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울프
닐 게이먼.케이틀린 R. 키어넌 지음, 김양희 옮김 / 아고라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닐 게이먼 원작의 영화 ‘스타더스트’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이 책은 ‘베오울프’를 영화화 하려고 닐 게이먼이 시나리오를 썼고 다시 케이틀린 키어넌이라는 여류작가가 판타지소설로 쓴 작품이다. 영화는 보지 않았다. 상상력을 한계 지을 우려가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읽고 보니 내 생각이 맞았을 가능성이 크지 싶다.

 

 

 빠르게 전개되는 사건을 따라 때론 은유적으로, 불처럼 명확하게 그려지는 장면들, 수사적인 풍경의 묘사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문장의 아름다움도 즐길만 하다. 도도히 흐르는 검은 강물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검은 숲을 관통하는 것 같기도 한, 끔찍하고도 웅장한 상상의 연대기다.

 

 5-6세기 북유럽 신화이자 영문학의 고전 ‘베오울프’는 읽어보지 않았다. 이 한 편의 판타지소설로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단지 이 소설만으로 재해석되었을 부분들을 음미하는 맛도 괜찮다. 베오울프 라는 영웅이 한 인간으로서 겪는 고민과 갈등 그리고 인간적으로 사라져가는 죽음의 시간을 맞이하는 장면들이 웅대한 서사와 함께 감동적이다. 선과 악의 절대적인 구도를 축으로 하는 판타지 소설의 맥을 이으면서도 선과 악이 절대적으로 양분되지는 않는 섬세함을 보인다. 감추거나 드러내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 않는 상황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빚어지는 새 세상의 탄생은 인간의 부활을 너머 예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도 같다. 이 책 ‘베오울프’는 다분히 이교도적이며 동시에 기독교적이고, 또한 인간적이다.


 초반에 영웅 베오울프는 기도가 아니라 영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기도도 해롭지 않다고 고집을 부리는 운페르드에게 그는 '해롭지 않은 건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못 박는다. 오딘이나 로마인들의 예수 그리스도는 죄없는 백성들이 괴물에게 잡혀갈 때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분노한다. 베오울프는 오딘도 새로운 신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영웅심만 믿는 ‘인간’이다. 자신을 찬미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노래되어진 영웅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건 3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인간, 베오울프는 아름다운 마력을 지닌 물의 여인(이 책에서는 비중있는 역할을 하는 등장인물이다)과 결탁한다.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그녀와 합일하여 ‘용’을 잉태하게 한다. 흐로드가르 왕이 그렌델을 낳았듯이 인간의 죄악은 거듭된다. 용은 베오울프 자신이 만든 거대한 욕망이고 분신이다. 지독한 악마, 그렌델을 물리치고 더욱 악마적인 용을 태어나게 한 그는 30년 동안 누린 영예와 부와 명성이 자신의 영혼을 매춘한 대가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 사이에, 이교도의 하나였던 기독교는 오딘의 제단을 잠식하고 드디어 새로운 세상, 라그나뢰크(신들의 운명, 우주 대부분을 파괴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다)가 선포되었다. 베오울프가 왕비에게 하는 말은 공허하게 들릴 정도로 그의 실재적인 힘이 상실되어 있다.

“...... 그가 이미 내 왕국의 절반 이상을 죄와 구원과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 따위 말로 충분히 속였다고 생각하오. 안 되오. 나는 내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들의 신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오. 만약 이 삶 다음에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오딘의 궁전에 있는 내 자리를 명예롭고 만족스럽게 차지할 것이오.......” (p320)

 그러나 베오울프는 물러나야할 때를 안다. 흐로드가르 왕이 그랬듯이 그가 ‘사랑했거나 증오했던 모든 것들’을 등 뒤에 두고 떠난다. ‘왠지 모르게 사악하고 이상한 느낌’을 주었던 금관의 느낌은 이제 위글라프에게 전해진다.

 놀랍게도 위글라프는 더 이상 마녀라 불리는 물의 여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지금까지 불린 최고의 영웅들의 노래로 불릴 수 있다는 말에도 현혹되지 않는다. 진정 위글라프는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대가와 공정한 선물에 이성적일 수 있는 사람이다. 기독교적으로 지향되는 인간으로 보인다. 이것은 베오울프의 장례식 장면의 묘사와 함께 의미심장하다.

- 위글라프는 빨간 겉옷을 입고 왕비 옆에 숨어 있는 비쩍 마른 기독교 신부를 보았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규율을 지키는 그 아일랜드인은 이 행사에서 공식적인 역할을 맡지 못했다. 베오울프의 장례식은 이 이상한 새 종교가 우위를 점하면서 점점 이 땅에서 사라져자고 있는 옛 방식대로 명예롭게 치러질 터였다. 이 방식이 베오울프의 방식이었고 위글라프 왕의 방식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p380)

또 한 번 놀라운 반전이 끝 부분에 기다린다. 운명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인간. 세계 운명의 실을 잣고 있는 세 자매들은 물의 여인을 비롯한 모든 불멸의 존재들이 끈질긴 인내심으로 기다리는, 인간의 다음 운명을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위글라프의 응대에 미소를 지으며 “그럴지도”라고 말한 물의 여인은 사멸하는 존재인 인간의 속성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사멸함으로 욕망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간성을!  기나긴 시간을 지나온 물의 여인 같은 불멸의 존재들은 '기다리는 놀이‘에 능숙할 수밖에.

 이것은 다시 ‘시간’과 ‘기독교’에 대한 통찰과 비판으로 이어진다.

 ‘시간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산맥까지도 깎아내리는 것처럼, 시간 속에 갇혀 있는 인간들도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켜야 하는 법이다.’(p256) 

 일찌기 젊은 베오울프는 해변의 전투로 소란이 잠잠해진 후, 혹한의 바람을 맞으며 오히려 자신이 청결한 느낌이 받는데 여기서 그의 각성은 날카롭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오딘과 그의 형제들을 떠나, 살해된 로마인의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 없는 아버지를 섬기게 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이 택한 선택과 결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다시 자유롭고 순결하고 깨끗해질 수 있다는 약속에 끌렸겠지.(p257)' 라고 한숨 쉰다.

 종교의 순결한 기능을 우리는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 종교 자체가 하나의 감옥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시간 속에 갇혀있는 우리들도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위그드라실(세계수, 우주의 중심에 서 있는 거대한 물푸레나무로서 아홉 세계를 연결함) 아래서 바쁘게 베를 짜고 그 뿌리를 돌보는 우르드, 베르단디, 스쿨드의 손만 믿어서는 될까. 그들이 자아내는 하나하나 경이로운 실들을 보는 것과 더불어 우리가 자아내야하는 것들을 살피는, 좀더 적극적인 세계관을 권장하는 것으로 읽힌다. 결국 그것도 인간의 또 다른 욕망이 빚어내는 것일 테지만.

(덧; 책의 뒷편에 '용어해설'을 실어두어 낯선 이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부리님, 이 리뷰를 보시려나 모르겠지만^^

한 가지 알게 된 게 있어요. Buri부리는 북유럽 신화의 최초의 신이에요. 부르의 아버지이며 오딘의 할아버지더군요. 부리님 몰라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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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3 23: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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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4 2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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