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이벤트 '당신 곁의 28쪽'으로 28쪽의 글귀와 함께 좋은 책 소개를 많이 받았다.

왜 하필 28쪽이었냐, 궁금하셨을 텐데 다양한 유추를 깨고 다락방님이 알아 본 그 영화에 나오는 28쪽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올해 본 단연 최고의 영화였다. DVD가 아니라 우연히 왓챠를 통해 보았고 흥분을 누를 수 없었다.

평범한 섬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여성들의 아카펠라로 고조되는 한밤 축제와 비발디의 '사계'와 함께 북받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특히나 심장이 나대서 미칠 것 같았다.  


아래에 한 꼭지 옮겨 둔다.














 <내가 당신을 볼 때 당신은 누굴 보나요>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절묘한 힌트를 얻었다. 나와 영화, 나와 사람, 나와 세상 사이의 시선이기도 하여 표제를 고심하다 단번에 이 문장을 떠올렸고 자꾸 설레었다. 영화읽기 에세이로는 2017년 <고마워 영화> 이후 두 번째로 기억의 서랍을 비웠다. 2년간 코로나 바이러스로 적지 않은 게 달라졌고 또 여전하지만 오랜 시간 영화를 보고 느끼며 함께했던 순간들은 시간이 흘러도 기억에 생생하다. 아무리 오래된 영화라도 영화는 항상 현재에 산다고 생각한다. 어떤 기억은 재생하여야 하고 잊지 않아야 하기에 이야기가 너무 많아 퇴고 과정에서 줄이고 또 줄이고 한 호흡으로 써내려간 탓에 호흡이 좀 빠른 듯 느껴질 수 있다. 개인적인 기억이지만 누군가에게 비슷한 기억을 소환하고 함께 생각하며 공감할 수 있는 한 줄이 있을 거라 여기며 또 용감하게 나를 내보인다. 이야기 나누고 소통하길 바라며.


부단히 쓰는 게 내가 사는 방법이고 방식이라는 걸 나는 3년 전에 수채화를 배우며 확실히 느꼈다. 중학생 땐 미술반에도 들었고 그렇게나 해 보고 싶었던 수채화인데 글보다 매력적이지 않았다. 나중에 또 어떻게 변심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래서 한 달만에 접고 화구도 다 치워 버렸다. 2013년 구월엔 작은아이가 내 문서를 몽땅 날려버리고 낙담했는데 그게 운명이었을 거라 여기고는 조금만 기다려라, 미친듯이 쓸 것이다,라고 대담한 속말도 어디다 메모해 놨는데 그걸 잊고 있다가 얼마 전에 보고 혼자 웃었다.


<내가 당신을 볼 때 당신은 누굴 보나요>는 챕터를 나누지 않고 긴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내 마음에 걸린 영화의 어떤 코드를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나의 흐름으로 쓰고 엮었다. 궁극적으론 이 영화 난 괜찮던데요 같이 볼래요?, 하는 마음을 담았다. 표지와 본문 속 6장의 사진은 영화의 내용과 연관되는 이미지로 골랐고 <고마워 영화>에서처럼 모두 라이카클럽 사진작가 박유영의 작품이다. 라이카 필름카메라 작품.


그때와 지금의 표지사진이 같은 공간에서 찍은 거라 우연치고는 참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어딘가 하면, 부산 기장군 일광면 소재 '마레'라는 레스토랑 안이다. <고마워 영화> 표지 속의 여자는 바로 저입니다.^^ 그리고 이번 책의 표지사진은 친정부모님과 우리부부 넷이서 '마레'에 가서 오랜만에 식사를 하는 중에 벌떡 일어나더니 남편이 찍은 사진이다. 햇살이 비치는 그 순간을 포착하려고...  2020년 마지막 날이었고 오후 두 시경의 겨울이었지만 그런대로 포근했던 날이다. 사진의 양쪽에 보이는 두 개의 창, 수평선이 가르는 창밖 파란 풍경은 절반은 하늘, 절반은 기장바다로 나는 마레의 이 시원한 바다 풍경을 좋아한다. 바깥으로 나가 데크로 가면 약간 지중해 풍을 느낄 수 있다. 엄마는 팔순을 넘고 아빠는 구순이고 건강이 좋지 않지만 곁에 계셔서 감사하다.


