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피 아저씨의 뱃놀이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53
존 버닝햄 글, 그림 | 이주령 옮김 / 시공주니어 / 199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그림책은 너무 유명한 탓에 오히려 한동안 꽂아두었는데 오늘 작은 아이가 마음 내키는대로 뽑아 들고 나온 그림책이라, 함께 보며 새삼 즐거웠다. 존 버닝햄의 그림책은 볼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와 닿고, 보이지 않던 것이 다시 보이는 매력이 있다.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도 그의 여느 그림책에서 볼 수 있는 장점이 부각되어 낯설지 않게 보였다. 여유로운 느낌을 주는 여백의 아름다움과 느긋함이 우선 자극적이지 않아 편안하다. 강렬함과 자극적인 것들이 힘을 발하는 것 같은 요즘, 이런 그림책들은 첫 눈길보다는 여러번의 눈길을 더할수록 은근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어눌한 말투로 뚜벅뚜벅 이어가는 글귀는, 반복되는 구절들에 리듬을 싣고 유쾌하게 다가온다.

아이와 역할극을 하는 식으로 대화글을 던지고 받으면 좋겠다. 꼬마들의 대사와 동물의 대사를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낭낭하게 울린다. 난 잔뜩 목에 힘을 주고 아저씨의 대사를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목에 준 힘을 빼고 부드럽게 해야 더 어울리지 싶다. 왜냐하면 검피 아저씨는 아이들의 부산함과 분탕질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화도 내지 않는, 가슴 넉넉한 아저씨이기 때문이다.

검피 아저씨의 입가에 잡힐듯 말듯 머물러 있는 희미한 웃음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그저 뭐든 받아줄 것 같고 마냥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모르는 척 눈 감아줄 것 같은 넉넉한 가슴을 가진 사람, 버릇 없이 굴어도 조금은 안심이 되는 인자한 눈웃음을 가진 사람. 그런 검피 아저씨는 아이들에게, 동물들에게(결국 동물들은 아이들의 또다른 모습으로 비친다) 의미있는 타인이다. '의미있는 타인'이라는 말은 들은지 몇년이 되었다. 난 이 말이 담고 있는 모든 의미가 참 좋았다. 그리곤 그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게 의미있는 타인은 누구였으며, 난 다른 사람에게 의미있는 타인이 되는지... 돌아보았다.

아이들에게 부모는 첫번째의 세상이며 세상 전부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제2의 세상과 만나고 부대끼며 많은 사람을 만난다.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 혈연관계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과 혀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나'에 대한 존중감도 좌절감도 맛보며, 삶의 보이지않는 길도 어렴풋이 더듬어간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에서처럼 지식의 맛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재산을 물려주시는 선생님도 있고, <모네의 정원에서>에 나오는 블룸 할아버지 같은 분도 있다. 이 할아버지는 주인공 여자아이를 모네의 그림세계로 이끌어주시는 아파트 위층에 사는 이웃이다.

아, 이런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 내가 또 이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 검피 아저씨는 이런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좀이 쑤셔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는 아이들을 배에 모두 태우고 강으로 뱃놀이를 가는 이웃 아저씨는, 자신의 자상한 당부도 들은둥마는둥 일을 저지르고 마는 녀석들과 함께 즐기는 눈치다. 감정을 드러내는 글귀도 표정도 별로 없고, 겉으로 보이는 사실과 들리는 얘기들만 적혀있는 글이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상상하게도 한다. 검피 아저씨는 아마도 녀석들과 함께 자신의 어린시절 추억 속으로 흠뻑 빠져, 자신을 또 그렇게 받아준 의미있는 타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되갚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존 버닝햄의 글은 그렇게, 그림이 주는 여백 못지않게 행간에서 상상의 여백을 넉넉히 남기고 있어 더욱 맘에 든다.

들녘을 가로질러 아저씨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행의 모습이 담긴 장면은, 단순한 색과 선이지만 거친 붓자국으로 덧칠해놓은 하늘이 쏜살같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하루도, 한달도, 일년도... 아저씨의 유년도, 그리고 아이들의 자람도. 모두가 둘러앉아 차를 마시는 마지막 장면에서, 난 금방 발견하지 못한 걸 아이가 말했다. 남자아이는 화난 얼굴이라고. 친구랑 배 위에서 싸운 일로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나보다, 라고 말했더니 왜 싸웠을까?, 하며 아이는 눈을 깜박였다. 옆에 앉은 양은 놀란 눈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고 보니 여자아이나 검피 아저씨의 표정과 남자아이의 표정이 사뭇 다르다. 아이들도 앞 장면에서보다 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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