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2021~2022년 배우 김혜자와 나눈 긴 시간에 걸친 대면 및전화 인터뷰, 구술, 누구에게도 고백한 적 없는 평생을 써 온 일기 형식의 글들, 신문 방송 등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 기사 등을 토대로 편집자가 초고를 만들고, 저자가 다시 기억과 사실을 수정하고 추가하는 방식으로 원고가 완성되었다. 조명 눈부신 드라마와 직사각형의스크린에서 걸어 나온 인간 김혜자와의 특별한 만남을 기대해 본다.

배우를 한다고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미쳤다며 모두 반대했지만 아버지(김혜자의 부친 김용택은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대한민국 2호 경제학박사이며, 미군정 시절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는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명한 배우의 한마디는 어떤 정치인이나 학자 못지않게 영향력이 있다. 찰리 채플린을 봐라. 웃기는 짓을 하는 것 같지만그 사람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아니? 좋은 배우가 되거라.
좋은 배우가 되면 톨스토이나 셰익스피어처럼 세상에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라. 그리고 책을 많이 읽어라."
내가 태어나기 직전, 아버지는 높은 연단에 서서 많은 군중 - P11

의 박수를 받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버지 옆에 놓인 어항속에
‘예쁜 빨간색 붕어‘가 헤엄치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박수는 어항을 향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 혜자는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 박수를 받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금붕어가 한 마리라 외롭겠다 하셨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은 그저 국어 시간이면 책 잘 읽는 정도의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부모의사랑이나 간섭을 모르고 살아서 어려서부터 웬만한 일들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해결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별히 예뻤다거나 뛰어난 재주꾼도 못 되었고, 그래서 그런지 부모님이나교사들이 내게 별로 큰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 P12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미치도록 좋아해서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화를 봤습니다. 수업 시간이 왜 그렇게 지루했던지, 학교가 끝나는 종이 울리기 무섭게 감옥에서 풀려난기분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영화관에 가서도 보았고, 텔레비전의AFKN(1957년부터 1996년까지 송출된 주한미군방송)에서 틀어주는 흑백영화로도 보았습니다. 영어 대사를 이해할 수 없으면 영상만으로도 보았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에바 가드너, 라나 터너, 오드리 헵번, 진피터스, 마릴린 먼로, 앤박스터, 잉그리드 버그먼, 데보라카,
진 시몬스……. 이런 여배우들의 얼굴 표정에서부터 발끝 움직이는 것까지 내 머릿속을 온통 사로잡았습니다. 나의 조그만가슴을 설레게 한 남자 배우는 로버트 테일러, 조셉 거튼, 제임스 메이슨, 게리 쿠퍼, 로런스 올리비에, 타이론 파워, 클라크 게이블이었습니다. - P13

내가 맡은 배역이 아무리 인생의 속박에서 고통받는 역이라해도 그 속에 바늘귀만 한 희망이 보이는가, 그것이 내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삶의 밑바닥을 헤매어도 그곳에 희망이 있나, 그 희망을 연기할 구석이 있나, 내일의이야기가, 혹은 그다음이 보이는가? 끝없는 절망 속에서 이 여자가 그냥 죽음을 선택해 버리나? 그렇지 않고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어디엔가 있나? 그것을 찾고 그것을 연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가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합니다. 얼마 전 강수연 배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속으로 "잘 가." 하고말했습니다. 강수연이 생전에 김혜자, 윤정희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늙어서 집으로」에 나오는 할머니 같은 역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나라를 빛낸 배우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그녀에게 연기할 수있는 좋은 배역이 있었어야 했는데…… - P19

배우는 연기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배우에게는 유일한 빛이고 희망입니다. 또한 그것이 배우가 세상에 줄 수 있는 희망의빛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수연에게 모든 것이 너무 일찍 왔고일찍 가 버렸습니다. 갓 스무 살 넘은 나이에 세계적인 무대(베니스 국제영화제와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연기상을 타고, 너무어려서 월드스타가 되고 나니 아무것이나 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작품이 있어야 배우로서 ‘이렇게 해 볼까, 저렇게 해 볼까?‘
고민하고, 설레고, 한 장면을 백 번 넘게 연습해 보고……. 그것이 배우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배우는 살아 있다고 느낌니다. 그것이 은총의 순간입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가슴 설레는것이 있을 때 삶이 은총으로 빛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로서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삶이되는 것입니다. 삶이 뒤엉키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더라도 배우는 자신이 연기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 P20

강수연 배우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전해 받고 또다시 죽음에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에대해 생각했습니다. 배우를 살게 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존엄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죽는다는 것은 슬픕니다. 어렸을 때 영화제에서 상타지 않고 평범한 주부 역할도 하고, 세계적인 배우는 아닐지라도 평범한 여성으로 살았으면 더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에 강수연에게 너무 큰 것이 왔습니다.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가엾어서, 김혜자, 윤정희 같은 배우, 「집으로」의 할머니같은 역을 하고 싶다 했는데.......
그래도 멋있어, 강수연 배우답게 갔구나. 그곳에서 만나. - P21

내가 인생에서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연기자로 살아오면서 몰입의 순간들을 많이 가진 것입니다.
어떤 것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반쯤은 몽유병자처럼흉내만 내면서 살아가는 나를 잘 아시는 신이 내가 몰입할 수있도록 계속해서 작품들을 내 앞에 가져다주셨습니다. 그러면흐릿한 불씨처럼 존재하던 나는 뜨거운 불로 타오를 수 있었습니다. - P23

키키 키린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렇게 몰입하는 순간 인생의 허무와 고통, 슬픔, 갈등, 부질없는 생각들을 다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나자신이 되고 어느 때보다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생의 모든 것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토록 부족한 인간인데 나를 배우로 만들어 주셨으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기 생활을 정말로 그만둘 때가 되면 그것으로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문장을 대사처럼 외웁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내 인생은매 순간순간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 P25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글을 읽고 있으면 행주 냄새가 납니다. 그분이 내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2004년 오래된미래 간)에 추천사를 써 주신 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김혜자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나라도 저럴 수밖에 없다고생각한 나머지 그에게 내가, 아니 모든 여편네들이 쓴 것처럼오싹해질 때가 있다. 저런 연기의 깊이는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혹시 드라마 밖에서의 그녀는 힘이 다 빠져 무기력하게 지내는 건 아닐까, 궁금해하곤 했다.‘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나를 보신 것입니다. 평소에 나 널브러져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아마 그분도 그런 거겠지. 소설한편 완성하고 나면 그러시겠지? 우린 같은 ‘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입니다. - P37

이제는 슬픈 이야기도 웃으면서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펑펑 울고, 심각한 장면은 내내 힘주며 했습니다. 그것이지난날의 연기였다면, 연기를 계속하면서 배운 것은 힘을 빼때 정말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실 힘을 빼는 게 더어렵습니다.
「눈이 부시게」에서 ‘등가교환‘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수(손호준)가 자고 있을 때 인터넷 방송 채팅방에 들어온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장면에서는 정색하고 말하면 안 됩니다. "니네들 그렇게 살다가 나처럼 된다." 이 말을장난처럼 툭 던져야 합니다. 무방비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졸고 있다가 잠결에 들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 P40

그 대사를 한 백 번쯤 연습했습니다.
거저 얻어지는 건 없습니다. 내 귀중한 것을 희생하지 않으면얻는 게 없습니다. 그것이 등가교환의 법칙입니다. 운이 좋았다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나는 이해력도 부족한 사람이라 열심히 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꿈에서도맨날 대본이 나올까요.
어느 날 걸레질을 하면서, 오늘이 내가 전에 좋아했던 사람이 결혼을 하는 날이라고 혼자 상상했습니다. 이제 시작했겠네,
지금쯤 식장에 걸어 들어가겠지. 그러면서 걸레질하는데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그 와중에도 내가 지금 어떻게 눈물을 떨어뜨리고 무슨 표정을 짓는지 스스로 살피고 있었습니다.
기억하려고 굳이 안 해도 그런 것들이 저장됩니다. - P41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연기가 있습니다. 촛대 훔친 장 발장을회개하게 해 준 신부님 같은 역입니다. 너무나도 나쁜 사람을변화하게 해 주는 할머니역할을 해보고싶습니다. 어디로 가서 살 수도 없는 흉악범입니다. 도망다니다가 다 쓰러져 가는집, 살 만한 집이었는데 오래되어서 폐허가 되어 가는 집에서들리는 피아노 소리 때문에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낡은풍금이나 피아노로 감동적인 곡을 치는 할머니, 나 혼자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런 역을 하고 싶어서 피아노를 배우고 있습니다. - P41

그래서 요즘에 99세 할머니가 피아노 독학으로 배우는 유튜브를 많이 봅니다. 이 할머니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는데도혼자 하시는데, 나는 피아노 선생님도 있고 다 갖춰 놓고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나는 항상 열망은 가득합니다. 피아노를잘 치고 싶습니다. 그런데 연기 외에는 실천이 부족합니다. 종종 후회합니다. 10년만 일찍 시작했더라면 지금쯤 한 곡 정도는 멋있게 연주할 수 있을 텐데, 그때 잠깐 시도했다가 다시 놓은 것을 후회합니다.
나는 직업란에 ‘탤런트‘라고 쓰는 사람을 보면 무심결에 ‘아,
저이는 저걸 직업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하면서 놀랍니다. 아주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해 와서 그런지 나는 연기가 직업이라고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직업이라고 하면 왠지 자존심이 상합니다. 「마더」의 엄마가 아들 도준(원빈)한테 "너는 나야" 하듯이 연기는 나입니다. 숨 쉬는 것처럼. - P42

옛날에 내가 열심히 외우고 무대에서 했던 대사를 다시 읽으면 그때의 나로, 그때의 내 감정으로 휙 하고 건너갑니다.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할 때는 또 지금까지의 어떤 고정관념에 따른 연기가 아니라, 가령 ‘절망‘ 같은 것을 대사에 의해서가아니라 발목의 관절이 딱 꺾인다거나 뒤로 나자빠지는 동작 등으로 표현해야 해서 그것을 고심했습니다. 연극 작품들이 그렇게 내면 연기를 키워 주었습니다. 연기를 하면서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의 정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6년 만에 다시 임신을 해서 입덧으로 다른 음식은 못 먹고 매일 딸기만 먹으며 살았습니다. 연출 선생님이 무대 뒤에서 북을 쳐 줍니다. 막이 오르면 나는 신이 오릅니다. 남편과 애인 사이에 방황하는 여인이 되어 울고 웃고 하다 보면 - P53

그대로 나 자신의 일처럼 빠져들어 갑니다. 애인과 남편의 공모로 죽임을 당하는 나...…. 요란한 박수 소리와 함께 막이 내립니다. 땀에 흠뻑 젖어 흡사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나는 딸기를 몇 개 집어먹고 또다시 저녁 공연을 위해 열심히 화장을 합니다.
함께 KBS 탤런트 공채에 합격한 배우들이 브라운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텔레비전 연속극이 활발해지자 무대 연기도 하나둘 그쪽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4년 동안 연극에 몰두하며 살다가 다시 KBS TV에 나갔지만, 이미 정상의길을 걷고 있는 동기 탤런트들을 보면서 심한 좌절감이 들었습니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커져 가는 그들을 의식하면 화제의 대상도 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내면적인 연기가 더 중요한 거야‘ 하면서 자꾸만 초라해져 가는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 P54

신은 절대로 내가 경험한 삶이 그냥 없어지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주 우울한 생각을 했든, 너무 슬픈 생각을 했든, 치졸하고 부끄러운 생각을 했든, 그 모든 것이 내가 역을 맡을 때조금씩 도움을 주었습니다. 내가 겪은 모든 일과 감정들이 연기에 다 투영되었습니다.
내 마음속이 그토록 뒤범벅일 것이라고는 누구도 모릅니다.
부잣집에 태어나 좋은 학교에 다니며 순탄한 삶을 산 것처럼보이지만, 내 마음속 회오리가 있기에, 복잡한 심리가 있기에연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배우에게는 어떤 경험도 나쁜경험이 없습니다. 물론 그것을 이겨 냈으면 말입니다. 아주 거지같이 살아도 그것도 좋은 것이고, 나쁜 남자를 만나 살아도그것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다 좋은 경험입니다. 배우로서는. - P57

슈베르트가 ‘내일 아침엔 깨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매일 잠자리에 들었다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좋아지기까지 했습니다. 작품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할 때, 그 일이 끝나면 매번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지?‘
늘 삶의 한쪽에 죽음이 함께했습니다. 신이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허무에 더 깊이 빠지기 전에 다음 작품에 온 힘을 다해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돈과명예가 아니라 그 천성적인 허무가 나에게는 연기생활에 더욱전념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나 자신은 죽음을 생각하지만사람들은 내 연기에서 위로받게 하고 싶었습니다.
‘살아, 네 힘으로 살아 네 힘을 다해, 죽지 마라는 결심이 나를 살게 했습니다. - P59

또 하나의 대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청춘이지만 현실은백수였던 스물다섯 살의 혜자가 70대가 되어서야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고 나서 하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잠방(인터넷 방송 진행자가 자는 모습을 보여 주는 수면 방송)을 하는 영수(손호준)와 그것을 보고 있는 영수TV 시청자들을 보고 혜자가말합니다
"늙는거 한순간이야. 너희들 이딴 잉여 인간 방송이나 보고있지? 어느 순간 나처럼 된다. 나도 몰랐어. 내가 이렇게 늙어버릴 줄"
극 중 대사만이 아니라 정말 그렇습니다. 나도몰랐습니다.
내가 이렇게 늙어 버릴 줄 준비할 시간도 없이 누구나 갑자기 늙어 버린다는 걸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생은 곧 시간이기 때문에,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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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클루트의 이 훌륭한 책들은 자주 읽히지도 않고 또끝까지 읽히지도 않는 것 같다. 이 책이 갖고 있는 매력이라면 이것이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는 느슨하게 묶어놓은거대한 상품더미로, 오래된 자루들이나, 낡은 항해 기구,
엄청난 크기의 양털 가마니, 그리고 루비와 에메랄드의 작은 주머니들이 흩어져 있는 잡동사니 방이자, 하나의 큰잡화상 같다는 사실이다. 이쪽에서 이 꾸러미를 끊임없이풀어보고, 저기 있는 더미에서 몇 개를 뽑아보고, 무언지거대한 세계 지도의 먼지를 털어내 닦고 그러고는 반쯤 어 - P51

둑한 곳에 주저앉아 비단과 가죽과 용연향의 낯선 냄새를맡노라면 밖에서는 엘리자베스 조의 지도에 실리지 않은바다의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뒤죽박죽의 씨앗들, 비단, 일각수의 뿔, 코끼리의 이빨.
양털, 흔해빠진 돌들, 터번식의 모자, 금괴 등의 값을 측정하기 힘든 물건들과 전혀 값이 나가지 않는 잡동사니들은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기에 이어졌던 알려지지 않은 땅으로의 수많은 여행과 교역, 그리고 발견의 결실이었다.
그 원정들은 서쪽 지방에서 온 ‘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선원으로 태우고 여왕이 직접 일부 재정 지원을 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프루드의 말에 의하면 그 배들은 현대의 요트보다 크지도 않았다고 한다. 왕궁에서 가까운 그리니치의 강가에 배들이 운집했다. ‘추밀원이 궁정의 창문으로 내다보고 …… 배들은 거기서 군수물자를 하여했으며들의 외치는 소리가 하늘에 닿아 되울리는 것 같았다.‘ - P52

