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하늘바람 > 이야기속 동물의 상징성

1. 하늘의 비밀을 알고 있는 동물 <노루>

 

우리는 노루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가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 일 것이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를 나무꾼이 숨겨주고 그 보답으로 노루는 선녀들이 언제 어디서 하늘의 두레박을 타고 내려와 목욕하는 것을 알려주고 선녀 옷을 숨겨 선녀와 함께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노루는 하늘의 움직임을 미리 다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자신을 살려준 나무꾼에게 은혜를 보답함으로써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은혜를 갚을 줄 아는 동물로 여겨진다.

충남 공주 우성면 내산리에 노루목 전설이 바로 은혜를 갚은 노루 이야기다.

포수에게 쫓기는 노루를 나무꾼이 숨겨주자 그 노루는 은혜를 보답 하기위하여 묘 자리를 잡아주었고 그 자리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덤을 옮겼다. 그 후 나무꾼은 점점 집안이 일어나 아주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는 이야기다. 그때부터 여기를 노루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 하변 이씨 선조 한사람이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를 숨겨주고 과거에 장원을 하였으며 그 후 과거시험 때가 되면 노루가 앞산에 나타나 울음으로 과거시험이 있음을 알려주었고 이씨 집안은 12명이나 장원급제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노루는 이렇게 은혜를 보답할 줄 아는 동물일 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하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신성한 동물로 여겼던 것이다.

또 우리 속설에 노루를 잡으면 재수가 없다고 한다. 이 속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믿고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 특히 전방의 군부대에서는 이 속설을 절대적으로 신봉하여 노루가 잡히거나 죽은 노루를 보아도 절대 놓아주거나 먹지 않고 묻어 준다.

이렇게 노루가 불길함을 미리 예견해 주는 동물로 여기게 된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 편에서 많이 나온다. 유리왕이 흰 노루를 잡고 난 뒤 백제 시조 온조가 왕에 오르게 된 것이나, 중천왕 15년에 흰 노루를 잡았더니 그해 11월에 우레와 지진이 있었으며 또 장수왕 때 흰 노루를 잡고 그해 12월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고 하는 기록들을 들 수 가 있다.

이러한 믿음은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고려 시대에는 도성에 자주 노루가 나타났다.

노루가 나타나면 불길하다는 것을 고려 우왕 때 일관의 말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일관이 말하길 “전해오는 비기에 의하면 노루가 성안에 들어오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으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각별히 조심하여 행동하십시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고려는 망하였으며 노루가 나타나면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고 믿게 되었다. 이렇게 불길함을 미리 예견해 주는 신성한 동물, 하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신성한 동물로 여겼기 때문에 노루고기를 먹으면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여겼다.

노루가 나타났을 때 불길함을 나타내는 이야기는 많이 있다. 그 예를 들면 

<노루가 동네를 쳐다보고 울면 그 동네는 화재가 생긴다.> <노루고기를 먹으면 제수가 없다.> <노루가 짖으면 맞은편 동네 사람이 죽는다.> <노루를 잡으면 사고가 계속난다.> 등 많은 속설이 아직도 시골에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속담에나 민요 등에는 노루 사냥을 하는 모습이나 고기를 먹는 이야기도 있다.

노루 뼈는 세 번을 우려먹고도 또 우려 사위를 준다는 말은 노루 뼈가 보신이나 신경통에 좋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또 노루고기 함 점 먹으려다 돼지고기 열 점 잃는다. 란 말은 노루고기가 맛이 좋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비록 노루를 사냥하는 풍속도 있었고 요리도 해먹었지만 우리 민중들 가슴 속에는 노루는 신성한 동물로 잡으면 불길하다는 의식이 내재되어있다고 하겠다.

 

2.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우리 민족에게 거북이는 매우 상징적이며 상서로운 동물이다. 미래를 미리 알려주기도 하고  신의 뜻을 전달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거북이는 재물 복을 갖게 하는 영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거북은 나쁜 의미보다 좋은 뜻을 가진 동물로 우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특히 거북은 장수의 동물로 십장생의 하나로 널리 그려졌고 오랜 삶에서 터득한 경험으로 지혜로운 동물이기도 하다.

거북은 오랜 옛날부터 점복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는데 지금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즉 거북의 등을 태워 등짝이 갈라지는 것을 보고 길흉을 예언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귀복 龜卜 하였다. 그 예로 <삼국사기> 기록된 의자왕 20년에 있었던 백제의 멸망을 예언하는 거북이 등을 들 수 가 있다.

거북이는 각종 일상생활 도구에서도 많이 볼 수가 있다. 거북이 모양을 형상화한 대표적인 곳은 바로 문방사우라고 할 수 있으며 또 비석의 받침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비석의 받침으로 사용된 거북, 즉 귀부龜趺 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가 있다.

