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한 해가 저물 때마다 유언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한다. 신선한 발상에 진지함이 묻어나는 유언을 모 주간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죽음을 상정하고 쓰는 글, 유언은 산도르마라이가 에스터의 입을 빌어 말하듯이 솔직하지 않으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유언>은 한 늙고 고독한 여인이 말하는, 삶의 의무에 대한 인식의 과정이다. 나름대로 편안하고 걱정없었지만, 꿈길을 걸어가듯 몽환적인 20년을 살아온 에스터에게 어느 날 갑자기 그 꿈을 깨는 일이 일어난다. 싫든 좋든 현실을 맞아야하는 일이 일어난다.

 '현실'이라는 이름을 달고 당당하게 오는 것은 라요스라는 옛 약혼자이다. 라요스는 거짓과 허풍과 위선으로 가득찬 기이한 인물이다. 그는 현실감각이 부족하고 도덕적으로 결함투성이 인물이다. 그가 쏟아내는 말과 지어내는 동작은 예외없이 거짓으로 점철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거짓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만큼 진실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이게 바로 우리가 맞이하며 사는 '현실'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다. 중요한 것은, 꿈이 아닌 현실에서만 - 그것이 삶이든 죽음이든 - 마음이 안정된다고 말하는 에스터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진실! '언제나 진실이 문제다.' 에스터처럼 우리는 진실을 말하기 두려워한다. 무엇 때문에? 자존심이 문제인가? 앞날에 대한 희망이 문제인가? 도덕으로 무장한 인상을 주는 우리가 정말 두려워하는 건 어쩌면 삶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삶은 숭고한 의무이자 싸워나가야할 적이라고 에스터는 인식한다. 자신을 기만하고 혼란에 빠뜨렸던 쓰레기 같은 삶이라도 사랑이란 이름으로 송두리째 자신의 모든 걸 내어주는 에스터. 삶의 의무를 제대로 다하려면 그냥 사랑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용감하게 사랑해야 한다.' 진실한 허풍선이 라요스의 입을 통해 음악처럼 흘러나오는 삶에 대한 성찰과 인간관계에 대한 인식은, 그것이 거짓덩어리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란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며 만족의 웃음을 짓게 한다. 에스터에게도 우리에게도 예외없이 그럴 거라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갈까? 과연 한 번이라도 계획한대로 이루어진 일이 있는가? 아니, 계획이라도 제대로 세워본 일이 있는가? '어떤 것도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지 않고, 또 미리 준비하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소.' 라요스의 이 말은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위장되지 않은 시선이다. 사실 결과를 두고 근사하게 포장하여 말하는 순간에도, 정작 자신은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 특출나고 근사한 계획이나 준비를 하였던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무것도 예상하고 준비한 대로 되는 법이 아니라면, 라요스처럼 단 하나의 진실한 율법에 충실하는 건 어떨까? 라요스가 자기를 인정한 말처럼, 줏대도 없고 지조도 없고 경박한 사람이 바로 우리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나약한 성품은 어느 순간 여지없이 무너지며 삶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삶에 대한 도피를 일삼는다.

마라이는 라요스의 입을 통해, 마치 생을 뚫어지게 쏘아본 듯한 눈으로, 철학적인 동시에 시적인 글귀를 물 흘리듯 내보낸다. '누군가가 자신을 희롱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 그러나 어느 날 세상일에는 경이롭게도 이치와 순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오......기분이 내키고 마음이 맞아서가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우주의 율법에 따라 내적으로 성숙해야 한다오.' 생의 해질녘에서, 내적으로 성숙한 매무새를 하고, 자신을 또 한번 기만하려는 삶의 기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생의 끝자락에서 용감하게 자신의 모든 걸 내어주는 나이 든 여인을 그려본다.

진실일 거라 믿는 라요스의 20년 전 편지를 비추는 촛불을 덮는, 의외의 바람 한 자락이 삶을 뒤바꾸어 놓듯이, 위험, 불확실성, 이런 삶의 속성에 우리는 오히려 매료되는 건 아닐까? '세상의 어떤 이치와 오성'도 끼어들지 못하게 용감하게 사랑하는 것만이 그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란 생각이 든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라는 싯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니는 개인의 진실로 생을 채워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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