 ‘나는 때로 내 안에 지옥을 느낀다. 내 가슴에는루시퍼가 안마당을 차지하고 있다. 일군의 악마들이 내 안에서 되살아난다.‘ 이런 고독함 속에는 안내자도 없고 동반자도 없다.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암흑속에 있고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조차 단지 나를 구름 속에 있는 것으로 바라볼 뿐이다.‘ 겉으로는 가장 건전한 인간이고 놀위치의 가장 뛰어난 의사로 존경받는 그이지만일을 할 때면 아주 기이한 생각과 상상이 그와 함께 유희를한다. 그는 죽음을 동경했다. 그는 모든 것을 회의했다. 만일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잠들어 있는 것이고 삶이라는이 발상은 단지 꿈이라면 어떨까?  - P64

영문학에는 아주 겁나는 지대들이 있다. 그런 밀림과숲, 그리고 황야 가운데에서도 엘리자베스 조 희곡이 으뜸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를 여기서 살펴보지는 않겠지만) 셰익스피어 Shakespeare가 단연 두드러진다. 그가 살았던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조명을 받아온 셰익스피어, 그의 동시대인들의 눈높이에서 보았을 때 제일 높이 우뚝 서 있는 셰익스피어 말이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보다 조금 뒤떨어지는엘리자베스 시대 작가들, 예컨대 그린Greene이나 데커Dekker, 필Peele, 채프먼 Chapman, 보먼트 Beaumont, 그리고 플레처Fletcher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의 경우도 그 황야로 모험을하는 일은, 평범한 독자들에게는 질문을 퍼붓고 의구심으로 번민하게 하며 기쁨과 고통으로 즐거웠다 괴로웠다를 - P68

왔다갔다하게 하는 일종의 고난이요 혼란스런 경험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개 과거 시대의 걸작들만을 읽는 경향이 있기에 그런 것인데) 문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행사하는가를, 그것이 얼마나 수동적으로 읽히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우리를 이끌고 우리 마음을 읽어내는가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은 우리의 선입견을비웃고 우리가 당연시해온 원칙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사실상 작품을 읽고 있는 우리를 둘로 갈라 우리로 하여금 심지어 즐기고 있는 와중에도 입장을 포기하거나 고수하게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 P69

그녀가 파국을 맞는다는사실 말고는 그녀가 어떻게 거기에 이르게 되는 건지는 알수가 없다. 아무도 그녀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녀는 언제나 열정의 최고조에 달해 있지, 그 열정의 초입에있는 법이 없다. 그녀를 안나 카레니나와 비교해보자. 그러시아 여인은 피와 살, 신경과 기질, 심장과 머리, 몸과정신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이다. 그러나 이 영국 처녀는카드에 그려져 있는 얼굴처럼 평면적이고 조악하다. 깊이도, 폭도 없고, 복잡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희곡의 의미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게 내버려두었던것이다. 축적된 감정을 무시한 것이다. 이는 그 감정이, 우리가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희곡을 산문과 비교해왔지만, 희곡은 - P77

사실 결국엔 시다.
희곡은 시이고, 소설은 산문이라 할 수 있겠다. 세세한사항들은 지워버리고, 그 둘을 나란히 놓고서 우리가 할수 있는 한 각각이 하나의 전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각각의 각과 모서리들을 느껴보기로 하자. 그러면 즉시 가장중요한 차이점들이 드러난다. 오랫동안 느긋하게 축적되어온 소설과, 이와 달리 약간 응축되어 있는 희곡. 소설에서는 감정이 모두 쪼개져 흩어졌다가 천천히 점차 함께 엮여 한 덩어리로 모인다면, 희곡에서 감정은 응축되고 일반화되며 고양된다. 희곡은 그 얼마나 강력한 순간들을, 그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구절들을 우리를 향해 쏘아대는가!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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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1960, 1970년대는 인권 운동이 큰 진전을 이룬 시기였다.
흑인민권법Civil Rights Act이 제정됐고, 전미여성기구NOW, NationalOrganization for Women가 창설됐다. 스톤월폭동을 기폭제로 성 소수자평등권 운동도 폭발적으로 발흥했다. 그 맥락의 전모를 입체적으로살피려면 냉전 체제의 여파 등에 대한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당시 미국이 베트남전쟁과 반전 평화운동의 거센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는 사실, 즉 먼 인도차이나반도로 쏠린 백인 국가권력과남성 권력의 공백과 지배질서의 혼란으로 오래 억눌렸던 이들의입지가 넓어졌다는 점도 주효했다.
하지만 법과 제도의 진전이 시민 의식과 관습 속에 스미는 데는상당한 시간과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일상의 보이지 않는차별과 편견에 맞서 온전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법 제도와 별개로 천부의 권리를 시민들의 감각 속에 끊임없이 노출하는 게 중요하다. 인종 분리의 담장을 넘어 흑인이 진입하고, 동성애자 커플이 손을 맞잡고 거리와 광장을 활보하고, 남성이 전유한 노동과 유희의 - P123

경계를 허무는 일, 끊임없이 자극하고 부딪쳐 더디더라도 점차 자연스러운 풍경의 일부가 되는 일은 집단이 거대한 대오를 이뤄서 힘과함성으로 법 제도에 맞서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투쟁의 일부다.

델 윌리엄스Dell williams는 그 시기 바이브레이터와 딜도를 들고고루한 성 윤리와 차별적 젠더 억압에 도전했다. 그는 1970년대 초여성 최초로 뉴욕 중심부에 섹스토이숍을 열었다. 어두침침한 홍등가 귀퉁이에서 남자가 운영하고 남성 고객들이 전하던 그 공간을, 여성은 법이 아니라 관습과 인식과 시선의 장벽에 막혀 접근할수 없던 그 배타의 영역을, 뉴욕 카네기홀 인근의 버젓한 자리에 여성 전용공간으로 창업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성공했다. 그가 연 것은 작은 가게였지만 그곳은 여성의 성적 해방구였고, 그는 상품을팔면서 주체적 성 의식을 함께 전파했다. "(여성의) 오르가슴이 세계를 구할 것"이라는 말을 남긴 ‘바이브레이터의 여전사‘ 델 윌리엄스가 2015년 3월 11일에 별세했다. 향년 93세.
- P124

자기최면이라도 거는 것처럼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이건 죄가 아냐(I love myself, It‘s not a sin)"라고 반복하는 스피어스의 노래는 여전히 그러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들과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사회 현실에 대한 역설적인 고발이었다. 스피어스의 저 노래가 구현하려던 세상이 그보다 30년 앞서 1974년 윌리엄스가 아파트 부엌,
또 ‘이브의 정원‘을 거점으로 구현하려던 세상이었다.
2015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워킹걸>이 담고 있는 이야기도 그것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 광고회사 사원이자 워커홀릭인 기혼 여성(조여정 분)이 망하기 일보 직전의 섹스토이숍 주인(클라라 분)을 만나 동업을 하게 되면서 관능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고, 섹스토이에대한 주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사업가로도 성공한다는 내용실제로 여성이 운영하는 섹스토이숍이 한국에 있는지, 어떤 사정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저 영화 속 이야기를 윌리엄스는 40여년전 미국 뉴욕에서 실현했다.(한국에서는 곽유라, 최정윤의 ‘플레저랩이 2015년 8월에 창업했다.) - P128

그의 임종을 지켜본 비서 엘리자베스 그린 코언은 "윌리엄스는자신이 이뤘거나 이루고자 했던 일에 대해 늘 ‘나는 단지 여성의 권리가 보다 신장되기를 바랐을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라고 <뉴욕프레스>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와 수십 년 동안 함께 일한 이브의 정원 매니저 킴 이브리스빅은 "윌리엄스는 섹스의 정신적인 면을 중시했다" "만일 모든 여성이 오르가슴을 경험한다면 세상은 훨씬 평화로운 곳이 될 것이라 말하곤 했다"라고 전했다. 이브의 정원 홈페이지는 그의 부고를 전하며 "윌리엄스는 우리 시대 이브의 역할은 창피스러움에 주눅 든 여성들을 각자의 성적 능력과 감각 그리고 관능을 자각한 강하고 활력 있는 여성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라 말하곤 했다"라고 썼다. 전미여성기구 뉴욕 지부장 재키 세발로스Jacqui Ceballos, 1925~는 "여성의 성적 무지에 대한 델 윌리엄스의 자각은 페미니즘 운동에서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소중한 자극제가 됐다" 하고 기렸다. - P129

2012년 4월 <USA투데이>는 미국 백악관의 대통령자유메달 수상자 열세 명의 명단을 전하며 인권법률가 존 마이클 도어John MichaelDoar의 이름 앞에 ‘다소 낯설지 모르는‘이라는 수식을 달았다. 그와나란히 놓인 이름들 미국의 첫 여성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가수 밥 딜런, 작가 토니 모리슨, 우주비행사 출신의 미 상원의원 존 글렌 등에 비해 그는 누가 봐도 무명 인사였다. 버락 오바마미 대통령은 "존은 미국의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용감한 법률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1960년대 미국 법무부 인권 담당 검사로 차관보를 지내고 1974년에 워터게이트사건의 의회특별검사로 활약했다.

미국의 1960년대는 200년 흑인 차별의 ‘전통‘에 대해 흑인과 소수의 백인이 조직적 저항에 나서던 때였다. 그 시기 도어의 자리는 헌법이 보장한 권리와 자유·평등·정의 같은 보편적 가치를 둘러싼거친 질문과 근원적 갈등들에 국가를 대표해서 답변하고 심판해야 - P131

하는 모두가 마다하던 자리였다. 그는 권력과 법이 맞설 때 법의 편에 의연히 섰고, 힘센 관습과 소수의 요구가 부딪칠 때 그 요구의 법적 타당성을 먼저 따졌다. 공적 사명을 부여받은 연방공무원으로서, 또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시민으로서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그일이 그때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절박하고 첨예한 일이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그는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1929~1968이나 맬컴 엑스Malcolm X, 1925~1965 혹은 당대의 몇몇 저명한인권운동가에 버금가는 영예와 명성을 얻을 수 있었지만, 당시에도세상이 많이 나아진 뒤로도 단 한 번 자신의 행적을 삶의 밑천으로삼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익명 대중의 피와 땀을 딛고 ‘역사에 남는맨 꼭대기의 시시한 자들‘이라는 놈 촘스키Noam Chomsky, 1928~ 식의냉소도 모면한, 드문 영웅이었다. - P132

1961년 5월 미시시피 주의 흑인 청년 제임스 메러디스 JamesMeredith, 1933~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미시시피대학교에 등록원서를 낸다. 그의 성적은 입학하고도 남을만큼 우수했지만 대학은 두 차례나 등록을 거부한 터였다. 그가 흑인이라는 게 이유였다.
당시의 민주당 주정부 역시 메러디스가 유권자법 위반으로 실형을산 이력을 빌미로 대학 측을 편들었다. 주정부와 대학은 인종주의적 편견 속에 있었지만, 설사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들 뒤에는 성난백인 유권자들이 있었다. 식당, 술집은 물론 버스 정류장에서도 흑인들은 백인과 공간을 공유할 엄두를 낼 수 없던 시절이었다. 미국남부의 거의 대다수 주가 그러했다.
메러디스는 미국 최대의 흑인 인권단체인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 - P132

협회NAACP‘ 회원이었다. 당시 그는 "내가 하려는 일이 어떤 어려움에 직면할지 잘 알고 있고, 또 감당할 준비가 돼 있다. (…) 누구도나를 억누를 수 없다"라고 말했다. 수차례의 청문회와 재판을 거쳐미국 연방대법원은 그의 입학이 정당한 권리임을 인정했고,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 1925~1968도 수차례 전화를 걸어 주지사를 설득했다. 1962년 10월에 대학 측은 메러디스의등록을 승인했다. 하지만 백인 학생들이 격렬한 시위로 실력 저지에나섰고, 그 와중에 두 명의 흑인이 숨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메러디스 역시 생명의 위협 속에 놓였다. 9월첫등교일, 존 도어인권국 수석검사는 연방보안관과 함께 메러디스와 나란히 등교를감행했다. 근 한 달간 그의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그를 지켰다.
당시 대학과 학교 인근에는 연방군인 500여명이 배치돼 소요 사태에 대비했다. 메러디스는 훗날 미국의 저명한 인권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활약했고, 미시시피대학교 교정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 P133

존 도어는 전통적인 남부 공화당 집안 출신이었고 스스로를 ‘링컨 공화주의자‘라고 부르곤 했다. 워터게이트사건이 터졌을 때 그는다시 워싱턴으로 불려와 미 하원 특별검사로 활약했다.(당시 그의 팀원 중 한 명이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1974년 7월 리처드 닉슨RichardNixon, 1913~1994 탄핵안 초안에 존 도어는 이렇게 썼다. "사적으로 나는 닉슨 대통령에 대해 아무 편견이 없고, 그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않다. 하지만 나는 대통령의 권력 남용 문제에 결코 무심할 수 없다. 3주 뒤 닉슨은 사임했다. 워터게이트사건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숱한 인터뷰 요청에도 불구하고 도어는 단 한 번도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돋보이게 할 만한 수많은 사연 - P138

의 주인공이었지만 자신의 경력과 경험을 소개하는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 1960년대 법무부 시절 그와 함께 일했던 새크라멘토 법대의 도로시 랜즈버그 부학장은 <LA타임스> 인터뷰에서 "도어는 늘 겸손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낼 뿐이었다. 우리가 그를 사랑했고, 그를 위해 열심히 일했던 것도 그때문이었다"
라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고향 미니애폴리스로 돌아가 아들이운영하는 로펌에서 주로 인권 사건을 맡아 일하며 여생을 보냈다.
1985년 PBS가 만든 1950, 1960년대 시민권 운동 특집시리즈에인터뷰이로 등장한 도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우리는 혁명이나전쟁이 아니라 법적 절차를 통해 카스트제도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항상 느꼈던바, 당시 현장에는 언제나 강하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미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법에 근거한 민주적이고헌법적인 절차들을 완성해냈다" - P139

2012년 메달 수여식 후 케이블방송 C-SPAN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을 "1960년대 이후 인종 평등을 위해 전진해온 모든 노력의 놀라운 결실"이라고 말했다. "당시 셀 수 없이 많은 남부의 흑인들이 투표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2등 시민이었고, 차별은 잔혹하고 끔찍했다. 이제 끝났다"
그는 2014년 11월 11일에 별세했다. 향년 92세. 오바마 대통령은백악관 공식 자료를 통해 "그의 용기와 인내가 없었다면 미셸과 내가 지금 여기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애도했다.
하지만 "이제 끝났다" 라는 그의 진단은 그의 희망이었다고 해야한다. 그는 미주리 주 퍼거슨사건 18세 흑인 청년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사건에 대한 대배심의 불기소처분과 그 이후의 상황들을 보지 못했다. - P139

