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1960, 1970년대는 인권 운동이 큰 진전을 이룬 시기였다.
흑인민권법Civil Rights Act이 제정됐고, 전미여성기구NOW, NationalOrganization for Women가 창설됐다. 스톤월폭동을 기폭제로 성 소수자평등권 운동도 폭발적으로 발흥했다. 그 맥락의 전모를 입체적으로살피려면 냉전 체제의 여파 등에 대한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당시 미국이 베트남전쟁과 반전 평화운동의 거센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는 사실, 즉 먼 인도차이나반도로 쏠린 백인 국가권력과남성 권력의 공백과 지배질서의 혼란으로 오래 억눌렸던 이들의입지가 넓어졌다는 점도 주효했다.
하지만 법과 제도의 진전이 시민 의식과 관습 속에 스미는 데는상당한 시간과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일상의 보이지 않는차별과 편견에 맞서 온전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법 제도와 별개로 천부의 권리를 시민들의 감각 속에 끊임없이 노출하는 게 중요하다. 인종 분리의 담장을 넘어 흑인이 진입하고, 동성애자 커플이 손을 맞잡고 거리와 광장을 활보하고, 남성이 전유한 노동과 유희의 - P123

경계를 허무는 일, 끊임없이 자극하고 부딪쳐 더디더라도 점차 자연스러운 풍경의 일부가 되는 일은 집단이 거대한 대오를 이뤄서 힘과함성으로 법 제도에 맞서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투쟁의 일부다.

델 윌리엄스Dell williams는 그 시기 바이브레이터와 딜도를 들고고루한 성 윤리와 차별적 젠더 억압에 도전했다. 그는 1970년대 초여성 최초로 뉴욕 중심부에 섹스토이숍을 열었다. 어두침침한 홍등가 귀퉁이에서 남자가 운영하고 남성 고객들이 전하던 그 공간을, 여성은 법이 아니라 관습과 인식과 시선의 장벽에 막혀 접근할수 없던 그 배타의 영역을, 뉴욕 카네기홀 인근의 버젓한 자리에 여성 전용공간으로 창업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성공했다. 그가 연 것은 작은 가게였지만 그곳은 여성의 성적 해방구였고, 그는 상품을팔면서 주체적 성 의식을 함께 전파했다. "(여성의) 오르가슴이 세계를 구할 것"이라는 말을 남긴 ‘바이브레이터의 여전사‘ 델 윌리엄스가 2015년 3월 11일에 별세했다. 향년 93세.
- P124

자기최면이라도 거는 것처럼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이건 죄가 아냐(I love myself, It‘s not a sin)"라고 반복하는 스피어스의 노래는 여전히 그러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들과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사회 현실에 대한 역설적인 고발이었다. 스피어스의 저 노래가 구현하려던 세상이 그보다 30년 앞서 1974년 윌리엄스가 아파트 부엌,
또 ‘이브의 정원‘을 거점으로 구현하려던 세상이었다.
2015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워킹걸>이 담고 있는 이야기도 그것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 광고회사 사원이자 워커홀릭인 기혼 여성(조여정 분)이 망하기 일보 직전의 섹스토이숍 주인(클라라 분)을 만나 동업을 하게 되면서 관능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고, 섹스토이에대한 주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사업가로도 성공한다는 내용실제로 여성이 운영하는 섹스토이숍이 한국에 있는지, 어떤 사정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저 영화 속 이야기를 윌리엄스는 40여년전 미국 뉴욕에서 실현했다.(한국에서는 곽유라, 최정윤의 ‘플레저랩이 2015년 8월에 창업했다.) - P128

그의 임종을 지켜본 비서 엘리자베스 그린 코언은 "윌리엄스는자신이 이뤘거나 이루고자 했던 일에 대해 늘 ‘나는 단지 여성의 권리가 보다 신장되기를 바랐을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라고 <뉴욕프레스>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와 수십 년 동안 함께 일한 이브의 정원 매니저 킴 이브리스빅은 "윌리엄스는 섹스의 정신적인 면을 중시했다" "만일 모든 여성이 오르가슴을 경험한다면 세상은 훨씬 평화로운 곳이 될 것이라 말하곤 했다"라고 전했다. 이브의 정원 홈페이지는 그의 부고를 전하며 "윌리엄스는 우리 시대 이브의 역할은 창피스러움에 주눅 든 여성들을 각자의 성적 능력과 감각 그리고 관능을 자각한 강하고 활력 있는 여성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라 말하곤 했다"라고 썼다. 전미여성기구 뉴욕 지부장 재키 세발로스Jacqui Ceballos, 1925~는 "여성의 성적 무지에 대한 델 윌리엄스의 자각은 페미니즘 운동에서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소중한 자극제가 됐다" 하고 기렸다. - P129

