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Ritournelle > * 이것은 시(詩)가 아니다 !

* 시(詩)에 대한 도발적 페러디, 아니 도발적 전복을 시도하는 이승훈 교수의 <이것은 시가 아니다>(세계사, 2007)가 출간되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유명한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크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페러디한 시(詩) 제목으로서 시적 본질주의에 그야말로 똥침을 가하는 통쾌함을 가득 지니고 있는 것 같아 자꾸 웃음이 나온다. 아래에 나와 있는 이 시집에 실린 몇몇 작품만 읽어봐도 작가의 시적 세계에의 지향성이 어떠한지를 명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도발적 전략이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얼마나 효과적으로 먹힐지는 두과 봐야 할 일이다.

* 한겨레(2007. 3. 8)  / 이게 시냐, 시와 시비붙은 시인

 

서정시가 끝난 시대, 순수도 서정도 폭력이다
순수는 불행을 모르고 서정은 불순하고…
결국 난 시를 쓰지 않으려고 시를 쓴다
‘시는 끝났다’는 도발적 주장을 위한 ‘반시로서의 시’
한겨레  최재봉 기자
» <이것은 시가 아니다> 이승훈 지음. 세계사 펴냄. 6000원
“학교 연구실에서 20년 매일 잡채밥을 시켜 먹는다 지치지도 않으십니까? 빗물 묻은 우비를 걸치고 배달 온 청년이 묻는다 다른 건 잘 못 먹어요 청년이 나가면 연구실 낮은 탁자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맛없는 잡채밥을 먹는다 학생들이 연구실에 앉아 잡채밥을 먹는 걸 보면 실망할지 몰라 문을 잠그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오전 열한시 반 낡은 잠바 걸치고 앉아 고개 숙이고 잡채밥 먹는다 물론 다 먹지 못하고 남긴 그릇을 신문지에 싸서 연구실 문밖에 내놓는다”(<잡채밥> 전문)

이것은 시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승훈(65·한양대 국문과 교수)씨가 새로 낸 시집에 실려 있는, 엄연한 시다. 시집 제목은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집에는 같은 제목을 단 표제작도 들어 있다. 그 작품의 전반부는 이러하다.

“한양대 교수로 직장을 옮긴 1980년대 초 밤이면 김일성이 자신의 집을 폭파하겠다고 전화를 하고 밤새도록 지붕 위엔 낯선 비행기가 떠 있다고 편지를 보낸 제자가 있었다 춘천교육대학을 중퇴하고 결혼에 실패한 그는 대학 시절 서울 집으로 간다며 철길을 계속 걸어간 적이 있지 어느 날은 그의 시집을 영국에서 출판하게 되었으니 선생님이 평론을 쓰셔야 한다는 편지도 보냈다”

이것 역시 시가 아니다. 그런데, 또한 이것은 엄연한 시다. 시집 <이것은 시가 아니다>에는 이와 비슷한 ‘것’들이 81편이나 들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시이면서 시가 아니고, 시가 아니면서 동시에 시이기도 하다. 시인이 주장하는바 ‘불이(不二)’의 경지다.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는 제목은 물론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따온 것이다. 화폭에 분명 담배 파이프를 그려 놓고 제목에서는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라고 우기는 마그리트의 그림은 존재와 기호, 사물과 회화의 관계에 관한 철학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모더니즘·해체시론 이론가인 시인

<모더니즘 시론> <해체시론> 등의 연구서를 낸 이론가이기도 한 시인은 시집 뒤에 붙인 해설성 시론 ‘누가 코끼리를 보았는가’에서 마르셀 뒤샹의 설치 작품 ‘샘’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능가하는 현대 미술의 스캔들로 일컬어지는 작품 ‘샘’이란 그저 평범한 남성용 소변기였던 것. 마그리트의 그림과 뒤샹의 변기는 미술과 예술에 관한 기존의 관념을 뿌리에서부터 뒤흔든 문제작들이었다. 마그리트의 그림이 까다로운 철학적 화두를 던졌다면, 뒤샹의 변기는 예술과 비(非)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린 혁명적 도발이었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가리켜 ‘시가 아니’라고 선언하며 뒤샹의 변기를 거론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시로써 ‘시라는 것’에 대해 시비를 걸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순수도 서정도 폭력이다 순수는 불행을 모르고 고통을 모르고 타자를 모르고 서정도 서정도 허위다 서정시가 끝난 시대에 서정을 주장하는 건 불순하고 순진하고 천진하고 시가 갈 길은 무수히 많다 갈 데가 없으므로 갈 데는 많고 그러므로 갈 곳이 없고 지금 책상에 날아와 앉는 파리처럼 갈 곳이 없고”(<서정시> 부분)