생존자에서 조력자로
폭력 피해 여성 구제를 위하여


영국의 여성인권운동가 데니즈 마셜Denise Marshall은 1961년 12월12일에 런던 북부 하이버리의 아일랜드계 어머니와 외판원 아버지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재혼했다. 양부는 무능하고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마셜은 집에서 부모에게 맞는 게 일이었고, 학급에서는 가장 가난한 학생으로 따돌림을당했다. 아홉 살 때 부모가 너무 싫어 찻잔에 표백제를 부은 적이있는데, 그걸 알아챈 부모가 그를 야단치기는커녕 오히려 재미있어했다고 한다. 함께 살던 양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의강간이 시작된 것은 마셜이 일곱 살 되던 해부터였다. 어느 날 열네살의 자신을 또 덮치려는 할아버지에게 마셜은 다가오면 죽이겠다고 말했고, 비웃으며 덤벼든 그의 다리를 칼로 찔렀다. 강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 일이 있기 두 해 전 열두 살 때 경찰서에 찾아가강간당해온 사실을 고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어요. 오히려 쫓겨났죠. 1970년대가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 ‘이브스 Eaves‘를 찾아오는 어린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볼 때마다 나 - P149

는 이 사회가 1970년대 이후 얼마나 진보했나, 진보하기는 했나 싶어 절망합니다." ‘

페미니즘 전사戰士가 실재한다면, 데니즈 마셜은 그 일원이라고불릴 만했다. 영국 젠더폭력 피해 여성 구제단체 ‘이브스‘ 대표로서그는 유·청년기의 저 결기로 불의와 부당함에 맞섰다. 사건 현장에그가 나타나면 경찰들의 태도가 달라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성폭력·가정폭력·강제 성매매 피해 여성들의 구호시설을 열고 정신적·육체적 회복과 자립을 위한 창의적이고도 실질적인 여러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그에게 피해자는 동정하고 시혜를 베풀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불의에 희생된 동지였다. 그들의 위축된 자아를 북돋워피해자가 아닌 생존자 survivor로 다시 서게 하고, 나아가 다른 피해여성을 부축하는 조력자 supporter로 힘을 보태게 한 것은, 그의 삶이그러했듯 바로 그들에게서 세상을 바꿀 힘을 찾고자 해서였다. 영미국 왕실은 2007년 그에게 대영제국훈장을 수여했다. 마셜은 4년 뒤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빅 소사이어티‘의 위선을 향해 그 훈장을집어 던졌다. 그런 데니즈 마셜이 2015년 8월 21일 별세했다. 향년53세. - P150

기고문에서 피해 여성과 전문가들의 도움을 이어주는 매개 프로그램으로써 아미나 프로젝트를 런던뿐 아니라 영국 전역과세계로 확산해야 한다고 썼다. "아미나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 여성뿐 아니라 자원봉사자들의 삶도 보상받고 또 변화한다. 그들은 폭력에 대한 이해를 키우고 극복의 기술을 익히며 자기 삶의 새로운전망과 지평을 열게 된다. 한 참가자가 표현했듯이 ‘내 안에서 마치페미니스트의 그것과 같은 뭔가 포효하듯 깨어나는 경험을 하게되는 것이다."
‘피해자가 생존자로, 나아가 조력자로 변화하는 그 과정은 마셜의삶의 이력이기도 했다. 그는 내무부가 주최한 성폭력 컨퍼런스에서한 강간 피해자가 사례를 발표하는 동안 여성 전문가들이 분노는커넝넋 나간 얼굴로 동정하듯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났다고 말했다. 2003년 이후 파피 프로젝트를 거쳐 간 여성은 약 3000명에달하고 그중 1000여 명이 영국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 P152

영국 최대 여성 · 아동 자선단체인 ‘위민스에이드Women‘s Aid‘에 따르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일반 폭력 범죄는 1995년부터 2014년까지 약 3분의 1로 꾸준히 감소한 반면 가정폭력은 전혀 줄지 않았다.
2013년의 경우 매주 약 두 명의 여성이 파트너나 전 파트너에 의해살해당했다. 전체 여성 피살자의 46퍼센트였다. 여성이 남성 파트너를 살해한 경우는 7퍼센트였다. 2012년 한 해, 가정폭력을 겪은 여 - P152

성은 전체의 약 7.1퍼센트였고, 16세 이후 가정폭력을 경험한 적이있는 여성은 30퍼센트에 달했다. 영국 경찰은 30초마다 한 통꼴의가정폭력 피해 신고 전화를 받고 있다. 이브스가 인용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국 가정폭력 피해의 사회적 비용은 연간 160억 파운드에 달하고, 부상을 치료(정신과 진료 비용은 제외)하는 데만 약 17억파운드가 든다. 성폭력과 강제 매매춘 등을 뺀 가정폭력 피해만 그렇다‘
위민스에이드는 여성 한 명을 6개월간 구호시설에 수용하는 데드는 비용이 인건비와 시설운영비 등을 포함해 약 9600파운드라고밝혔다. 영국 정부는 2010년 약 1억 파운드의 예산으로 젠더폭력피해 여성 구제단체들을 지원했다. 그해 집권한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정권은 그 예산을 대폭 삭감하기 시작했다. 2015년 영국 정부의 젠더폭력 구제 예산은 2010년의 4분의1 수준인 2800만 파운드였다.  - P153

이른바 ‘빅 소사이어티‘ 정책, 즉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서비스를 정부에만 의존하지 않고 가족과 이웃, 사회공동체가 합심하여 추진함으로써 서비스의 효율을 높이고 작은 정부를 실현한다"
하는 구상의 일환이었다. 2010년 187곳에 달하던 젠더폭력 구제 시설은 2014년 155곳으로 줄었고, 그나마 대부분 극심한 운영난을 겪게 됐다. 위민스에이드는 "지난해 하루 평균 약 112명의 여성과 84명의 아동이 각종 구호시설을 떠나야 했다"라고 밝혔다.

마셜의 이브스와 파피 프로젝트도 직격탄을 맞았다. 젠더폭력은사회 기부의 가장 변두리 분야 가운데 하나다. 게다가 인신매매 피해 여성에 대한 지역사회의 시선은 위선적인 온정조차 기대하기 힘들 때가 많다. - P153

마셜은 범죄소설 마니아였고 영혼의 암살자 Soul Assassin』와 『긴그림자 The Long Shadow』라는 두 권의 범죄소설을 자비 출판한 작가였다. 어둡고, 새롭고, 조금은 자전적인 내용이라고 줄리 빈델은 그의 작품들을 평했다. 파트너리사가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은2003년 무렵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마셜은 "나 같은 ‘생존자‘는 상담을 받으라는 말을 늘 듣곤 한다. 하지만 내겐 글쓰기와페미니즘이 최선의 치료법이었다" "픽션 안에서 당신은 당신의 세상을 통제할 수 있고, 당신이 원하는 세상을 구현할 수도 있다"라고말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픽션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해 위암과 소장암말기 판정을 받고 줄곧 투병했다. 빈델은 병석의 그가 "할 일이 아직 많다" "레즈비언들을 위한 안전한 거처를 마련하고 싶고, 무엇보다 먼저 이 비정한 정부를 쫓아내고 싶다"라고 했다고 전했다. - P155

순간을 사는 존재
이단자라는 오명 속에서 존엄사 합법화에 나서다


기독교의 퇴행적 보수성과 몽매주의에 맞서 교회의 혁신과 종교건강성을 회복하고자 헌신했던 ‘이단자 Heretic 라루‘가 2014년 9월 17일 작고했다. 목사이자 종교학자였던 그는 성서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교회와 스스로도 믿지 않으면서 성서의 기록을 역사의 진실처럼 설교하는 목회자들을 비판했다. 또 노인학자로서 삶의 위엄 못지않게 죽음의 존엄을 중시했고,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활동에 생애를 바쳤다. 기성 교단과 다수의 보수 기독교인들로부터 비난받으면서도 그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외적인 것들의 허구성을 전투적으로 고발했다. 향년 98세. - P157

훗날 목사가 되고 종교기관의 성서연구자로 활동한 것을 보면당시의 저 별명은 그리 진지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존엄사 합법화 운동의 선봉에 서면서 그는 적어도 보수 교단의 입장에서는 진짜 ‘이단자 라루‘였다.
죽음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70년대부터 이어져온 듯하다. 1976년에 그는 한 심리학자가 임종을 앞둔 이들을 대상으로 죽음과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직한 태도 등을 설명하는 강연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리고 4년 뒤 영국의 저널리스트 출신 데릭 험프리Derek Humphry,
1930~와 함께 미국의 선구적인 존엄사 옹호 단체 ‘헴록 소사이어티Hemlock Society‘를 설립, 8년 동안 의장을 맡는다. 험프리는 불치병 아내의 자살 결심과 실행 과정을 기록한 『진의 길 Jean‘s Way』과 『마지막출구Final Exit 등의 저자이자 존엄사 합법화 운동의 선구적인 활동가였다. - P162

목사 자격을 지닌 종교학자가 존엄사를 지지하는 상설 조직을만들어 리더가 되는 일은,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로서는 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직을 사퇴하고 노인학과 겸임교수가 된다. 험프리는 "라루는 누구도 두려워 엄두를 내지 못하던 단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생의 막바지에 이른 이들에게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부여하자는 주장을 둘러싼 논란이 미국에서 막 시작되던 때였고, 당연히 뜨겁고도 예민한 주제였다. 그는 그 민감하고 논쟁적인 시기에 엄청난 조정력을 발휘하며헴록을 이끌었다"라고 회고했다.
헴록은 의학·법률 전문가 등과 함께 불치 환자 상담과 존엄사 합법화 운동 등을 주도했고, 1994년 오리건 주가 미국 최초로 존엄사 - P162

를 합법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힘록은 2007년에 관련 단체 등과 연합하여 공감과선택Compassion & Choices‘이라는 이름의 시민단체로 거듭났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4년 10월 16일 자 「죽을권리-힘을 얻다‘The right to die-Seizing some control」는 기사에서 뇌암에걸린 뒤 오리건 주로 이주해 의사의 존엄사 처방을 받은 캘리포니아의 스물아홉 살 여성 브리트니 메이너드가 그해 11월 1일에 자신의 삶을 끝내기로 했고, 남은 삶을 존엄사 옹호 운동에 바치고 있다는 사연과 함께 미국 사회의 죽음에 대한 전향적인 변화상을 소개했다. 미국의 경우 오리건 주를 이어 버몬트 몬태나, 워싱턴·뉴멕시코 주가 존엄사를 합법화했고, 존엄사 법안이 계류 중인 곳은더 많다. <이코노미스트>는 생사를 신의 선택으로 믿어온 강고한기독교 전통과 "목숨만은 신의 것"이라고 했던 사유재산권의 아버지존 로크의 정신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며, 교회에 규칙적으로다니는 미국의 신도 가운데 최소 20퍼센트가 존엄사를 옹호한다는공감과선택의 조사 결과를 인용하기도 했다. 저 거대한 변화의 물꼬를 튼 이가 라루였다.  - P163

그리고 라루의 교재 이야기도 있다. 라루는 매 학기 첫강의 때면 학생들에게 실제 사람의 골분을 보여주곤 했다. 자신의 친구였던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심리학과 허먼 하비 교수가 라루에게 강의 교재로 쓰라며 유언한 그의 뼛가루였다. 라루는 죽음의 실체를이성적으로 가르쳤고 "하비는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라며 농담처럼말하곤 했다.
또 그는 <레지스터> 인터뷰에서 "당신이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삶을 통해 추구하는 것들의 중요성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성과 성서』 『안락사와 종교』 『신의 역할』등 다수의 논쟁적인 책을 썼다.
라루는 두 차례 결혼했고 이혼했다. 전 아내 에밀리 퍼킨스는 "라루는 우리가 하루하루 혹은 한 해 한 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항상순간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을 하곤 했다"라고 말했다. 죽음과 순간으로 닿아 있기 때문에 그의 삶이 더 열정적일 수 있었다는 거였다. 퍼킨스의 말처럼 라루는 자신이 믿고 가르친 바대로 살았다. 유족은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산소호흡기 연명치료를 거부,
그의 뜻을 존중했다. - P165

1960년대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불씨는 아무래도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가 암살된 1963년 베티 프리던의 책 여성의신비가 지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케네디 집권 초기 전미여성기구의 성차별 폭로, 고용평등 운동도 든든한 화약고였다. 다만 벅샌덜같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가 보기에 그들의 활동은 너무 개량적이고 온순했다.
초기 신좌파페미니즘운동가들은 성차별 문제를 자본주의의 역사와 노동 현실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열었고, 특히 1960년대 광범위하게 전개되던 인권·저항 운동 조직 내 성차별에 가장뜨겁게 분노함으로써 독자적인 운동의 장을 여는 데 기여했다. 공산주의 이념을 모태신앙처럼 내장한 페미니스트 벅샌덜에게 반자본주의 투쟁과 결합하지 않는 여성해방운동은 넌센스였다.  - P172

유년 시절 이후 집에서 겪어온 경험에 비춰 좌파운동진영내의 성평등의식이라는 게 어떤 지경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1998년 출간된 ‘페미니스트 회고 기획The Feminist Memoir Project 에실은 불 지피기 Catching the Fire‘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그는 "페미니즘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사랑에 빠지듯 여성운동에 매료됐고,
페미니즘은 내 생애의 퍼즐을 풀어주었다. 나는 민권운동, 반전운동 등등을 해왔지만 내게 그것들은 의무감과 분노의 소산이었지 내자신의 싸움은 아니었다"라고 썼다. 유년의 아버지로 표상되는 것들에 대한 애증을 그는 그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인종과 계급과 젠더의 구조를 교차시켜보고자 했다. 사회변혁은 급진적인 제도 개혁을 통해 교정돼가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
하지만 그의 급진적 페미니즘은 여성학과 여성운동사에 미친 영 - P172

향에 비해 운동 진영 내에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1971년 이후그는 뉴욕주립대학교 교수가 돼 여성노동운동사를 가르치며 여성운동 현장과 거리를 뒀다. 대신 급진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가치를추구하며 독자적인 삶을 개척해나갔다. 그는 1976년 린다 고든 수전 리버비 등과 함께 미국 노동 여성 America‘s Working Women』이라는전 6권의 방대한 자료집을 공동 출간했다. 370여 년간 여성들이 남긴 일기, 구술 기록, 편지, 노래, 시, 사료집, 대중잡지, 기사까지 수집해 여성들이 노동으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고 어떤 조직을 만들어 어떻게 일했는지, 노예 여성들이 들판이나 집 안에서 했던 일과사보타주 사례까지 집대성한 저 책은 여성학과 노동학에 중요한 1차 자료로 꼽힌다. 당시 랜덤하우스의 젊은 편집자가 토니 모리슨이었다. - P174

벅샌덜 등은 1995년 인종적 · 민족적 배경과 지역 변수를 포함시킨 개정판을 냈고, 앞서 1987년에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ww의 조직가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Elizabeth Gurley Flynn, 1890~1964의 평전『워즈 온 파이어Words on Fire를 내기도 했다. 플린은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주요 활동가로 조직 내 성차별과 중앙집중적 구조 등에 대해 선구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며 싸운 공산주의자였지만, 벅샌덜의평전이 나오기 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여성이었다.
2011년 은퇴 후에는 뉴욕시립대학교에서 노동학을 강의했고, 베이뷰 여성 마약경범죄 교정시설에서 수감자들을 교육했다. 2011년말 한 인터뷰에서 그는 경범죄 교정시설이 수감자(대부분 18~34세스패니시와 아프리칸아메리칸이라고 했다)들의 교정·재활을 돕기보다그들을 사회의 낙오자로 만들고 있다고 성토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학생들은 지식에 목말라 있다" "정치적인 문제에 아주 성실하 - P174

다. 그들은 어서 나가서 ‘월가 점령‘ 시위에 참여하길 원하며, 뭔가이 사회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는 이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여성과 계급의 혁명적 건강성을 믿고 미래를 낙관한 힘찬 사회주의자였다. 올초 병원에서 신장암 말기 판정을 받자마자 곧장 퇴원, 친구들을 초대해 성대한 고별 파티를 열기도 했다. 그가 2015년 10월 13일 별세했다. 향년 76세.