2012년 4월 <USA투데이>는 미국 백악관의 대통령자유메달 수상자 열세 명의 명단을 전하며 인권법률가 존 마이클 도어John MichaelDoar의 이름 앞에 ‘다소 낯설지 모르는‘이라는 수식을 달았다. 그와나란히 놓인 이름들 미국의 첫 여성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가수 밥 딜런, 작가 토니 모리슨, 우주비행사 출신의 미 상원의원 존 글렌 등에 비해 그는 누가 봐도 무명 인사였다. 버락 오바마미 대통령은 "존은 미국의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용감한 법률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1960년대 미국 법무부 인권 담당 검사로 차관보를 지내고 1974년에 워터게이트사건의 의회특별검사로 활약했다.

미국의 1960년대는 200년 흑인 차별의 ‘전통‘에 대해 흑인과 소수의 백인이 조직적 저항에 나서던 때였다. 그 시기 도어의 자리는 헌법이 보장한 권리와 자유·평등·정의 같은 보편적 가치를 둘러싼거친 질문과 근원적 갈등들에 국가를 대표해서 답변하고 심판해야 - P131

하는 모두가 마다하던 자리였다. 그는 권력과 법이 맞설 때 법의 편에 의연히 섰고, 힘센 관습과 소수의 요구가 부딪칠 때 그 요구의 법적 타당성을 먼저 따졌다. 공적 사명을 부여받은 연방공무원으로서, 또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시민으로서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그일이 그때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절박하고 첨예한 일이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그는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1929~1968이나 맬컴 엑스Malcolm X, 1925~1965 혹은 당대의 몇몇 저명한인권운동가에 버금가는 영예와 명성을 얻을 수 있었지만, 당시에도세상이 많이 나아진 뒤로도 단 한 번 자신의 행적을 삶의 밑천으로삼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익명 대중의 피와 땀을 딛고 ‘역사에 남는맨 꼭대기의 시시한 자들‘이라는 놈 촘스키Noam Chomsky, 1928~ 식의냉소도 모면한, 드문 영웅이었다. - P132

1961년 5월 미시시피 주의 흑인 청년 제임스 메러디스 JamesMeredith, 1933~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미시시피대학교에 등록원서를 낸다. 그의 성적은 입학하고도 남을만큼 우수했지만 대학은 두 차례나 등록을 거부한 터였다. 그가 흑인이라는 게 이유였다.
당시의 민주당 주정부 역시 메러디스가 유권자법 위반으로 실형을산 이력을 빌미로 대학 측을 편들었다. 주정부와 대학은 인종주의적 편견 속에 있었지만, 설사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들 뒤에는 성난백인 유권자들이 있었다. 식당, 술집은 물론 버스 정류장에서도 흑인들은 백인과 공간을 공유할 엄두를 낼 수 없던 시절이었다. 미국남부의 거의 대다수 주가 그러했다.
메러디스는 미국 최대의 흑인 인권단체인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 - P132

협회NAACP‘ 회원이었다. 당시 그는 "내가 하려는 일이 어떤 어려움에 직면할지 잘 알고 있고, 또 감당할 준비가 돼 있다. (…) 누구도나를 억누를 수 없다"라고 말했다. 수차례의 청문회와 재판을 거쳐미국 연방대법원은 그의 입학이 정당한 권리임을 인정했고,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 1925~1968도 수차례 전화를 걸어 주지사를 설득했다. 1962년 10월에 대학 측은 메러디스의등록을 승인했다. 하지만 백인 학생들이 격렬한 시위로 실력 저지에나섰고, 그 와중에 두 명의 흑인이 숨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메러디스 역시 생명의 위협 속에 놓였다. 9월첫등교일, 존 도어인권국 수석검사는 연방보안관과 함께 메러디스와 나란히 등교를감행했다. 근 한 달간 그의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그를 지켰다.
당시 대학과 학교 인근에는 연방군인 500여명이 배치돼 소요 사태에 대비했다. 메러디스는 훗날 미국의 저명한 인권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활약했고, 미시시피대학교 교정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 P133

