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 우리 아버지의 어머니.
할머니는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가서 아들 딸 하나씩 낳으셨다. 신의주에서 목재업을 크게 하시던 할아버지는 간단한 수술을 받으시다가 감염이 되어 젊은 나이에 어이없게도 돌아가시고 만다. 그 때 할머니의 나이는 22살. 졸지에 홀로 되신 할머니께서는 해방 후 친척들과 함께 공산당 정권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피난오셨다. 수중에 남은 재산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바닥났고, 할머니는 고된 생활전선에 뛰어드신다.
소학교 출신의 젊은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코흘리개 아이들을 위해서 온갖 굳은 일을 다 하셨단다. 최근에 들은 바로는 영화배급업에도 손을 대셨다고 한다. 현재의 영화배급과는 차원이 다른 일을 하셨겠지만,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영화보기를 즐기시는 이유가 여기 있었던 모양이다. 열심히 일하신 덕인지, 돈버는 수완이 좋으셨는지 할머니는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시대의 흐름을 통찰하는 능력(몸에 배인 생존전략과 눈치)을 가지신 덕에 아들 딸을 돈 잘 벌 수 있는 대학 학과에 입학시키셨다.
시대를 고되게 살아오신 분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할머니는 보수적이시다. 또한, 자나 깨나 자식들의 성공을 바라신다. 물론 여기서의 성공은 경제적 부의 축적이다. 아직도 손자인 내가 치과의사가 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신다. (난 치과의사가 되고 싶지도 않고, 그럴 능력도 없었지만...) 또한, 금강산길이 열렸을 때, 한번 가서 구경하고 오시라고 권해 드려도 북한 공산당 놈들이 어떻게 할지 두려워서 절대로 가시지 않겠다고 하신다. 휴전한지 몇십년이 지났고, 남북 정상이 포옹했고, 개성공단에서 냄비가 생산되어 남쪽의 백화점에서 팔리는 시대이지만, 아직까지도 북쪽에 대한 할머니의 마음은 얼음처럼 차다.
편하게만 살아온 나의 입장에서 볼 때 할머니의 보수적 성향은 못마땅한 것이지만, 할머니를 이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고통의 60여년 세월이었다고 생각하면 그렇다고 이해 못할 것도 없다.
남편과 사별한 지 무려 63년째. 상상할 수도 없는 긴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시면서도 악바리처럼 아이 둘을 키우고 대학공부까지 시키신 그 힘. 재혼은 물론 변변찮은 연애도 안하시고 지금껏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시느라 푹 쉬시지도 않는 할머니의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내가 생각할 때는 할머니의 힘은 '천주님'에 대한 신앙에서 나온다. 사별하신 후 이웃의 권유로 신의주에서 성당을 다니신 이래, 지금도 힘이 부치시지 않으시면 새벽마다 성당에 다니시는 열혈 신자이시다. 항상 묵주반지를 끼고 다니시고, 틈만 나시면 기도를 하신다. 그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할머니의 중심을 잡아준 것은 눈 앞에 아른거리는 어린 아들 딸들과 손자 손녀의 모습이었겠지만, 그 뒤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것은 신앙이라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기복신앙이란 표현으로 우리나라 종교와 기도 방식을 폄하했던 나이지만, 할머니와 같은 삶을 살아오신 분들께 나의 어줍잖은 비판은 사치로 느껴질 뿐이다.
어떻게 하면 할머니 인생을 이용해서 페이퍼 하나 더 쓸까 고민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할머니께서는 손자를 위해서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시고 계실 것이다. 자식 잘되기를 소원하는 기도라서 내 입장에서는 크게 부담스럽지만, 기도를 하는 순간이 할머니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일 거라고 생각하니 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한다.
최근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하셨다.
교황과 동갑내기인 우리 할머니에게 이 사건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될까 생각하면 두렵기만 하다. 84년 교황님이 한국에 오셨을 때, 누구라도 그랬듯이 서울 여의도 광장까지 달려가서 맞이하셨던 우리 할머니. 어쩌면 그 길고 긴 60여년 동안 교황님은 할머니의 연애 상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철없는 젊은이들의 일회용 사랑이 아닌 고귀한 영혼의 짝사랑이 아니었을까. 할머니의 가녀린 영혼을 쓰다듬어 주시는 모든 신부님, 수녀님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 하느님까지 모두 연인이었을 것이라.
내가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던 어린 시절부터 교황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던 요한 바오로 2세. 그를 대체할 누군가가 뽑혀 그의 자리에 선다는 것도 너무나 낯설기만 하다. 신앙심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는 내가 이럴진대, 27년 동안 변치 않는 믿음과 존경과 사랑을 보냈던 할머니의 상실감은 측정 불가능하리라.
그런 동갑내기 짝사랑의 대상이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나는 할머니께 안부 전화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교황님이 위독하다는 뉴스를 들으시고 얼마나 많은 기도를 올리셨을까? 그 많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으셨을 때 얼마나 힘이 빠지셨을까? 상심하셔서 건강이 더 나빠지시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가까이 일산 고모댁에 계셔도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였는데, '모나카' 한 상자 사들고 조만간 안부인사 드리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