영국의 저명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이자 왕립학회 회원인 실라로보덤Sheila Rowbotham, 1943~은 <가디언> 부고에서 "벅샌덜은 어디를 가든 선동하고 조직했다. 또 어디서든 환영받고, 사랑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를 이어주고 또 가르치고 돕고 아이디어를 나누는 데 쏟았다"라고 썼다. 시카고의 비영리 좌파 정치시사 전문 출판사 ‘헤이마켓북스 HaymarketBooks‘ 는 추모의 관용구 R.I.PRest In Peace‘ 대신 "Rest In Power"라는 멋진 표현으로 로절린 벅샌덜의 삶과 죽음을 함께 기렸다. - P175

벤치의 익살꾼
즐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시합에서 진 감독이 "난 잘했는데 애들이 형편없어서"라고 말했다고 치자. 사실이라면 그는 좋은 감독이 아닐 것이다. 선수들의 사기를 죽이고 팀워크를 해치고 팬들의 냉소와 비아냥을 사기 딱 좋은 말 아닌가. 하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진 않더라도, 패전팀감독의 심중에 저런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속내가 은연중에라도 드러날까 봐 더 조심할 것이다. - P177

1964년 미국 프로야구 마이너리그 산호세 비스Bees 감독 로키 브리지스는 데뷔전 패배 뒤 인터뷰에서 저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쏟아진 건 팬들의 비난이 아니라 유쾌한 웃음과 응원이었고, 선수들 중 누구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가 정말 잘나서가 아니라
‘못나서였다. 그는 그렇게 실패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전가하는 리더들의 오랜 관행을 기분잡치지않게 조롱했고, 저 상투어의 의미를완벽하게 뒤집었다.
그가 얻고 또 선사한 웃음은 메이저리그 선수로서나 코치와 감독으로서, 야구를 통해 추구했던 궁극적인 가치였다. <스포츠일러 - P177

스트레이티드>가 인정한 ‘미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익살꾼‘ 로키 브리지스가 2015년 1월 28일, 아이다호 주 코들레인의 한 호스피스병동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

에버렛 라마 브리지스 Everette Lamar Bridges, 애칭 로키 Rocky 브리지스. 그는 1951년에 미국 메이저리그 브루클린 다저스에 입단해 1961년에 LA에인절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만 10년 동안 2272타석 2할 4푼 7리의 타율을 기록했고, 통산 열여섯 개의 홈런을 쳤다. 현역 시절 그는 1·2·3루 등의 다양한 포지션을 거쳤지만 그가 가장 오래머문 자리는 벤치후보였다. 10년 사이 그는 무려 일곱 개 팀을 전전했고, 전반기와 후반기를 다른 팀에서 뛴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미국 프로야구 역사의 저 숱한 스타들 명단 속에서 그의 이름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야구를 정말 사랑하는 이들 중에는 그를 메이저리그의 가장 ‘즐겁고 행복한 선수로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 P178

군대 민주화 운동
부당한 명령과 처우 개선, 반전운동에 힘써


만일 군대에 노조가 생긴다면? 임금과 근무시간, 복지 규정을 두고 매년 정부와 협상을 벌인다면? 부당한 명령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부대원이 지휘관을 선출하자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군대를 없애자는 말만큼이나 급진적인, 그래서 꿈 같은 저 주장이 실제로 제기된 적이 있다.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구정 대공세 직전인 1967년 12월 미국 뉴욕에서였다. 그해 베트남에는 미군 약 50만 명이 주둔해 있었고, 대통령 린든 존슨이의회를 상대로 추가 파병의 불가피성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리던때였다. ‘미국군인노조ASU‘라는 이름의 그 조직은 반전 및 군대 민주화를 기치로 병영 안팎에서 꽤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고, 1960, 1970년대 좌파 운동과 결합하면서 베트남전쟁 종전에 크게 기여했다. 미국군인노조를 설립하고 이끈 앤드루 딘 스태프 Andrew DeanStapp가 2014년 9월 3일에 별세했다. 향년 70세. - P187

훗날 밝혀진바, 베트남전쟁에 징집된 전투병의 80퍼센트가 블루칼라 출신이었다. 대학생은 전체의 20퍼센트로 당시 대학 진학률약50퍼센트에 턱없이 못 미쳤고, 그들은 대부분 장교로 활동했다. 1970년대하버드대학교 재학생 가운데 베트남에 파병된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파병이 시작되고 전쟁이 확산되면서 시민들은 그 전쟁의 계급적·계층적 편향성을 분위기로 체감하게 됐고, 1년 단위로 교대하던전선의 군인들과 제대병들의 증언을 통해 전쟁의 실상이 알려지기도 했다. 그 전쟁이 정부가 선전하듯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 베트남 주민들의 차가운 반응과 누가 적이고 누가 민간인인지 모른 채 총을 쏘아야 하는 현실, 전장의 병사들에게전황을 정직하게 전달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 - P188

프는 한 인터뷰에서 "정부는 언제나 미군이 베트남 국민을 돕기 위해 거기 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1968년경에는 모든 게 거짓임이명백해졌다." 미군 대위 하워드 레비가 양민 학살자라며 그린베레병사들의 교육을 거부, 군사재판에 회부된 건 1967년이었다.(1964년에 미국 대법원의 흑인참정권 판결을 이끌어낸 앨라배마의 인권변호사찰스 모건 주니어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레비는 3년형을 선고받았다.) 앤드루 딘 스태프가 미 육군에 입대한 건 그해 봄이었다. - P189

도둑맞은 행복
수용소에서 1600킬로미터를 걸어 가족 품으로


매년 5월 26일은 호주 의회가 정한 ‘국가 사과의 날National SorryDay‘이다. 호주 정부가 과거 원주민에게 범한 야만적인 일들을 사과하고 잊지 않겠다는 취지로 비슷한 잘못을 다 함께 경계하자는 취지로 1998년에 지정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나 점령국에 가한 약탈과 학살 등의 악행은 보편적인 역사지만 호주의 과거는 좀특별하다. 당시 호주의 백인 정부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태어난아이들을 부모와 혈족의 품에서 강탈해 집단시설에 수용한 뒤 결혼과 교육과 노동으로 원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탈색하고 백인화했다. - P197

그 만행은 합법적으로 장장 두 세대를 넘겨 1905~1970 자행됐고,
사실상의 ‘국가 유괴‘로 최소 10만 명의 아이들이 수용소로 끌려갔다. 자신의 언어와 종교와 관습과 핏줄을 도둑맞은 그들이 이른바호주의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다. 호주 정부의 첫 공식 사과는 2008년 2월 13일에 이루어졌다. 당시 수상이었던 케빈 러드 Kevin - P197

Rudd, 1957~는 의회 연설에서 "We are sorry (우리가 잘못했습니다)"를연발했다.
도둑맞은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상처를 극적으로 증언하고 호주의 국가적 양심과 인류 보편 윤리의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내딛게 한 원주민 작가 도리스 필킹턴 가리마라Doris Pilkington Garimara가 2014년 4월 10일에 영면했다. 향년 76세. 그는 한국에도 번역 출간된 책 『토끼 울타리』의 저자이자 백인수용시설을 탈출해 장장1000마일약 1600킬로미터 걸어 가족 품으로 돌아온 토끼 울타리의실제 주인공 몰리 켈리의 장녀다. - P198

1931년 7월, 호주 북서부 깁슨 사막 인근 원주민 마을 지갈롱의열네 살 몰리는 동생 데이지, 사촌 동생 그레이시와 함께 백인 경찰에게 끌려갔다. 부모는 저항도 못한 채 통곡만 했고 할머니와 친척들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려는 부족 전래의 방식대로 제 머리를돌로 찧으며 함께 아파했다. 그들 형제는 원주민 어머니 모드가 토끼 울타리‘ 감독관이던 백인 아버지와 낳은, 마을 최초의 혼혈아다. 토끼 울타리는 동부 지역의 야생 토끼들이 서호주 목장의 목초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호주 정부가 1907년에 세 갈래로 나누어 설치한 연장 2023마일 3256킬로미터의 철조망으로, 그 철조망의 한 기점이 몰리의 고향 지갈롱이었다. - P198

아이들은 부족 언어를 쓰면 혼이 났고, 영어로 성경을 읽고 주기도문을 암송해야 했다. 하지만 몰리를 가장 분노하게 한 것은 수녀의 말 한마디였다. "우리에겐 엄마가 없다고 했다. 우리 말은말이 아니라고 했다."
며칠 뒤 아침, 수용소 아이들이 예배를 보러 교회로 이동한 사이몰리는 "엄마에게 가자"라며 두 동생을 이끌고 숲으로 도망쳤다. 어릴 적부터 고향에서 익힌 사냥 기술과 감각, 그리고 토끼 울타리만찾아 따라가면 아무리 멀어도 집에 닿는다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다. 그들은 헬기까지 동원한 추적을 피해가며,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난생처음 맞닥뜨리는 사막과 벌판과 숲을 헤쳐가며, 사냥과 구걸로 허기를 달래고 추위와 공포를 견뎌가며, 상처로 곪은 발의 통증을 참으며, 칭얼대는 동생들을 번갈아 입어주면서, 장장 9주 동안거의 맨발로 호주 대륙을 중단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수용소 탈출에 성공한 예는 몰리 일행이 처음이었다. 아이들을 추적하느라 큰돈을 쓰고 체면까지 깎인 원주민보호국은 몰리와 데이지를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 P199

하지만 시련은 끝이 아니었다. 백인 목장의 하녀로 살며 목부牧夫토비 켈리와 결혼, 도리스와 애너벨을 낳은 몰리는 1940년 11월에맹장염으로 수술을 받은 직후 두 아이와 함께 다시 무어 강 원주민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리고 9개월 뒤 네 살이었던 도리스는 남겨둔채 18개월 된 애너벨만 안고 다시 탈출, 지갈롱으로 돌아오지만 3년뒤 애너벨을 또 빼앗겼다. - P199

호주 정부가 사과하기까지 기나긴 줄다리기가 있었고, 땅과 함께정체성을 잃어버린 다수의 원주민들은 2등 시민으로, 술과 마약으로 황폐해져갔다. 호주 비원주민으로서 조국의 어두운 역사를 고발한 첫 지식인 세대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인류학자 윌리엄 E. H. 스태너다. 그는 150여 년에 걸쳐 원주민 사회에 자행된 파괴와 약탈의 역사에 대한 정부의 외면을 ‘거대한 호주의 침묵Great AustralianSilence‘이라 불렀다. 진보 학계와 원주민단체의 요구에 1992년 폴 키팅Paul John Keating, 1944~ 정부는 약탈과 살인, 문화와 생활양식의 파괴를 제한적으로 인정했지만 사과는 거부했다. 1997년 의회 인권위원회 보고서가 나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유당 존 하워드 JohnHoward, 1939~ 정부는 ‘사과sory‘가 아니라 역사적 흠집blemish에 대해
‘유감regre‘이라고 말했다. 당시 수상인 하워드는 선조들의 행위에대해 현 수상이 사죄할 수는 없다고 했고, 그들의 행위가 그릇된 것이긴 하나 선한 의도였던 만큼 사죄할 일이 아니라고도 했다. - P204

2014년 2월 케빈 러드 전 수상은 ‘국가사죄기금National ApologyFund‘을 발족하고 초대 의장을 맡았다. 그는 "우리는 우리 역사의 원주민성을 감추려 하기보다 더 확장된 국가적 정체성의 하나로 끌어안아야 한다. 우리는 원주민과 비원주민 삶의 간극으로 하여 미래세대로부터 비난받지 않아야 한다"라고 연설, ‘토끼 울타리‘로 깎아먹은 호주의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만회했다.
도리스는 화해위원회의 창립 멤버이자 ‘국가 사과의 날‘ 제정의발의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시드니모닝헤럴드>는 도리스가 숨지기 3주 전 고향에 가 몰리가그를 낳았던 부족의 성목 윈타마라 나무 아래에 앉아 긴 영적인 시간을 보냈고, 퍼스로 돌아와 혈족들의 기도 속에서 엄마 곁으로 영원히 떠났다고 전했다. - P205

등불을 켜는 자
경찰 내부고발자로 산다는 것


로빈 무어Robin Moore, 1925~2008의 논픽션 프렌치커넥션이 출간된게 1969년이다. 프렌치커넥션은 중동 지역에서 재배된 아편이 프랑스에서 헤로인으로 가공돼 미국 동부로 반입되는, 1960년대 최대의 마약 밀매 루트와 시스템을 일컫는 말, 책은 뉴욕경찰청NYPD 마약단속국의 영웅적 형사들이 그 유통 조직을 추적 소탕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1971년 진 해크먼이 주연을 맡은 윌리엄 프리드킨의 동명 영화는 큰 인기를 끌며 아카데미작품상 등 5개 부문상을 탔다.
책 출간과 영화 개봉 사이, 1970년 4월 25일자 <뉴욕타임스>에는 로빈 무어의 책이 그렸던 경찰상과는 정반대인, 뉴욕경찰청의 만연한 부패·비리 실태를 폭로하는 기사가 1면에 실렸다. 브루클린과브롱크스 지역 순찰대 소속 이탈리아계 경찰관 프랭크 서피코FrankSerpico, 1936~의 제보에 근거한 기사였다. 정기 상납과 뇌물 단속 정보 누설….…. 그는 언론 제보 전에 그 사실들을 감찰 당국에 보고했지만 전혀 시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는 말도 했다. 보도 직후 - P207

당시 뉴욕시장이던 존 린제이는 지방검사 휘트먼 냅Whitman Knapp,
1909~2004을 의장으로 한 경찰부패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냅위원회‘는 그해 6월부터 조사 활동을 시작해 1972년 8월 첫 보고서를발표했다.
서피코의 폭로는 맛보기일 뿐이었다. 영화의 감동에 취해 있던 이들의 예상과 달리 부패 경찰이 있다 해도 얼마 안 될 테고 비리라해도 자계自戒의 선은 있으리라 여기던 시민들의 기대와도 달리, 그들은 압수한 마약을 빼돌려 유통했고 수익금을 나눴으며 그것을단속 현장에 없던 요원들에게까지 일정 비율로 분배하고 있었다. 심지어 프렌치커넥션의 카르텔 조직원이나 다름없이 협조한 이도 있었다. - P208

그냥 경찰관도 아니라 자타공인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 자부하던뉴욕경찰청 마약특별조사팀SIU의 실상이 그러했다. 마약특별조사팀은 거리의 조무래기 소매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카르텔 유통 거점과 거물들을 추적·단속하는 임무를 전담한 팀이었다. 1972년 마약특별조사팀 전체 요원 70명 가운데 52명이 기소됐다. 판사는 그렇게 벌어들인 검은 돈으로 최고급 양복에 비싼 차를 몰고 다니며돈을 물 쓰듯 하면서도 경찰 신분증까지 지니고 있던 그들을 ‘도시의 왕자들‘이라고 불렀다.

