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에서
진 크레이그 헤드 조지 지음, 김원구 옮김 / 비룡소 / 1995년 4월
평점 :
절판


내 어릴 적, 꿈을 꾸면 그림자처럼 따라오곤 하던 풍광들을 떠올린다. 이름 모를 광활한 대지 혹은 숲, 눈아래로 도도히 삼킬 듯 흐르는 물살을 내려다보며 두 팔을 힘껏 날개짓하였다. 내 몸이 야생매의 그것처럼 부드러운 듯 힘찬 획을 그으며 비상하면, 온세상이 내 세상이다. 내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이란 없다. 바람도 물살도 날개짓까지도.

<나의 산에서>는 지금 두 아이가 되어서도 한번씩 꾸는 '벗어나기'의 꿈을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식으로 대신 꾸어준다. '샘 그리블리'라는 지혜롭고 용감한 소년을 통해, 꾸는 것으로만 머물러 있는 대부분 사람들의 꿈을 현실적으로 실현시켜주는 셈이다.

아이에게 '집'이란 자신을 보호해주는 안락한 공간이자, 의식과 문화를 책임지고 - 아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 길들이는 공간이기도 하다. '집'이라는 다소 폐쇄적이며 일방적인 공간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싶어질 때, 아이는 진정한 성장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려움! 일탈에 대한 두려움이 벗어나고 싶다는 꿈보다 나를 더 강하게 옥죄이고 있었던 것 같다. 진정한 의미의 성장은 그렇게 더디게 다가오고, 아직도 미성숙한 인간성을 어쩔 수 없어 잠못 이루기도 한다.

<나의 산에서>는 한편의 영화처럼, 바람의 생생함과 날짐승의 피같은 비릿함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살아서 두 눈을 부릅뜨고 발톱을 세우는 온갖 동물과 있는대로 감정을 드러내는 날씨까지도, 샘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겨내는 자신과의 싸움에 백기를 들게 할 수 없다.

성장을 위한 자신과의 싸움은 타인과의 의미있는 관계를 필요로 한다. 도시에서 숲으로 달아난 샘은 자신이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집으로 다시 이끌려갈까봐 사람을 피한다. 그러다 한 사람씩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의미있는 타인'을 만나게 된다. 집으로 대변되는 부모의 품을 벗어나 맺게되는 수많은 타인과의 인연을 소중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나를 아는 사람 하나없는 낯선 곳에서 아무런 선입견없는 관계를 독립적으로 맺어보고 싶다는 것도 단지 꿈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은가.

샘의 짧지 않은 숲의 생활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영원히? 집을 나가겠다고 할 때 선선히 고개를 끄득여주었던 것처럼, 샘의 부모님은 당신들의 아들을 다시 품어줄 때도 선선하다. 아무 거리낌도 책망도 없이, 샘의 집나무 옆에 집을 짓는다. 열한 명의 식구가 살 집이다. 이제는 몸과 마음이 조화롭게 성숙해가는 아들과 함께 '땅에 뿌리를 내린다'. 땅을 사랑하는 피는 모계 쪽에서 온 것이었다. '네 어머니는 너에게 좋은 집을 주겠다고 하셨다. 어머니 관점에서는, 좋은 집이란 지붕과 문이 있는 거야.'

'돌아오기'... 작가는 내리기 쉬운 결론을 빗겨가, 감동적인 라스트신을 연출한다. '벗어나기'의 경험을 배부르게 한 후의 '돌아오기'란 갖가지 영양소로 건강하게 자라야 할 아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사람이면 평생을 되풀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모든 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거기에 있는지 알고 있단다.'
'아버지!'
샘은 자신을 찾아 숲으로 온 아버지의 부름에 답한다. 이제는 '산 열매만 따 먹고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자신이 붙었는데도.

마음 속에 영원히 살 '샘 그리블리'... 집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고 싶을 때면 샘을 따라가 숲의 집나무에서 살고 싶어질 것이다. 나의 손발을 묶어두는 두려움을 훌훌 벗어버리고 사슴가죽 옷을 입고 모카신을 신고 버들피리를 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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