존 도어는 전통적인 남부 공화당 집안 출신이었고 스스로를 ‘링컨 공화주의자‘라고 부르곤 했다. 워터게이트사건이 터졌을 때 그는다시 워싱턴으로 불려와 미 하원 특별검사로 활약했다.(당시 그의 팀원 중 한 명이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1974년 7월 리처드 닉슨RichardNixon, 1913~1994 탄핵안 초안에 존 도어는 이렇게 썼다. "사적으로 나는 닉슨 대통령에 대해 아무 편견이 없고, 그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않다. 하지만 나는 대통령의 권력 남용 문제에 결코 무심할 수 없다. 3주 뒤 닉슨은 사임했다. 워터게이트사건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숱한 인터뷰 요청에도 불구하고 도어는 단 한 번도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돋보이게 할 만한 수많은 사연 - P138

의 주인공이었지만 자신의 경력과 경험을 소개하는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 1960년대 법무부 시절 그와 함께 일했던 새크라멘토 법대의 도로시 랜즈버그 부학장은 <LA타임스> 인터뷰에서 "도어는 늘 겸손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낼 뿐이었다. 우리가 그를 사랑했고, 그를 위해 열심히 일했던 것도 그때문이었다"
라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고향 미니애폴리스로 돌아가 아들이운영하는 로펌에서 주로 인권 사건을 맡아 일하며 여생을 보냈다.
1985년 PBS가 만든 1950, 1960년대 시민권 운동 특집시리즈에인터뷰이로 등장한 도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우리는 혁명이나전쟁이 아니라 법적 절차를 통해 카스트제도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항상 느꼈던바, 당시 현장에는 언제나 강하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미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법에 근거한 민주적이고헌법적인 절차들을 완성해냈다" - P139

2012년 메달 수여식 후 케이블방송 C-SPAN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을 "1960년대 이후 인종 평등을 위해 전진해온 모든 노력의 놀라운 결실"이라고 말했다. "당시 셀 수 없이 많은 남부의 흑인들이 투표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2등 시민이었고, 차별은 잔혹하고 끔찍했다. 이제 끝났다"
그는 2014년 11월 11일에 별세했다. 향년 92세. 오바마 대통령은백악관 공식 자료를 통해 "그의 용기와 인내가 없었다면 미셸과 내가 지금 여기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애도했다.
하지만 "이제 끝났다" 라는 그의 진단은 그의 희망이었다고 해야한다. 그는 미주리 주 퍼거슨사건 18세 흑인 청년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사건에 대한 대배심의 불기소처분과 그 이후의 상황들을 보지 못했다. - P139

생존자에서 조력자로
폭력 피해 여성 구제를 위하여


영국의 여성인권운동가 데니즈 마셜Denise Marshall은 1961년 12월12일에 런던 북부 하이버리의 아일랜드계 어머니와 외판원 아버지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재혼했다. 양부는 무능하고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마셜은 집에서 부모에게 맞는 게 일이었고, 학급에서는 가장 가난한 학생으로 따돌림을당했다. 아홉 살 때 부모가 너무 싫어 찻잔에 표백제를 부은 적이있는데, 그걸 알아챈 부모가 그를 야단치기는커녕 오히려 재미있어했다고 한다. 함께 살던 양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의강간이 시작된 것은 마셜이 일곱 살 되던 해부터였다. 어느 날 열네살의 자신을 또 덮치려는 할아버지에게 마셜은 다가오면 죽이겠다고 말했고, 비웃으며 덤벼든 그의 다리를 칼로 찔렀다. 강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 일이 있기 두 해 전 열두 살 때 경찰서에 찾아가강간당해온 사실을 고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어요. 오히려 쫓겨났죠. 1970년대가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 ‘이브스 Eaves‘를 찾아오는 어린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볼 때마다 나 - P149

