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으며 스산한 우리네 생을 잔잔하게 덮쳐오는 파도에 눈물을 섞어 날려보낸다. 다른 사람의 인생도 하물며 내가 살아온 인생도 다 알 수 없는 것. 추측이 아닌, 단지 이해하고자 타인의 생에 한발씩 다가가다보면 자신의 인생이 벌거벗은 채 달려온다. 윌리엄처럼 캐서린처럼 루시처럼, 그들의 생처럼, 나! 아파요! 그리고 우리는 비슷하게 위로받는다.
이 책만으로도 읽는 데 무리는 없지만 루시 바턴의 생을 좀더 자세히 읽으려고 2017년에 문학동네에서 나오자마자 사둔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이제야 펼친다. 예전에 “다시, 올리브”를 읽다가 흥미를 좀 잃어 스트라우트의 책을 멈추었던 까닭이다. “오, 윌리엄!”에서는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러니까 지금 하려는 말은… 같다는 거야” 이런 구절을 자주 달아 읽기에 난 좀 거슬리네. 루시 바턴이 화자로 나오는데 그 인물의 언어습관으로 그리 쓴건지 스트라우트의 문체로 그리 쓴건지는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다 읽어보면 알게 되겠지. 아마도 전자인 듯.

나는 내가 투명인간이라고 느낀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하지만 가장 깊은 수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설명하기가 아주 어렵다. 그리고 설명하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정으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내가 하려는 말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건 내가 자랄 때 우리집에는 욕실 세면대 위에 높이 걸려 있던 아주 작은 거울 말고는 거울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처럼 단순한 이야기일수 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아주 근본적인 수준에서 나를 투명인간으로 느낀다는 말 외에는. - P82

윌리엄이 말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당신의 공포에 대해 내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모르겠어. 당신의 공포에 대해 내가 뭘 해줄 수 있는지 알았던 적이 없어."
그래서 내가 말했다. "음, 문을 열 때 당신 먼저 몸을 들이미는게 아니라 나를 위해 문을 잡아주면 돼." 내가 덧붙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면 충분히 긴 바지를 입는 것도 괜찮겠지. 당신 카키 바지가 너무 짧아서 그걸 보면 겁나게 우울해지거든. 맙소사, 윌리엄, 당신 얼간이처럼 보인다고." - P144

나는 작문을 가르칠 때 그 일을 오래 했다―권위에 대해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글을 쓸 때 권위를 가지는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헬름 게르하르트의 사진을 봤을 때 나는 생각했다. 오, 권위가 느껴지는데. 나는 캐서린이 왜 그와 사랑에 빠졌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단지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의 외모가 풍기는 인상, 보이는 방식 때문이었다. 그는 명령에 따르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영혼까지 소유할 수는 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리고 문밖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천천히―이것을 깨달았다. 이 권위가 바로 내가 윌리엄을 사랑하게 된 이유임을 우리는 권위를 갈망한다. 진실로 그렇다.
누가 뭐라고 말하건 우리는 권위라는 감각을 갈망한다. 혹은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힘든 일‘ -나는 그걸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을 겪으면서도 윌리엄은 이 권위를 결코 잃지 않았다. - P168

오, 알아, 안다고. 책임이라는 거―심리치료사를 찾아갔었어. 혹시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할까봐 말하는 건데, 조앤과 같이 찾아간 그 심리치료사를 계속 만났어. 한동안 혼자 찾아갔고, 그 사람이 책임에 대해 말하더군.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봤어, 루시.
그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고, 알고 싶어 - 정말로 알고 싶어-사람이 뭐든 실제로 선택하는 건 언제인가? 당신이 말해봐."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사람이 뭔가를 실제로 선택하는건-기껏해야-아주 가끔이라고 생각해. 그런 경우가 아니면 우린 그저 뭔가를 쫓아갈 뿐이야 - 심지어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걸 따라가, 루시. - P194

나는 알고 싶다. 결코 알 수 없겠지만.
캐서린, 늘 자기만의 특유한 향기를 발산했던.

요점은 결코 자신을 떠나지 않는 문화적인 빈 지점이 있다는 말이고, 다만 그것은 하나의 작은 점이 아니라 거대하고 텅 빈 캔버스에서, 그게 삶을 아주 무서운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윌리엄은 그런 나를 세상으로 안내한 듯하다. 그러니까 내가 최대한 안내될 수 있는 만큼, 그가 내게 그걸 해주었다. 그리고 캐서린도.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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