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물만두 > 비단으로 짠 천성산 - 초록의 공명

6월 초에 도롱뇽 소송 대법원의 판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동안 우리가 걸어 왔던 길을 돌아 보았습니다. 3보 1배는 도롱뇽 소송을 시작하면서 내원사 대중 스님들과 많은 종교인,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여 부산역에서 부터 천성산 정상인 화엄벌까지 7박 8일 동안 가장 낮고 느린 걸음으로 천성산을 올랐던 참회와 정진의 걸음이었습니다. 영상 속의 글은 녹색평론과 독일 인지학회지에 실렸던 리타 데일러 교수님의 글로 한 외국인의 눈에 비친 천성산 운동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글입니다.

비단으로 짠 천성산 - 리타 테일러(Rita Taylor) ― 영남대 영문과 교수. 인지학회 회원.

무덥고 찌는 듯한 여름날, 많은 작은 폭포와 깨끗한 용소로 이루어진 개울가를 따라 천성산의 내원사까지 걸어보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천성산의 수원(水源)에서부터 내려오는 이 계곡의 물이 말라버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천성산은 수많은 계곡과, 개울과 개천, 그리고 여러개의 소중한 습지가 잘 남아있는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야생보존지역 중의 한 곳이다. 이곳은 내원사와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암자를 제외하고는 인적이 드물어 지금까지도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화, 곤충, 그리고 조류를 위시한 생태계가 섬세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지역의 특별한 자연생태계 때문에 한국정부는 몇해 전에 이곳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천성산 보존에 대한 약속을 어기고 그 대신에 프랑스의 떼제베(TGV)를 모델로 한 ‘총알’ 기차가 통과하도록 이 산을 가로지르는 18킬로미터에 달하는 터널 공사를 추진하고 있다. 이 결정은 실용성보다는 정치적 타협에 근거를 둔 것이다.  

서울에서 한반도 남단의 부산까지 이어질 이 고속철선로는 기존의 새마을 열차보다 더 빠른 속도를 실현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가 절약할 수 있는 시간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다가올 고속철도 시대를 광고하려고 영어로 “달려라 한국, 위대한 한국”이라고 쓴 지역게시판을 보면 상황이 더욱 아이러니칼하게 느껴진다. 속도의 대가는 엄청나다. 그것은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역의 자연유산의 상실을 강요하는데, 천성산이 그 상실의 일부가 될 것이다. 

 개울을 따라 올라가 우리는 숲으로 둘러싸인 산자락에 둥지를 튼 내원사에 도달하였고, 그곳에서 천성산을 관통하는 선로 결정에 반대하여 거의 외롭게 2년간 항의투쟁을 벌여온 지율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절에서 손님 대접으로 내어준 녹차를 앞에 놓고 지율 스님은 지금 계획중인 이 프로젝트가 산의 무수한 생물다양성에 어떤 나쁜 결과를 초래할지 스님이 직접 손으로 모은 경이롭고도 헌신적인 노력인 조사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하였다. 
 
- 중략 - 
 
스님이 절을 마친 뒤 밤에 우리는 그이를 따라 천성산의 한 작은 암자로 올라갔는데, 그곳에는 다양한 환경단체의 대표들이 스님과 만나기 위해 모여있었다. 산속에서 밤하늘의 별은 빛났고 공기는 신선하였다. 작은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 지율 스님은 지난 몇달간 보여준 놀라운 헌신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생한 힘과 유머, 그리고 열정으로 산의 운명에 관해 토론을 시작함으로써 우리 모두를 사로잡았다. 이 모임의 결론으로 부산에서 천성산까지 3번 걷고 1번 절하는 삼보일배의 여정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삼보일배의 여정은 부산에서 시작하여 8일 만에 산에게 바친 회향식과 함께 천성산 화엄벌에서 끝났다. 그 분들이 이마를 땅에 대고 큰절을 할 때마다 그것은 땅에 대한 참회와 깊은 용서를 표현한 것이었다. 특히 약 6주간 날마다 삼천배를 계속한 뒤 바로 이 순례에 참석한 지율 스님을 비롯한 다른 모든 참가자들은 우리에게 이런 희생의 메시지를 전하였는데,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우주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래서 땅의 아픔이 곧 우리의 아픔이라는 것을 인식하라는 것이었다.
 
