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 되는 동화 독이 되는 동화
심혜련 지음 / 이프(if)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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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난 외할아버지께만은 퉁명스럽고 사나운 아이였다. 다섯살 아래의 남동생을 끔찍히 생각하셨던 당신은, 그런 티나는 편애를 못마땅해하는 외손녀에게 늘 눈에 가시였다. 따지기 좋아하고 그냥 못 넘어가는 어린 외손녀에게 따뜻한 말한마디 건네기도 어렵고 버거우셨을 것이다.

결혼을 하고 다른 성씨의 맏며느리이자 두 딸아이들의 엄마의 자리로 살고 있는 나. 보석같은 딸들에게 심어줄 수 있는 건 과연 어떤 것이 있나? 살기 흉흉한 이 세상에 그래도 가슴 속 굳건히 품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어떤 것. 살아가면서 가슴 한 구석 답답한 덩어리같은 것이 있었다. 큰소리로 내뱉고 싶은데 그러기도 어려운 무엇이 있었다. 확 벗어버리고 싶은데 이미 내 온몸을 옥죄고 꼼짝 못하게하는 무엇이 있었다.

보이지 않게 폭력을 휘두르는 그 정체를 이 책에서는 신랄하게 꼬집고 규명한다. 작자는 현장에서 다년간 독서지도를 해오면서, 아이들의 글과 토론등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그물이 깨끗하고 투명한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물들여 가는지를 극명하게 증거한다. 그것은, 남녀로 편을 갈라 시나브로 물드는 과정을 어른도 아이도 별다른 인식없이 행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제목에서는 동화라고 축약되어 있지만, 작자는 다양한 쟝르의 이야기 구조와 인물의 관계를 찾아나서며 얼마만큼의 약과 독이 공존하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줄곧 놓치지 않고 있는 시선은 페미니즘이다. 차별이 없는 세상, 양성평등의 세상은 요원한 꿈인가? 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왜곡된 의식이, 소위 권장도서들에 알게 모르게 독으로 녹아있어, '편견과 차별없이 세상을 바라보며 성장해야할 아이들 의식의 빈터를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것'이다. 여자다움, 남자다움의 허상을 붙들고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이 시대의 자화상을 우리 아이들에게 아닌 척 강요하고 있는 꼴이다.

'여와 남, 남과 여. 둘은 서로에게 없는 것을 공평하게 나눠 가지면서 부족함을 메워가'는 '어떤 틀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스럽고 편안한 관계'이어야 한다. 동화 속 요켈과 율라처럼, 그렇게 '친구가 되는 것'이다. 어릴 적 아무 스스럼없이 남자친구가 엄마가 되고 내가 아빠가 되어 하던 소꿉놀이를 떠올려보자. 그런 역할이 이상하달 수 있나? '우리가 희망의 씨앗을 건네주기만 한다면, 아이들은 그것을 받아 싹을 틔우고 소담스러운 꽃으로 가꿀 수 있'다고 '아이들에겐 분명 그런 힘이 있'다고, 작자는 어른들이 쓰는 한편의 동화가 가지는 힘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현 초등교과서의 독성분을 끄집어내놓은 점도 인상적이었다. 1학년 큰아이가 한번씩 내뱉는 말을, 난 가슴 속에서는 화들짝 놀라며, 그런게 아니라며 단호하게 고쳐줄 때가 있다. '여자니까......' 난 분명 그런 말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디서 그런 걸 익혔을까? 내 의식에 자리하는 것들이 벌써 전염되었나? 당당하게 할 말하고, 무엇보다 자기자신을 아낄 줄 아는 마음을 버리지 말고, 드넓은 세상으로 비상의 날개를 펼치는 데 있어 주저하지 말기를. 내 삶의 주인공으로, 세상의 주인공으로 나란히 손잡고 살아가기를, 친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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