는 이 사회가 1970년대 이후 얼마나 진보했나, 진보하기는 했나 싶어 절망합니다." ‘

페미니즘 전사戰士가 실재한다면, 데니즈 마셜은 그 일원이라고불릴 만했다. 영국 젠더폭력 피해 여성 구제단체 ‘이브스‘ 대표로서그는 유·청년기의 저 결기로 불의와 부당함에 맞섰다. 사건 현장에그가 나타나면 경찰들의 태도가 달라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성폭력·가정폭력·강제 성매매 피해 여성들의 구호시설을 열고 정신적·육체적 회복과 자립을 위한 창의적이고도 실질적인 여러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그에게 피해자는 동정하고 시혜를 베풀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불의에 희생된 동지였다. 그들의 위축된 자아를 북돋워피해자가 아닌 생존자 survivor로 다시 서게 하고, 나아가 다른 피해여성을 부축하는 조력자 supporter로 힘을 보태게 한 것은, 그의 삶이그러했듯 바로 그들에게서 세상을 바꿀 힘을 찾고자 해서였다. 영미국 왕실은 2007년 그에게 대영제국훈장을 수여했다. 마셜은 4년 뒤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빅 소사이어티‘의 위선을 향해 그 훈장을집어 던졌다. 그런 데니즈 마셜이 2015년 8월 21일 별세했다. 향년53세. - P150

기고문에서 피해 여성과 전문가들의 도움을 이어주는 매개 프로그램으로써 아미나 프로젝트를 런던뿐 아니라 영국 전역과세계로 확산해야 한다고 썼다. "아미나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 여성뿐 아니라 자원봉사자들의 삶도 보상받고 또 변화한다. 그들은 폭력에 대한 이해를 키우고 극복의 기술을 익히며 자기 삶의 새로운전망과 지평을 열게 된다. 한 참가자가 표현했듯이 ‘내 안에서 마치페미니스트의 그것과 같은 뭔가 포효하듯 깨어나는 경험을 하게되는 것이다."
‘피해자가 생존자로, 나아가 조력자로 변화하는 그 과정은 마셜의삶의 이력이기도 했다. 그는 내무부가 주최한 성폭력 컨퍼런스에서한 강간 피해자가 사례를 발표하는 동안 여성 전문가들이 분노는커넝넋 나간 얼굴로 동정하듯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났다고 말했다. 2003년 이후 파피 프로젝트를 거쳐 간 여성은 약 3000명에달하고 그중 1000여 명이 영국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 P152

영국 최대 여성 · 아동 자선단체인 ‘위민스에이드Women‘s Aid‘에 따르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일반 폭력 범죄는 1995년부터 2014년까지 약 3분의 1로 꾸준히 감소한 반면 가정폭력은 전혀 줄지 않았다.
2013년의 경우 매주 약 두 명의 여성이 파트너나 전 파트너에 의해살해당했다. 전체 여성 피살자의 46퍼센트였다. 여성이 남성 파트너를 살해한 경우는 7퍼센트였다. 2012년 한 해, 가정폭력을 겪은 여 - P152

성은 전체의 약 7.1퍼센트였고, 16세 이후 가정폭력을 경험한 적이있는 여성은 30퍼센트에 달했다. 영국 경찰은 30초마다 한 통꼴의가정폭력 피해 신고 전화를 받고 있다. 이브스가 인용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국 가정폭력 피해의 사회적 비용은 연간 160억 파운드에 달하고, 부상을 치료(정신과 진료 비용은 제외)하는 데만 약 17억파운드가 든다. 성폭력과 강제 매매춘 등을 뺀 가정폭력 피해만 그렇다‘
위민스에이드는 여성 한 명을 6개월간 구호시설에 수용하는 데드는 비용이 인건비와 시설운영비 등을 포함해 약 9600파운드라고밝혔다. 영국 정부는 2010년 약 1억 파운드의 예산으로 젠더폭력피해 여성 구제단체들을 지원했다. 그해 집권한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정권은 그 예산을 대폭 삭감하기 시작했다. 2015년 영국 정부의 젠더폭력 구제 예산은 2010년의 4분의1 수준인 2800만 파운드였다.  - P153

이른바 ‘빅 소사이어티‘ 정책, 즉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서비스를 정부에만 의존하지 않고 가족과 이웃, 사회공동체가 합심하여 추진함으로써 서비스의 효율을 높이고 작은 정부를 실현한다"
하는 구상의 일환이었다. 2010년 187곳에 달하던 젠더폭력 구제 시설은 2014년 155곳으로 줄었고, 그나마 대부분 극심한 운영난을 겪게 됐다. 위민스에이드는 "지난해 하루 평균 약 112명의 여성과 84명의 아동이 각종 구호시설을 떠나야 했다"라고 밝혔다.