당신의 모든 시간을 응원하며 부족한 나를 키우는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2020년 12월 31일 오후 2시 30분 배혜경 아이폰12 촬영, 기장 마레 




내가 당신을 볼 때 당신은 누굴 보나요

_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Lady on Fire(셀린 시아마 2019)

 

 

'영감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가'에 대한 특별한 해답을 보여준 영화로 뒤늦게 내게 온 보물이다. 개봉 때 놓친 좋은 영화를 다른 경로로 보는 혜택을 누리는 세상이 되었다. 비디오테이프와 DVD라는 구체적 물상으로 소유되었던 한 편의 영화는 이제 무형의 아카이브에 저장되어 언제 어디서나 스트리밍할 수 있는 네트워크적 소유물이 되었다. 좋기도 그렇지 않기도 한 측면이 있지만 꽤 고마운 극장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두 여인의 꿰뚫어 볼 듯한 눈빛이 모든 걸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영화다. 엘로이즈의 치맛자락에 옮겨붙은 모닥불의 선연한 불꽃보다 마리안느와 주고받는 시선 사이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더 선연하기 때문일까. 모든 장면의 구도와 색감이 예술적인 미장센으로 마음의 캔버스에 남고 그들의 타오르는 감정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뚫어질 듯한 시선마저 애틋하다. 이 영화는 그렇게 감독 셀린 시아마를 포함해 주체적으로 살고자 한 여성들의 연대와 폭넓은 애정 그리고 예술을 향한 촘촘한 열정을 뜨겁고도 서늘하게 그려낸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압델라티프 케시시2013), <캐롤>(토드 헤인즈 2015), <아가씨>(박찬욱 2016) 이후 여러모로 훨씬 그윽하고 지극한 영화로 마음에 들어왔다.


남성 감독의 시선으로 그린 여성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 여러 가지로 포착된다. 셀린 시아마는 실제 자신의 경험과 역사적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드러내 놓지 못한 여성 삶의 소소하나 소소한 게 아닌 사안을 이야기에 깨알같이 녹여 놓았다. 가령 여성 드레스에 주머니에 무얼 담지 못하도록 19세기 이후 사라진 주머니를 달아주고, 조명받지 못한 여성 몸의 수난사로서 낙태 광경을 그림으로 남겨주고, 결혼이 아니라 책을 좋아하는 여성의 손에 책을 쥐어 주며 28쪽에 영감을 주고받은 상대의 얼굴을 삽화처럼 그려준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이 아닌 여성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해석한 그림을 그려서 전시하게 해준다. 미시사의 한 장면으로 영원히 남겨서 기억하게 하며, 역사에서 사라진 이름 없는 여성들에 헌정하는 영리한 방식이다.

 

사랑이라 불리는 감정이 어떻게 발아하고 고조되어 폭발하는가는 예술적 영감이 어떻게 점화하고 고양되어 완성되는가에 버금가는 물음이다. 이 영화는 그런 물음에 강렬한 미학적 답변을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를 살려 세심하게 제시한다. 특히 파도의 격랑, 스케치하는 연필의 사각거림,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가 청각을 예민하게 자극한다. 여백의 미를 살린 그림처럼 절제된 행동과 대사를 통해 다하지 않는 게 나을 말을 삼키며 대신 깊이 응시하고 정확히 살피는 시선을 통해 감동을 전달한다. 그렇기에 더욱 인물들이 나누는 대사에 몰입도가 높고 그 대사를 통해 주요 레퍼런스를 명확하게 파악하게 한다. 남성이 배제된 이 영화는 어느 순간도 모호하지 않다는 점에서 여성이 내는 그 목소리가 자신감에 차 있다.


그리스 신화 속, 하데스를 찾아가 아내를 이승으로 데려오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는 이 영화에서 두 여인의 촉발된 감정을 지지하고 마지막 선택에 이르기까지 뼈대가 되는 레퍼런스다. 강요된 결혼이 싫고, 수영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고, 도서관이 있어 수도원이 차라리 좋다고 말하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 혼담을 나누기 전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구를 싣고 배를 타고 외딴 섬에 들어간 화가 마리안느.


여성 화가가 걸작을 그리는 걸 싫어하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당차고 예민해 보이는 마리안느가 저택에 도착한다. 벽난로의 활활 타오르는 불꽃 앞에 나신으로 앉아 담배를 피우며 물에 빠진 화구를 건지다 젖은 몸을 말린다. 이 장면에서 영화에서 두 번째로 보이는 불꽃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현재 시점에서 마리안느가 그린 그림의 제목을 묻는 제자 여학생에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고 대답해 주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다. 그러면서도 그림을 내어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인습에 눌린 18세기 여성을 비추는 한 대목이다. 여학생이 꺼내놓은 그 그림이 기억을 소환하고 마리안느는 뒤돌아보아추억을 간직하며 작별을 선택한 엘로이즈와의 애틋한 감정을 회상한다.

