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 클럽 반올림 6
김혜진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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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람이 부는 곳을 걷는다. 어딘가 문이 있다. 잊고 있었던 문이 열렸다. 그래, 저런 문이 있었지. 차갑고 뜨거운 빛깔의 청동 잎과 꽃과 줄기로 장식된 문. 잊고 있던 곳으로 통하는 문.

문 너머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문 안에 있는 것은 잊고 있었던 정원, 잊고 있었던 길, 잊고 있었던 호수, 잊고 있었던 세계. 세계의 잔해.-11쪽

나는 말이 없어졌고, 신중해졌다. 말하지 않기. 보지 않기. 틈을 보이지 않기. 티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 걸은 물러서고 나면 한 걸음 다가와 끌어 내는 사람은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더, 원하는 만큼 물러설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나 사이의 거리. 무한한 척력으로 채워진 공간.-16쪽

퍼즐을 쉽게 맞추려면, 먼저 모두 그림이 있는 쪽으로 뒤집어. 그 다음에는 이렇게, 한쪽이 직선인 테두리 조각들을 찾는 거야. 테두리를 둘러 맞춰 놓아야 안을 채우기가 쉽거든.

사는 거랑 비슷하네.-79쪽

테두리 밖에도 퍼즐 조각들이 있다고 생각해?

나는, 늘, 그런 기분이야.-80쪽

몸으로 사는 것. 머리로만 살지 않는 것. 그런 걸 나도 할 수 있다면. 나도 몸을 던져서 타오를 수 있다면. 그런 일체감 속에서 살 수 있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를 보았다. 역시 세상은 넓었다. 내가 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닐지도 몰랐지만 본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128쪽

예상치 못하게 일어나는 일들은 사건이라거나 행운이라고 하고 예상할 수 있는 일들은 일상이라 부른다. 상처 받고 다리에 힘이 빠져 비틀거리고 피를 흘리는 일들을 일상이라고 한다. 일상의 처연한 풍경 안에서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은행나무 잎들이 바람에 몰려 골목을 지났다. 구겨지고 밟힌 노란색.-157쪽

- 무감각한 것보다야 훨씬 낫지. 맘껏 흔들리고 불안정해지는 게 나아.
-그래야 뭔가 탄생할 여지가 생기는 거니까. 창조......변화, 소용돌이, 뭐 그런 거.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말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숨은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카오스에서 모든 게 시작되듯이. 안정된 원소는 분열하지도 않으니까. 뭔가 만들어지려면 괴롭고 슬프고, 그런 게 필요하거든.-172쪽

상처 받는 걸 두려워하지 마. 상처를 가지고, 그것 때문에, 더 아름다운 모습이 될 수도 있어. 나이 든 사람들의 주름처럼. 어쩔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면, 말끔히 지워질 것 같지 않다면, 그걸로 아름다운 흉터를 만들도록 해. 상처가 아무는 것은 그 후에 달린 거니까.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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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7-08-19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책장을 열어보고 싶었는데 혜경님 서재에 몇 장 열려있네요. ^^

프레이야 2007-08-19 11:00   좋아요 0 | URL
누에님, 몇 군데 잘 보셨는지요? ^^
책표지가 참 근사하지요. 즐거운 일요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