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밥헬퍼 > 소파 방정환의 단편소설 '금시계'

*자료,염희경, '금시계'개작으로 본 방정환의 문학적 변모 (계간 어린이창비, 2003,.가을 통권 제2호,156-159쪽)

                                                         금 시 계

                                                                                                            방정환

  흥수는 잔디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몸은 피곤할 대로 피곤하였고 머리는 아까부터 무겁고도 흐리기 짝이 없다. 그의 입에서는 힘없는 한숨이 나왔다. 그는 고개를 숙여 석양에 비추이는 잡초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넘어가려는 저녁 해는 그의 몸을 비추어 잔디 위에 검은 그림자를 던졌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들어 창천(蒼天)을 쳐다보았다. 중천에 뜬 소리개는 느리게 원을 그리고 있다.  한숨을 휘-쉬는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다.

  가련한 고학생 김흥수는 갈 곳이 없는 청년이다. 저물어가는 하늘에 종잘거리는 것은 제 집을 반기는 새떼의 노래요,  멀리 뵈는 무학현(無鶴峴) 고개에 걸음이 급한 이는 귀가하는 촌인(村人)이로다, 아아 화락한 가정의 따뜻한 즐거움! 흥수에게는 그것이 없다. 

  저녁때가 되었다. 태양은 서산 너머로, 짐승은 숲속으로, 사람은 집으로, 세상은 어둠 속으로 제가끔 기어드는데 이 몸만 홀로 갈 곳이 없구나 생각하매 하염없는 눈물이 금할 새 없이 흐른다.

  그는 XX고등보통학교 3년생이다. 학력은 그다지 우승(優勝)치는 못하나 품행일는지 성근(誠勤)일른지 여러가지 방면으로 그는 전교의 모범적 학생이었다. 홀로 계신 모친은 외삼촌댁에 계시고 자기는 냉동(冷洞), 삼촌 댁에 부쳐 있어 통학하더니 그 삼촌이 사업에 실패를 당하여 작년 가을에 북간도로 옮겨가신 후 흥수는 자기가 스스로 주선하여 OO목장에 있어 우유배달을 하여가며 고학을 하던 터이다. 그 혹독한 작년 겨울의 추위도 능히 굴하지 않고 지내어왔다. 학교 교원은 물론이요 목장의 주인까지 그의 성실함에 감동하여 여러가지로 그에게 좋도록 편의를 보아주었다. 자력자급, 노동생활은 계속되었다.

  이와같이 고생스러운 통학을 하고 있는 흥수에게 일매(一枚))의 비보가 이르렀다.그것은 시골 외삼촌댁에 계신 모친의 병보(病報)였다.......빈한 집에 부쳐 계신 모친, 그 모친의 중병. 아아 약 한첩도 못 쓰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흥수는 그날 밤, 또 그 이튿날 밤을 잠도 못자고 생각다 못하여 목장 주인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두 달치 봉급을 미리 주시면 좋겠다고 청하였다. 흥수의 모친이 중병인 것과 그 외삼촌댁의 빈한한 것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주인은 두 달치 봉급을 미리 주면 그 두달 동안 봉급 없이 흥수가 고생할 생각을 하고 흥수를 위하여 거절하였다.

  기후(基後) 오륙일 후에 목장 주인의 부인이 순금반지를 경대 위에 놓았다가 잃어버렸다.

  금반지를 잃었다고 미친 듯이 날뒤는 부인은 벌써 흥수를 의심한다. 두 달치 봉급을 달라는 대로 주었더면 반지나 잃지 않았을 걸 하고 남편을 원망한다. 부인뿐이 아니라 목장 내 전부가 흥수를 의심하는 모양이 흥수의 눈에도  띄었다. 아아 무실(無實)의 죄명! 이것도 내가 빈한한 까닭이다. 가슴을 껴안고 부르르 떠는 그의 뺨에는 원한과 분노가 엉킨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그 자리에서 변명을 하고 싶었으나 누가 자기에게 직접으로 가져갔다는 이도 없는데 먼저 변명을 하면 도리어 그네의 의심을 두텁게 할 뿐이겠으니까 잠자코만 있었다.

  다른 사람은 다 아무리거나 주인은 결코 흥수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의 성실, 그의 인내, 그의 정직에 깊이깊이 감동한 주인의 가슴에 그렇게 용이하게 의심이 일어날 리도 없고 일으킬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그까짓 변변치 않은 일로 소동을 일으키는 것은 자미(滋味)롭지 못하다 하여 그 일은 그대로 덮어버렸다.

