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푸하 > [한국에 살면서] 나눔으로서의 죽음

[한국에 살면서] 나눔으로서의 죽음


한국에 살면서 나는 점차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끝’이며, 부와 명예의 ‘끝’이며, 사랑의 ‘끝’인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한국인은 자신의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 둘씩 늘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몸에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먹어가며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려고 노력한다. 결국은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많은 한국인은 죽음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 한국 오고부터 죽음이 두려워져

한편 일부 한국인들은 벼랑으로 내몰린 최악의 상황에서 그 상황을 종결짓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자신의 죽음 또는 타인의 죽음으로 현재의 난국을 마무리 지으려 하지만 대부분 많은 사람에게 상처만을 남길 뿐이다. 한국사회에서 많은 이들에게 죽음은 비극인 것이다.

한국에 오기 전에 나는 죽음을 그다지 두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이가 어린 탓도 있었겠지만 많은 네팔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네팔인은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며, 또 다른 생명체로 태어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죽음이 두려워질 때마다 할머니의 죽음을 떠올린다. 병상에 누워계셨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한 시간 전에 갑자기 집으로 의사를 불러달라고 하셨다. 얼마 후 찾아온 의사에게 할머니는 “내가 이제 곧 죽을 것 같아요. 내 몸에서 쓸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기증하고 싶어요”라고 힘들게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남기시고 할머니는 편안한 얼굴로 돌아가셨다.

파슈파티나트 힌두사원에서 할머니의 시신을 화장하면서 나는 바람을 타고 피어오르는 연기는 하늘로 돌아가고 갠지스강으로 이어지는 바그마티강에 뿌려진 재는 땅으로 돌아가겠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언제나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시고, 부지런하게 살아가셨던 할머니의 모습은 가족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가슴 속에 남아있다. 삶이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나를 반성하게 하는 할머니의 삶은 내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할머니의 육신은 자연으로 돌아가셨지만 할머니의 영혼은 많은 사람이 나누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시골의 어느 가난한 농부의 눈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할머니의 눈을 떠올리며 어느 순간에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하기 위하여 나는 다시금 한순간이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 열심히 산 영혼은 사람들 마음속에

개인적으로 몸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몸의 죽음 못지않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정신의 죽음이 아닌가라는 물음을 던져본다. 부단히 노력해도 백 년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몸이지만 매 순간을 열심히 살아간 사람들의 정신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몇백 년, 몇 천 년을 살아간다.

죽음은 나에게 여전히 두렵지만 할머니와 정신의 죽음을 극복한 이들을 떠올리며, 나는 ‘끝’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자연으로 몸이 돌아가고, 타인에게 영혼을 나누어주는 ‘나눔’으로서의 죽음을 맞이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검비르만 슈레스터 예티 인터내셔널 대표

 

 

멋진 생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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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9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지막 마술
나카지마 가즈코 지음, 아키사토 노부코 그림, 김숙 옮김 / 북뱅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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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손은 요술쟁이 같다는 말을 작은 딸이 어릴 때 한 적이 있다. 자기가 원하는 걸 척척 만들어 주는 할머니의 손이 마치 마술사의 손처럼 신기하고 고마워서 그런 표현을 한 것이다. 할머니는 인생의 오랜 경험과 그로 얻은 지혜로 마술사다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지 모른다. 하지만 할머니는 기력이 떨어지며 어느날엔가는 아이와 이별을 하게 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되며 마음은 조급해지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넉넉해질 수도 있다.

할머니의 이런 인간적인 감정이 여기 할머니 마술사에게도 그대로 있다. 동글동글한 얼굴과 풍만한 몸이 정겨워보이는 삽화다. 히말라야 산 깊은 숲 속에 혼자 사는 할머니 마술사는 눈이 오는 겨울이면 너무 조용한 산이 싫어진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할머니는 그런 내색을 하기도 싫어한다. 할머니는 머리맡에 두었던 마술빗자루를 타고 마을로 내려가기로 한다. 어라, 빗자루도 낡아 마술의 힘이 다 됐다. 할머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법의 힘도 다 되어간다는 생각에 뭔가 '그럴 듯한 것'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이 죽기 전 뭔가 그럴 듯한 것 하나쯤 되거나, 남기거나 해야겠다는 강박증을 갖듯이 말이다.

할머니는 꽃 중에서도 수선화, 자유로이 나는 새, 뭐 그런 것들이 그럴 듯해 보여 변신해보려고 시도를 하지만 시들시들한 수선화, 새 중에서도 까마귀, 이런 것들로 바뀌는 자신의 모습에 서글프다. 이 부분이 아주 재미나다. 2학년 정도의 아이들이 읽기에 좋을 만큼이지만 내가 보아도 웃음이 난다. 연필로 간단히 그린 삽화와 함께 우스꽝스러운 상상을 할 수 있다.

