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의 빨간 외투 비룡소의 그림동화 75
애니타 로벨 그림, 해리엣 지퍼트 지음, 엄혜숙 옮김 / 비룡소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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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여자 아이가 입고 서 있는 빨간 외투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나, 이 그림책의 표지만 보면 그런 것들이 마구 궁금해진다. 요즘 아이들은 옷 하나에 그리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아이가 얼마나 많을까 싶지만, 나의 기억만 들추어봐도, 몇가지 기억들이 살아난다. 겨울 교복치마 밑에 입으라고 손뜨게로 짜주신 노란 속바지, 민소매 원피스의 하늘거림, 발등에 가는 끈으로 연결된 검정색 에나멜 구두, 얇은 레이스가 달린 발목까지 오는 하얀 양말의 기억이 그렇다.

이 그림책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아름답게 살려 놓았다. 일러스트레이터는 유태인 핍박을 피해 도미한 여성그림책작가이다. 개구리와 두꺼비 시리즈로 기억되는 아놀드 로벨의 부인이란다. <안나의 빨간 외투>는 전쟁의 폐허를 보여주는 뿌연 그림으로 시작한다.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다친 사람들이 거리에 뒹굴고 먹을 것도 없고, 온통 '없음'이라는 단어만이 판을 치는 세상에 안나와 엄마는 황량한 가슴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불행할 것 같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나와 아이들이지만, 이런 극한 상황을 이해하기엔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그리 부족하진 않다.

그러나 불행할 것만 같은 안나와 엄마는 행복을 가꾸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다림! 작은 소망을 가슴 속에 안고 키우며 설레며 기다리는 마음! 겨울이 되어 안나는 거울 앞에서 파란 외투를 입어보지만, 쑥쑥 자라는 아이에게 그 외투는 작기도 하고 따스해 보이지도 않는다. 이런 때 엄마라면 얼른 넉넉하고 따뜻한 외투를 장만해주고 싶어진다. 안나의 엄마는 안나에게 썩 괜찮은 외투를 장만해주려고, 가지고 있는 귀중한 물건들을 팔 생각까지 하며 사람들을 찾아간다.

그러나 양털을 깎기 위해 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엄마가 처음 들은 말이다. 아무래도 올 겨울은 작은 외투를 억지로 끼어입고 보내야 할 것 같다. 이듬해 봄, 양털을 얻고 여름엔 산딸기를 얻어 실을 염색하고 그리고 옷을 짜고... 꼬박 사계절을 보내고 여섯 개의 귀여운 단추가 달린 빨간 외투가 완성된다. 다른 아이도 입고 있는 똑같은 외투가 아니라, '안나를 위한 빨간 외투'라고 특별하게 적힌 푯말과 함께 쇼윈도우에 걸려있는 외투는 한 면을 꽉 채우게 눈에 확 들어온다. 빨간 색상이 참으로 곱다. 아이의 소망과 엄마의 사랑, 다른 어른들의 배려가, 오래 기다렸다 받은 선물의 값을 무한대로 하는 것 같다.

안나는 빨간 외투를 입고 서 있는 자기의 모습을 두고두고 잊지 못하겠다. 난 어릴 적 엄마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조그만 양철 함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분홍색 플라스틱 손잡이가 위에 달렸고 직사각형의 함에 파스텔톤 그림이 있는 건데, 그리 비싸거나 화려한 건 아니지만, 엄마의 애정이 담긴 작은 선물이다. 크리스마스면 으레 하는 선물, 백화점에 가면 온통 똑같은 형형색색 근사한 선물들보다 아이에게 잊지 못할 특별한 기억을 주는 선물을 하고 싶다. 그 선물의 이름은 '기다림과 사랑'이다.

<안나의 빨간 외투>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얼른 손에 넣고 싶어 참지 못하는 요즘 아이들에게, 두근두근 기다렸다 얻는 커다란 기쁨을 보여준다. 그 기쁨은 무르익혀서 얻은 달디 단 맛이다. 어릴 적 잊지못할 특별한 기억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되살려 놓은 이 한 권의 그림책으로 마음의 풍요를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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