비구니 스님들이 앉았다 일어섰다 하면서 마치 물결치는 파도처럼 열지어 삼보일배하는 모습은 산자락의 능선과 계곡이 서로 굽이치며 솟았다 내려갔다 하면서 멀리 지평선까지 율동적으로 흐르는 모습과 비슷하였다. 나는 일본 선종의 유명한 도겐(道元) 스님이 자신의 책《산수경》에서 부처가 얘기한 오래된 지혜를 인용하면서 했던 신비로운 말이 생각났다. “저 푸른 산들이 늘상 걸어다니는구나.” 그리고 “너희들은 푸른 산이 걸어다니는 것과 너희들의 걸음을 잘 살펴보거라.” 삼보일배의 순례 그 자체가 이 나라의 비폭력과 이타적 저항운동의 역사에 길이 새겨질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런 항의가 정부의 계획에 어떤 효력을 낼지 거의 불투명하다. 어떤 경우에도 산의 목소리에 대한 지율 스님의 공명으로 시작된 이 순례가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의 순례가 되어 우리에게 ‘걷기’, 즉 우리들의 걷기가 산의 걸음과 얼마나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순례의 의미는 우리에게서 끝나게 될 것이다.  

우리 심장의 박동이 자연의 리듬과 공명하는가. 산이 물결처럼 흐를 수 있으려면 우리의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지지 말아야 한다. 산의 뭇 생명체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그 개울물이, 지율 스님이 잘 간파하였듯이, 메말라버릴 위험에 처한 우리 마음의 샘물에도 닿아야 한다.  

많은 어린 학생들이 천성산으로 소풍을 가서 ‘산과 물’을 직접 경험하고 거기서 지율 스님을 직접 만나 그 분의 가르침을 접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리고,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우리가 이른바 ‘진보’가 가져올 편안함을 자연과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일과 저울질하듯 가늠해볼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뿐만 아니라 무한한 뭇 생명체들의 보금자리인 땅을 위해 필요한 희생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지율 스님은 산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것처럼 보인다. 때때로 어떤 무심한 순간이면 점점 어두워져 가는 산의 앞날 때문에 더는 견디기 어려운 깊은 슬픔이 스님의 눈가에 내비치기도 한다. 스님의 말은 공허한 소리가 아니다. 아름다운 풍경에 대해 ‘금수강산’이라는 한국어 표현이 있다. 이 말은 아름다운 풍경을 형형색색의 비단실로 강과 산을 수놓은 자수에다 비유한 것이다. 지율 스님은 일천명의 성인(聖人)을 뜻하는 천성산이라는 눈부시게 퍼지는 빛나는 비단폭에 자신의 생명을 실 삼아 지금 수(繡)를 놓고 있는 것이다. (박혜영 옮김)   

리타 테일러(Rita Taylor) ― 영남대 영문과 교수. 인지학회 회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06-05-30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경보고서 땅, 6학년 책 수업하면서 참고로 잘 보았어요.
 
 전출처 : 보슬비 > [흔적] 아이버릇 고쳐주는 부모습관 8가지
아이버릇 고쳐주는 부모습관 8가지
요한나 그라프 지음, 이홍경 옮김 / 글담출판 / 2006년 5월
절판


이것이 문제습관이다 : 화가 나면 아무 말이나 막 하는 부모

자녀와 갈등에 직면했을 때, 감정의 정지 버튼을 눌러라.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걸음 더 물러서라. 아이와 갈등에 직면했을 때 화를 참지 못해 무원칙하게 화를 내는 부모라면 일단 정지 버튼을 눌러라. 그리고 화 때문에 평소 세워둔 소신에 위배되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한 번 더 되새겨라. 그런 뒤 말하라. 그것이 행복한 아이를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습관이다.-.쪽

'아이와 나' 사이에서
------------------------------------------------------

"부모는 항상 아이를 제 1순위에 놓고 자기 것은 포기해야만 한다."
"너무 지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더라도 아이를 위해 있는 힘을 전부 끌어 모아야 한다."
이것은 부모에게 약간 남아 있는 힘까지 몽땅 쏟아 부어 결국 완전히 지치게 만드는 잘못된 생각이다. 경고 알람이 울리기 전에 부모도 쉬어야 한다. 휴식을 함으로써 다시 에너지를 충전해야 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줄 것도 없기 때문이다.
부모는 세 가지 의무사항이 있다.
1. 나 자신 돌보기 2. 배우자 돌보기 3. 아이 돌보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며 날마다 자신을 위해 투자할 시간이 있는 사람만이 배우자와 아이들을 더 사랑스럽게 대할 수 있다.
커다란 나무를 베어야 한다고 한번 상상해 보라. 가능한 빨리 일을 끝내려고 단 1분도 쉬지 않고 무거운 톱으로 하루 종일 나무를 베었다. 이제 나무를 반쯤 베었을 뿐인데 5분도 더 버티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지쳐 버렸다. 이때 몇 미터 옆에서 똑같이 나무를 베고 있던 남편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믿을 수 없다! 남편은 벌써 일을 끝냈다! 남편은 1시간마다 쉬었음에도 나무를 다 벤 것이다.
"어떻게 일을 끝냈어요? 난 쉬지 않고 일했고 당신은 1시간마다 쉬었잖아요?"
"난 1시간마다 쉬면서 톱을 더 날카롭게 갈았거든."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이를 우선순위에 놓는것이 최고는 아니었네요.-.쪽

