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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끓는 시간 ㅣ 사계절 1318 문고 19
박상률 지음 / 사계절 / 2001년 7월
평점 :
이 책을 읽는 내내 순지라는 여자아이가 감당해나가는 불행에 말문이 막혔다. 너무나 담담하게 겪어내는 불행이라 어찌 보면 그것 자체가 순지의 운명처럼 느껴졌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몽실언니'가 떠올랐다. 순지는 현대판 몽실언니 같다. 몽실언니는 전쟁이라는 커다란 슬픔으로 인해 개인의 삶이 망가지는 경우였지만 이 책의 순지는 현대의 전쟁 아닌 전쟁 중의 중학생이다. 아빠의 실업이 뜻하지 않게 가지고 오는 불행의 연속을 순지는 무척이나 꿋꿋하고 지혜롭게 견뎌낸다.
가슴이 턱턱 막히는 것 같은 불행의 연속에서 코만이 아닌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온기는 유일하게도 '밥이 끓는 시간'이라는 묘사가 나오는 대목이다. 영세 가구공장에 다니던 아빠가 남들처럼 영악하게 일자리를 옮겼더라면 순지네의 불행이 그렇게 쉽게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휴일이면 자장면 한 그릇의 외식으로 행복해하고 밥이 끓는 시간 동안 구수한 밥 냄새를 맡으며 네 식구가 오순도순 살아갔을 테다. 실직자에 대한 사회적인 책임을 작가는 따져묻지 않는다. 그저 독자가 그점까지 생각해보게 한다.
중학교 1학년인 순지가 맞부딪히는 어둠의 그림자를 작가는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청소년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여과하겠다는 의도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어른들의 이기적이며 본능적인 욕구와 위선적인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고 또래 남학생의 비이성적인 호기심도 비린내 나도록 묘사하고 있다. 순지라는 1인칭 화자를 내세워 그 또래 학생들이 보고 듣고 겪으며 생각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어쩌면 가장 악랄하고 불행하고 비합리적인 일들을 순지로 하여금 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한다. 삶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호의적이지도 않음을 똑똑히 보게 한다. 삶은 생각보다 냉정하고 악의적인 방식으로 다가오는 면이 있음을 청소년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이야기일까.
흙을 일구어주지 않아도 잘 피어나는 맨드라미처럼 순지도 그렇게 앞날을 스스로 헤쳐가며 잘 살아갈 것이다. 일용직으로 일하다 왼손의 손가락 네 개가 잘려나가도 보상 한 푼 받지 못한 아빠는 상심하여 집을 나간다. 시골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이복동생 순달을 입양보내고, 집을 내 준 보증금마저 외삼촌이란 작자에게 털리고 나서도 순지가 세상에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문득 뒷모습이 아닌 앞모습을 보이며 순지에게로 걸어오는 아빠.
"밥은 드셨어요?"
일 나갔다가 들어온 아빠에게 말을 건네듯 하며 밥을 끓이는 그 시간이 생애 가장 따뜻한 순간일테다. 이제 불행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행복의 서막이었으면 좋겠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글귀는 각 장마다 앞에서 끄는 짧은 싯구다. 각 장의 이야기에 잘 맞는 싯구들이 삶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며 가슴에 진하게 남는다. 그 중에서도 아래의 글귀는 순지의 삶에 두껍게 덮힌 먹구름을 걷어줄 것만 같은 희망을 보여준다.
- 서성거리는 달빛 아래서 거미들이 또 안테나를 치고 있다. 내일은 좀더 좋은 소식이 걸려오려나보다.
- 이진영 <폐가에는 달빛이 살고 있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