마셜의 이브스와 파피 프로젝트도 직격탄을 맞았다. 젠더폭력은사회 기부의 가장 변두리 분야 가운데 하나다. 게다가 인신매매 피해 여성에 대한 지역사회의 시선은 위선적인 온정조차 기대하기 힘들 때가 많다. - P153

마셜은 범죄소설 마니아였고 영혼의 암살자 Soul Assassin』와 『긴그림자 The Long Shadow』라는 두 권의 범죄소설을 자비 출판한 작가였다. 어둡고, 새롭고, 조금은 자전적인 내용이라고 줄리 빈델은 그의 작품들을 평했다. 파트너리사가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은2003년 무렵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마셜은 "나 같은 ‘생존자‘는 상담을 받으라는 말을 늘 듣곤 한다. 하지만 내겐 글쓰기와페미니즘이 최선의 치료법이었다" "픽션 안에서 당신은 당신의 세상을 통제할 수 있고, 당신이 원하는 세상을 구현할 수도 있다"라고말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픽션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해 위암과 소장암말기 판정을 받고 줄곧 투병했다. 빈델은 병석의 그가 "할 일이 아직 많다" "레즈비언들을 위한 안전한 거처를 마련하고 싶고, 무엇보다 먼저 이 비정한 정부를 쫓아내고 싶다"라고 했다고 전했다. - P155

순간을 사는 존재
이단자라는 오명 속에서 존엄사 합법화에 나서다


기독교의 퇴행적 보수성과 몽매주의에 맞서 교회의 혁신과 종교건강성을 회복하고자 헌신했던 ‘이단자 Heretic 라루‘가 2014년 9월 17일 작고했다. 목사이자 종교학자였던 그는 성서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교회와 스스로도 믿지 않으면서 성서의 기록을 역사의 진실처럼 설교하는 목회자들을 비판했다. 또 노인학자로서 삶의 위엄 못지않게 죽음의 존엄을 중시했고,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활동에 생애를 바쳤다. 기성 교단과 다수의 보수 기독교인들로부터 비난받으면서도 그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외적인 것들의 허구성을 전투적으로 고발했다. 향년 98세. - P157

훗날 목사가 되고 종교기관의 성서연구자로 활동한 것을 보면당시의 저 별명은 그리 진지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존엄사 합법화 운동의 선봉에 서면서 그는 적어도 보수 교단의 입장에서는 진짜 ‘이단자 라루‘였다.
죽음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70년대부터 이어져온 듯하다. 1976년에 그는 한 심리학자가 임종을 앞둔 이들을 대상으로 죽음과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직한 태도 등을 설명하는 강연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리고 4년 뒤 영국의 저널리스트 출신 데릭 험프리Derek Humphry,
1930~와 함께 미국의 선구적인 존엄사 옹호 단체 ‘헴록 소사이어티Hemlock Society‘를 설립, 8년 동안 의장을 맡는다. 험프리는 불치병 아내의 자살 결심과 실행 과정을 기록한 『진의 길 Jean‘s Way』과 『마지막출구Final Exit 등의 저자이자 존엄사 합법화 운동의 선구적인 활동가였다. - P162

목사 자격을 지닌 종교학자가 존엄사를 지지하는 상설 조직을만들어 리더가 되는 일은,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로서는 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직을 사퇴하고 노인학과 겸임교수가 된다. 험프리는 "라루는 누구도 두려워 엄두를 내지 못하던 단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생의 막바지에 이른 이들에게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부여하자는 주장을 둘러싼 논란이 미국에서 막 시작되던 때였고, 당연히 뜨겁고도 예민한 주제였다. 그는 그 민감하고 논쟁적인 시기에 엄청난 조정력을 발휘하며헴록을 이끌었다"라고 회고했다.
헴록은 의학·법률 전문가 등과 함께 불치 환자 상담과 존엄사 합법화 운동 등을 주도했고, 1994년 오리건 주가 미국 최초로 존엄사 - P162

