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andcat >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죽음은 삶이 아닌 것, 곧 삶의 부재 상태이며 미래완료형으로 인간이 일용할 필수 관용구이다. 삶의 의지로 가장 충만할 때 종종 죽음의 수사가 동원되는데 가령 ‘죽고 못 살고’, ‘죽기보다 싫거나 죽자 사자’ 하고, ‘죽기 살기로 기를 쓰는’ 식이다. 먹을거리들의 죽음은 날마다 사람의 삶을 살찌운다. 소의 죽음, 배추의 죽음으로 인간은 먹고살지만 자질구레한 일상으로 날마다 죽어나는 존재가 또한 인간이다. 날아다니는 새가 하늘을 사유하지 않듯, 자신의 죽음은 사유하지 않는 게 사람이지만, 죽음이 과연 삶과 따로 생각할 수 있는 주제이겠는가.

죽음은 영원한 익명의 상태이며 죽음의 형식은 권총자살한 소설가 로맹가리의 유언처럼 “나를 마침내 완전히 표현”하는 방식이다. 죽음에도 생명이 있어 시대에 따라 대접이 달랐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우리의 자세는 대부분 비슷하다. 바로 죽음을 맞는 자세는 감연하기 짝이 없고, 나의 죽음, 내 가족, 지인의 죽음만은 엄마의 품처럼 아늑하며 무덤처럼 고요하기를.(달리 ‘젖무덤’이란 말이 생겼겠는가!)

건강한 사회, 건강한 죽음
일본 만화 『시마 상무』(히로카네 겐시, 2006)를 보면 노인복지로봇이 나온다. 최첨단 기기가 장착된 옷을 노인이 입으면 책 한 권 드는 힘으로 쌀 한 가마니를 번쩍 들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로봇을 만드는 엔지니어가 복지와 의료, 기계의 힘으로 수명을 억지로 연장하는 것이 과연 건강한 삶, 건강한 사회겠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과학과 의료기술 등 물리적인 부분이 덜 발달한 탓도 있었지만 과거의 우리 조상들은 죽음을 긍정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죽어갔다. 오늘날은 되려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시대이며 한편으로는 초고령 사회를 목전에 두고 있는 나이든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수명이 정해져 있듯 한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인구의 임계치라는 것이 있고, 그 인구가 자원이 한정된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노인복지로봇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이 눈앞에 있는데 온갖 방법을 동원해 연장시키고 싶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안락사 문제에서 짐작되듯 그것의 한계와 기준, 가치가 무엇인지 논란이 분분하다. 이렇듯 한 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시사하며 그것은 또한 한 사회가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지 미리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죽음은 과거에 없었던 각종 질병과 복잡한 사회구조로 인해 흡사 백수광부처럼 달려드는 경우가 많다. 때로 테러나 건물 붕괴로 어이없이 희생당하기도 한다. 교통사고 사망률과 자살률이 높은 우리나라의 죽음은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삶과 멀어진 느낌이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건물을 지어대고, 지구의 평균온도를 올리고 있는 삶의 양태 때문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란 죽은 자임을 연습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그의 말대로라면 그만큼 철학이 부재한 시대가 요즘이 아닌가 싶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경건한 죽음
죽음에 관한 방대한 저서 『죽음 앞의 인간』(필립 아리에스, 2004)을 보면 19세기 초에는 임종환자의 최후 성찬식 때 가족은 물론 안면이 없는 사람들도 집안이나 환자의 침실을 방문하여 만인이 참석한 가운데 죽어갔다고 한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죽음이 오히려 아름다운 유혹이었고, 바다나 광야처럼 방대한 자연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 일반적으로 죽음은 더 이상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취급되었다. 인간의 육체에 대한 광적인 탐구의 시대였던 르네상스와 신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찼던 중세의 시공을 지나 19세기 말 도래한 산업혁명은 죽음에 대한 인식 또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오늘날의 죽음은 죽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이 회피하거나 배척하며 외양을 왜곡하고 조작할 정도로 두려운 것으로 바뀌었다. 과거 죽음의 현장은 차가운 의료기기와 수술등, 심폐소생술이 주는 공포감 가득한 병상과는 많이 달랐다. 내가 속한 혈족과 공동체 구성원들이 죽어가는 침상 주위로 결집했고, 죽음이 공동체를 통과함으로써 빚어진 불안감을 다 함께 애도하면서 표출했다. 죽음으로 인해 허약해진 공동체가 감지된 위험을 만천하에 선언하는 의식이자 마지막 절차가 바로 장례였고, 그것의 형태는 축제였다.

