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 베틀북 그림책 13
프리드리히 헤헬만 그림, 미하엘 엔데 글, 문성원 옮김 / 베틀북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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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여섯살 난 큰 아이를 데리고 빛그림 연극을 본 적이 있다. '피터와 늑대'라는 유명한 곡을 빛그림 연극으로 연출한 것이었다. 하얀 장막 뒤에서 움직이는 여러가지 그림자는 때론 실제보다 과장되기도 하고 때론 축소되기도 하면서 변화무쌍한 눈속임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모든 그림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했다. 빛과 그림자는 한 몸이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빛보다 엄청 큰 덩치로 나를 덮치려고도 하며 막연한 공포심을 조장하기도 했다. 세상을 은유로 해석하며 의미를 찾아가는 유일한 생명체, 우리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상상력의 힘이 그 단순한 윤곽에서 나오고 있었다.

막연함. 예순 중반을 향하고 있는 어머니는 이 단어를 가끔 내뱉으신다. 매사에 정확하고 자신만만하셨던 어머니가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모든 걸 받아들이는 쪽으로 인생관을 바꾸신지도 어언 10년이 되었다. 물질도, 자식도, 젊음도 당신이 계획하고 꿈꾸셨던 대로 되지 않지만, 그저 앞으로 살아가실 길도 막연하다 하시지만, 오늘도 어머니는 열심히 먹을 갈고 붓을 잡아 마음을 가다듬어 글을 쓰신다. 어머니의 살아온 삶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다. 오늘도 수용적으로 변한 어머니의 태도가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을 보고, 삶의 양면을 생각했다. 이 세상의 양면을 생각했다. 내가 빛의 편에 서 있다면, 그것도 인생의 반을 넘어선 시각에 서 있다면, 나의 그림자는 더 긴 형상을 하고 나의 발끝을 따라다닐 것이다. 생의 모든 떠도는 그림자들, 내가 빛이 있는 곳에 서 있게 해주는 모든 그림자들을 끌어안아야 한다. 죽음이라는 최후의 그림자까지 흔쾌히 받아들이는 오필리아의 자글자글한 얼굴이 빛으로 화사하다. 외롭고 덧없는 그림자들의 향연은 찬란한 빛의 향연으로 승화되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에겐 아직도 힘든 과제다. 그것은 내 안에 '나'를 버리고 넉넉한 자리를 많이도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걸 뜻한다. 어머니처럼 오필리아처럼. 인생은 연극이 아니라, 빛그림 연극이라고 고쳐 말하고 싶다. 덧없는 그림자들끼리 아웅다웅하다가 먼 나라에서 빛으로 부활할런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의 그림들을 천천히 넘겨보면, 삶이 무엇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인지, 오필리아의 목소리만큼 작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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