냅위원회의 거의 모든 조사 성과는 30세 신참 마약특별조사팀요원 로버트 루시Robert Leuci의 목숨 건 활약 덕이었다. 냅위원회의설득으로 비밀요원 Undercover이 된 그는 16개월 조사 기간 동안 무선마이크를 숨긴 채 동료들과 생활했고, 도청기가 발각돼 두 차례나 살 - P208

해당할 위기까지 겪으며 비리 현장의 대화를 위원회에 생중계했다.
서피코도, 그보다 네 살 아래인 루시도, 브루클린 출신의 이탈리아계 이민 2세였다. 루시는 파이프 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봉제공장 직공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1940년 2월28일에 태어났다. 그의아버지는 어린 루시에게 성을 이탈리아어식 발음레우치이 아닌 영어식투시으로 발음하게 했다. "아버지는 미국인이 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끊임없이 주입하곤 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퀸스의 존애덤스고교를 졸업하고 캔자스베이커대학교에 입학한 열아홉 살에 그는
‘미국인이 되기 위해‘ 뉴욕경찰아카데미에 입교했고, 2년 뒤 자신과가족의 염원이던 뉴욕경찰청 배지와 휘장을 단다. 퀸스와 맨해튼,
브롱크스 등지의 순찰대원으로 일하던 그가 마약단속국 사복형사로 승진한 것은 스물네 살이던 1964년이었고, 또 몇 년 뒤 선망하던 마약특별조사팀에 발탁됐다.  - P209

그는 발군의 검거 실적을 쌓은 뛰어난경찰관이었다. 그리고 그도 이내 부패경찰이 됐다. 훗날 자서전 『올더 센추리언스All the Centurions에서 고백했듯, 당시의 그에겐 소속감이 절실했다. 부패는 가장 강력한 유대의 끈이었다.
냅위원회가 그를 선택한 배경은 확실하지 않다. 위원회 출범 초기, 검사였던 니콜라스 스코페타라는 이가 그를 설득했다고 한다.
스코페타는 "루시는 나쁜 경찰이었지만 그에겐 좋은 편이 되려는의지가 있었고, 그 일에 목숨을 걸었다"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젊어(그 무렵 30세) 물이 덜 들었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고, 1972년 <라이프> 보도처럼 "흑발에 구레나룻, 잘생긴 얼굴에 젊음의 기대감이 가득 담긴 온화한 갈색 눈동자의 그가 누구에게든 어떤 일에서든 확신을 줄 만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끄나풀‘이 되지 - P209

않으면 ‘미국인‘으로 남을 수 없을 만한 결정적인 약점을 잡혔을지도 모른다.
루시도 위원회의 제안에 선뜻 응한 건 아니었다. 오래 망설였고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는 조건을 달았다. 냅위원회가 경찰 비리에만초점을 맞춘다면 협조하지 않겠다, 뉴욕의 범죄 정의 시스템 전체가 부패했고 경찰은 50여 년 동안 굳어진 그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라는 거였다. 그가 요구한 ‘대의‘는 정의와 직업윤리 이전에 배반에 따를 인간적 고뇌를 견디기 위한 버팀목이기도 했을것이다.
스코페타가 그의 조건에 어떻게 답변했는지 역시 알려진 바 없다. 어쨌건 그는 협력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동기를 말하라면,
그건 (처벌의) 두려움이 아니라 죄의식이었다"라고 말했다. 그 죄의식은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서피코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 P210

미국의 감시자
스페인내전 참전 병사가 본 세계 정치


선택과 판단은 늘 곤혹스럽지만 특히 어려운 선택도 있다. 입바른 말 한마디로 앞길이 어긋나기도 하고, 투자나 빚보증에 자식들의 팔자가 출렁일 수도 있다. 좀 거창하지만 시대나 역사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선택도 있다. 시대가 가파를수록, 예컨대 전쟁이나 혁명의 시대라면 그 선택은 더 어려워진다. 100년 전 대한제국의 적지않은 이들은 선택의 자리 위에 제 목숨까지 얹고 고민했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 잘 만나고 나라 잘 만나는 것 못지않게 시대를 잘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목숨 걸 일도 없고, 비겁함을 드러내지 않아도되고, 비교적 안전하게 용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내전이 터진 1936년, 지구에는 약 20억 명이 살았다. 그들가운데 3만여 명이 파시스트 반란군에 맞서 스페인공화국 합법 정부를 지키기 위해 조직된 ‘국제여단‘에 가담했다. 그들 대부분은 국가나 조직의 명령에 등 떠밀려 나선 게 아니었다. 조국과 민족,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돈이나 명예를 좋은 것도 아니었다.
이름 없는 그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위해 유럽과 아메 - P217

리카, 더 멀리 중국에서 목숨을 걸고 달려간, 말 그대로 의용군이었다.(스탈린 체제의 코민테른이 그 안에서 어떻게 무정부주의자와 대립하고 억압했는지는 나중 일이니 덮어두자.)올해는 스페인내전 발발 80주년이다. 국제여단의 가장 어린 세대였을 10대 후반, 20대 초반 청년들 중 용케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도 이제 대부분 세상을 떴다. 델머 버그 Delmer Berg 는 국제여단 미국인 의용군 부대 ‘에이브러햄링컨여단‘의 평범한 병사였지만, 가장 오래 살아남아 특별한 병사가 됐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싶어서가아니라 그냥 스페인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라고 말했던 그 마지막병사가 두 달 넘긴 100년을 살고 2016년2월28일 별세했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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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만큼 많이 알려져 있으면서 울프만큼 읽히지 않은 작가도 드물 것이다. 모르긴 해도 다른나라에서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이것은 울프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평생 소설의 새로운 기법을 천착했던 그녀는 작은 표현 하나의 실험을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녀는 우선 모더니스트이다. 조이스와 더불어 의식의흐름 수법을 소설에 도입하고 완성시킨 작가였다. 또 그녀는 누가 뭐래도 철저한 페미니스트이다. 울프의 페미니즘은 비록 예술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격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이나 페미니즘은 울프 문학의 진수도 아니며, 더더욱 전부는 아니다. 그녀의 문학은 - P4

한마디로 말해 인간주의 문학이다. 모더니즘, 페미니즘, 사회주의 따위는 그녀가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도중에 잠시 들른 간이역들에 불과하다. 궁극적인 목적지는 사랑과 이타주의利他主義를 근간으로 하는 인간주의라는 정거장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그녀를 지나치게 모더니즘의 기수로, 또는 페미니즘의 대모로 부각시키면서, 크고도 울창한 숲과같은 그녀의 문학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경향이 없지않았다.
이 전집의 발간이 울프의 세계를 바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나아가 읽는 분들의 정서를 순화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된다면 더없는 보람으로 여길 것이다.

박희진 - P5

많은 독자들에게 울프는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소설을발간하기 이전부터 그리고 그 이후로도 울프는 소설이 아닌 평문이나 에세이를 꾸준히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에세이스트이기도 합니다. 작가와 그 문학관, 역사와 사회상까지 망라한 서평과 함께 작가를 조명한 전기적 에세이,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한 비평적 에세이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에세이들은 정곡을 찌르는 문장의 묘미와 명징한 사고의 흐름으로 또 다른 울프를 보는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광범한 독서에서 연유한 통찰력과 혜안이 번득이는 에세이들이야말로 그녀만의 탁월한글쓰기 훈련장이었습니다. 이렇듯 균형 잡힌 시각과 명철한 사고를 바탕으로 소설적 기법을 실험했기에 그녀의 소 - P6

설이 갖는 난해성은 난해함 자체가 아니라 그 밑에 투명하게 비치는 밑그림을 드러내지 않나 싶습니다. 울프의 에세이는 지금까지 여섯 권이 발간되었습니다. 울프의 생전 출판된 『평범한 독자』 I, II와 울프의 사후, 남편인 레너드가에세이들을 모두 다시 편집해 네 권으로 묶은 게 그것입니다. 이번 번역의 원전은 레너드 울프가 편집한 네 권의 에세이 모음집 중 1권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 P7

셰익스피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 부류로 나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셰익스피어를 책으로 읽기를 선호하는사람들, 무대에서 공연되는 것을 보기를 선호하는 사람들,
그리고 책에서 무대로 끊임없이 달려가 노획물을 챙기는사람들, 만약 사과하나가 땅에 툭 떨어지는 소리나 나뭇가지들을 스치는 바람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않는 정원에서 『십이야 Twelfth Night)를 읽을 수 있다면, 분명히 『십이야』를 책으로 읽는 것에 관해 얘기할 게 많다. - P11

우선, 시간이 있다. 제비꽃이 핀 둑에서 숨 쉬는 향긋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작이 사랑의 본성을 파고들 때 그 미묘한 말의 암시를 설명할 시간이 있다. 또한 여백에 기록할 시간이 있다. ‘그녀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애정들을……) 간, 뇌, 심장이‘ [1막 1장]・・・・・・ 어느 날 밤 당신이데리고 들어온 멍청한 기사에 대해서‘ [1막 3장]와 같은 기이한 어구들에 경탄하고 이런 어구들로부터 ‘그런데 저는 일리리아에서 무엇을 해야만 하나요? 제 오라비는 일리시움에 계시는데 [1막 2장]와 같은 사랑스러운 어구가 생겨났는지 자문할 시간이 있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는 통제하에서 움직이는 완전한 정신으로 쓰는 게 아니라, 우연히 마주친 단어의 흔적을 붙잡아 무모하게 따라가기 위해 단어들과 놀고 장난치며 날아다니는 더듬이로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 단어의 메아리로부터 다른 단어가생겨나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로, 아마도, 우리가 이 희곡을 읽을 때 이 희곡은 음악의 가장자리에서 영원히 떨고 있 - P12

는 것 같다. 그것들은 항상 『십이야』의 노래들을 불러내고있다. ‘오 친구여 오게나, 우리가 지난밤에 불렀던 노래 말일세.‘ [2막 4장]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단어들과 깊은 사랑에빠지지는 않아서 언제나 단어들을 향해 비웃을 수 있었다.
‘단어들을 가지고 장난하는 사람들은 바로 단어들을 난잡하게 만들기 마련이지. [3막 1장]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리고나면 토비 경과 앤드루 경과 마리아가 불쑥 나타난다.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은 의미 있는 말들이다. 이 말들은 한 인물의 전체적인 성격을 짧은 구절에 집약한 채 성급하게 튀어나온다.  - P13

앤드루 경이 ‘나도 한때는 숭배를 받았단 말이지‘ [2막 3장]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를 손아귀에쥐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소설가라면 그와 같은 친밀한어조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데 세 권을 써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이올라와 말볼리오와 올리비아와 공작이, 우리의 정신이라는 무대의 빛과 그림자 사이를 오가며 움직일 때 그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추측하는 모든 것들로 정신은 가장자리까지 차고 넘쳐흐르게 되어서 우리는 왜 그들을 실제의 남자와 여자라는 육체 속에 가두어야 하는지 묻게 된다. 왜 이러한 정원을 극장으로 바꿔야 하는가? 대답은 셰익스피어가 무대에 올리기 위해 글을 썼으며 아마도 여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 P13

그다음엔 아마도 배우들이 너무나 개성이 뛰어나거나 너무나 맞지 않게 배역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연극을 분리된 조각들로 나누었다. 한번은 우리가아카디아의 숲 속에 있었고, 한번은 블랙프라이어에 있는어느 숙소에 있었다. 책을 읽는 정신은 장면에서 장면을거미줄 짜듯 이동하면서, 떨어지는 사과와 교회의 종소리와 그 희곡을 하나로 묶어주는 부엉이의 환상적인 비행으로 하나의 배경을 만들어낸다. 여기 공연장에서는 그러한연속성이 희생되었다. 우리는 보다 덜 화려한 공연의 만족스러운 절정이 될 수도 있을,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결합하는 듯한 느낌 없이 많은 화려한 파편들만을 가지고 극장을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극은 그 목적에 잘 - P18

부합했다. 그 연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읽은 말볼리오와 쿼터메인 씨가 연기한 말볼리오, 우리가 읽은 올리비아와 로포코바 부인이 연기한 올리비아, 그리고 그 희곡 전체에 대한 우리의 읽기와 거드리 씨의 읽기를 비교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셰익스피어에게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십이야』를 다시 읽어야만 한다. 거드리 씨는 그것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앞으로 공연될 『체리 과수원Cherry Orchard』,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 그리고 헨리 8세 Henry the Eighth』에 대한 갈망을 자극했다. - P19

지난 삼백 년간 영국에서 얼마나 많은 수백만 개의 단어가 쓰여지고 인쇄되었으며, 어떻게 해서 그 대부분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는지를 생각하면 던의 언어가도대체 어떤 속성을 갖고 있기에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그렇게 분명하게 들리는지 한번 생각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1931년은 아첨을 해도 용서를 받을 기념비적 해이지만 던의 시가 대중적으로 읽힌다거나 타이피스트가 퇴근하면서 지하철에서 던을 읽고 있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았다고 우리가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의시는 읽히고 우리 귀에 들린다. 그의 시집 개정판들과 그에 대한 글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엘리자베스 시대와 우리 시대를 갈라놓는 거친 - P20

바다를 건너는 오랜 비행 후에도 그의 목소리가 왜 우리 귀에 울려 퍼지는지 그 의미를 분석해보는 것은 아마도 가치있는 일이리라.
그의 시가 의미로 꽉 차 있지만 우리를 매혹시키는 첫 번째 속성은 의미가 아니고 훨씬 더 순수하고 직접적인 그 무엇이다. 그것은 그가 갑자기 말문을 터트리는 폭발력이다.
모든 서두와 논의는 다 소진되어버리고 그는 가장 짧은 길로 시 안에 바로 뛰어든다. 시구 하나면 모든 준비를 무색케 한다.


나는 어떤 늙은 연인의 유령과 이야기하고 싶소. - P21

또는


한 시간 동안이라도 사랑했다고 말하는자,
그 누구든 그는 완전히 미친자요. 


즉시 우리는 사로잡혀 멈춘다. 가만히 서시오. 그가 명령한다.



가만히 서시오. 그럼 나는 당신에게
사랑의 철학을 강의하리라, 내 사랑이여.



그리고 우리는 가만히 서야만 한다. 첫 단어부터 충격파가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이전에는 무기력하고 마비되었던 직관이 떨리면서 살아난다. 시각과 청각의 신경들이 일깨워진다. 우리 눈앞에 ‘빛나는 금발머리로 만든 팔찌‘ 가타오른다." 그러나 더 놀라운 점은 우리가 아름답게 기억 - P22

에 남는 구절들을 단지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마음의 자세에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된다는 점이다. 던의 열정이 일격을 가하면 일상적인 인생의 흐름에서 흩어져 있던 요소들이 하나로 완전해진다. 한순간 전에는 여러 다양한 속성으로 들끓던 유쾌하고 단조로운 이 세상이 바로 소멸되어버린다. 이제 우리는 던의세계 안에 있다. 다른 모든 풍경은 날카롭게 단절된다.
독자를 갑자기 놀라게 하고 굴복시키는 이런 위력에 있어서 던은 대부분의 시인을 능가한다. 이것이 그의 특징적자질이다. 그런 식으로 그의 정수를 한두 단어로 요약하면서 그는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작용할 때는두 개가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대조로 나누어지는것 또한 바로 그 정수이다. 곧 우리는 이 정수가 무엇으로구성되었는지, 어떤 요소들이 함께 만나 그렇게 깊고 복잡한 인상을 새겨놓는지 자신에게 묻기 시작한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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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 부고를 일삼아 읽고 끌리는 이들을 골라 소개하는 지면(<한국일보> ‘가만한 당신‘)을 2년 남짓 맡아왔다. 관련 보도들을 종합하고, 보충 자료를 찾고, 책이나 영화 등 도움 되는 것들은 최대한 참조했다. 국내에 알려진 이들은 어떻게든 기억되리라 여겨 외면했고, 떠난 자리에 잔물결도 일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을 편파적으로 주목했다. 그들 중 특히 기억하고 싶은 이들의 이야기를 어렵게 골라 이책을 엮었다.