마을로 가기로 한 할머니. 오르막을 힘들게 오르는데 갑자기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는 무엇이 있다. 이게 무얼까. 작고 오동통한 두 손. 할머니와 '용기'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이의 얼굴은 해맑다. 할머니의 얼굴과 닮아있다. 녹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다가 할머니가 마지막일지도 모를 마술을 부려 변신해보기로 작정하는것은 다름 아닌, 긴 나무의자다. 아, 그런데 이게 정말 마지막 마술이 되고만다. 괴로워하는 할머니는 점점 자신의 마음이 바뀌어가는 것을 느낀다. 뭇사람들이 이 나무의자에 앉아 휴식을 얻고 쉬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나중에 찾아온 '용기'라는 아이의 한 마디가 할머니의 마음을 넉넉하게 풀어준다.

우리는 의식하든 안 하든,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죽음을 준비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죽음은 생의 끝이 아니라 또하나의 시작이란 말은 이미 상투적이다. 어느 님의 서재에서 본 네팔인의 글처럼 죽음은 '나눔'으로 승화될 때 그 의미가 더욱 가치롭다 하겠다. 육체적, 정신적 나눔으로 죽음이 의미화된다면 누구든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죽음이나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 외모지상주의를 낳고 온갖 장수식품을 불티 나게 팔리게 하는 것 같다는 글귀가 인상적이었다.

참, 할머니나무의자는 지금도 그 녹나무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그럴 듯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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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아이들 천국의 아이들 2
마지드 마지디 지음 / 효리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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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의 영화가 동화로 재탄생되었다. 이란의 마지드 마지디 감독은 자신의 유년시절, 가난했지만 꿈과 선함을 잃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다시 동화로 써 그 감동을 살려냈다. 이 동화는 표지에서부터 삽화 모두가 그림이 아니라 영상이다. 영화의 스틸컷을 삽화로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생동감있는 감동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 들어있는 영상만으로도 영화의 아름다운 영상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천국의 아이들 2>도 나왔다. 이 책도 영화를 동화로 쓴 것이지만 1편동화의 번역을 맡았던 김병규님이 썼다. 영화 감독은 마지드 마지디가 아닌 신예감독인데 이 영화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기전에 동화를 먼저 보는 게 좋지 않을까싶다.

<천국의 아이들>은 말 그대로 넉넉하고 따뜻한 마음씨로 사람의 마음을 정화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허리가 아파 꼼짝 못하는 어머니, 변변한 일거리가 없는 아버지, 분유도 넉넉히 못 먹는 어린 동생 그리고 서로 아끼고 위해주는 소년과 소녀, 알리와 자라가 나온다. 알리가 자라의 분홍구두를 잃어버린 사건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서로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고 부모님의 어려운 처치를 잊지 않고 마음 아프게 하지 않으려는 이 아이들의 마음이 어쩜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상이 아닌 천국의 심성이다. 유일한 신발을 오빠의 실수로 잃어버린 자라는 오빠의 헌 운동화를 돌아가며 신기로 한다. 오전반을 마치고 나면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와 오빠 앞에 운동화를 벗어놓는 자라. 운동화 갈아신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슬리퍼 위에 발을 올려놓고 기다리는 알리. 알리는 또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가지만 지각을 하기 일쑤다. 하지만 이렇게 뛴 덕분에 마라톤대회도 나갈 수 있게 된지도 모른다.

3등을 하여 상품으로 탄 운동화를 동생에게 주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는 알리는 "3등이 제일 어려워"라고 말한다. 1등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실망하여 연못에 발을 담그고 앉는다. 금붕어들이 몰려와 알리의 상처투성이 냄새나는 발을 핥는다. 이 때의 영화장면이 참 아름답다. 초록 연못물 안에서 하늘거리며 꼬리짓을 하는 붉은빛 금붕어들이 알리에게는 더없이 위로가 된다. 자라는 오빠가 더욱 슬퍼할까봐 실망의 빛을 내지않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게 있다. 지금 문밖에는 아버지가 양손에 잔뜩 선물을 사들고 와있다는 사실이다. 감자봉지, 전기다리미, 아기분유 그리고 운동화 두 켤레. 아버지는 아마 새로 시작한 정원사일이 잘 된 모양이다. 삐죽이 보이는 운동화 두 켤레가 마치 아이들의 마음처럼 순백이다.

