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iting for Godot

(En Attendant God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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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 유재명(블라디미르) 김우석(에스트라공) 백길성(뽀조)
         박훈영(럭키) 김초록(소년)

부두연극단 20주년 앵콜 레파토리No.3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
-En Attendant Godot

부두연극단 20년 앵콜레파토리 No.3로 공연되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에쿠우스’ ‘19그리고80’에 이어 부두연극단 20년 공연 역사 중 가장 많은 관심과 호응을 받았던 작품으로서 연출가 이성규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연출가 이성규는 고도를 기다리며 외에도 노름의 끝장(대학시절) 마지막데이트(3번) 대사없는 일막(2번)등 베케트 극을 여러 번 연출해 왔으며 한때 베케트의 전 작품을 공연할 계획을 세웠던 베케트 전문 연출가이기도 하다.

이번에 공연되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1978년, 1995년에 이어 연출가 이성규의 세 번째 “고도” 공연이 되는 셈이며, 그동안 다른 연출가들에 의해 왜곡된 해석과 표현으로 실추된 “고도”의 문학성과 연극성을 다시 복원 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연습해 왔다. 현대 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 작품의 원작을 거의 손상 하지 않으며 베케트의 공연의도를 충실히 반영하면서도 지금, 여기 이곳의 관객들의 감각에 맞도록 광대극적 요소를 최대한 살려 삶이면서도, 연극인 이 작품의 숨은 의도를 한 껏 드러낼 예정이다.

또한 1969년 노벨 문학상을 받고 1986년 타게한 사뮤엘. 베케트를 추모하고 그의 탄생 100주년(2007년)을 기념하기 위한 공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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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마지막 토요일 저녁,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다섯 시 일 분 전에 나는 소극장 문을 들어섰다. 액터스 소극장은 내게 두 번째 인연이다. 이미 뮤클 회원들이 자리를 거의 다 차지하고 앉아있고 나는 안내자가 가리키는 자리에 혼자 앉았다. 옆에 앉은, 모자 쓴 아저씨가 힐끗거리고 내내 어깨를 부딪혀와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다리를 꼬았다 풀었다 하며 1막 그리고 5분의 막간, 다시 2막의 긴 시간을 앉아있었다. 기댈 수 있는 의자가 아니라 나중엔 허리가 좀 아팠지만 좋은 연극에 이런저런 생각도 들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옆에 앉은 아가씨는 휴대폰을 끄지도 않고 문자메시지를 몇 번인가 날리고 있는 바람에 그것도 종내 못마땅했다.

대학생 때 학과축제 때인가 이 연극을 처음 보았다. 그리곤 이번이 두 번째다.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은 한 그루의 앙상한 나무와 작은 바위가 있는 허전한 무대 위에서 의미없는(?) 대화를 나누고 온갖 유희를 즐기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을 견디기 위한 동작일 뿐이다. 그들은 지금 기다리고 있다, 고도라는 어떤 존재를.

고도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는 그들도 우리도 확신하지 못한다. 블라드미르는 조금 더 현명하여 '구원'이라는 낱말을 내뱉지만 그가 말하는 '구원'의 진정한 의미는 어디에 닿아있는 것일까. 그는 철없어 보이는 에스트라공을 안아주고 보살피며 설득한다. 반면 에스트라공은 한없이 기대고 바라며 어리광을 부린다. 티격태격 하다가도 결국 그들은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서로 원한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어제의 그들이 오늘의 그들을 필요로 한다. 마치 우연인 것처럼 같은 장소에서 만나고 또 헤어지지만 그들이 다시 만난 그곳이 어제의 그곳이라는 보장은 없다.

고도가 보낸 소년은 늘 되뇌인다. 고도는 오늘 오지 못하고 내일은 꼭 올 것이라고. 고도의 말을 전하는 그 소년은 어제 만난 블라드미르를 알아보지 못하고 똑같은 말만 녹음기처럼 할 뿐이다. 피상적인 만남과 불가능한 소통, 의미없이 뇌까리는 수다들, 그런 것보다 더 깊은 존재의 허무는 '무덤을 딛고 태어난 생명이 자라기도 전에 무덤 저 아래에선 땅을 파는 곡괭이 소리가 들려온다'는 사실이다. 블라드미르와 럭키의 대사처럼 생은 오지도 않을 그 무엇을 기다리며 시간을 견뎌야 하는, 형벌과도 같은 부조리함을 떠안고 사는 것이다.

시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연극은 말한다. 밤은 늘 오겠지만, 밤이 가면 아침이 오고 금세 다시 밤이 온다. 어제와 오늘, 내일 그리고 한 시간 전과 한 시간 후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역설한다. 어제 난폭한 뽀조는 오늘 장님이 되어 도움을 청하는 입장이 되어 나타나고 어제 세상의 종말을 예견하듯 열변을 토하던(생각이란 걸 하게되면) 럭키가 오늘 벙어리가 되어 나타난다. 어제의 블라드미르를 고도가 보냈다는 소년은 오늘 알아보지 못하고 처음 본 사람인 것처럼 말한다. 만남과 소통의 불가함은 존재 자체의 허무와 부조리 못지 않은 현대인의 비극이다. 무의식에 갖고 있는 죄의식도 마찬가지의 비극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통이 진짜 불가한 걸까. 블라드미르는 내일 자기를 만나면 처음 본다고 하지말고 지금 잘 봐두라고, 소년에게 말한다. 그를 돌려보내며 블라드미르는 다시 조금의 두려움을 갖지만 그래도 그렇게 믿어보는 것이다.

연극은 비극적인 주제를 희극적으로 푼다. 슬랩스틱 코미디를 구사하며 말장난과 조롱으로 간간이 무대를 웃음바다로 만든다. 그들이 앙상한 나무 옆에 서서 고도를 기다리며 먼 시선을 보내는 장면은 내내 그리움의 병을 앓고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들은 서로 원하고 필요로 한다. 외로움과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 곁에 누가 있기를 바란다. 서로 돌보고 보살피고 필요로 하는 손길을 내어주려고 한다. 물론 블라드미르의 마음의 폭이 에스트라공의 그것보다 넓다.

오래 전 환청을 경험한 일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기다림! 그것이 절실하면 기다림의 대상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연극은 구원의 '신'을 기다리는 것으로 인간 존재의 허무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일상의 기다림이란 그리 거창한 것이기보다 체온을 나눌 수 있고 서로 바라볼 수 있는 대상에 닿아있다.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이 환청과 환영을 경험하듯 기다림의 대상은 결국 절절한 사랑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스트라공의 다 떨어진 구두와 구멍난 양말이나 '구두는 하루에 한 번 꼭 벗어야한다'는 블라디미르의 충고와는 달리, 저 혼자 섰는 앙상한 나무와도 달리, 우리는 홀로서기에는 너무 무기력하고 권태로운 의식에 잠식해 있지나 않은지. 럭키는 세상의 해악과 종말론을 역설하면서도 짐가방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많은 짐을 떠안고 서서 고통의 신음을 내뱉는다. 짐가방을 내려놓듯 기다림이라는 형벌의 시간을 잊기 위해 우리는 예술창작 활동에 매달리고,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싸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곤 다시 기다리는 것이다. 바로 곁에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고도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우리는 늘 먼 곳만 바라보며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디디가 고고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는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기다림은 그리움의 또 다른 언어, 바보같은 환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환상마저 불가하다면 어떻게 살아갈지... 기다림은 살아있음의 증거다.

 

 

2008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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