 

외딴 섬의 저택이라는 갇힌 공간에서 엘로이즈와 백작부인, 마리안느와 가정부 소피까지 여성 넷이 기거한다. 이 모두를 지켜보고 담아내는 여성 감독 셀린 시아마와 나까지 여섯 명이 되겠다. 처음 그린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은 백작부인이 딸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다시 그릴 닷새를 주고 밀라노에 가 있는 동안 엘로이즈, 마리안느, 소피 세 사람은 신분 따위 아무렇지 않게 자매처럼 친구처럼 지낸다. 함께 요리하고 와인을 마시고 카드게임을 하고 책을 읽는다. 소피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낙태도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힘을 합해 돕고 마리안느로 하여금 소피가 시술받는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게 해 여성 몸의 선택권을 지켜주려는 태도를 취한다.


엘로이즈는 억눌려 있지만 여러 면에서 주체적 여성이다. 화가 마리안느가 이성으로 누르고 사는 욕망을 풀어주는 견인차다. 바다를 향해 달음질치며 달리기를 오래 꿈꾸어 왔다고 말하는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의 선택도 다르게 해석한다.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을 우선으로 오르페우스는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뒤돌아보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마리안느를 향해 엘로이즈는 다른 의견을 낸다.


- 여자가 말했을 수도 있죠. “뒤돌아봐요!!!


나중에 이 말이 두 사람의 이별에 재현되고 암전과 함께 현재로 장면이 급전환되는데, 정말이지 정신이 번쩍 드는 강렬한 플래시이다.

 

마리안느가 포즈를 취하기 싫어하는 엘로이즈를 몰래 관찰하며 처음에 그린 초상화는 엘로이즈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시에 마리안느의 마음에도 차지 않았다. “당신이 본 내가 이랬나요?”라고 따져 묻는 엘로이즈에게 마리안느는 그림에는 규칙과 관습과 이념이 있다고 배운 대로 항변해 본다. 진심일 리 없는 말이었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눈에 불꽃을 튀기며 치열하게 나누는 대화는 영화가 하고 싶은 말로 집중해서 듣게 된다. 엘로이즈는 존재감이란 그저 진실되지 않은 순간들로 이루어지는 거라는 마리안느의 말을 망설임 없이 반박하며 어떤 감정은 아주 깊다고, 이 초상화는 나를 닮지도 않았고 더구나 당신을 닮지도 않아 슬프다고 말한다.


우리는 같은 위치, 아주 동등한 위치에 있어요.”

 

젠더정체성 문제를 꾸준히 다룬 셀린 시아마 감독은 학예의 여신으로 불리는 뮤즈는 거짓 개념이라는 데서 이 영화를 출발했다고 말하며 뮤즈란 그들이 공동 창작자라는 걸 숨기기 위해 정형화되고 말을 잃은 여성으로 단순화한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영화라고 발표했다. 기존의 뮤즈는 남성 예술가의 시각으로 탄생했고 역사 속 수많은 사례가 이를 말해주지 않는가.

다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엘로이즈는 자진하여 포즈를 취하고 시종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안느를 옆으로 오게 해 눈을 응시한다.


당신이 나를 보는 동안 나는 누구를 보나요.”


자화상이 거울 속 자신의 눈을 응시하며 그리는 얼굴이듯 초상화를 그리는 주체와 객체는 하나가 되어 대상이 허물어지고 새로이 선다. 초상사진을 찍을 때도 다르지 않다. 초상화에 두 사람이 그려져 있듯 사진에도 두 사람이 찍혀 있는 것이다. 나를 보는 너와 너를 보는 나.

 

엘로이즈의 치맛자락에 불이 붙어 타오르는 밤축제와 엔딩의 음악회 장면은 특히 청각으로 압도한다. 전자에서는 여성들의 아카펠라 합창이 후자에서는 비발디의 사계 여름이 감정을 극점으로 고조시키며 꽉 조인 여성 삶의 코르셋을 벗고 삶과 예술의 정념으로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을 들려준다. 클로즈업된 엘로이즈의 솟구치는 눈물 뒤 서서히 차오르는 희열과 그 모든 걸 안 보이는 곳에서 바라보는 마리안느의 시선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영화는 누구나의 심장에 생물처럼 살아 있을 뜨겁고도 서늘한 여름을 불러준다. 한 폭의 유화처럼 영원한 신화처럼 깊은 음영과 우아함을 갖춘 영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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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2-10 06:47   좋아요 1 | URL
행복책 님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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