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요? 그들은 이 세상에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뭔가 유익을 얻으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말하자면 무상으로 하는 걸 의미해요. 만약 인류가 이것을 잃어버린다면 가장 중요한 핵심을 놓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_164쪽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거울 속의 거울>은 원인과 결과로 성립된 인과=논리적인 연결 고리가 아닌 전혀 다른 관점에서, 소위 음악적인 관점에서 ‘그림‘을 차례차례 이어가는 콘셉트입니다.

새로운 시도네요. 어떤 생각으로 진행하신 건가요?

이 작품에서 각종 사상이 의미를 지닙니다. 예를 들면 부負의 드라마투르기도 그래요. 그리스 신전에서 중요한 부분은 기둥이 아니라 기둥 사이에 있는 (부의) 공간이라 해도 될 정도로 결국 보이지 않는 것, 즉 여백이야말로 사실은 가장 중요한 부분인거죠, 이는 노자의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노자는 이런 말을 남겼어요.

"찰흙으로 그릇을 만들지만 찰흙이 에워싸는 허무의 공간이야말로 그릇의 본질(유용성)이다."

또 "서른 개의 바퀴살이 바퀴통(중심)으로 모이지만, 바퀴살 간의 허무의 공간이야말로 바퀴의 본질(유용성)이다"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사이에 있는 (공허한) 공간을 본질로 봐도 좋다면, 문학에서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해왔습니다. 이야기하기는 사실 ‘말하지 않는 것’, 즉 ‘그림’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에 주목하게끔 하는 역할에만 충실하면 되는 겁니다. (106-107쪽) - P106

이쯤에서 다시 궁금해지는데요, 언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어딘가 깊은 신비의 세계에서 오는 걸까요?

언어는 정신세계의 어딘가 깊은 데서 나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도 그런 식으로 설파하죠. 즉,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많은 단계들 중에서 맨 마지막, 소위 가장 아래에 있으며, 어떤 에너지 혹은 언어로 표현되는 가장 밀도 높은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말하자면 가장 밀도가 높은 형태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카발라로 치면 아홉 단계가 더 있어요. 이 아홉 세계는 제각기 다릅니다. 이 정도로 밀도가 높지는 않고, 좀더 투과성이 있죠.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눈에 보이는 창조는 신의 길 끝에 있다고. - P241

그렇습니다. 죽음은 삶에서 내가 내 신체에 행하는 파괴 행위의 총합이에요. 그러나 이 파괴 행위는 애초에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전제조건이기도 하죠. 우리는, 우리 의식은, 사실 문자 그대로 말하면 죽음의 자식입니다. 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동시에 의식의 기초인 물질적 신체, 즉 물질적 뇌를 점점 더 파괴시켜가야 하니까요. 문득 전생의 개념이 떠오르는군요. 어느 특정한 긴 혹은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사람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인데요. 다른 관계 속에서 태어납니다. 물질적 세계로요. 다시금 새롭게… 그래서인지 그 어떤 마술적 세계상에서도 달은 물질적 신체를 상징해요. 달은 차고, 또 집니다. 달이 져서 보이지 않는 동안 달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잘 몰라요. 초승달이 뜨면, 그러니까 아주 가느다란 초승달이 보이면, 전통적인 히브리 문화에서는 달의 등장을 독립된 두 명의 증인이 확증해야만 했어요.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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