 “이 시는 시의 고민이 사라지고 쓰는 시 아무렇게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시 비가 오면 아무 일도 못하고 비 때문에 비 때문에 이제 시는 끝났다 비가 올 때 끝나고 시의 문제는 철학의 문제로 넘어간다 아슬아슬하게 넘어간다 시와 산문의 전쟁도 끝나고 오늘부터 끝나고 시의 종말은 시의 죽음이 아니야 한 시대가 끝난 거야 이젠 무슨 시론도 본질도 없지 최근 젊은 애들이 쓰는 시를 욕해선 안되지 이게 우리 시의 희망이고 미래야 본질주의자들은 엿이나 먹어라! 또 비가 오잖아? 사흘만 참으면 돼 사흘 뒤에 사흘 뒤에 너를 만나겠지”(<개는 사람을 문다> 부분)

본질주의자들은 엿이나 먹어라!

인용한 시들에서 서정시나 순수시, 또는 시의 ‘본질’에 관한 시인의 거부감은 격렬하다. 다른 시들에서도 마찬가지. “사유는 결국 미친 짓이죠 무슨 영혼, 진리, 본질 따윈 버리세요”(<우리가 할 일은 웃는 것이다>)라거나 “그저 언어가 있으므로 시를 쓴다”(<언어가 있으므로 시를 쓴다>), “현대시는 끝났어 이젠 모두가 시이고 모든 게 가능해”(<나는 다른 누구일 뿐이다>), “결국 난 시를 쓰지 않으려고 시를 쓴다”(<시론>)와 같은 도발적이고 극단적인 주장을 쉽게 만날 수 있다.

 

 

 

» 이승훈/시인
시는 끝났다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쓰여지는 시. 시의 죽음을 먹고 사는, 하이에나 같은 시. 이승훈씨의 시는 그야말로 ‘반시(反詩)로서의 시’라 이를 법하다. 시인 자신 예의 해설성 시론에서 “내 시의 종말(end)이 내 시의 목적(end)이고 내 시의 목적이 내 시의 종말”이라고 선언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의 ‘시’들이 주장과 이론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시집의 전반부에는 일상에서 마주친 시적 순간을 유머러스하게 포착한 일상의 시편들이 배치되어 있다.

“올 겨울엔 이런 일이 있었다 진눈깨비 치던 오전 난 택시를 타고 공항터미널로 가고 있었다 그날 제주에서 제주대 대학원 박사 논문 심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사 옆에 앉고 그는 50대로 보이는 남자 공항터미널로 가면서 그가 힐끗힐끗 곁눈으로 나를 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선생님은 무얼 하십니까? 난 검은 바바리를 걸치고 낡은 밤색 가방을 무릎에 놓고 있었다 글쎄 뭐 하는 사람 같아요? 그랬더니 기사 왈 철학하는 사람 같군요! 네? 철학이요? 왜 있잖아요? 풍수도 보고 예언도 하는 철학 말입니다 진눈깨비 치던 겨울 오전이었다”(<철학> 전문)

이런 것을 시로 보아야 할까. 시인의 주장대로 이제 시는 끝났고 그 주검 또는 부정이 시의 자리를 대신해야 하는 것일까. “선생님 어떻게 이런 게 시가 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시가 싫어서 시를 쓴다. 쓸 것이 없는 시, 시 되기를 거부하는 시”라거나 “나는 무엇을 창조한 게 아니라 그저 기표를 따라 표류했을 뿐이다”(‘해설성 시론’)라고 답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이승훈씨의 새 시집은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 한 보따리를 독자에게 던져 준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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