비석 밑에 거북이가 그려지게 된 때는 신라시대 부터이다. 커다란 거북에 용머리를 하고 있는 비석 받침돌을 비희贔屓라고 하는데 그 대표적인 유물로는 태종 무열왕릉 기념비를 들 수가 있다. 그리고 임금의 옥새나 왕의 인보 등에는 반드시 거북의 형상으로 손잡이를 만들곤 했다. 이것은 거북이 같이 그 왕조가 오랫동안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이렇게 인장의 손잡이로 사용되는 거북을 귀뉴龜紐 라고 한다.

그밖에 집을 짓고 상량을 할 때 대들보에다 하룡河龍 해귀海龜 라는 글씨를 거북이 대신 쓰기도 하였다. 

거북이는 은혜를 갚는 동물로 설화 속에 많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이제현의 <역옹패설>에 나오는 이야기로 거북이를 살려주고 거북이의 도움으로 삼대가 재상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통해현 포구로 큰 거북이가 잘못 들어왔다. 이를 발견한 당시 현령 박세통이 다시 바다로 살려 보내준다. 그날 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내 아들의 생명을 구해주었으니 공과 아들 손자 삼대에 걸쳐 재상을 지낼 것이다.”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이후 박세통과 아들 홍무는 재상에 올랐으나 손자 박함은 상장군에 그쳤다. 박함은 불만을 품고 거북이의 예언이 거짓이라고 시를 지어 노래했다. 그러자 박함의 꿈에 거북이가 나타나 말하길 “그대가 주색에 빠져 스스로 복을 찬 것이지 내가 은덕을 잊은 것은 아니다. 조그만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라고 사라졌다. 그 후 박함은 재상이 되었다.」

거북이가 장수한다는 것은 신성한 동물로 여겨 옛사람들은 고분 벽화에 사신도로 많이 그려져 왔다. 즉 북방을 지키는 현무로 북쪽은 죽음을 의미하지만 현무는 죽음을 지키는 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오랜 삶에서 터득한 경험이 바로 지혜로 연결되어 지혜로운 동물로 여겨졌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로 <토끼와 늑대 거북이의 지혜겨루기> 이야기를 들 수가 있다. 몇 번을 지고도 승복하지 않은 토끼 때문 마지막 내기로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하였다. 그때 성질 급한 토끼는 자기는 천살이라고 하였고, 늑대는 이 세상이 생길 때 자신은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거북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늑대 너를 보니 죽은 내 손자가 생각난다고 말하였다는 이야기다.

거북이가 민속놀이에도 등장을 하는데 충북의 거북이 놀이가 일제 강점기에는 대표적인 놀이였다. 사람이 둥근 멍석을 덮어쓰고 거북이 형상을 하여 집집마다 다니며 지신밟기로 액을 막아주고 한해의 풍성함을 축복하는 고사 등을 지내며 그 집안의 무사태평과 발복을 기원하는 놀이로 추석날에 행해졌다.

거북이와 같이 지혜롭고 보은을 행하는 사람들로 넘치는 사회가 되었음 하는 바램이다.  

 

3. 단군을 연상케 하는 동물 <곰>

 

우리는 곰을 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남자들은 웅담을 생각할 것이다. 정력과 건강에 최고라는 웅담 때문에 요즘 곰의 수난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생들은 곰을 보면 단군신화를 연상케 될 것이다.

단군신화에 한웅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신단수로 내려와 신시를 열었다. 그 때 곰과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이 되기를 청한다. 한웅은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백일 동안 이것만 먹고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하여 호랑이는 실패하고 곰은 성공을 하여 여자가 되어 한웅과 혼인을 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다.

오랜 옛날엔 곰을 신으로 추앙하고 신성시 했다는 것을 지명이나 문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 고구려조에 나오는 금와왕 이야기에 해모수와 유화가 만나는 장소가 웅신산이다. 또 불국사를 창건한 대성이라는 사람은 곰을 죽인 후 곰의 복수를 막기 위하여 장수사라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곰은 우리 조상의 상징으로, 절대 능력을 지닌 신성한 신으로,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 즉, 여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충남 공주는 옛 지명이 곰내熊川 곰나루熊津 웅주熊州 라고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여자로 변한 곰과 살던 총각이 여자가 곰인 것을 알고 도망을 가다 강물로 뛰어 들었는데 곰도 따라 강물에 뛰어 들었으나 헤엄을 칠 줄 몰라 곰이 죽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직도 시베리아나 중국 소수민족 사이에는 곰을 신으로 숭배하는 사상이 남아있다.

중국 흑룡강성에 살고 있는 오르죤족(Oulunchun)은 수렵을 주로 하는 민족이다. 그들은 곰을 잡으면 곰의 머리를 나무틀에 올려놓고 곰에게 절을 한 후 담배를 바친다. 그리고는 다른 짐승을 많이 잡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그리고 곰의 뼈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성대하게 풍장을 해준다고 한다.

