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봄 열풍아 불어라
/조말선 시인

생활의 핍진함 속에서 봄은 상징성이 강하다. 실제로 봄이 왔지만 봄이 온 게 아니라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을 것이다. 기온이 몰라보게 올라간 요즘 도시의 끝까지 걸어나가 보면 비탈마다 버려진 묵은 밭을 손보는 이들이 있다. 묵은 해에 심어놓은 야채들이 그 자리에서 말라버렸거나 시금치,배추들이 땅에 납작 붙어 빛이 바래 있는 밭들은 마치 아이들의 헌 공책 같다. 갈구리 끝에서 정리돼 가는 이랑들이 새봄에 어떤 글자를 받아 적을까 얼굴을 말갛게 씻고 설레는 새 공책 흉내를 낸다. 흥이 난 내가 빨리 걷는다고 빨리 오는 게 아니며 늦게 걷는다고 더디 오는 게 아닌 봄이 겨울을 지나온 자에게는 아무런 회의도 없이 누구의 설득도 없이 스며드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계절을 이야기할 때 그 순환성을 내세우기보다 그 시기마다 불어닥치는 열풍을 눈여겨보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그만큼 무슨무슨 열풍들이 불어닥쳤다가 물러서고 또 새로운 열풍이 그 자리를 메우곤 하는 차례가 반복되는 바람에 겨울이 가는지도 모르고 오는 봄도 저만치 밀려나 보인다. 허구한 날 오고가는 계절의 순환에 감격해 하는 사람은 덜떨어진 취급을 받으므로 '얼짱 열풍''몸짱 열풍''한류 열풍''웰빙 열풍''매트로 섹슈얼 열풍''블로그 열풍' 쯤은 기본적으로 아는 체를 해야 한다. 이러한 열풍들은 자리를 바꿀 때마다 초강력태풍처럼 위력이 대단하다. 열풍을 소비하는 쪽에서는 추세에 뒤질세라 비판없는 수용을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보인다. 인터넷이 그 일등공신인 건 다 아는 사실이다.

고민 없고 반성 없이 받아들인 자본의 상품인 만큼 소비자들은 새로운 상품이 몰아치면 바로 갈아탄다. 예뻐지고 날씬해지고 싶은 욕구는 나이와 성별을 따지지 않는다. 장수하려는 욕망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덮어버렸으며,남자 연예인들은 모조리 샤기 컷을 한 '이준기'가 되었다. 고민도 반성도 없이 멋진 몸매로 장수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누구나가 바라던 유토피아다.

유토피아는 상징으로써 기능할 때 희망의 종착지로 보이듯 상징의 세계는 그대로 두는 게 낫다는 데 덧없이 몰아치는 '열풍'의 문제가 있어 보인다. 비판과 반성 없이 받아들인 삶은 주체적인 삶이 아니다. 이러한 삶은 깊이 인식할 시간도 없지만 인식의 기능조차 퇴화시켜 버린다. 그것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삶의 방정식에 나를 대입시킨 것 뿐이어서 그런 삶은 다분히 키취적이다.

모 텔레비전 방송사의 프로그램 덕에 '독서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 그때 세상에는 딱 두 부류의 책이 존재했는데 방송사에서 선정한 우수도서와 그렇지 않은 도서였다. 많은 학생들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우수도서를 탐독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또 수많은 양서들이 피해 아닌 피해를 보았을 것이고,양서의 본질이 많이 왜곡되지 않았나 싶다. '웰빙 열풍' 때문에 여든 일곱까지 건강하게 살아온 한 노인이 금연을 한다고 나서고 있다. 그 노인은 수명을 조금 늘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누려온 즐거움을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보인다. 담배가 백해무익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추종을 낳는 열풍보다는 내가 주인이 된 나다운 삶을 살 기회를 빼앗기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열풍을 추종하는 삶은 신세대적인 사고로 부추기기 앞서 자연적인 삶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느림'이 거론된 지 오래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 바람은 한없이 더디다. 어찌보면 순환하는 자연에 궤도를 맞추는 느린 삶과 열풍은 부조화다. 그것은 너무 느려서 이미 우리 삶 깊숙이 스며있는지조차 모르는 게 아닐까.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의지와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 갈 수는 없을까. 그런 확신을 얻기 위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깊숙이 들여다보며 열풍에 의연할 수 있는 삶은 어떨까. 그때 계절의 순환이 주는 교훈은 구태의연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나다운 것을 위해 고통을 감내한 후에 오는 봄이 진정한 봄답다. 그 봄은 나로 인해 충분히 회의했으며 나에 의해 충분히 설득당했기에 적당한 때에 스르르 스며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를 무릎 아래 바짝 끌어당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멋진 신세계'에서 존의 입을 통해 말한 헉슬리의 말을 전해 주고 싶다. "나는 편안한 것을 원치 않습니다. 나는 신(神)을 원합니다. 나는 시(詩)를 원하고,현실적인 위험을 원하고,자유(自由)를 원하고 선(善)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ㅂ ㅅ 일보 2006.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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