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간 윌리 웅진 세계그림책 25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장미란 옮김 / 웅진주니어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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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작은 딸아이는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한다. 일주일에 한번 미술 선생님 오시는 날을 학수고대하며, 미술 시간이면 선생님과 종알종알 얘기를 주고받으며 자기만의 그림을 그린다. 어찌보면 그림보다 거기에 담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더 좋아하는 눈치다. 살짝 궁금해하며 한마디 던지면 술술술 그 그림에 담긴 자기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그걸 들으며서, 아이가 오늘도 유치원에서 친구한테 스트레스를 좀 받았구나, 무얼 갖고 싶구나, 무엇에 기쁨을 느끼고 자신감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귀중한 정보(?)를 건진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그런 것들을 파악하는데는 모자라지 않는 시간이다. 그래서 난 아이의 그림을 좋아한다. 우리 아이는 색을 참 다양하게 쓰는 편이다. 모양오리기도 좋아해서 오려 붙이고 꾸미고, 하여튼 방안이 늘 작업실이다. 엄마는 하루에도 몇번씩 귀찮아 죽을 지경인데 아이는 마냥 바쁘다. 창작에 여념이 없으니 참, 좋은 엄마 노릇하기 어렵다.

<미술관에 간 윌리>는 앤서니 브라운이라는 이름만으로 꽤 기대하며 덥석 고른 그림책이다. 기대만큼 썩 섬세하고 다양한 색감과 구석구석 숨은 그림 찾기의 재미가 그만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약간 공주병(?) 증세가 있어 그런지 못생긴 원숭이만 나온다고 한 번 보더니 보지 않으려한다. 저처럼 스케치북을 부욱 찢어 그린 그림인데도 말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토끼였으면 좀 다르지 않았을까, 위안하며 일단은 보류다. 그리곤 다시 한장한장 들여다보다 원숭이 가면놀이를 한 윌리를 발견했다.

가면은 자신을 한꺼풀 숨길 수 있는 도구이다. 그런 만큼 어떠한 제약에도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자신의 숨은 욕구를 한껏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윌리는 원숭이 - 아마도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 - 가면을 쓰고 소위 명화들을 옆에 두고 자신의 스케치북에 하나씩 재창조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엔 아이다운 자신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쁜 여자친구 밀리를 사이에 두고 벌렁코친구와 삼각관계(?)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른들이 명화라고 감상하기를 강요한 그림들을 아이다운 눈으로 비틀어 놓았다. 남자아이다운 욕망을 걸러내지않고 풀어놓았다. 엉큼하게도 그림 속에는 하나같이 그림붓, 바나나, 빵, 스케치연필, 그림물감 같은 그림도구와 간식들이 버젓이 들어있다. 그리고 두가지의 다른 형태로 볼 수 있는 그림속 그림도 있어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끝이 없다.

그런데 심오한 주제를 아이들의 손을 빌어 말하는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이 단순히 여기서 끝나진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의 그림에 있는, 윌리를 그리는 원숭이의 얼굴이 어쩌면 윌리와 그렇게 닮아 있는지.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원숭이 귀부인이 잡고있는 개목걸이줄에 묶여 네발로 기고 있는 건 다소 섬뜩하다. 바벨탑의 벽에 그려져있는 비명을 지르는 듯한 표정들, 그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두 팔을 벌려 가슴을 젖히고 웃음짓고 있는 원숭이, 미추의 기준을 완전히 엎어버리는 듯한 '신비한 미소'('모나리자'의 윌리판 패러디) 앞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삭막한 벽돌담 위에 싱그러운 나무가 있는 풍경을 그려 전망좋은 방으로 바꾸는 '경치 나쁜 방', 뭉크의 그림 속 인물처럼 절망하며 절규하는 윌리가 있고 뒤로는 현대문명의 필요악이랄 수 있는 텔레비전이 있는 '나쁜 꿈'은 밀리와 악당 벌렁코의 결혼식 청첩장을 받은 악몽으로 위장하고 있다. 떠오르는 태양을 찾아가는 눈먼 오리온은 '양파가 있는 풍경'에서 윌리 대신 몇 킬로미터나 쫓아가 양파를 대신 잡아준다. 양파는 윌리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일지도 모른다. '영웅'에서 윌리는 자신의 욕망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벌렁코를 찌르는 창은 붓으로 바뀌어있어 윌리가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지않는다. 윌리의 말처럼 '꿈꾸는 것은 자유잖아, 그렇지?'

이제 원숭이 가면은 벗어서 책상위에 두고 알록달록한 조끼도 벗어 걸상에 걸쳐놓고 뿌옇게 흐려진 물통과 팔레트를 그대로 두고 윌리는 스케치북을 들고 나간다. 미술관에라도 가서 자신의 그림을 명화 옆에 떡하니 붙여놓으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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