곰이 신으로 추앙받게 되는 데는 겨울잠을 자기 때문이라고 한다. 겨울 동안 안보이든 곰이 봄이 되면 다시 보이므로 신성한 동물로 영생, 또는 환생을 의미하는 동물로 나타나기도 하였는 모양이다.

또 곰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동물로 설화에 많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사냥꾼에게 쫓기는 자신을 숨겨준 나무꾼의 소원을 들어주어 장가들게 하였다는 곰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여우하고는 살아도 곰 하고는 못산다.”라는 말이 있듯이 미련함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동물이기도 하다. 곰이 “옥수수 따듯이 한다.” 는 속담은 곰의 미련함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속담이다. 이 말은 곰은 옥수수룰 딸 때 왼손으로 따면 오른쪽 겨드랑이에, 오른손으로 따면 왼쪽 겨드랑이에 옥수를 끼어 넣고 따므로 2개 이상을 따지 못한다는 말이다.

얼마 전 지리산에 풀어 논 반달곰이 과수원에 폐를 끼친다고 반달곰을 죽인사건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우리는 곰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웅담이 탐이 나서가 아니라 아직까지 우리들의 정서에는 곰에 대한 신성함이나 성서러움 또는 단군설화에 나오듯 우리 조상이라는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으로 온 이여성이 곰의 자손이라는 말이 있는 것은 자신이 범상하지 않는 인물임을 스스로 내세우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여송은 조선에 원군 와서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또한 최초로 조선 땅에 말뚝을 박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바로 경상도 성주가 고향인 조선사람이였다는 설화가 전해내려 오는 것은 그 당시에 조선을 구한 은인이라는 믿음이 민중들에게 깔려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4. 태양 속의 새 <까마귀>

 

우리는 까마귀를 보면 불길 한 징조라고 생각하고 죽음을 연상한다. 언제부터 까마귀가 불길한 징조를 가져오는 흉조가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동이족이 중원의 패권을 상실하고 한반도로 이주 하고 난 뒤 중국의 영향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까마귀를 흉조로 보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본디 까마귀는 태양을 상징하는 새로, 불길한 징조를 미리 알려 불행을 막을 수 있도록 예시를 주는 새로, 또 효자를 상징하는 착한 새로 알려줘 있다.

까마귀의 어원은‘가마고’라고 한다. 가마는 곰의 어원이 변하여 생긴 말이라고 한다. 또 가마는 우두머리를 나타내며, 곰은 단군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까마귀는 단군과 관련된 새로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삼족오는 태양 속에 발이 세 개 달린 까마귀의 그림이다. 왜 태양 속에 발 세 개 달린 까마귀를 넣었을까? 봉황이나 공작 등 아름다운 많은 새들이 있는데 유독 까마귀를 넣는 이유는 바로 단군왕검의 적통을 이어 받아 태양을 숭배하는 정통성 있는 왕조라는 것을 의미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이야기가 있다. 연오랑이란 이름을 풀이하면 까마귀를 인도하는 남자라는 뜻이다. 즉, 태양을 인도하고 끌어 오는 사람이다. 그래서 연오랑 세오녀가 일본으로 가고 난 뒤 신라가 태양이 정기를 잃었다고 하였다. 그들을 다시 데려오기 위하여 신라 아달라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냈으나 일본의 왕이 된 연오랑이 오지 못한다고 하여 그의 왕비인 세오녀가 짜준 비단을 가지고 태양의 정기를 다시 찾기 위한 제사를 지낸 곳이 바로 오늘의 영일만이다.

삼족오의 유래는 희화의 아들 열 명이 태양이 되어 하늘에 떠 있으니 온 천지가 말라 죽게 되어 희화는 수하 장수 제준에게 활을 쏘아 태양을 떨어트리게 하였다고 한다. 그때 떨어진 태양은 발이 세 개 달린 까마귀였다고 전한다.

또 까마귀는 앞으로 닥칠 위험을 미리 예시해 주는 새로도 많이 등장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란 비처왕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도 까마귀가 나와서 그 서신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한 것이다. 그 후 비처왕은 정월보름날에 까마귀의 기일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 제사 지냈다고 한다.

또 까마귀를 보고 반포조反哺鳥라고 한다. 이 말은 반포보은에서 유래되었는데 까마귀는 늙은 어미를 위하여 먹이를 물어다 주어 그 은혜를 갚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그 외 칠월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만날 수 있도록 은하수에 다리를 놓아주는 새도 까마귀와 까치다.

이렇게 좋은 의미로 우리 설화에 많이 나타나는 까마귀를 우리는 죽음을 상징하는 흉조라고 느끼게 된 것은 음양 오행사상이 도입되고부터가 아닌가 한다.

