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찬실 아줌마의 가구 찾기 ㅣ 돌개바람 9
박미라 지음, 김중석 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이찬실 - 아줌마 - 가구 - 찾기
네 개의 단어가 낱자로 눈에 든다. 어린이가 읽는 동화지만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이들은 별로 관심 두지 않는 '가구'는 목적어격이다. ‘찾기’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활동이다. 숨은그림찾기, 보물찾기, 또 뭐가 있더라..
이찬실,이라고 하니까 찬찬하고 진실한 사람일 거란 느낌이 든다. 수수하다못해 조금은 촌스러울 것 같은 이름이다. 뜬금없이 초등학교 때 ‘진실’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생각난다. 하기야 탤런트 이름에도 동명이 있다. 노란색의 밝은 책표지에는 아줌마가 청소기를 손에 들고 다른 손엔 걸레를 쥐고 서 있다. 북술북술한 퍼머머리에 조금 뚱뚱해 뵈는 몸, 앞치마를 걸치고 팔을 걷어부치고 서 있는 모습이 사람들이 썩 호감을 느끼지 못할 인상이다. 어디서 많이 본 생김새 같다 싶어 그린이 이름을 확인하니, <나는 백치다>의 삽화를 그린 김중석님이다. 이 책에서는 수채물감을 연하게 풀어 붓을 쓰윽쓰윽 그은 듯 자연스럽고 편한 삽화가 술술 읽히는 이야기와 잘 어울린다.
이찬실 아줌마가 가장 아끼던 가구는 장롱이었다. 나는 오래 전 결혼을 하면서 처음 장만했던 장롱이 생각났다. 아줌마의 장롱은 십장생이 양각으로 새겨진 오래된 장롱인데 나의 그것은 십장생은 아니지만 양각의 무늬를 따라 사이사이 먼지를 닦아 줘야했던, 그저그런 디자인의 둔탁한 갈색 덩치였다. 만 11년을 함께 한 그 장롱을 4년 전 이사를 하며 폐기했다. 어렵사리 신혼살림을 시작하여 적지 않은 세월을 함께 살아왔다. 그런 것들이 마치 가족인 양 쉽게 버리기가 내키지 않았다. 전혀 생각이 없을 무생물에도 애정을 품게 되는 게 사람인가 보다.
살아오면서 누구도 알지 못할 뼈아픈 이야기와 알콩달콩한 사소한 이야기, 가족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 가구다. 정든 가구는 쉽게 버리지 못할, 식구 같은 것이다. 가구는 그 집의 분위기를 결정하고, 집주인의 취향과 살아가는 결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구는 눈 뜨면 늘 봐야하고 고정된 채 붙박여있는 물건이지만 손때가 묻고 먼지가 앉은 그것들이 하나하나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여 추억을 공유하는 어떤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찬실 아줌마는 가구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그 이유는 구구절절하다. 그걸 다시 찾는 과정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계맺기에 성공한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덤으로 얻었다. 그녀의낡고 빛바랜 기억이 선명해짐을 느끼게 되는 건 더께 같이 앉은 먼지를 털어내듯 오래된 가구를 모조리 내다 버린 후부터다. 하지만 가구를 버리고 아줌마가 기대했던, 전혀 다른 삶을 얻지 못한다. 더 좋은 집에서 새로운 가구와 조화로운 이탈리아 풍의 테이블램프보다 이전에 자신의 머리맡을 지켜주던 퇴색된 꽃무늬 갓을 쓰고 있는 작은 램프가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자 마치 '거위털 이불이 몸에 착 감기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는 이상한 느낌을 갖는다. 그건 뭐랄까. 자기 것이 아닌,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는 것 같은, 소외감, 고립감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 아주 어릴 적의 아련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그녀의 기억 속에 살아난다. 그것들을 내다버리려 했다니. 그것들은 아줌마를 살게하고 만들어준 소소한 이야기들인데. “이게 다 그놈의 가구 때문이야.”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그녀의 마음과 삶을 단정한다. 내성적이라 다른사람에게 먼저 말도 잘 못 걸고 바깥출입도 잘 안 하는 생활은 남들에게 '거만함'으로 보이고, 가구를 죄다 내다 버리고 인사도 없이 이사를 가버린 행동은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된다. “좋은 집으로 이사 간 사람이 여긴 왜 왔어?" 야채가게 아줌마의 이 말이 뾰족하다. 수수한 이찬실아줌마는 이런 말에도 날을 세우지 않는다.
그래도 결말은 안심이 되는 쪽으로 흐른다. 이찬실 아줌마가 세상의 사람들과 하나씩 관계를 맺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가구를 찾아다니며 세상의 바람을 코로 마시고 세상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기에 얻은 것이다. 동네 아이들, 야채가게 아줌마, 유모차 할아버지 그리고 화가선생님. 그녀는 이제 눈 뜨면 하릴없어 무료한 아줌마가 아니라 바지런히 할 일들을 목록으로 적어가며 하루를 바쁘게 사는 아줌마가 되었다. 작은 목소리로 나누는 사람들과의 대화도 창밖에서 수채물감으로 번져오는 바람의 색깔처럼 예전과 달리 느껴진다.
그래서 가구는 다 어떻게 되었냐고? 그녀에게 가구는 이제 그냥 ‘가구’일 뿐이다. 가구야 뭐, 유모차 할아버지 집에 가면 미운정고운정 든 친구를 만나듯 그걸 쓰다듬을 수 있다. 이제는 다른 것에 더 몰두할 것이다. 그녀는 잘 하는 게 많다. 집안 청소하기, 할아버지와 이야기 나누기, 가구 반들반들하게 닦기 그리고 한 가지 더, 자신도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진짜 특기가 있다. ^^ 그녀는 자신이 잘 하는 것,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았고, 자신만의 ‘가구’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동시에 그것들과 오래 함께 할 것이다. 물론 그녀의 곁에는 평생을 동행할 좋은 사람도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재미있게 읽은 이야기다. 하지만 저학년동화로 나온 것인데 저학년 아이들은 그다지 흥미로워 할 주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발상은 아주 좋은데 아이들 또래의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은 점도 아이들의 호기심에서 살짝 비켜날 우려가 있다. 2~4학년 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