  그때부터 일주일 후인데 이번에는 주인의 금시계가 없어졌다. 목장 내는 전보다 더 소동이 되었다.  그런데 의외에 기(基) 시계는 흥수의 책상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면 그렇지. 흥수가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금반지도 분명히 흥수의 짓일세, 그렇고 말고 흥수밖에 누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있나? 하고 의론(議論)이 분분한데 흥수는 이런 소동이 생긴지도 모르고 목장 뒤뜰에서 운동하는 소떼를 지키고  있다. 

 

뜰의 한모퉁이 돌 위에 힘없이 앉아서 손에 들고 있던 물리책 갈피에서 아까 풀숲에서 주운 종이를 꺼내 펴들고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그 종이는 순금반지 한개를 십오원에 전당잡힌 전당표이다. 전당잡힌 자의 이름은 최흥봉이라고 있는데 최흥봉이는 이 목장의 급사로 있는 아해이다. 지금 그 전당표를 주인에게 보였으면 자기의 변명은 훌륭히 된다. 그러나 흥수에게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흥수는 흥봉의 집 형편을 대강 짐작한다. 요사이는 흥봉의 집이 석 달치 집세 십삼원 오십전을 내지 못하면 집을 내놓게 되는 가련한 영편(影便)) [형편(刑便)의 오식인듯-편집자]에 있는 것도 안다. 흥수는 가련한 소년 최흥봉의 일을 자기의 신상에 비하여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때 저곳에서 달음질하여 오는 소년은 주인의 명령으로 흥수를 부르러 오는 최흥봉이다. 흥수는 아무 말 없이 전당표를 흥봉에게 주었다. 흥봉이는 그 표를 보더니 얼굴빛이 노래진다. 한참이나 그 표를 든 채로 우두머니 섰더니 이윽고 그의 눈에는 두 줄기 눈물이 비오듯 한다. 아아 이것을 주인에게 고하지 않고 나에게 넌지시 주는 흥수의 아름다운 마음! 나는 이렇게 착한 흥수에게 죄명을 씌우고자 이번에 주인의 금시계를 흥수의 책상에 감추었구나......아아, 못할 짓도 하였다.......깊이깊이 뉘우친 흥봉이는 일체를 흥수에게 자백하였다......흥수는 주인에게로 갔다. ......

  흥수야 이 시계가 네 책상 속에 들어있으니 어쩐 일이냐. 나는 요전 금반지 일도 설마 네가 그러하였으랴 하였더니 이젠 너의 짓이 아니라고 할수 없다 하는 주인의 말에 흥수는 자기의 변명을 위하여 자세한 일을 고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아무 대답도 아니하였다. 주인은 암만하여도 이 일이 흥수의 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실이 증명하는 이상에는 그것을 이유없이 부인하는 수도 없다.  그래서 체면상 그대로 둘 수 없으므로 본의는 아니나 흥수를 해고시켰다.      

  이렇게 하여 오늘 아침에 목장을 나온 흥수는 무실의 죄명으로 인하여 아무 곳에도 갈 곳이 없는 몸이 되었다.

  한학년에서 수학하는 학생의 집에서도 그를 반기지는 아니하였다. 반기지 아니할 뿐 아니라 흥 모범학생이지 저 꼴에......하고 비웃었다. 이러한 덧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흥수는 해가 아주 진 것도 모르고 여전히 잔디 위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만일 내가 그때 사실대로 주인에게 고하였던들 가련한 소년 흥봉이와 그 흥봉이의 보탬이 많은 빈한한 가정은 어찌 되었을까......이러한 생각을 하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그 눈물 고인 눈 속에는 자기가 목장 문을 나올 때 판장(板薔) 옆 오동나무 밑에 울고 섰던 흥봉이의 모양이 아련히 보인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집집에는 전등불이 반짝거리고 어두워가는 하늘에는 어린 별들이 우는 듯이 끔벅거리는데 갈 곳없는 흥수는 힘없이 일어서더니 어디로 가는지 굽어진 산길로 한걸음 두걸음 어둠 속으로 걸어간다.    1918. 10 소파생(小波生)      <신청년 창간호 1919년 1월호>


 

 

 

 

 

*그림 Shinobu Mat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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