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내가 좇은 것은 서양 근대 문명의 최첨단이었다.
‘생산적‘이고 ‘경제적‘인 일이었다. 애덤 스미스의 저녁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차려줬다는 카트린마르살의 일침에는 남성중심의 경제학에서 여성의 노동이 어떻게 지워지는지가 담겨있다. 살림을 여성의 몫으로 할당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몫은 무엇인가? ‘살림‘의 반대인 ‘죽임‘이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그리고 육식주의는 똑같은 죽임의 메커니즘으로 유지된다. 재고 나누고 옮기고 가두어 생명을 빼앗는다. 생산 과정을 세분화하여 인간을 반복적인 단순 노동을 하는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전락시킨바 바로 그 자본주의는 동물 역시 생명이 아닌 기계로 여긴다.
공장식 축산이란 공장식 노동의 확장판이다. - P34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은 살림으로 하나 된다. 모두 생존과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비거니즘은 우리의 밥상을 죽임이 아닌 살림의 먹거리로 채우는 것이 시작이다. 페미니즘은 남성중심 사회가 여성의 몫으로 할당하고 폄하했던 살림의 가치를 높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죽임의 문명에서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은 공통의 적을 갖는다. 자크 데리다는 그것을 ‘육식-남근-로고스중심주의carno-phal-logocentrism‘라고 부른다. 육식주의와 남성중심주의는 이성의 언어로 지어진 철옹성 위에서 함께 군림한다. 둘은 동시에 해체할 수밖에 없다. 나는 채식을 시작했을 때부터 나의 남성성을 의심받았다. 남자가 힘을 쓰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말에는 죽임이야말로 남성의 필연적인 역할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 P35

원래 인간은 홀로 내버려 두면 제멋대로 삐뚤빼뚤 자라나는 나무와 같다.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좇는 반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나무가 모여 숲이 되는 것과 같다. 나무는 각자 햇빛을 향해 자라기 때문에 모여있으면 위로 꼿꼿하게 큰다. 살기 위해 그러는 것이지만 결과는 아름답다. 인류를 아름답게 하는 문화 예술 역시 개인이 모여 살기 위해 스스로 반사회적 기질을 다스린 결과다. 첨예한 줄다리기의 산물이다. 권리를 완벽히 보장하는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과업은 인간을 모아 숲을 만드는 것만큼 어렵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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