를 합법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힘록은 2007년에 관련 단체 등과 연합하여 공감과선택Compassion & Choices‘이라는 이름의 시민단체로 거듭났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4년 10월 16일 자 「죽을권리-힘을 얻다‘The right to die-Seizing some control」는 기사에서 뇌암에걸린 뒤 오리건 주로 이주해 의사의 존엄사 처방을 받은 캘리포니아의 스물아홉 살 여성 브리트니 메이너드가 그해 11월 1일에 자신의 삶을 끝내기로 했고, 남은 삶을 존엄사 옹호 운동에 바치고 있다는 사연과 함께 미국 사회의 죽음에 대한 전향적인 변화상을 소개했다. 미국의 경우 오리건 주를 이어 버몬트 몬태나, 워싱턴·뉴멕시코 주가 존엄사를 합법화했고, 존엄사 법안이 계류 중인 곳은더 많다. <이코노미스트>는 생사를 신의 선택으로 믿어온 강고한기독교 전통과 "목숨만은 신의 것"이라고 했던 사유재산권의 아버지존 로크의 정신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며, 교회에 규칙적으로다니는 미국의 신도 가운데 최소 20퍼센트가 존엄사를 옹호한다는공감과선택의 조사 결과를 인용하기도 했다. 저 거대한 변화의 물꼬를 튼 이가 라루였다.  - P163

그리고 라루의 교재 이야기도 있다. 라루는 매 학기 첫강의 때면 학생들에게 실제 사람의 골분을 보여주곤 했다. 자신의 친구였던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심리학과 허먼 하비 교수가 라루에게 강의 교재로 쓰라며 유언한 그의 뼛가루였다. 라루는 죽음의 실체를이성적으로 가르쳤고 "하비는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라며 농담처럼말하곤 했다.
또 그는 <레지스터> 인터뷰에서 "당신이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삶을 통해 추구하는 것들의 중요성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성과 성서』 『안락사와 종교』 『신의 역할』등 다수의 논쟁적인 책을 썼다.
라루는 두 차례 결혼했고 이혼했다. 전 아내 에밀리 퍼킨스는 "라루는 우리가 하루하루 혹은 한 해 한 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항상순간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을 하곤 했다"라고 말했다. 죽음과 순간으로 닿아 있기 때문에 그의 삶이 더 열정적일 수 있었다는 거였다. 퍼킨스의 말처럼 라루는 자신이 믿고 가르친 바대로 살았다. 유족은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산소호흡기 연명치료를 거부,
그의 뜻을 존중했다. - P165

1960년대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불씨는 아무래도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가 암살된 1963년 베티 프리던의 책 여성의신비가 지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케네디 집권 초기 전미여성기구의 성차별 폭로, 고용평등 운동도 든든한 화약고였다. 다만 벅샌덜같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가 보기에 그들의 활동은 너무 개량적이고 온순했다.
초기 신좌파페미니즘운동가들은 성차별 문제를 자본주의의 역사와 노동 현실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열었고, 특히 1960년대 광범위하게 전개되던 인권·저항 운동 조직 내 성차별에 가장뜨겁게 분노함으로써 독자적인 운동의 장을 여는 데 기여했다. 공산주의 이념을 모태신앙처럼 내장한 페미니스트 벅샌덜에게 반자본주의 투쟁과 결합하지 않는 여성해방운동은 넌센스였다.  - P172

유년 시절 이후 집에서 겪어온 경험에 비춰 좌파운동진영내의 성평등의식이라는 게 어떤 지경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1998년 출간된 ‘페미니스트 회고 기획The Feminist Memoir Project 에실은 불 지피기 Catching the Fire‘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그는 "페미니즘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사랑에 빠지듯 여성운동에 매료됐고,
페미니즘은 내 생애의 퍼즐을 풀어주었다. 나는 민권운동, 반전운동 등등을 해왔지만 내게 그것들은 의무감과 분노의 소산이었지 내자신의 싸움은 아니었다"라고 썼다. 유년의 아버지로 표상되는 것들에 대한 애증을 그는 그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인종과 계급과 젠더의 구조를 교차시켜보고자 했다. 사회변혁은 급진적인 제도 개혁을 통해 교정돼가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
하지만 그의 급진적 페미니즘은 여성학과 여성운동사에 미친 영 - P172