그들이 왜 끌렸는지 한두 마디로 설명하긴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차별과 억압과 무지와 위선에 맞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가치와 권리를 쟁취하고자 우리 대신 우리보다 앞서 싸워준 이들이라고 하겠다. 글을 깊이 읽은 내 친구는 그들을 "생을 거의 완전연소한 이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글보다 먼저 사진 속 표정과 미소와주름살들을 먼저 ‘영접하곤 했다고 말했다. 나는 낯선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 P6

그들을 알아가는 과정이 빚을 갚는 일 같아 조금은 행복했다. 떠듬떠듬 원서로 된 탐정소설 읽듯 그들의 말투나 표정을 상상하기도 했고, 매개변수가 빠져 해명되지 않는 단층이 보이면 탐정처럼 자료와 인터뷰, 그 무렵의 사건 따위를 다시 뒤지기도했다. 물론미제로 남을 때가 많았지만 억지로라도 잇고 싶을 땐 내 상상이나 희망 따위를 표 나게 끼워 넣기도 했다. 나처럼, 쓰이지 않은 내용과 행간을 뒤져 읽어준 독자들이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이 책의 어떤 대목이 읽을 만하다면, 책 속 그들의 삶과 그들이추구한 세상이 아름다워서일 테고, 책바깥 독자들의 세상이 너무고약해서일 테다. 그 간극을 메우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바란다.

2016년 6월
최윤필 - P7

콩고의 마마
전쟁 속에서 끌어안은 인간의 존엄



콩고의 레베카 마시카 카츄바Rebecca Masika Katsuva는 ‘마마‘라는 애칭으로 널리 불렸다. 그는 콩고전쟁중 강간당한 여성과 고아, 성폭행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거둬 치료하고 함께 먹고 자고 일하고 가르쳤다. 그의 품을 거쳐 간 여성만 약 6000여명. 아이들이 부르던호칭을 그들이 따라 불렀고, 친해진 뒤로는 이름을 포개 ‘마마시카‘
라고도 했다. 카바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참혹한 강간 피해자, 아니 생존자였다. 콩고의 여성들은 그런 그에게서 용기를 얻고조금은 덜 힘들게 다시 일어서곤 했다. 콩고의 ‘마마‘가 2016년 2월2일 별세했다. 향년 49세.

그의 삶을 되돌아보려면 콩고 현대사를 짧게라도 들춰봐야 한다. 벨기에의 오랜 식민지에서 1960년 독립. 1961년 독립 영웅이자 초대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mba, 1925~1961 암살, 미국·소련·벨기에의 암투와 내전, 1965년 미국을 등에 업은 모부투 세세세코Mobutu Sese Seko, 1930~1997 집권과 32년간의 독재, 동쪽 국경 너머 르 - P15

완다의 1994년 내전과 반군들의 월경, 1996년 제1차 콩고전쟁으로 이듬해 5월 로랑 카빌라Laurent Kabila, 1939~2001 의 콩고민주공화국 탄생, 1998~2003년 제2차 콩고전쟁, 전쟁 중이던 2001년에 카빌라 암살(사실상 집권 세력에 의한 숙청)과 그의 아들 조제프 카빌라Joseph Kabila, 1971~의 집권.
콩고전쟁이 내전이 아닌 까닭은 이웃 국가의 무력이 공공연히 개입했기 때문이다. 특히 앙골라, 짐바브웨, 우간다, 르완다 등 중부아프리카 8개국이 각각 콩고 정부군과 반군을 편들어 벌인 제2차전쟁은 당시 미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Madeleine Albright, 1937~의 표현처럼 콩고를 무대로 한 ‘아프리카 세계대전‘이었다. - P16

전쟁 원인은 구리와 우라늄, 다이아몬드 등 콩고의 자원, 특히 동부 지역에집중 매장된 콜탄 때문이었다. ‘잿빛 골드‘라 불리는 분쟁 광물 콜탄은 희소원소 ‘나이오븀ND‘과 ‘탄탈룸‘의 원광석이고, 두 광물은 각각 초경합금과 첨단 전자 장비의 재료로 쓰인다. 특히 탄탈룸은 전자무기와 스마트폰, 노트북 등 IT 장비 전자회로와 전지의 필수 광물, 전 세계 콜탄 매장량의 70퍼센트 이상이 콩고에 있고, 그 대부분이 동부 콩고우간다 르완다 부룬디와 국경을 맞댄 남·북키부주에 묻혀 있다. 콩고의 서쪽 끝 수도 킨샤사의 권력은 동부까지 미치지 못했고, 쿠데타군은 동부의 자원을 떡밥 삼아 저들 국가의 군대를 끌어들였다.
제2차 전쟁 희생자는 400~600만 명에 달했고, 집단 학살과 강간, 고문, 기아, 질병으로 숨진 민간인이 전투에서 숨진 군인보다 훨씬 많았다. 반군 진영은 광산들을 꿰찬 채 아동·여성 노동력을 노예처럼 부려콜탄을 채석했고, 걸러진 탄탈룸은 여러 경로로 팔려 - P16

나가 무기로 바뀌어 동부로 되돌아왔다.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곳도 당연히 동부 키부 지역, 카추바가 나고 자라 결혼해 살던 곳이 거기였다. - P17

얻는 게 있다" "아이들이 나를 안정시켜준다"라고 그는 말했다. 피오나의 다큐멘터리에는 그가 아이들을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병원에데려가는 뭉클한 장면들이 나온다. "나 역시 죽을 마음을 여러 차례 먹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내 도움을 원하는 아이들과 여성들을 본다"

유엔 등 국제사회의 중재와 분쟁 광물 무역 규제 등에 떠밀려 콩고 정부군과 반군은 2003년 휴전했다. 하지만 동부는 지금도 사실상 반군 수중에 놓여 있고, 분쟁과 강간도 지속되고 있다. 옥스팜은2004~2008년 사이 남키부 주 유일한 산부인과 병원인 판지병원에서 진료받은 강간 피해자 9709명 가운데 4311명을 인터뷰한 결과를 2010년 4월 공개했다. 피해자의 56퍼센트는 들판이나 숲속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밤중에, 다시 말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당했다. 남편과 함께 병원에 온 이는 1퍼센트가 되지 않았고, 세 명 중한 명은 혼자 왔으며, 절반 이상은 강간당한 지 1년질병 등 후유증 때문에 온 이들이었다. - P20

휴전 뒤 민간인에 의한 강간범죄도 그사이 무려 열일곱 배나 증가했다. 2004년 1퍼센트 미만이던 민간인 강간 비율은 2008년 전체의 38퍼센트였다.
카추바도 2006년 이후 무려 세 차례나 더 집단강간을 당했다. 2009년 1월 강간은 카추바가 군인들의 강간 사실을 고발 · 폭로해온데 대한 보복·협박 강간이었다. 카추바의 어머니도 그의 일을 돕다2010년 4월 마시카 카쿠바는 국제사면위원회의 지네타사강상을수상했다. "끊임없는 공격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성폭력 생존자 - P20

와 청소년, 아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돌본" 공로였다.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시상식에 그는 불참했지만, 국제사면위원회 미국 지부의 수잔느 트리멜은 카바가 상금 1만 달러를 어떻게 쓸지궁리 중이었다고 전했다. "돈을 집에 둘 수 없으니 우선 은행에 넣어두려고 한다. 나중에 고마에 집을 한 채 사서 세를 놓을 생각이다. 아이들의 학비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돈이 남으면 그 아이들과여성들을 입히고 먹이는 데 쓸 거다." 그에겐 함께 돌보는 아이들 외에 입양한 고아 열여덟 명이 있었다.
콩고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해온 인권운동가 바바 탐파는 <가디언>기고문에서 작년 말 카추바가 재봉틀을 구해 달라고 했으며
"다섯 대가 있었는데 세 대는 망가지고 하나는 도둑맞았다"라고 했고, 몇 달 뒤에는 "수확한 농작물을 시장에 내가기 위해 밴 한 대가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렇게 여성과 아이들과 마을살림을 챙기느라 정작 자신의 몸은 못 챙겼던지, 카추바는 2016년2월 2일 오전 8시에 병원에 갔다가 오후 4시에 숨졌다.  - P21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HRW의 콩고 담당 선임연구원 아이다 여는 "카추바가 떠난 뒤 세상이 더황량해진 것 같다"라고 HRW 홈페이지에 썼다. 그는 "카추바 덕에모진 일을 겪었던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자신들도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됐고 또 힘을 얻었다" "내 삶도 그를 알아더 풍요로워졌다"라고 추모했다. 유엔의 분쟁 지역 성폭력 특별대표자이납 하와 방구라Zainab Hawa Bangura, 1959~는 "마시카는 영웅이었다. (…) 그 어떤 야만도 인간의 존엄과 평화를 향한 인류의 열망을이길 수 없음을 그는 내게, 이 세계에 보여주었다"라고 밝혔다.
- P21

"이듬해 만나면 우리는 누가 안 왔는지,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서로 묻곤 했고, 점점 그 질문은 누가 죽었는지로 바뀌어갔다." 그들 다수는 혈우병 때문이 아니라 에이즈로 숨졌고, 그가 10대 중반에 이르러 캠프가 문 닫을 즈음까지 살아남은이는 그를 포함해 단 두 명뿐이었다.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콜트와 같은 생존자를 대상으로 HIV 내성 인자 보유 여부를 검사, 그중 일부가 실제로 돌연변이를 통해 HIV 면역에 기여하는 케모카인Chemokine 단백질과 수용체를 보유한 것으로 훗날 밝혀냈다. 콜트는 그런 변이 없이 감염되지 않은, 기적 같은 행운의 주인공이었다.
13세 때 감염된 혈액제제 때문에 C형 간염에 걸려 약 2개월간 입원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완전항체반응full antibody response‘, 즉 몸 면역시스템이 스스로 병을 치유해내는 또 한 번의 마법 같은 일을 경험하기도 했다. 혈액제제가 안전해지고, 유전자재조합 방식의 새로운치료제, 즉 비감염 혈액의 특정 단백질을 햄스터의 난소 등에 주입해 혈액응고인자를 추출해 만드는 농축제제가 나온 것은 1990년대이후였다. 콜트는 ‘행운‘이라고 했지만 그건 사무치게 원망스러웠을자신의 몸을, 그래도 믿고 사랑한다는 고백이었을 것이다. - P26

 "효과적인 치료법을 가지지 못한 채 암환자를 대하는 건 참 힘든 일이다. 그럴 때마다 조금이라도 빨리 실험실로 돌아가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 그것만큼 더 중요한 일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환자들의 심정을 잘 알았을 것이다.
"미래가 불확실한 만큼 내 모든 걸 과학과 환자들에게 쏟아야 한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만일 당신이 어려서부터 심각한 질병을앓아왔다면, 아마 당신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걸알 수 있을 거다." 그는 "그건 인간관계에서는 썩 좋은 일이 아니어서 나는 결혼을 두 번 했다"라고 덧붙였다. - P29

그는 2016년 2월 22일에 바하마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뇌출혈을일으켜 마이애미의 잭슨메모리얼병원으로 후송됐고, 이틀 뒤 24일에 별세했다. 향년 38세.
근년 들어 그의 육체는 응고인자제제를 거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체 면역 체계가 농축제제를 항원으로 인식해 공격에 나선 거였다. 항체반응은 대개 초기에 발현하지만, 그의 경우처럼 드물게늦게 나타나기도 한다. 스탠퍼드 의대 종양학과장 조지 슬레지 주니어는 "그는 재능과 헌신, 끈기 면에서 예외적으로 탁월한 동료로 존경받았다"라며 "수많은 선배 연구자들도 그를 통해 많이 배웠다며슬픔을 전해왔다"라고 전했다. 가장 가까운 스승이었을 레비는 "그는 항암 면역요법 분야에서 아주 중요한 몇 가지 발견을 해냈고, 환자에게 직접 혜택을 줄 수 있는 여러 임상 실험을 디자인해 추진해왔다"라고 말했다." - P29

작은 거인
장애 편견과 고통 앞에서 춤추다


스텔라 영Stella Young은 호주의 코미디언 겸 방송인이었고 칼럼니스트였다. 그는 불완전골형성증osteogenesis imperfecta이란 희귀 유전병을 갖고 태어난 장애인이었다. 뼈가 약하고 변형되는 저 증상 때문에1미터가 되지 않는 키에 골절상을 달고 살았는데, 일곱 살 무렵 친구생일잔치에 초대받아 가서 과자를 먹던 중 사레가 들려 쇄골이 부러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맹렬한 장애인인권운동가였다.
2013년 11월, 31세의 영은 <시드니모닝포스트>에 여든 살의 나에게」란 제목의 칼럼을 썼다. 편지 형식의 글에서 영은 "와인이라도몇 잔 마신 날이면 잔망스럽게 혼자 하던 생각이지만 ‘나는 이 세상에 잘 살려고 왔지, 오래 살려고 온 게 아니야‘라고 한 말은 진심"이라고 하지만 당신(여든 살의 나)을 만나러 가는 동안 모든 가능성을움켜쥐고 늘 긍정적이고 진취적으로 지혜롭게, 즐겁게 살겠다고 약속하겠다"라고 썼다. 그는 그 약속을 지켰지만 여든 살의 자신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는 2014년 12월 6일에 숨졌다. 향년 32세. - P31

금요일 밤이면 영은 댄스클럽의 플로어에 서서 춤을 추곤 했다.
그의 춤은 휠체어 안에서 펼쳐지는 아주 절제된 동작이었을 것이다. 호르몬이 충동질하는 만큼, 아니 여린 뼈와 근육이 허락하는만큼, 리듬을 타며 춤추는 것을 즐겼던 영에게 그 순간은 몸의 감각을 가장 예민하게,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롭게 의식하는 순간이기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도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껴야 했다.
그들에게 영의 춤은 춤이 아니었을지 모르고, 영의 존재 자체가 이채로웠을지 모른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즐기기 위해 추는 춤이 비장애인에게는 ‘특별한 행위‘로 느껴지는 현실, 그는 그 시선들을 ‘논평의 시선‘이라고 했다. 놀랍다, 대단하다, 라며 말을 건네는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램프>의 한 칼럼에 이렇게 썼다. "음악에 영혼을 맡기고 춤으로 근심 따위를 털어내는 그 공간에서조차 그들, 비장애인들은 나의 존재를 교훈적 타자로 대상화한다."
"장애인의 몸은 그 자체로써 정치적이기 때문에, 나의 춤은 정치적발언이 된다." 하지만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난 춤을 추고플 땐 출것"이라고 썼다. "문제는 우리의 장애가 아니라 장애를 바라보는 당신들의 방식입니다." - P38

2014년 12월 18일 멜버른 타운홀에서 열린 영의 추도식 드레스코드는 ‘재미있는, 멋진 fabulous‘이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큐빅장식의 스팽글 드레스나 물방울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꽃 장식을 달았다. 진행을 맡은 방송인 월리드앨리는 "오늘은 맘껏, 무제한 즐기는 자리"라며 "환호하고 박수치고 춤추자"라고 말했다. 온당치 못한 사회와 싸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그것을 또 나눠주기까지한 고인의 삶처럼 영을 잃은 슬픔도 행복한 웃음으로 기억하자는취지였을 것이다. 행사가 끝난 뒤 참석자들은 타운홀 바깥 연방광장으로 나가 영이 그렇게 즐기던 춤으로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 P39

