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로 유명세를 먼저 얻은 이 작품을 완역본으로 만나게 되어 우선 기뻤다. 아름다운 디바와 추남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뮤지컬에서는 다 표현해내지 못했을 문학적 장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더 기쁜 일이었다. 그런 장치들이, 흩어져 있는 조각퍼즐들을 맞추듯 끼워질 때, 작가의 치밀한 구성에 탄식이 흘러 나왔다. 나레이터는 사건 수첩을 뒤에서 앞으로 뒤적이며, 조각이불을 꿰메어 나가듯, 차근차근 사건의 형체를 독자에게 드러내주고 있다. 그렇게 책장을 넘겨가다, 미녀와 야수의 슬픈 사랑에 눈물 짖고 있기에는 석연치 않은, 명징한 일련의 상징들이 내 의식에 던지는 파문은 예상 밖이었다. 작가의 치밀한 구성만큼이나 그러한 상징과 심상들은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리며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을, 아니 거대한 우주의 원리를 그리고 있었다.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된 프랑스의 오페라 극장은 온갖 인간 군상들이 폼나게 차려입고 드나드는 곳이다. 그곳의 화려한 무대 위에서는 인간들이 펼치는 희로애락의 드라마가 공연된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것이 드라마의 전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있다. 무대 아래의 드넓은 공간은 기괴한 공기가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심연의 호수와도 같다.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꿈틀대게 하는 마력의 공간이다. 저 찬란한 기품을 뽐내고 서 있는 지상의 오페라 극장은 무대 아래의 음산한 지하 세계까지를 포함하는 공간이다.

크리스틴 다에는 무대 위의 세계를 상징하는 대표 인물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선하고 생명에 찬 인물이다. 반면 에릭은 무대 아래 지하 세계의 주인공으로, 추악한 모습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지하의 존재는 지상의 존재에게 끊임없이 접근을 시도하며 사랑받기 위해 몸부림친다. 이런 집착은 지하 존재만의 일방적인 광기가 아니다. 지상의 존재, 크리스틴은 어릴 적 아버지에게서 들은 '음악의 천사'를 만나기 위해 무의식의 황홀경을 갈망하고 있다. 크리스틴이 인간의 의식세계를 대변하고 있다면, 에릭은 인간의 무의식을 대변하고 있다. 그는 가공할 잠재력과 파괴력의 소유자로, 시시때때로 인간의 연약한 의식을 뒤흔들어 놓는다.

에릭은 '음악의 천사'답게 천상의 목소리로 크리스틴을 사로잡아 천상의 경험을 하게 한다. 그녀는 에릭의 음악 또는 목소리를 통해 진정한 오르가즘을 경험하며 하나됨을 느낀다. 크리스틴과 에릭의 대화는 겉돌고 냉소적이지만, 이들 사이에 음악 - 목소리이든, 바이얼린이든 - 이 놓이면, 그 순간은 외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침범하지 못하는 그들만의 성역이다. 영혼이 고양되며, 자아가 온전히 합일되는 최고의 경지와도 같다.

에릭이 원하는 단 한가지는 자신이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것이다. 다가가려고 하면 가면부터 던져주었다는 어머니. 태초부터 거부당하는 운명을 지닌 에릭을 감싸안아야 할 자가 있다면, 다름아닌 크리스틴이었다. 크리스틴이 에릭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때, 비로소 에릭은 자신과 세상에 대한 증오를 내던지게 된다. 크리스틴의 이런 태도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임기응변이 아니라, 에릭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이해로 빚어진 진실함의 표현이다. 크리스틴이 에릭의 눈을 정면으로 보며 애정과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 에릭은 그 눈물을 더 흠뻑 받아들이려고 가면을 벗고, 두 사람의 눈물은 서로 섞여 하나가 된다.

마침내 크리스틴은 자신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를 인정하고, '또 다른 자신'과 진정 하나가 된 것이다. 이는 삶과 죽음의 합일이며, 빛과 어둠의 하나됨이다. 모든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무는 화합의 순간이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세계, 그 어마어마한 잠재력의 세계에서 도망갈 궁리는 그만둠이 어떠할지! 차라리 그것을 직시하고, 초월하여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 왜곡되지 않은 자기애야말로 참된 의미의 성숙한 인간 - 나아가 조화로운 우주 - 을 만드는 주춧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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