향에 비해 운동 진영 내에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1971년 이후그는 뉴욕주립대학교 교수가 돼 여성노동운동사를 가르치며 여성운동 현장과 거리를 뒀다. 대신 급진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가치를추구하며 독자적인 삶을 개척해나갔다. 그는 1976년 린다 고든 수전 리버비 등과 함께 미국 노동 여성 America‘s Working Women』이라는전 6권의 방대한 자료집을 공동 출간했다. 370여 년간 여성들이 남긴 일기, 구술 기록, 편지, 노래, 시, 사료집, 대중잡지, 기사까지 수집해 여성들이 노동으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고 어떤 조직을 만들어 어떻게 일했는지, 노예 여성들이 들판이나 집 안에서 했던 일과사보타주 사례까지 집대성한 저 책은 여성학과 노동학에 중요한 1차 자료로 꼽힌다. 당시 랜덤하우스의 젊은 편집자가 토니 모리슨이었다. - P174

벅샌덜 등은 1995년 인종적 · 민족적 배경과 지역 변수를 포함시킨 개정판을 냈고, 앞서 1987년에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ww의 조직가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Elizabeth Gurley Flynn, 1890~1964의 평전『워즈 온 파이어Words on Fire를 내기도 했다. 플린은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주요 활동가로 조직 내 성차별과 중앙집중적 구조 등에 대해 선구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며 싸운 공산주의자였지만, 벅샌덜의평전이 나오기 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여성이었다.
2011년 은퇴 후에는 뉴욕시립대학교에서 노동학을 강의했고, 베이뷰 여성 마약경범죄 교정시설에서 수감자들을 교육했다. 2011년말 한 인터뷰에서 그는 경범죄 교정시설이 수감자(대부분 18~34세스패니시와 아프리칸아메리칸이라고 했다)들의 교정·재활을 돕기보다그들을 사회의 낙오자로 만들고 있다고 성토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학생들은 지식에 목말라 있다" "정치적인 문제에 아주 성실하 - P174

다. 그들은 어서 나가서 ‘월가 점령‘ 시위에 참여하길 원하며, 뭔가이 사회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는 이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여성과 계급의 혁명적 건강성을 믿고 미래를 낙관한 힘찬 사회주의자였다. 올초 병원에서 신장암 말기 판정을 받자마자 곧장 퇴원, 친구들을 초대해 성대한 고별 파티를 열기도 했다. 그가 2015년 10월 13일 별세했다. 향년 76세.

영국의 저명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이자 왕립학회 회원인 실라로보덤Sheila Rowbotham, 1943~은 <가디언> 부고에서 "벅샌덜은 어디를 가든 선동하고 조직했다. 또 어디서든 환영받고, 사랑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를 이어주고 또 가르치고 돕고 아이디어를 나누는 데 쏟았다"라고 썼다. 시카고의 비영리 좌파 정치시사 전문 출판사 ‘헤이마켓북스 HaymarketBooks‘ 는 추모의 관용구 R.I.PRest In Peace‘ 대신 "Rest In Power"라는 멋진 표현으로 로절린 벅샌덜의 삶과 죽음을 함께 기렸다. - P175

벤치의 익살꾼
즐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시합에서 진 감독이 "난 잘했는데 애들이 형편없어서"라고 말했다고 치자. 사실이라면 그는 좋은 감독이 아닐 것이다. 선수들의 사기를 죽이고 팀워크를 해치고 팬들의 냉소와 비아냥을 사기 딱 좋은 말 아닌가. 하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진 않더라도, 패전팀감독의 심중에 저런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속내가 은연중에라도 드러날까 봐 더 조심할 것이다. - P177