비행하는 인간
육체의 해방을 꿈꾼 익스트리머


그는 날고 싶어 했다. 오래 날기 위해 점점 높이 올라갔고(클라이밍), 그러자니 더 가벼워져야 했다(프리솔로잉), 부력을 아끼려면 정밀한 몸의 균형은 필수였다(하이라이닝). 윙슈트플라잉은 그의 꿈에가장 근접한 익스트림스포츠였다. 그의 마지막 꿈은 맨몸에 윙슈트로만 날아 낙하산 없이 착지하는 거였다. 땅의 속박으로부터 최대한 벗어나기. 그에게 비행은 자유였다.
어쩌면 그는 추락과 비행의 차이를 활강하는 육체의 방향각이 아니라 의지의 지향각에 두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절벽에 부딪쳐 부서져버린 몸이 균형과 부력을 잃고 수직으로 내리꽂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이 비로소 날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죽음의 추락이 아닌, 마침내 삶의 비행. 다만 그 비행은 너무 짧았다.
2009년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뽑은 ‘올해의 모험가‘ 딘 포터DeanPotter가 2015년 5월 16일 요세미티국립공원 윙슈트플라잉 도중 사고로 숨졌다. 향년 43세. - P41

2009년 여름, 등산화도 스틱도 없이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윙슈트에 낙하산 하나 달랑 메고 아이거 북벽 디프블루시 Deep BlueSea 루트의 해발 3970미터 벼랑에 섰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떨어진돌이 바닥에 닿는 데 약 8초가 걸리는 그 높이에서, 그는 장장 2분50초 동안 5.5킬로미터를 날았다. 윙슈트플라잉 최장 기록이었다.
2011년 11월 그는 아이거 서벽수직 고도 2804미터에서도 3분 20초 동안7.5킬로미터를 날아 자신의 세계기록을 경신했다.
윙슈트의 활공비는 2.5쯤 된다. 1미터 하강하는 동안 2.5미터를수평 이동한다는 얘기다. 땅의 수평선을 기준으로 하강하는 각, 즉활강각은 50.7도다. 그의 2011년 활강각은 20.5도였다. <토니윙슈트>사이트에 올린 글에서 그는 "내가 사람보다 새에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라고 썼다. - P46

1990년대 말의 그는 세계적 클라이머가 돼 있었고, 굴지의 스포츠 용품 업체들-파타고니아, 블랙다이아몬드, 파이브탠과 스폰서십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2006년 파란의 스캔들로 기억되는 유타주 아치스국립공원 프리솔로잉으로 그는 저 스폰서들을 잃고 만다. 무른 사암岩들의 풍화로 조성된 유타 주 남부의 랜드마크들중에서도 크기로나 모양에서 가장 돋보이는 델리키트아치 DelicateArch 프리솔로잉한 거였다. 불법은 아니지만 클라이머들조차 신성시하며 넘보지 않던 바위였다. 거기에서 촬영팀의 밧줄에 긁힌 듯한 자국이 발견됐다. 클라이머들의 성토가 이어졌고, 공원 측도 공식 조사에 착수했다. 딘은 "바람 불면 날아갈 초크 자국 외엔 남긴흔적이 없다"라고 결백을 주장했지만 정황상 궁지에 몰릴 수밖에없었다. 그 일로 2002년에 결혼한 클라이머이자 아내 스테프 데이 - P48

비스Steph Davis, 1973~의 스폰서 계약마저 끊겼다. 둘은 2010년 이혼했다. 2008년 ESPN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들은 자연을 신성하게지키기 위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그 사건 이후 아치스국립공원은 일체의 등반 행위를 공식적으로 금했다. 물론 더트백에게법은 대수로운 게 아니다. 그들을 멈추게 하는 것은 자기 몸이 바위(자연)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따지고 보면 요세미티를비롯한 국립공원 베이스점핑도 모두 불법이다. 점퍼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해가 진 뒤 주로 점핑을 한다. 어두워서 더 위험한 대신,
어둡기 때문에 공기의 미세한 흐름에 더 예민해질 수 있다고 딘 포터는 말했다.
"인간이 난다는 게 미친 생각이란걸 나도 안다. 하지만 언젠가그게 가능해지려면 생각이 허용하지 않는 곳으로 누군가는 나아가야 한다." 그는 동료 그레이엄 헌트와 2015년 5월 16일 저녁 7시 30분, 요세미티 협곡의 고도 914 미터 ‘태프트 포인트 Taft point‘에 올랐다.
다음 날 시신으로 발견된 그의 몸에는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은 채매여 있었다. - P41

모성이라는 환상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


낯선 이의 가만한 미소 혹은 가만히 건네는 손의 온기가 값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힘겨운 자리에 혼자 섰거나 그런 기분에 지친이에게는 마주 서는 것보다 나란히 서서 가만히 같은 곳을 바라봐주는 게 더 고마운 일일지 모른다.
바버라 아몬드 Barbara Almond는 정신분석 · 상담 의사로 어머니는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라는 책을 썼다. 책에서 그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 희생을 뭉뚱그려 ‘모성motherhood은 무조건 완벽하고 최고여야 한다는 아득한 기준을 부정했다. 끊임없이 ‘모범 어머니‘를 찾아 전시하는 사회, 모든 어머니가 그런 모범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고 채찍질하는 사회를 비판했다. 책의 제목처럼, 그녀는 모성에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나란히 있고 모든 어머니는자식을 진심으로 미워할 때도 있다고 썼다. 당신만 아이를 미워하는게 아니고, 그게 잘못된 일도 아니며 한결같이 감싸주는 게 아이에게 좋은 일도 아니라고, 그러니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라고 썼다.
실패의 예감과 불안, 실패했거나 하고 있다는 자책과 죄의식에 - P51

시달리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게 든든한 ‘어머니‘ 같았던 그가2016년 3월 6일 별세했다. 향년 77세.

작가이자 교수인 캐럴린 시Carolyn See, 1934~는 2010년 10월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아몬드의 책 서평 첫 줄을 "우선 이 매혹적인책을 모든 새로운 엄마와 나이 든 엄마,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 아이와 남편, 아빠와 연인 들에게 권한다"라고 썼다. "(이 책은) 모두가알고 있지만 거의 아무도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사실을 전한다. 우리 중 최고의 엄마들조차 때때로 모성이란 것이 요구하는 바에서비롯된 두려움과 공포, 증오와 역겨움으로 고문당하고, 심지어 아이들을 향한 순전한 살의를 경험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들려준다. - P52

자살연구자
죽음을 이해하는 것으로 예방하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장 아메리Jean Améry, 1912~ 1978는 『자유죽음』 서문에 "이 책은 심리학이나 사회학과는 거리가 멀다. ‘자살학suicidology‘이라는 과학이 끝나는 곳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라고 썼다. 그는 책에서 생명의 논리, 삶의 논리로 죽음과 자살을 설명하고배격하는 모든 시도들을 반박하고 조롱하며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깨어 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택한 자유죽음을 옹호했다. 그에게 자유죽음은 ‘에셰크échec, 체스 게임의 외동수‘, 즉 돌이킬 수없는 총체적 삶의 실패에 직면한 이가 "모든 삶의 충동, 살아 있는존재의 끈질긴 자기 보존 충동"에 저항하며 그에셰크를 돌파하는유일한 길이고 "자유를 가장 급진적으로, 어떤 점에서는 가장 생생하게" 실천하는 행위였다.
아메리보다 6년 늦게,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시에서 태어난 심리학자 노먼 파버로 Norman Farberow는 제2차 세계대전을 아우슈비츠 수감자가 아닌 미 공군 대위로 경험했다. 그는 전후 참전군인들이 겪는 고통스러운 사회 부적응과 급증하는 자살률에 학자 - P61

로서 감응, 아메리가 "경의와 더불어 약간의 경멸도 숨기지 않았던 자살학의 토대를 닦았다. 미국 최초의 자살예방센터를 세워 ‘생명의 전화 서비스를 시작했고, 이제는 상식이 된 자살 예방 연구와자살로 친지를 잃은 생존자의 심리 치유에 생을 바쳤다. 국제자살예방협회IASP 설립을 주도한 그가 국가자살예방협회가 제정한 세계자살 예방의 날이던 2015년 9월 10일,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전혀 상반된 입장에 선 듯 보이는 아메리와 파버로는 자살에 대한 세상의 통념에 맞서 싸운 동지기도 했다. 아메리가 ‘생명의 논리‘ 로부터 죽음과 자살의 인식론적·철학적 해방을 추구했다면, 파버로는 자살이라는 행위에 드리운 종교적·사회문화적 보편 인식들, 예컨대 자살자에게 드리운 비겁함과 나약함의 이미지, 남은 자가감당하는 수치와 죄의식을 걷어내고 현상을 과학적으로 바라보게하는 데 헌신했다. - P62

그가 세계적으로 저명한 심리학자라는 사실을 알아챈 이는 거의없었다" "그가 은퇴 후 근 20여 년 동안 단 한 푼도 받지 않으면서그 일을 계속했다는 사실도 밝혀야겠다"라고 썼다.

LA 자살예방센터는 1997년 이후 ‘디디허시정신보건서비스DHMHS‘ 와 통합, 운영돼왔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실직한 여성들의 실의를 치유하고 격려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민간 자선단체인 디디허시정신보건서비스는 시대 상황에 따라 빈민, 소수인종 등 다양한소외 계층의 정신보건 증진을 위해 일했다. 디디허시정신보건서비스 디렉터인 심리학자 키타 커리는 파버로 헌정 비디오에서 "파버로는 자살의 오점‘을 지우기 위해 헌신한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P68

 "자살하려는 이들이 겪는 극심한 고통을 누구보다 앞서 이해한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 2014년 파버로는 미국자살학회학술대회비디오 연설을 통해 "전화 한 통화 같은 아주 사소한 우정을 표시하는 것만으로도 자살을 막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내겐 늘 굉장한 일처럼 여겨졌다" 하고 말했다.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처럼, 그는 저 ‘소박한 말로 자신의 학자이자 봉사자로서의 생애와 자살학의 역사를 포괄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살과 자유죽음은 동의어가 아니고, 노먼 파버로가 막고자 한 모든 자살이 장 아메리가 옹호한 자유죽음은 아니다. 심리부검을 포함한 자살 연구와 예방 활동, 또 자살 후 생존자에 대한 심리 치료의 목적이 "(자살자 본인보다는 가족, 나아가사회의 보상 심리에 달려 있다"라고 한 아메리의 비판에는 부인하기 - P68

힘든 진실이 있고, 여전히 자살을 죄악시하는 종교와 관습과 법이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아메리의 목소리는 좀 더 커져야 할 필요가있다.
하지만 심리학과 자살학이 자유죽음의 "존엄성을 박탈"한다는아메리의 단죄에 파버로와 슈나이드먼 같은 이들이 고분고분하게수긍할 것 같지도 않다. 그들은 아마 아메리가 책에서 예로 든 숱한이들의 자살이 모두 그의 기준에 부합하는 자유죽음이었는지 심리부검을 통해 규명하자고 따져 물을 것이고, 아메리는 삶의 외통수를 판별하는 판관은 개인과 사회이지만 둘의 판단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응수할 것 같다.
그렇게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사례와철학적 논리로 끝도 없이 맞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전선 너머에서 ‘자살=죄악‘이라는 해묵은 주장이라도 끼어들면 금세 나란히 서서 사회의 위선에 맞서 동지로 싸웠을 것이다. 그들로 하여 우리는 자살이라는 죽음의 한 형태와 거기 이르는 삶의 보편과 특수를, 지금 우리 삶의 양상을 조금은 더 느긋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 P69

사랑의 합법성
동성혼의 법제화를 위하여


난소암을 앓던 니키 콰스니Niki Quasney는 2014년 3월, 운전 중 찌르는 듯한 가슴 통증을 느꼈다. 곧장 응급실로 와야 한다며 의사가경고했던 바로 그 증상이었다. 하지만 콰스니는 통증을 견디며 혼자 40여 분을 더 달려 인디애나 주 경계를 넘어 일리노이 주 병원을찾아갔다. 지난해 8월 AP통신 인터뷰에서 그는 "두려워서 그랬다" 라고 말했다.
그가 두려워한 건 병과 죽음보다 법과 제도의 억압이었다.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는 인디애나 주법에 따르면 13년 반려자 에이미샌들러도 완벽한 타인일 뿐이어서, 가족에게만 면회가 허용되는 투병 과정이 더 고독하고 절망적이리라 그는 두려워했다.
다행히 퇴원한 그는 곧장 인디애나 주 연방지방법원에 자신들을법적 부부로 인정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한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의사망진단서에 샌들러가 아내로 기록될 수 있도록, 사망 후 유산과연금 등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거였다. 앞서 콰스니와 샌들러는 2011년 일리노이 주에서 시민결합Civil Union, 동성혼 대신 부부 지위만 - P71

보장을 했고, 2013년에 매사추세츠 주에서 결혼도 했지만 인디애나주는 다른 주의 동성혼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연방지방법원은 그해 4월 주정부가 두 사람의 결혼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한다. 이례적으로 빠른 판결이었다. 그리고 6월 동성혼을 허용해달라는 소송 10여 건에 대해서도 주정부가 승인해야한다고 판결한다. 주정부는 즉각 항소했지만 9월에 제7항소법원은만장일치로 연방지방법원의 판결을 편들었다. 인디애나 주는 10월부터 동성 커플의 혼인확인서 발급을 시작했다. 소송을 시작한 지6개월 만이었다.
목숨을 건 사랑과 호소로 연방법원을 감동시키며, 미국의 모든주를 통틀어 법정투쟁 최단 기록으로 인디애나 주의 동성혼 합법화를 이끈 니키 스니가 2015년 2월 5일에 별세했다. 향년 38세. - P72

사회를 치료하는 경제학
안정된 진로를 벗어나 학문의 의미를 찾다


교황 레오 13세1878~1903 재위의 회칙 ‘레룸노바룸Rerum Novarum‘이발표된 것이 1891년이다. 교황은 19세기의 10년을 남겨둔 인류가 20세기를 맞이하며 감당해야 할 숙제와 지향을 밝힌 그 회칙의 뼈대를 "자본주의의 폐해와 사회주의의 환상"이라는 함축적인 표현 안에 담았다.
그로부터 100년 뒤인 1991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재위는 같은 이름의 새로운 교황청 회칙 ‘뉴 레룸바룸‘을 내놓는다. 이 시기는 공산주의의 패배와 자본주의의 전일적 지배가 확연해진문명사적 전환기였다. 바오로 2세는 회칙에 레오 13세의 구절을 뒤집은 "사회주의의 폐해와 자본주의의 환상"이라는 예언적인 표현을굵은 글씨로 담았다. - P77