아이들에게는 긍정적인 요구와 분명한 경계선이 필요하다.

아주 행복하고 안정적으로 자란 아이는,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한 경계선을 그어준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다. 이런 연구 결과들은 아이들에게 분명한 경계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경계선을 확실하게 그으면 아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 경계선을 통해 아이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고 앞으로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일관성 있게, 자유를 주는 동시에 규칙과 경계선을 지키도록 교육하면 아이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다.-.쪽

어린 아이들이 보이는 분노식 발작


"당장 사줘. 갖고 싶단 말야!"
원하는 장난감을 사주지 않는 부모에게 시위라도 하듯 바닥에 누워 데굴데굴 구르는 아이들. 물건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 엄마의 손등을 물어뜯는 아이들. 엄마가 안아서 제지하려고 하면 발버둥을 치며 울고불고 하는 아이들. 아이들이 보이는 분노의 발작이다.
화가 나 자제력을 잃어 버리면 아이들은 부모가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다. 기껏해야 부모가 뭔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또 아이들은 자신의 분노를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아직 언어와 감정을 담당하는 양쪽 뇌가 서로 결합되어 있고 완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말이 아닌 몸으로 분노를 표현한다.
이때 아이 가까이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것이 부모가 이 순간에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최선책이다. '네 옆에 있고 네 편이야.'라는 것을 아이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차분한 목소리로 아이를 진정시켜야지 창피한 마음에 아이를 때리거나 더 큰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것은 사태 진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쪽

이것이 문제습관이다 : 아이 앞에서 서로를 무시하는 부모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부모님이 서로 사랑하기를 원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멋진 옷도, 신기한 장난감도 아닌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다. 하지만 모든 부부가 원만하게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다. 때론 갈등하고 때론 반목하며 지내는 것이 부부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부부는 아이를 기르는 데 한 팀이 되어야 한다. 서로 돕고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부부는 헤어지더라도 부모는 남기 때문이며 아이는 엄마와 아빠가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푸하 > [한국에 살면서] 나눔으로서의 죽음

[한국에 살면서] 나눔으로서의 죽음


한국에 살면서 나는 점차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끝’이며, 부와 명예의 ‘끝’이며, 사랑의 ‘끝’인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한국인은 자신의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 둘씩 늘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몸에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먹어가며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려고 노력한다. 결국은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많은 한국인은 죽음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 한국 오고부터 죽음이 두려워져

한편 일부 한국인들은 벼랑으로 내몰린 최악의 상황에서 그 상황을 종결짓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자신의 죽음 또는 타인의 죽음으로 현재의 난국을 마무리 지으려 하지만 대부분 많은 사람에게 상처만을 남길 뿐이다. 한국사회에서 많은 이들에게 죽음은 비극인 것이다.

한국에 오기 전에 나는 죽음을 그다지 두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이가 어린 탓도 있었겠지만 많은 네팔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네팔인은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며, 또 다른 생명체로 태어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죽음이 두려워질 때마다 할머니의 죽음을 떠올린다. 병상에 누워계셨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한 시간 전에 갑자기 집으로 의사를 불러달라고 하셨다. 얼마 후 찾아온 의사에게 할머니는 “내가 이제 곧 죽을 것 같아요. 내 몸에서 쓸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기증하고 싶어요”라고 힘들게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남기시고 할머니는 편안한 얼굴로 돌아가셨다.

