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한 치 앞을 모르고 살아가는 게 사람이다.
2월엔 세 번을 서울 왔다갔다하며 작은딸 졸업 축하와 이사 정리하느라 엄마노릇 좀 했고 이달엔 새 마음으로 일 좀 시작하기 전에 에너지 충전을 생각했다.
일은 한순간에 일어난다. 그저께 우도 검멀레해변에서 오른발목 골절상으로 119구급차를 세 번 옮겨 타고 부산 모 병원 응급실로 와서 바로 입원 중이다. 세상 긴 하루였다. 멀고먼 길에서 프로답게 성심껏 돌봐준 소방구급대원들, 휠체어 준비해주고 친절히 안내해준 항공사 직원, 진료시간 마치고 길가에 따라내려와 카카오택시 불러주고 선결제까지 해주신 제주 하북동 배정형외과 의사 선생님. 너무나 고마운 분들 덕택으로 잘왔다. 너무 아파ㅠㅠ. 물가 돌이 언뜻 미끄러워 보이지 않아도 사실은 미끄럽다는 걸 잊지 않았어야 했다. 항상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걸 명심했어야 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행한 동명의 친구, 그날 놀라고 힘들었을거다. 구급차가 울렁거려 친구는 차 안에서 구토까지 했다. 난데없이 보호자 노릇하며 배낭 두 개에 목발 들고 부산까지 따라오고 다음날 서울로 돌아갔다. 일에 바쁜 친구에게 이참에 휴가 시간 만들어 주고 우도의 일몰을 함께하며 좋은 추억 쌓으려고 마음 먹었는데 계획대로는 안 되었지만 잊지 못할 날이 되고 말았다. 상쾌한 아침 공기 마시며 집 나와선 수학여행 가는 기분이라며 헤헤거리다 사고는 3시 20분경 그만. 그 이전까지는 성산항에서 우도 가는 뱃길도, 하고수동해변 옥색 물빛도, 섬의 섬 또 섬 비양도 한바퀴 걸으며 바람도 하늘도 참 좋았다^^
수술 전 검사들 거치며 이틀밤을 병원에서 지냈다. 빠르면 내일 수술한다. 복사뼈 안팎으로 두 군데 뎅강. 뒤쪽에 조각조각. 금속정과 판을 양쪽으로 대야 해서 절개라인도 클 거 같고 생각보다 일이 크다. 부기가 가라앉아야 수술한다는데 부기가 여전한 것 같다. 그러면 며칠 더 지나 수술할 수도 있다. 일단 내일 아침 상태를 보고 결정. 이번 선거는 불참할 수밖에 없네. 이런 일 생전 처음. 목발도 생전 처음. 모든 게 시간이 지나야 될 일인데 수술도 무섭고 수술 후 견딜 시간도 무섭다. 잘되길 기도하며…
곳곳에 온통 지뢰밭이니 조심 또 조심하며 살라는 경고장 하나 오지게 받은 것 같다. 조심은 소심이다. 밖에 나가 보면 제 나이와 제 몸을 알게 된다. 마음만 갖고 기분대로 깡총거리다가는 큰일난다. 말도 행동도 소심 또 소심해야한다. 돌다리도 여러번 두드려보고.
병원에 보호자는 전혀 못 들어온다. 진통제 맞고 그런대로 통증 잊어볼까 싶어 오늘 아침 식사 후 옆지기가 드립해 보내준 커피 한잔 마시며 이 책을 펼친다. 제인 캠피온의 영화와 제작다큐를 먼저 보았는데 영화에서 생략된 피터의 아버지 조니의 천성적 상냥함과 그 뿌리라 할 수 있는, 위험을 초래하기 쉬운 예민함에 대한 지적이 예리하다. 토마스 새비지! 거침없는 문장도 매력있네.

"존, 그래도 자네를 생각해서 한마디만 해 두겠네." 원장은그렇게 말하고는 책상 위에 늘 놔두는 두개골 너머로 조니를 바라보았다. "나도 눈치라면 빠지지 않는 사람이야. 그래서 아는데, 자네는 내가 이때껏 본 젊은 친구들 중에 가장 천성적으로 상냥한친구야." "상냥하다고요?" 조니가 물었다. "상냥하다고 하셨습니까? 저는 까맣게 몰랐습니다, 원장님, 제가 상냥하다는 걸요." "몰랐을 테지." 원장이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조니도원장처럼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그처럼 권위가 느껴지는방식으로, "그래서 천성적으로 상냥하다고 한 거야. 최신 정신 의학을 공부하는 친구들이 말하길 그런 상냥함은 특정한 예민함에서 비롯된다더군. 그런데……." "그런데 뭡니까, 원장님?" "우리는 가끔 예민함을 통제해야 해, 예민함은 위험을 초래하는 수가 있거든. 그게 의사가 되려는 사람한테 특별히 유용한특성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네. 아쉽지만, 그게 현실이야."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원장님? 취직을 하려면요." "어디 시골 마을 같은 데로 가게, 존, 시골 마을 같은 데서 일하는 거야. 마음이 단단해질 때까지." - P40
"나 원, 이런 굴욕이 있나." 조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내의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끔찍해, 정말로 끔찍한 굴욕이야. 남자애한테는." "굴욕이라고요? 피터한테요, 아니면 당신한테요? 우리가 스스로를 낮추면 굴욕을 당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리스도께서도그렇게 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리스도라니, 맙소사. 냉찜질하게 수건 좀 적셔 주겠어?" 로즈는 수건을 찬물에 적셔 남편의 얼굴에 얹어 주고는, 남편이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켰다. 나중에 남편이 일어나면 여느 때처럼 술을 갖다 달라고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는 앞으로 며칠 동안 남편이 제대로 몸을 가누도록 술의 양을 세심하게 조절할작정이었다. 남편은 그녀가 가능한 적당량 이상을 요구하는 법이없었다. 그러나 잠에서 깬 조니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볼 뿐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이번에는 로즈가 남편에게술을 한잔 마시라고 권했다. 로즈의 남편은 위스키가 고통을 없애준다는 말을 자주 했고, 지금 그는 고통 속에 있었으므로, - P63
"가르쳐 주마, 피터. 남들이 하는 말을 절대로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남들은 너의 깊은 속을 절대로 모르니까."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을게요." "하지만 피터, 말을 꼭 그런 식으로 할 필요는 없단다. 남의말을 아예 귀담아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 그런 사람은, 보통모질게 자라서 모진 사람이 되게 마련이거든. 넌 상냥한 사람이되어야 해, 상냥한 사람이. 넌 어쩌면 남들한테 큰 해를 입히는 사람이 될지도 몰라, 왜냐면 넌 강하니까. 너 상냥함이 뭔지 아니, 피터?"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 "그래, 그럼 가르쳐 주마. 상냥함이란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앞길에 놓인 걸림돌을 치우려고 애쓰는 거란다." "그건 뭔지 알겠어요." 조니는 다시 입술을 물었다. "피터, 난 이때껏 걸림돌 같은 거였단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이 편하구나, 잘 알아들어 줘서 고맙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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