귀국 후 그가 처음 쓴 책은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이었다. 당시로선 신선하고 충격적인 발전의 이면, 즉 1970년대 광화학스모그와시민의 위협받는 안전 등을 폭로한 책이었다. 근대경제학을 반성적으로 고찰한 근대경제학의 재검토』라는 책도 썼다. 농지 위에 활주로를 닦아 나리타공항을 국제공항으로 확장하려던 일본 정부의 계획에 맞서 1966년부터 20년 넘게 싸운 산리즈카 마을 주민들의 투쟁을 일본 경제사회의 현실과 맞물려 환기시킨 나리타란 무엇인가뿐 아니라 ‘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 『일본의 교육을 생각한다』등등 그의 저서들은 경제 이론의 경계를 벗어나 현실 속으로 뻗어나갔다. 일본 출판업계의 거물인 이와나미문고의 편집자 출신이자사장이었던 오쓰카 노부카즈大信- 1939~는 책으로 찾아가는 유 - P84

토피아』라는 책에서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출간 이후 우자와가감당해야 했던 괴롭힘과 협박, 『나리타란 무엇인가 이후 몇 년간외출할 때마다 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을 소개했다. 1970년대 이와나미문고에서 열린 한 연구회 일화도 있다. 당시 우자와는 근대경제학의 모델과 수식으로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문제들을 명쾌하게 분석해 경제·사회학자들을 매료한 뒤 칠판에커다란 X표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모델로는 일본 사회의진정한 모습을 포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환경 파괴나 공해 등가장 중요한 요소가 이 모델에는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P85

그는 노벨경제학상의 단골 후보였다. 하지만 시카고대학교나MIT, 프린스턴의 강단 학자들이 그의 이질적인‘ 연구와 사회 활동을 어떻게 평가했을지는 의문이다. 어리석은 가정이지만, 만일 베트남전쟁이 없었다면, 그래서 그가 미국의 대학에서 연구 활동에 전념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훗날 우자와는 경제학을 공부하면서도 예비 의학도 시절 히포크라테스선서 앞에서 좌절했던 기억을 간직했다고 말했다. 길다면 긴생을 청년기의 어떤 기획 속에두고 마름질하듯 주무를 수는 없겠지만 경제학자로서 그의 마음속에는 ‘사회를 치료하는 경제학자로서 자신만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환자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는 없었지만사회를 위해 자신에게 더 유리한 자리를 포기했다. 그는 학문의 보수적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자신이 설정한 경제학자로서의 경계를지켰고, 그건 그에게 노벨상으로도 채울 수 없는 커다란 야심이었을지 모른다. - P85

잘려나간 장미
여성 할례 금지 운동의 시작


피렐리, 샤넬의 브랜드 모델로 1980, 1990년대 <엘르> <보그> 등 패션지 표지를 장식했던 소말리아 출신 모델리스 디리Waris Dirie,
1965~가 자신의 상처를 세상에 공개한 게 1997년 <마리끌레르> 인터뷰에서였다. 세 살 때 ‘미드간여성 할례 시술자‘에게 클리토리스와 음순을 잘린 이야기, "성냥개비 머리만 한 구멍만 남긴 채 질구를 봉합당한 이야기, 시술 후 자신은 살아남았으나 동생은 과다 출혈로숨진 이야기.
‘사막의 꽃‘으로 불리던 세계적 패션 스타의 고백은 아프리카와중동 대다수 국가들이 종교와 전통의 이름으로 수천 년 동안 자행해온 끔찍한 가혹 행위의 실상을 극적으로 폭로했다. 그는 1998년에 수기 ‘사막의 꽃을 썼고, 2009년 셰리 호만 감독은 에티오피아의 모델 겸 배우 리야 케베데Liya Kebede를 주연으로 이를 영화화했다. 와리스는 유엔 아프리카인권특사, 아프리카연합AU 평화대사 등을 역임하며 여성성기절제FGM, Female Genital Mutilation 근절과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 P87

도케누는 법적 강제에 만족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그는 "금지법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건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법에만 의지할 경우 기소를 면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저지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적도 많았다.
<가디언> 인터뷰에서 그는 "나의 공개적인 발언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살만 루시디에 못지않은 도발로 받아들여졌고 또 실제로 살해하려 한다는 말을 전해들은 적도 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반면에 아프리카의 여성들, 특히 FGM의 피해자들은 그를 ‘에푸아 엄마Mama Efua‘라고 불렀다. 일곱 살에 FGM을 당하고 현재 ‘더걸 제너레이션‘에서 일하고 있는 지부티 출신의 님코 알리는 "도케누는 (마치 엄마처럼) 유쾌하고 지혜로우면서 언제나 우리의 말을 끈기 있게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 우리도 아프리카의 여성들과 ‘엄마와 딸‘ 같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해왔다"라고 BBC 인터뷰에서말했다. 그는 <뉴요커> 인터뷰에서 아이작 뉴턴의 표현을 빌려 "그녀는 거인이었고, 우리는 지금 그녀의 어깨 위에 서 있을 뿐이다"라고도 말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뉴요커>에 보낸 이메일에서
"(도케누는) 희망과 변화의 기적"이라고 애도했다. - P93

탐욕스러운 환경운동가
노스페이스 창업자, 국가에 공원을 기증하다


더글러스 톰킨스Douglas Tompkins는 몽상가였다. 그의 꿈은 자연보호가 아닌 자연의 복원이었다. 이미 병들어버린 땅, 보호는 헛되고부질없는 짓이었다. 잘해봐야 증상을 잠시 완화하거나 지연시킬 뿐그나마도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보호였다. 그는 뭇 생명을 자연으로서 사랑했지만 인간만큼은 반反자연으로 여겼다. 자연과 항구적으로 공존하기에 인간은 못 믿을 존재였고, 또 너무 많았다. 그가지구 끝, 인적 드문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광막한 숲과 초원, 화산과습지와 강과 피오르해안에 제 꿈의 거처를 마련한 까닭이 그거였다.
220만 에이커약 27억 평, 서울 면적의 열다섯 배. 그 땅은 자연의 피난처가 아니라 수복의 거점이었다.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의 창업자, 더글러스 톰킨스가 2015년 12월 8일 별세했다. 향년 72세. - P95

크리스는 "이곳을 예전처럼 목장으로 이용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100년 뒤, 아니 10~20년만 지나도사람들은 여기가 공원이 아니었던 때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민들이 양을 키우기 시작한 1940년 이전에는 그 땅의주인이 농부가 아닌 야생의 동물들이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크리스는 남편과 달리 "주민 설득을 등한시한 탓에 오해와 불신을 증폭시킨 점"을 후회했고, 별도의 팀을 꾸려 주민들을 이해시키고 관계를개선하는 노력을 도맡았다. 지역 청소년들의 하이킹·캠핑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주민들의 공원안내원 취업 프로그램을 열었으며 향후국립공원이 되면 관광 수입으로 지역 경제가 더 활성화될 것이라는믿음을 전파하는 데 주력했다. - P102

자연을 복원해서 지키는 가장 근사한 해법으로 그들이 택한 게 국립공원화였다. 1929년 미국 연방정부가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인근 티턴Teton 산맥을 제외하자 록펠러가 15년 동안은밀히 그 땅들을 사들인 이야기, 지역 정치인들과 목장 주민들의반대를 뿌리치고 국립공원으로 국가에 기증해 당시 대통령이던 루스벨트가 수락한 이야기, 여름 들꽃이 그렇게 황홀하게 핀다는 그랜드티턴국립공원이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톰킨스는 들려주곤 했다. 그리고 개인이나 단체가 사적으로 넓은 땅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다만 자신은 임시 집사provisional stewards일뿐이라고 말했다. "나도 해낼 수 있다. 일이십 년만 기다려달라"라고말한 게 불과 2014년 9월이었다. 크리스는 그런 그를 늘 ‘롤로(젊은이)‘ 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 P102

하지만 그는 2015년 11월,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된 현지 잡지 <파울라 Paula>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들어 나의 생물학적 시계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서두르라고, 죽기전에 다 끝마쳐놓으라는 말이들린다"라고 말했다. 푸말린공원의 도로와 안내소, 식당 등의 시설을 갖춘 뒤 칠레 정부에 열쇠를 넘길 참이라고 했다. 은퇴를 생각한다」라는 인터뷰에서 그는 두 딸과 손자들에게 단 한 푼의 유산도남기지 않겠노라고, 노년에 쓸 작은 농장과 집만 남기고 전 재산을칠레와 아르헨티나 환경 보존을 위해 기부할 생각이라고도 했다.
베테랑 카야커이기도 했던 그는 2015년 12월 8일 지인들과 함께파타고니아 헤네랄카레라 호수 투어에 나섰고, 돌풍에 보트가 전복되면서 물에 빠져 저체온증으로 숨졌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훗날 사람들이 이 땅을 걸을 것이다. 무덤보단 이게 더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 P103

거인 같은 여성상
전쟁으로 시작된 여성해방의 상징


1943년 5월 29일, 발행 부수 400만 부에 달하던 미국 주간지 현재격월간지 <새터데이이브닝포스트>는 메모리얼데이 기념호 표지를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노먼 록웰Norman Rockwell, 1921~1978 의 그림으로 장식한다. 작업복 차림의 건장한 여성이 커다란 리벳건을 무릎에얹고 점심 도시락을 먹는 모습. 샌드위치를 든 그는 이두박근이라도과시하려는 듯 왼팔을 힘주어 구부렸고, 발은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을 짓밟고 있다. 무릎 위 도시락에 새겨진 ‘로시‘라는 이름 때문에 <리벳공 로시Rossi the Riveter>가 된 그림은 더 많은 여성 노동력을동원하기 위한 전시 국가와 자본의 홍보물로, 전시 채권 판촉용포스터로 활용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로시는 또 196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내건 여성 파워의 상징으로, 2001년 9·11사태 이후에는 애국주의의 한 표상으로 소환되기도 했다. <리벳공 로시>의 모델이었던 메리 도일 키프Mary Doyle Keefe가 2015년 4월 21일에 별세했다. 향년 92세. - P105

미국리벳공시위원회는 1998년에 만들어졌다. 각자의 경험을기록하고 그 가치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설립된 이 단체는 여성주의와 애국주의의 묘한 결속 위에서 강연과 저술 등 다양한 활동을펼치고 있다.
9·11 사태 직후 <리벳공 로시>를 비롯한 노먼 록웰의 주요 작품들은 미 전역을 돌며 순회 전시됐다. 2001년 11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전시 때에는 100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그의 작품을 관람했다. 큐레이터 비비언 그린은 "록웰의 작품들이 지닌 애국주의와 미국적 삶에 대한 찬미가 관객들의 욕구에 부합한 것 같다"라고 한 잡지 인터뷰에서 말했다. 구겐하임의 홈페이지를 장식한 그림도 <리벳공로시였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또 제2차 세계대전의 숨은 공로자로 리벳공 로시>의 사연이 언급될 때마다 키프의 이름은 곁두리처럼 소 - P110

개되곤 했는데, 그는 조금은 쑥스럽고 또 조금은 뿌듯했던 듯하다.
키프가 AP통신과 인터뷰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2002년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그 일(모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나 자신을 현대 여성의 상징 같은 존재로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라고말했다. 또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록웰의 그림이 잡지에 실리기 전까지 나는 그 그림을 보지도 못했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몰랐다" 하고 덧붙였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버몬트 주 템플대학교에 진학, 치위생사 학위를 받고 고향 베닝턴에서 치위생사로 일하다가 1949년에 결혼, 네 명의 자녀를 두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림이 그려진 지 24년 뒤인 1967년 록웰은 키프에게 사과편지를 썼다. 날씬한 몸매를 우람하게 그려 미안하다고 "그때는 ‘거인 같은 여성상이 필요했다"라고 말이다. 그림 자체가 아니라 남성 지배사회의 여성 대상화, 즉 필요에 따라 모범적 여성상을 상정하고 닮게 하려 한 관행을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걸 인류가 알기까지는 또 긴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아직 뭐가 문젠지 모르는 이들도있다. - P111

잊을 수 없는 기억
챌린저 참사의 비극을 밝히다


2016년은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 참사 30주년이다. 언론이 사고 당일1986년 1월 28일을 전후해 거의 매년 저 일을 고통스럽게 환기해온 까닭은, 우주탐사 역사상 최악의 저 참사가 인재였음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사고는 추진체 부품 결함, 엄밀히 말하면 결합부 고무 패킹의 저온 손상 때문에 빚어졌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그릇된 의사 결정 구조와 추진체 제작업체 모턴사이어콜사의 안일한 판단이 원인이었다. 그들은 기술진의 사전 경고와 발사 연기 주장을 묵살했다.
대통령직속사고조사위원회의 첫 조사 보고서가 나온 건 그해 6월이었지만, NASA의 우주왕복선 프로젝트는 사고 후 근 3년간 전면 중단됐다. 사이어콜은 존폐 위기에, 직원들은 실직 위기에 몰렸다. 유타 주 브리검 시 사이어콜 공장 주변은 "살인자들"이라는 낙서로 뒤덮여 있었다. 사고에 연루된 이들, 그릇된 결정의 책임을 져야 했던 이들은 죄인처럼 살아야 했다 - P113

정년이 임박했던 이블링도 1986년 직장을 떠났다. "그들(회사)은나를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식으로 대했다" "나도 누군가의 생명에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책임도 지고 싶지 않았다"라고 그는 말했다. 자책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1989년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유타 주 철새 보호 시민단체 ‘베어 강 철새들의 피난처‘의 자원봉사자로 살았다. 1980년대 중반 솔트레이크 범람으로 무너진 제방을복구하고 수로와 데크와 탐조 루트를 다시 손보고 수초를 가꾼 건전적으로 그를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의 기부와 모금과 노동 덕이었다고 단체는 밝혔다. 공학기술자 이블링은 특히 관개시설, 수로 보강 등 기술적인 분야를 진두지휘했고, 1990년 시어도어루스벨트환경보존상‘과 2012년 국립야생보존위원회NWRA의 ‘올해의 자원봉사자상을 탔다.‘ - P120

이블링이 세상에 나선 건 2016년 1월이었다. 30년 전 익명으로NPR과 인터뷰했던 그는 다시 NPR 기자를 브리검 집에서 만나 "이제 진실을 알릴 때"라며 "당시 NASA의 발사 결심은 확고했다"라고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난 세월 혼자 감당해야 했던 자책과 죄의식을 울먹이며 토로했다. "나는 좀 더 노력할 수 있었고, 좀 더 노력했어야 했다. 신은 그 일을 내게 맡기지 않았어야 했다. 나중에 신을 만나면 따져 물을 거다. ‘왜 나였냐? 당신은 패배자 loser를 선택했다‘라고."
그의 인터뷰가 1월 28일 미국 전역에 방영되자 시민들의 격려 편지가 쇄도했다. 앨런 맥도널드도 그에게 전화해서 "알면서 아무것도 안 하거나 어찌 되든 신경도 안 쓰는 게 루저"라면서 "당신은 위너winner"라고 말했다. "만일 당신이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면, 우리 - P120

는 멈추려는 시도조차 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풀지 못했다. 그들은 사이어콜이 아니고 NASA가 아니라는 거였다. 사이어콜 부회장이던 로버트 루트와 NASA의 조지 하디가 편지를 쓴 건 그 직후였다. 하디는 "당신과 동료들은 당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NASA도 언론담당관 스테파니 쉬어홀츠 명의의 성명에서 "우주비행사들이 보다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있도록 용기 있게 발언해준 이블링 같은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라고 밝혔다.
그제야 이블링은 마음이 좀 편해져서 "모든 건 끝을 맺어야 하는법"이라 말했다고 NPR은 전했다. 말한 적 없지만 그에게는 보이스졸리에 대한 부채감도 있었을지 모른다. 모두를 대신해 그 빚을 다깊고 그는 2016년 3월 21일에 별세했다. 향년 89세.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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