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보부아르 ‘패밀리’ (1933-1939)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192124
아렌트의 ‘부족’이 있다면 보부아르의 ‘패밀리’
걷기와 여행, 등반을 즐긴 걸로 보이는 보부아르는 1930년대 말을 인생에서 가장 우울했던 시절로 회고한다. 전쟁은 다가오고 다자간 연애관계는 덫에 걸린 기분이 들게 했다. 올가 자매, 자크로랑 보스트, 비앙카 그리고 모두와 연관하여 관계를 나눈 사르트르까지, 사랑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성을 고민했다. 우연에 기반하여 시작하나 필연적인 그 관계는 “자아와 타자의 대립”을 주제로 철학적 사유를 하고 타자들의 의식이라는 문제를 전개하고 싶었던 열아홉 살 보부아르 자신을 소환해 끊임없이 혼란에 밀어넣는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 질문을 자신의 삶에 끌어들인다.
“올가가 멀찍이 서서 낯선 눈길로 나를 바라볼 때면 나는 우상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는 대상으로 변했다.” (186)
“ 타인의 경험은 자기 자신의 경험처럼 실재하는가?” (202)
1938년, 카페 드 플로르에 앉아 집중적으로 원고를 봐준 보부아르에 대한 헌사를 달고 세상에 나온 <구토>와 연이어 나온 단편 <벽>으로 문단의 기대감을 받은 사르트르. 그와는 달리 보부아르의 <정신이 우선시되는 때> 원고는 출판사로부터 몇 차례 반려되고 문제점을 지적받는다. 보부아르는 이에 굴하지 않고 10년 후 <제2의 성>을 쓴다.
생 제르맹 거리의 그 유명한 카페 드 플로르 2층에서 하루 8시간 집필에 몰두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보부아르가 조용히 집필할 수 있는 방은 말년에나 마련되었다고. 미스트랄 호텔과 카페에서 집필하고 토론하고 만남을 가진 보부아르. 조롱과 비난에도 의연히, 고심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젊고 모순적이고 지적으로 유능한…
“사랑은 영원한 갱신 속에서 부단히 창조되어야 하는 것”
- 1927년
1936년 여름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여행했다. 보부아르는 둘만 있게 되어 마음이 놓였다. 축하할 만한 소식도 있었다. 드디어 파리로 발령이 난 것이다! 보부아르는 휴가 이후 파리 몰리에르 고등학교로 옮겨 갔다. 하지만 9월에 파리로 돌아와보니 정치를 외면하기가 힘들어졌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에스파냐 내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친구 페르난도 제라시의 조국이어서 더 마음이 쓰였고, 에스파냐 여행 이후로 그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민전선 출신 총리 레옹 블룸(Leon Blum)이 에스파냐 내전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하자 보부아르는 분개했다. - P187
타자들의 의식이라는 문제가 계속 되돌아왔다. 하루는 신문에서 택시 요금을 낼 돈이 없어서 창피했던 나머지 택시 운전사를 살해한 남자의 사연을 읽었다. 어떻게 사람이 수치심 때문에 그렇게까지 흉악해질 수 있을까? 왜 사람들은 때로-자기 자신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정신에 나타나려는 것처럼 - 타인을 위해 사는가? - P190
"당신은 무너져 가는 세계를 묘사하는 걸로 만족하고 독자를 새로운 질서의 문턱에 내버려 둘 뿐, 그 질서의 장점이 어떤 것일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보부아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10년 후 그 ‘새로운 질서‘의 선언문<제2의 성》을 쓰게 될 터였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파리 문단의 찬사를 한몸에 받는 동안 보부아르는 점점 더 아버지의 앙심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책으로 나오지도 못할 글을 쓴다고 비웃었고 "버러지 같은 창녀"보다 더 나은 삶을 살 리 없다고 했다. 직장에서 받는 대접은 달랐다. 파리 16구에 위치한 몰리에르 여자고등학교의 제자들은 보부아르를 매우 인상 깊은 교사로 기억했다. 보부아르는 실크 블라우스와 화장으로 세련되게 맵시를 냈고 늘 수업을 노트도 없이 매끄럽게 진행했다. 학생들에게는 데카르트, 후설, 베르그송을 가르쳤다. 프로이트는 주로 반박을 하기 위해 다루었고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칸트를 선호했다. - P191
1939년 여름에 보부아르는 쥐라에서 등반을 하고 제네바를 방문했으며 프로방스에서 아주 먼 거리를 도보로 주파했다. 7월에 프랑스정부는 출산 장려 차원에서 피임약 판매를 금지하고 자녀를 키우는 전업주부에게 수당을 주는 ‘가족법‘을 통과시켰다. 1804년에 제정된 ‘나폴레옹법전‘은 남성에게 여성에 대한 권위를ㅡ 남편으로서나 아버지로서 - 부여했다. 보부아르는 1960년대까지도 통용되었던 이 민법의 해체를 주도한 여성 중 한 명이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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