근사체험을 통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연구하고, 지난해에 〈한국죽음학회〉를 창립하여 국내에 ‘죽음학’의 존재를 알린 최준식 교수는 “지금 한국사회를 휩쓰는 웰빙 못지않게 ‘웰다잉(Well-dying)’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며 “주위 사람들과 품위 있게 이별하고, 자신의 생을 차분히 돌아보는 ‘죽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최 교수는 또한 영면실에 비해 중요도가 상당히 떨어지는 영안실에 대한 엄청난 관심에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영안실은 갈수록 화려하고 고급화되고 정말 필요한 영면실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똥으로 굴러도 이승이 낫다’, ‘죽은 정승이 산 개보다 못하다’는 속담이 죽음에 대한 한국인의 부정적 인식을 반영하는 단적인 사례들이라며 죽음에 대한 강렬한 거부감은 엄청난 의료비와 장례비로 귀결되고, 그 부담은 살아남은 자들이 떠안는 부조리함에 대해 꼬집는다. 오랜 역사 동안 ‘영적(spiritual) 문화’를 간직해온 한국이 산업화란 암초를 만나 물질문명에 더욱 매달리게 됐으며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현세만이 가치 있다는 편향된 생각을 갖고 세속적 가치에 천착하고 있다는 그의 지적은 놀랍게도 현대인의 삶의 방식이 지닌 문제점과 상통한다. 마치 나(우리 세대) 이후에는 세상이 끝날 것처럼 자연을 훼손하고 환경을 살리는 대안을 외면하는 삶의 태도 말이다.

최첨단 시대에 미개한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그의 책 『죽음, 또 하나의 세계』(최준식, 2006)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살지 않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조금 과장해서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죽음의 부정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둘로 분열되어 있는데, 자신이 이 세상에서 고유하다는 것을 앎으로써 장엄성을 간직하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속수무책으로 썩어 문드러져서 땅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이원적인 딜레마를 숙지하는 게 또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전쟁도 결국은 죽음이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동물 가운데 인간은 유독 남을 엄청난 규모로 처참하게 살육하는데 프로이트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이 영생한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 오토 랑크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다른 사람을 죽이고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경감된다. 즉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 자신은 죽음이라는 벌, 혹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벌에서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고 했다. 전쟁도 자신의 불멸을 확인하기 위해 일으키는 것이며 전장에서 적을 죽이면서 너는 죽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 있으니 나는 ‘불멸의 존재다.’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을 절대로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은 영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들은 부활절 때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셨다(부활하셨다)!”고 외치는 것이고, 그런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을 꾀하는 것이다. 인간 이외의 생명들에 대한 무차별 살육과 불로장생을 향한 현대인의 욕망, 종교의 부흥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포로 설명될 수 있을까?

죽음과의 화해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멕시코에는 ‘죽은 자의 날’이라는 기념일이 있다. 1년에 한 번, 죽은 자들이 살아 있는 친인척을 방문하기 위해 돌아오는 날이다. 그 날이 되면 설탕으로 해골을 만들고(설탕처럼 달콤한 죽음?), 나무나 종이로 만든 해골 가면을 쓴 후 죽은 이의 사진이나 갖가지 꽃과 음식으로 재단을 만들고 밤이 새도록 먹고 마신다. 시인인 옥타비오 파스는 “멕시코는 죽음과 친하고, 죽음을 농담 삼고, 죽음을 애무하고, 죽음과 함께 자고, 죽음을 축하한다.”고 했다. 우리는 주변인, 가족의 갑작스런 죽음을 통해 죽음을 환기하곤 실존의 기저에 깔려 있는 본질적인 허무와 직면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죽음을 둘러싼 창백한 아우라와 허무를 외면함과 동시에 조금 덜 허무하기 위해 무덤 같은 일상에 기꺼이 묻히고 만다.

존중되지 못하는 오늘날의 야만적 죽음 또한 개인에게 주어진 수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점에서 나무와 같다. 처연하게 선 채로 죽음을 맞이하는 나무처럼 욕망에 끄달리지 않는 죽음의 방식을 선택하기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연히-또는 필연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되었듯이, 죽음은 어느날 잘못 배달된 소포처럼 무람없는 얼굴로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저 오늘의 죽음을 충실히 살자.

죽어라, 그대가 죽기 전에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의 경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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