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 숟가락 하나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현기영 지음 / 실천문학사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20여년쯤 후면 돌아가고픈 곳은 어디일까? 유년의 기억이 묻어있는 곳은 아파트가 들어서 완전히 몰라보게 되었고 무주구천동 계곡물 못지않게 하얀 물거품을 뱉으며 쏟아져내리던 그 물도 이젠 다 메말라버렸다. 열두살 때 두 동생과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의 배경은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별로 자상하지 못했던 아빠가 우리 삼남매를 데리고 소풍을 가서 징검다리도 손잡아 건네주시고 옹기종이 사진도 함께 찍었던 유일한 기억의 장소이다. 그 사진 한 장만으로도, 이제는 고희를 넘기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늘 가슴 한 구석이 무겁다. 아버지는 내 '존재의 씨앗'이며, 잠깐의 단란했던 그 시간만으로도 아버지의 다른 부정적인 부분이 거의 묻혀버린다. 이 책의 주인공 똥깅이처럼 나는, '아버지'로 시작하여 '귀향연습'으로 끝맺는 이 책을 읽으며 줄곧 아버지를 생각했다

<변방에 우짖는 새>로 이름을 들었던 현기영 작가를 책으로 처음 만났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신의 유년과 사춘기 적 기억을 더듬어 쓴 자전적 소설이다. 독자에게 찻잔을 앞에 두고 들려주듯한 어투와 양해를 구하고 샛길로 잠시 갔다가 양해를 구하고 돌아오는 이야기 방식도, 그저 개인의 역사를 마주하고 듣는 것 같다. 해 묵은 기억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미화되기도, 과장되기도 축소되기도 하며, 예를 들어 일상의 대화까지 소상히 건져올릴 수는 없을 정도로 모호한 안개와도 같은 것일 게다. 그런 면에서 안개가 구체적인 활자로 탄생하려면 작가의 소설적 기법이 활용되어야 될 것이다.

이 소설은 현재에서 과거,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시간적 구성을 하고 있다. 세상과 불화한 아버지의 육신을 손수 만지며 이제는 자신에게 돌아올 죽음이라는 손님을 차분히 맞으려는 황혼의 영혼이 작가이자 주인공이다. 정신적으로 늘 가까이 있지 못한 아버지의 존재가 이제 빈껍데기만으로 남아, 그러나 자신의 영혼에 벗어버릴 수 없는 생의 그림자로 따라 붙은 채,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한다. 그 길은 밥먹듯이 찾아온 배고픔과 역사적 폭력이 짓누르고 치유될 수 없을 지도 모를 상처를 남기고 간 흔적이다. 제주의 고통스런 과거와 그때마다 굴하지 않고 버티는 민초들, 제주의 비상한 신화와 신비로운 자연의 풍광이 펼쳐진다. 내가 용두암을 가 본지 14년이 되었다. 그곳에서 발가벗고 놀았던 유년의 아이들 모습, 처음으로 여체를 보고 흥분했던 사춘기의 기억이, 시커멓고 구멍이 숭숭 난 현무암처럼 생생하다.

작가는 자신을 성장시킨 것들에 감사하며 그런 것들을 하나씩 되짚어 자신에게 묻고 있다. 아픈 역사에 대한 책임을, 변해버린 자연의 모습과 친구의 모습을, 문학과 독서의 영향, 그리고 변화무쌍한 성장의 길에서도 변하지 않고 내부에 존재하는 '인간 성장의 방정식'에 있는 '항수(恒數)'에 대해서 말이다. 이것을 작가는 '생성 최초의 것, 그 무엇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본질적인 것'이라 했다.

뜨거운 불씨같기도 하고 안온한 모태같기도 한, 나를 내보낸 품으로 돌아가려는 주인공이 제주도로 명명한 '자연'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고향이다. 결코 만만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작가는 성장소설 -그래서 중학생 때까지로 기억은 멈추어있다- 을 통해 유독 심했던 열병과 격정으로 아버지를 상처입게 한 것을 슬퍼하고 있다. 불안정한 생의 고개를 넘어 담담하게 귀향을(혹은 죽음을) 연습하는 주인공의 흰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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