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의 잠

                                                                   김선우

 

생리통의 밤이면

지글지글 방바닥에 살 붙이고 싶더라

침대에서 내려와 가까이 더,

소라냄새 나는 베개에 코박고 있노라면

 

푸른 연어처럼...

 

나는 어린 생것이 되어

무릎 모으고 어깨 곱송그려

앞가슴으론 말랑말랑한 거북알 하나쯤

다 안을 만하게 둥글어져

파도의 젖을 빨다가 내 젖을 물리다가

포구에 떠오르는 해를 보았으면

이제 막 생겨난 흰 엉덩이를 까불며

물장구를 쳤으면 모래성을 쌓았으면 싶더라

 

미열이야 시시로 즐길 만하게 되었다고

큰소리 쳐놓고도 마음이 도질 때면

비릿해진 살이 먼저 포구로 간다

 

석가도 레닌도 고흐도 감자먹는 아낙들도

아픈 날은 이렇게 혁명도 잠시

낫도 붓도 잠시 놓고 온종일 방바닥과 놀다 가려니

처녀 하나 뜨거워져 파도와 여물게 살 좀 섞어도

흉 되지 않으려니 싶어지더라

                                                     <내일을 여는 작가> 1997년 봄호

 

    안도현이 눈여겨 보고 있는, 아직 시집 한 권 묶지 않은 젊은 시인이란다.

   어제 가족과 함께 바다에 갔다. 서서히 해가 바다로 내려가고 있었고 해면은 잘게 부서지는 유리조각의 발광체 같았다. 코로 들어오는 바다 비린내가 언제부터 좋았는지... 그래 자주색 볼레로의 교복이 이뻤던 여고 2학년 때다. 어느 일요일 새벽(겨울이었다) 시내 버스로 한 시간 남짓을 달려와 해돋이를 하자고, 몇이서 의기투합되었다. 겨울바다는 그렇게 큰 몸으로 나를 덮치듯 안겨왔다.

  딸아이 둘은 서로 새우깡을 많이 주겠다고 야단이다. 포말처럼 하얗게 몰려오는 갈매기들에게 하나라도 더, 잘(입에 쏙 들어가게) 주려고 전심전력 하고 있다. 가히 몰입의 경지다. 그래서 아이들이 부럽다. 작고 하찮은 것에 대한 탐욕스런 몰입이 부럽다. 양볼이 발그레 물들고도 안 춥다며 새우깡을 한 봉지 더 사게 해 달라고 조른다. 수퍼에서 사는 값의 두배 이상의 값을 치르고, 작은 아이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로 난 수평선을 따라 걷는 기분이다.

  "갈매기가 내가 던진 거 먹었어. 바다로 떨어진 건 아마 물고기가 먹었을걸. 갈매기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참 좋아."

  아이는 시인이다.

  아이들 아빠는 카메라를 바꿔 가며 바다와 하늘과 갈매기와 사람을 담느라 바쁘다. 내 눈의 렌즈는 이 모든 풍경을 사진처럼 담고 있다. 정지한 시간이기라도 하듯 스틸사진으로 담고 있다. 무비카메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 그 사람이랑 닮았다. 살면서 닮아가는 면이 많기도 하다. 다양한 각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남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본다. 한마디로 자기 목적성이 강한 인간이다.('몰입의 즐거움'에서 이끄는, 질 높은 삶을 사는 인간형)  

  난 마음 속에 어떤 갈등이 있어 혼란스러우면 칩거하는 유형인데, 이 사람은 카메라 가방 메고 새벽에 나가는 형이다. 한때 그 도구가 낚싯대인 적도 있다. 난 가장 싸게 먹히는 도구, 바로 책을 보고 노는데 말이지.  보이지 않는 족쇄에 스스로 매어서 헤어나질 못하는 '나'는 이제 떨쳐버리고 그 모든 타성에서 벗어나야지.

  바다는 '나'를 버리라 한다. 그릇된 자아일랑 바닷물에 던져버려라. 까닭 모르게(사실은, 알고 있다. 나 자신의 한계가 두려워 입 밖에 내지 않을 뿐) 아픈 날,  바다는 한 몸으로 날 달구고 서늘하게 식힌다.

   딸아이들과 난 여자 사우나에서 목욕하고 남편은 찜질방에서 있다가 두 시간 후에 만났다. 통유리 밖으로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욕조라니. 이런 작은 호사는 누려도 뭐랄 사람 없겠지. 아이들 살갗이 참 보드랍다.  동그란 엉덩이는 마알간 해 같다. '이제 막 생겨난 흰 엉덩이를 까불며' 종알댄다. 몇달 새 몸무게가 많이 늘었다. 아이들 건강한 거, 감사하다. 하지만 내 몸무게는 늘지 않았어야 하는데... 그래도 난 종종 달콤한 도넛이 먹고 싶다. 초콜릿이 얌전히 발린, 동그란 구멍 있는 도넛에 커피 한 잔.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나의 애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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