 희생되어버린 개인들의 처절한 슬픔이 더 와닿았습니다. 그만큼 책을 잘 썼다는 얘기겠죠. 적어도 저에게는요.

글샘 2007-06-27 22:04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이야기는 슬픈데... 아이가 참 안쓰럽고 그런데... 2차대전의 독일이 나오고, 원폭맞은 일본이 나오는데 왜 그렇게 자꾸 밸이 꼬이던지요...

드팀전 2007-06-27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큰 이름으로 읽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봅니다.앞에도 말씀하셨지만...미국인,일본인,유태인들이 가해자인가 생각해보죠...전 그들이 가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그들의 정부와 그들의 체제가 가해자이지 그들은 그냥 평범한 사람들일뿐입니다.평범함이란게 물론 그 시스템이 주는 열매를 별 생각없이 받고 또 시스템을 지지해주지요.그렇지만 그것이 희생되어도 마땅한 만큼의 죄과라고 생각치는 않습니다.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시스템에 별소리 없이 월급받으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도 그런 댓가를 받아야 공평해지겠지요.그들 정부의 잘못을 왜 그들이 보상해야하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글샘님께서도 '국민'으로 호명하는 것에 대해 그다지 호감을 갖지 않으실거라 봅니다.전 미국인 일본인과 연대하고 싶습니다.워싱턴에서 한미FTA 삼보일배에 동참해주던 미국인,일본에서 위안부문제에 사과하라고 시위하는 일본 할머니들...전 그들이 가해자라고 생각치 않으며 '미국인' '일본인'이라는 '국민'의 이름으로 그들을 싸잡아서는 안된다고 봅니다...원폭맞은 일본을 생각치 마시고 원폭 맞은 평범한 일본인들을 생각하시죠.우리의 위안부가 아픔이었듯이 일본의 원폭도 밸꼴리는 일이 아니라 인류의 아픔이었다고 봐야하지 않겠습니까.일본은 당해도 싸지만 일본의 평범한 개인들이 그 모든 죗값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부당합니다.


글샘 2007-06-28 02:35   좋아요 0 | URL
저도 드팀전님의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빠의 상실에 아이가 얼마나 가슴아팠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순 없었겠지요. 그렇지만... 이 책을 가로지르고 있는 그 상처들을, '나, 아파' 하고 넘기기엔, 국가의 광기가 너무도 큰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에는 눈을 감으면서 사소한 것에 열받는 것이 초라한 인간이지만, 이 땅을 거저 점유하고 쓰면서도 그 땅속에 기름 칠갑을 하는 그런 나라에는 반대해야 옳지만, 그렇다고 미국인을 미워할 순 없겠지요.
예술가가 역사를 생각하지 못하고 사건들을 나열해 버리면 본질이 흐려지면서 오히려 본질을 호도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삐딱한 리뷰를 쓰게 된 거죠.

드팀전 2007-06-28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이 정치적 함의를 모두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런 방식은 물론 중요하지만 예술의 범위를 리얼리즘이나 계몽의 그릇으로만 한정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그럼에도 독자가 그 안에서 정치적 함의를 읽어내야 한다면 그것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제가 쓴 댓글 역시 상당히 정치적이라는 것을 아실 수 잇을겝니다.제가 생각하는 부분은 거대한 것으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방식이라는 것이지요.정치란 이름은 중요한 요소이고 사실 모든 것들이 연관되어 있지만 그것이 블랙홀같은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저 소설을 읽었던 미국인이 또한 미국민의 아픔만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작용할 가능성도 있지만-그것은 미국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걱정하는 부분은 민족/국가 라는 현실태를 인정하지만 그것으로 모든것을 환원시키는 방식이 가진 폭력성의 예감같은 것들 말입니다.그것은 강대국이나 약소국이나 근대세계에 사는 이들에게는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됩니다. 9.11을 제국의 심장에 타격을 가한 일로 볼 수도 있습니다.맞는 말입니다.호주 사는 제 친구가 9.11 이후 쌤통이다라는 식의 이메일을 보냈는데...당시 9.11의 반동이 사실 걱정되었습니다.제가 걱정했던 것은 좀 단순하게 이슬람에게 가해지는 미국 사회의 폭력이었는데 ..사실 더 큰 반동은 9.11 이후 여론을 등에 업은 미국의 일방적 군사주의였습니다.이것도 오래가진 못하겠지만 말이지요.이런 방식이 작동하는 원리가 바로 민족/국가로 문제로 환원해버리는 방식이지요.그것은 정치적이지만 또한 반동적인 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석과 희생자들의 이야기는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희생자는 개인으로 국가.민족.역사의 그냥 희생자일 뿐입니다...전쟁을 하는 자는 미국이고 희생당하는 사람은 미국인과 다른 약소국의 민간인일 뿐입니다.더 쉽게 말하자면 전선을 미국/이슬람...미국/억압받는 국가들이 아니라 미국/희생받은 사람들...이라는 관점입니다.김훈은 이런 방식을 극단적으로 몰아가면서 개인을 탈정치화 해버리는 극단으로 몰고갑니다. 글샘님이 우려하시는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지요.그런면에서 작가는 사실 정치적이며 텍스트로는 독자를 탈정치화하는 반동적인 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나는 아무편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어딘선가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내 조국을 지키기위해 싸우는 것으로 알고 전쟁에 나섰다.그러나 뒤에 진실을 알았다.내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부자들의 지하창고에 있는 금고였을 뿐이다"

전쟁과 자본의 관계를 이야기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국가/민족이란 이름이 개인을 동원하는 방식과 개인을 국가/민족으로 호명하는 문제에 대해 딴지거는 성찰을 요구하게 하는 글입니다.

글샘 2007-06-28 08:49   좋아요 0 | URL
제 이야기나 드팀전님 이야기나 상당히 정치적인 부분이기때문에 이 소설을 어떻게 읽느냐는 방법은 둘 다 정답일 수도 있겠지요.
아우슈비츠에서의 증언 문학은 인간성의 추악함에 치를 떨게 만들지만, 유태인의 시오니즘과 중동 전쟁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은 측면도 있습니다.
소련의 강제 수용소 같은 이야기들은 미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치하되구요.
우리 교과서에 왜 독립군 이야기는 없고, '소나기(51년 작품)'처럼 탈정치적 작품이나 염상섭처럼 중산층 작가만이 살아남는지와도 연관성이 있는 문제입니다. 박완서와 이청준같은 작가의 글이나 교과서에 실리는 이유가 그런 것이죠.

한국어 최고의 문학인 홍명희의 '임꺽정'이 80년대 금서였던 사실을 아십니까? 사계절 출판사는 임꺽정의 활판을 압수당해 망할 뻔 하기도 했지요. 조정래의 '태백산맥'도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고 꼴깝을 떨기도 하지 않았나요.

예술에 중립을 강제하는 자들의 의도는 딱 하나입니다.
자기들의 이데올로기를 강제하려는 의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