자신의 잃어버린 구두를 어떤 아이가 신고 있는 걸 보고 따라가보니 그 아이의 아버지는 장님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게도 그 구두는 잘 어울려보인다. 여기서 알리와 자라는 그 구두를 달라고 말하지 않고 "쟤한테도 잘 어울리네. 그냥 갈까." 라며 돌아선다. 자기것이라면 똑 부러지게 주장하고 움켜쥐려는 아이들이 대부분일텐데, 하물며 자기도 맨발이면서 이런 마음을 쓰는 아이들에게 '천국의 아이들'이란 제목은 더할 수 없이 어울린다. 천국이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단어에는 행복, 기쁨, 빛, 선함, 아름다움.. 이런 것일 테다. 제목처럼 이 아이들에게는 이런 단어들이 어울리고 이런 마음의 보석들을 품고 나누며 사는 아이들이다. 결국 천국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것이란 평범한 진리를 제목이 뜻하고 있다.

5학년아이들과 이 책을 읽었는데, 한 아이가 이 대목에서 "나라면 당장 내놓으라고 다그쳤을 것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한 말, "그러니까 우린 지옥의 아이들인거지." 하하하 웃으면서도 아이들은 자신을 돌아보며 조금은 넉넉한 마음이 되어 돌아간 것 같았다.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활자 크기에 영화의 장면들이 적절히 들어가 있어 마치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처럼 풋풋한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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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스파피필름 > 산수갑산(X)-> 삼수갑산(O)

산수갑산(X)-> 삼수갑산(O)
 
강병철 SK 감독은 “내일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어도 오늘은 일단 피하고 싶은 게 감독의 다 같은 마음”이라고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스포츠투데이 02.08.19]

일단 저지르고 보자 앞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와 "삼수갑산 가더라도" 의 수식어가 치명적으로 붙는다. [중앙일보 00.11.06]
 
 
잘해야 산수갑산(->삼수갑산) 어느 깊은 골짜기로 숨어들었으리란 얘기였고….
 
 
"흔히'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일을 꼭 해야겠다'고 할 때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을 꼭 해야겠다'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삼수갑산(三水甲山)'을'산수갑산(山水甲山)'으로 잘못 알고 쓰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아마도'삼수갑산'을 경치가 좋은 곳으로 잘못 알아 듣고 '산수갑산'일 거라고 생각하고
쓰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삼수갑산'의'삼수'는 한자의 '석 삼(三)'자와 '물 수(水)'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원래 '삼수갑산'이라는 말은 '삼수'와 '갑산'이라는 고장의 이름에서 온 것입니다.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모두 함경남도에 있는 오지로 매우 춥고 또 교통도
불편한 지역이었습니다.

옛날부터 중죄인들을 이곳으로 귀양 보냈기 때문에, 이곳은 한 번 가면 살아
돌아오기가 힘든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일신상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각오하고 어떤 일에 임하려고 할 때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라는 표현을 쓰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힘든 일을 각오하는 마당에 경치가 좋은 산수갑산에 간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삼수갑산'의 '삼'은 '뫼 산(山)'자가 아닌 '석 삼(三)'자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산수갑산'이라는 잘못된 표현은 쓰지 않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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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5-25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잘 몰랐네요 감사해요 가져갑니다
 


■ '피난'과 '피란' ■



우리나라의 제 7차 교육과정에 의해 개편된 중학교 국어책에

화가 이중섭 전기문이 나옵니다.

이중섭이 6.25 전쟁 때문에 피란을 간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애들은 '피난'을 '피란'으로 잘못 적어 놓은 줄 알더라구요.

잘못 적은 게 아니라 '전쟁을 피하는 상황'이란 뜻이므로

맞는 표현인데 말이죠.

아마 '피란'이란 말이 있는지 잘 모르는 분들도 많겠죠.

'피난'과 '피란'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며 둘 다 맞는 말입니다.

우선 사전에 나온 풀이부터 살펴 보겠습니다.

1. '피난(避難)'은 '재난을 피하여 있는 곳을 옮기는 것'
2. '피란(避亂)'은 '난리·전쟁 등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는 것'

여기서 '난리'는 대체로 전쟁 따위를 가리키므로

'피란'은 전쟁을 피해 길을 떠나는 경우에 쓰입니다.

또, 전쟁은 재난의 일종이기도 하므로 '피난'이라 써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작은 규모의 재난을 난리라고 하지는 않으므로

이 경우에 '피란'이라고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겠지요.

따라서, '피난'이 '피란'보다 범위가 넓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얼마전 '금지된 장난'을 읽었는데 그 책에도 '피란'이라고 적혀있었다. '피난'에 익숙해있다가

새삼 '피란'을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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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24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란은 처음 봅니다 ㅠ.ㅠ

반딧불,, 2006-05-24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소설에는 피란 많이 나와요;;
우쨌든 덕분에 정확한 뜻을 알게 됩니다.

하늘바람 2006-05-25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르군요.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