파슈파티나트 힌두사원에서 할머니의 시신을 화장하면서 나는 바람을 타고 피어오르는 연기는 하늘로 돌아가고 갠지스강으로 이어지는 바그마티강에 뿌려진 재는 땅으로 돌아가겠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언제나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시고, 부지런하게 살아가셨던 할머니의 모습은 가족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가슴 속에 남아있다. 삶이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나를 반성하게 하는 할머니의 삶은 내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할머니의 육신은 자연으로 돌아가셨지만 할머니의 영혼은 많은 사람이 나누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시골의 어느 가난한 농부의 눈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할머니의 눈을 떠올리며 어느 순간에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하기 위하여 나는 다시금 한순간이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 열심히 산 영혼은 사람들 마음속에

개인적으로 몸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몸의 죽음 못지않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정신의 죽음이 아닌가라는 물음을 던져본다. 부단히 노력해도 백 년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몸이지만 매 순간을 열심히 살아간 사람들의 정신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몇백 년, 몇 천 년을 살아간다.

죽음은 나에게 여전히 두렵지만 할머니와 정신의 죽음을 극복한 이들을 떠올리며, 나는 ‘끝’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자연으로 몸이 돌아가고, 타인에게 영혼을 나누어주는 ‘나눔’으로서의 죽음을 맞이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검비르만 슈레스터 예티 인터내셔널 대표

 

 

멋진 생각! 입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6-05-29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지막 마술
나카지마 가즈코 지음, 아키사토 노부코 그림, 김숙 옮김 / 북뱅크 / 200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할머니손은 요술쟁이 같다는 말을 작은 딸이 어릴 때 한 적이 있다. 자기가 원하는 걸 척척 만들어 주는 할머니의 손이 마치 마술사의 손처럼 신기하고 고마워서 그런 표현을 한 것이다. 할머니는 인생의 오랜 경험과 그로 얻은 지혜로 마술사다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지 모른다. 하지만 할머니는 기력이 떨어지며 어느날엔가는 아이와 이별을 하게 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되며 마음은 조급해지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넉넉해질 수도 있다.

할머니의 이런 인간적인 감정이 여기 할머니 마술사에게도 그대로 있다. 동글동글한 얼굴과 풍만한 몸이 정겨워보이는 삽화다. 히말라야 산 깊은 숲 속에 혼자 사는 할머니 마술사는 눈이 오는 겨울이면 너무 조용한 산이 싫어진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할머니는 그런 내색을 하기도 싫어한다. 할머니는 머리맡에 두었던 마술빗자루를 타고 마을로 내려가기로 한다. 어라, 빗자루도 낡아 마술의 힘이 다 됐다. 할머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법의 힘도 다 되어간다는 생각에 뭔가 '그럴 듯한 것'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이 죽기 전 뭔가 그럴 듯한 것 하나쯤 되거나, 남기거나 해야겠다는 강박증을 갖듯이 말이다.

할머니는 꽃 중에서도 수선화, 자유로이 나는 새, 뭐 그런 것들이 그럴 듯해 보여 변신해보려고 시도를 하지만 시들시들한 수선화, 새 중에서도 까마귀, 이런 것들로 바뀌는 자신의 모습에 서글프다. 이 부분이 아주 재미나다. 2학년 정도의 아이들이 읽기에 좋을 만큼이지만 내가 보아도 웃음이 난다. 연필로 간단히 그린 삽화와 함께 우스꽝스러운 상상을 할 수 있다.

마을로 가기로 한 할머니. 오르막을 힘들게 오르는데 갑자기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는 무엇이 있다. 이게 무얼까. 작고 오동통한 두 손. 할머니와 '용기'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이의 얼굴은 해맑다. 할머니의 얼굴과 닮아있다. 녹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다가 할머니가 마지막일지도 모를 마술을 부려 변신해보기로 작정하는것은 다름 아닌, 긴 나무의자다. 아, 그런데 이게 정말 마지막 마술이 되고만다. 괴로워하는 할머니는 점점 자신의 마음이 바뀌어가는 것을 느낀다. 뭇사람들이 이 나무의자에 앉아 휴식을 얻고 쉬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나중에 찾아온 '용기'라는 아이의 한 마디가 할머니의 마음을 넉넉하게 풀어준다.

우리는 의식하든 안 하든,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죽음을 준비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죽음은 생의 끝이 아니라 또하나의 시작이란 말은 이미 상투적이다. 어느 님의 서재에서 본 네팔인의 글처럼 죽음은 '나눔'으로 승화될 때 그 의미가 더욱 가치롭다 하겠다. 육체적, 정신적 나눔으로 죽음이 의미화된다면 누구든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죽음이나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 외모지상주의를 낳고 온갖 장수식품을 불티 나게 팔리게 하는 것 같다는 글귀가 인상적이었다.