까마귀는 온 몸이 까만색이다. 검은 색은 오행 중 북방을 나타낸다. 또 어둠을 상징하고 죽음의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거망증이 심한 사람을 우리는“까마귀 고기 먹었나?”라고 한다. 이것 또한 까마귀의 몸 색깔에서 비롯된 말이라 생각한다. 온 몸이 새까만 까마귀는 먹통을 연상하게 하고 먹통의 까만색을 까마귀에 비유하여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까마귀를 길조로 여겨 도시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제시하는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5. 정절의 새 <기러기>

 

 지금쯤이면 저 멀리 시베리아에서 추위를 피해 우리나라로 날아오는 기러기 떼들을 볼 수가 있다. 기러기는 겨울철새로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다시 북쪽으로 날아간다. 이렇게 기러기는 일정한 계절에 맞춰 이동을 하므로 옛 선비들은 곧잘 기러기를 빗대어 소식을 전하곤 하였다. 또한 기러기는 이별이나 쓸쓸함의 상징으로도 많이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 속담에 혼자된 사람을 “짝 잃은 외기러기”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혼자된 홀아비나 과부의 외로움을 나타내기도 하는 말이다.

우리는 기러기를 보고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기러기를 보고 쓸쓸함이나 외로움, 그리고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한 옛 선인들의 영향 때문이라 생각한다.

기러기라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전통혼례에서 등장하는 기러기이다.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장가를 갈 때 기러기 한 쌍을 앞장세워 간다. 이것을 목안(木雁)이라고 한다.

우리는 가끔 혼례 때 사용되는 기러기를 원앙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원앙은 암컷이 수컷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라도 갈아치운다는 것과 일부다처제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원앙 부부사이가 좋다고 하여 신혼부부의 금실을 대신할 수는 있어도 기러기처럼 상징적인 의미는 가지지 못한다.

그러면 많은 동물들 중에서 왜 기러기가 선택되어 인간의 대사라는 혼인에 등장하여 앞장서 가는 것일까?

기러기는 한번 짝을 지어면 평생 그 짝과 지낸다고 한다. 만약 한쪽 즉 수컷이나 암컷 중 한 마리가 죽게 되면 남은 기러기는 죽을 때까지 정조를 지키고 혼자 살아간다고 한다.

이러한 기러기의 습성 때문에 혼인에 기러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평생 동안 변치 말고 함께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또 살다보면 혹 불행한 일을 닥쳐 한쪽이 먼저 갈 수도 있는 일이니 한쪽이 먼저 가더라도 기러기처럼 정조를 지키고 혼자 살아가라는 뜻도 있다 하겠다.

충청도에선 혼례 때 전안상에 목안을 올려놓고 북향사배를 드리기도 한다. 그런 다음 신부의 어미가 치마로 기러기를 덮어서 가지고 나가는데 이것은 기러기가 날아가지 말라는 의미와 알을 잘 낳으라는 의미 즉, 생산을 잘하여 자식을 많이 두라는 의미도 있다. 치마로 싼 기러기를 쌀독에 넣거나 안방에 던져서 첫 아이의 성별을 점치기도 한다. 기러기 머리가 왼쪽으로 가면 아들을 낳고, 오른쪽으로 가면 딸을 낳는다는 것이다.

기러기는 작은 기러기는 안(雁)이라 부르고 큰 기러기는 홍(鴻)이라 부른다.

우리 옛 선인들은 기러기에 4가지 덕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첫 번째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가을이면 찾아오고 봄이면 돌아가니 믿을 수 있다고 하여 신(信)이오, 두 번째는 하늘을 날 때는 차례가 있어 앞에서 울면 뒤따르는 무리들이 화답을 하니 예(禮)요, 세 번째는 한번 짝을 맺으면 다시 짝을 얻지 않으니 절(節)이요, 네 번째는 무리지어 밤낮으로 살피고 생활하여 서로를 보호하니 그 지혜를 예폐(禮幣) 즉, 고마운 뜻을 표하기 위하여 보내는 예물로 사용하고도 남는다고 하였다.

어느 동물인들 나름대로의 지혜가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 조상들의 기러기에 대한 믿음과 애정은 다른 동물들 보다 훨씬 더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기러기는 앞에서 말한 4가지 덕을 지니고 있는 동물로 신의가 있고 또한 예의가 있으며 평생을 혼자 살아가며 정절을 지키는 지조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지혜롭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유교사상에 가장 부합하기 때문에 더욱 기러기를 추켜세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있으면 “기럭 기럭” 울음소리를 내면서 하늘에 무리지어 나르는 기러기를  대할 때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기러기의 4덕을 생각하며 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는 여유를 가졌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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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7 2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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