참, 할머니나무의자는 지금도 그 녹나무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그럴 듯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국의 아이들 천국의 아이들 2
마지드 마지디 지음 / 효리원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감동의 영화가 동화로 재탄생되었다. 이란의 마지드 마지디 감독은 자신의 유년시절, 가난했지만 꿈과 선함을 잃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다시 동화로 써 그 감동을 살려냈다. 이 동화는 표지에서부터 삽화 모두가 그림이 아니라 영상이다. 영화의 스틸컷을 삽화로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생동감있는 감동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 들어있는 영상만으로도 영화의 아름다운 영상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천국의 아이들 2>도 나왔다. 이 책도 영화를 동화로 쓴 것이지만 1편동화의 번역을 맡았던 김병규님이 썼다. 영화 감독은 마지드 마지디가 아닌 신예감독인데 이 영화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기전에 동화를 먼저 보는 게 좋지 않을까싶다.

<천국의 아이들>은 말 그대로 넉넉하고 따뜻한 마음씨로 사람의 마음을 정화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허리가 아파 꼼짝 못하는 어머니, 변변한 일거리가 없는 아버지, 분유도 넉넉히 못 먹는 어린 동생 그리고 서로 아끼고 위해주는 소년과 소녀, 알리와 자라가 나온다. 알리가 자라의 분홍구두를 잃어버린 사건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서로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고 부모님의 어려운 처치를 잊지 않고 마음 아프게 하지 않으려는 이 아이들의 마음이 어쩜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상이 아닌 천국의 심성이다. 유일한 신발을 오빠의 실수로 잃어버린 자라는 오빠의 헌 운동화를 돌아가며 신기로 한다. 오전반을 마치고 나면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와 오빠 앞에 운동화를 벗어놓는 자라. 운동화 갈아신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슬리퍼 위에 발을 올려놓고 기다리는 알리. 알리는 또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가지만 지각을 하기 일쑤다. 하지만 이렇게 뛴 덕분에 마라톤대회도 나갈 수 있게 된지도 모른다.

3등을 하여 상품으로 탄 운동화를 동생에게 주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는 알리는 "3등이 제일 어려워"라고 말한다. 1등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실망하여 연못에 발을 담그고 앉는다. 금붕어들이 몰려와 알리의 상처투성이 냄새나는 발을 핥는다. 이 때의 영화장면이 참 아름답다. 초록 연못물 안에서 하늘거리며 꼬리짓을 하는 붉은빛 금붕어들이 알리에게는 더없이 위로가 된다. 자라는 오빠가 더욱 슬퍼할까봐 실망의 빛을 내지않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게 있다. 지금 문밖에는 아버지가 양손에 잔뜩 선물을 사들고 와있다는 사실이다. 감자봉지, 전기다리미, 아기분유 그리고 운동화 두 켤레. 아버지는 아마 새로 시작한 정원사일이 잘 된 모양이다. 삐죽이 보이는 운동화 두 켤레가 마치 아이들의 마음처럼 순백이다.

자신의 잃어버린 구두를 어떤 아이가 신고 있는 걸 보고 따라가보니 그 아이의 아버지는 장님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게도 그 구두는 잘 어울려보인다. 여기서 알리와 자라는 그 구두를 달라고 말하지 않고 "쟤한테도 잘 어울리네. 그냥 갈까." 라며 돌아선다. 자기것이라면 똑 부러지게 주장하고 움켜쥐려는 아이들이 대부분일텐데, 하물며 자기도 맨발이면서 이런 마음을 쓰는 아이들에게 '천국의 아이들'이란 제목은 더할 수 없이 어울린다. 천국이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단어에는 행복, 기쁨, 빛, 선함, 아름다움.. 이런 것일 테다. 제목처럼 이 아이들에게는 이런 단어들이 어울리고 이런 마음의 보석들을 품고 나누며 사는 아이들이다. 결국 천국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것이란 평범한 진리를 제목이 뜻하고 있다.

5학년아이들과 이 책을 읽었는데, 한 아이가 이 대목에서 "나라면 당장 내놓으라고 다그쳤을 것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한 말, "그러니까 우린 지옥의 아이들인거지." 하하하 웃으면서도 아이들은 자신을 돌아보며 조금은 넉넉한 마음이 되어 돌아간 것 같았다.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활자 크기에 영화의 장면들이 적절히 들어가 있어 마치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처럼 풋풋한 동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