1964년 미국 프로야구 마이너리그 산호세 비스Bees 감독 로키 브리지스는 데뷔전 패배 뒤 인터뷰에서 저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쏟아진 건 팬들의 비난이 아니라 유쾌한 웃음과 응원이었고, 선수들 중 누구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가 정말 잘나서가 아니라
‘못나서였다. 그는 그렇게 실패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전가하는 리더들의 오랜 관행을 기분잡치지않게 조롱했고, 저 상투어의 의미를완벽하게 뒤집었다.
그가 얻고 또 선사한 웃음은 메이저리그 선수로서나 코치와 감독으로서, 야구를 통해 추구했던 궁극적인 가치였다. <스포츠일러 - P177

스트레이티드>가 인정한 ‘미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익살꾼‘ 로키 브리지스가 2015년 1월 28일, 아이다호 주 코들레인의 한 호스피스병동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

에버렛 라마 브리지스 Everette Lamar Bridges, 애칭 로키 Rocky 브리지스. 그는 1951년에 미국 메이저리그 브루클린 다저스에 입단해 1961년에 LA에인절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만 10년 동안 2272타석 2할 4푼 7리의 타율을 기록했고, 통산 열여섯 개의 홈런을 쳤다. 현역 시절 그는 1·2·3루 등의 다양한 포지션을 거쳤지만 그가 가장 오래머문 자리는 벤치후보였다. 10년 사이 그는 무려 일곱 개 팀을 전전했고, 전반기와 후반기를 다른 팀에서 뛴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미국 프로야구 역사의 저 숱한 스타들 명단 속에서 그의 이름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야구를 정말 사랑하는 이들 중에는 그를 메이저리그의 가장 ‘즐겁고 행복한 선수로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 P178

군대 민주화 운동
부당한 명령과 처우 개선, 반전운동에 힘써


만일 군대에 노조가 생긴다면? 임금과 근무시간, 복지 규정을 두고 매년 정부와 협상을 벌인다면? 부당한 명령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부대원이 지휘관을 선출하자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군대를 없애자는 말만큼이나 급진적인, 그래서 꿈 같은 저 주장이 실제로 제기된 적이 있다.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구정 대공세 직전인 1967년 12월 미국 뉴욕에서였다. 그해 베트남에는 미군 약 50만 명이 주둔해 있었고, 대통령 린든 존슨이의회를 상대로 추가 파병의 불가피성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리던때였다. ‘미국군인노조ASU‘라는 이름의 그 조직은 반전 및 군대 민주화를 기치로 병영 안팎에서 꽤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고, 1960, 1970년대 좌파 운동과 결합하면서 베트남전쟁 종전에 크게 기여했다. 미국군인노조를 설립하고 이끈 앤드루 딘 스태프 Andrew DeanStapp가 2014년 9월 3일에 별세했다. 향년 70세. - P187

훗날 밝혀진바, 베트남전쟁에 징집된 전투병의 80퍼센트가 블루칼라 출신이었다. 대학생은 전체의 20퍼센트로 당시 대학 진학률약50퍼센트에 턱없이 못 미쳤고, 그들은 대부분 장교로 활동했다. 1970년대하버드대학교 재학생 가운데 베트남에 파병된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파병이 시작되고 전쟁이 확산되면서 시민들은 그 전쟁의 계급적·계층적 편향성을 분위기로 체감하게 됐고, 1년 단위로 교대하던전선의 군인들과 제대병들의 증언을 통해 전쟁의 실상이 알려지기도 했다. 그 전쟁이 정부가 선전하듯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 베트남 주민들의 차가운 반응과 누가 적이고 누가 민간인인지 모른 채 총을 쏘아야 하는 현실, 전장의 병사들에게전황을 정직하게 전달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 - P188

프는 한 인터뷰에서 "정부는 언제나 미군이 베트남 국민을 돕기 위해 거기 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1968년경에는 모든 게 거짓임이명백해졌다." 미군 대위 하워드 레비가 양민 학살자라며 그린베레병사들의 교육을 거부, 군사재판에 회부된 건 1967년이었다.(1964년에 미국 대법원의 흑인참정권 판결을 이끌어낸 앨라배마의 인권변호사찰스 모건 주니어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레비는 3년형을 선고받았다.) 앤드루 딘 스태프가 미 육군에 입대한 건 그해 봄이었다. - P189

도둑맞은 행복
수용소에서 1600킬로미터를 걸어 가족 품으로


매년 5월 26일은 호주 의회가 정한 ‘국가 사과의 날National SorryDay‘이다. 호주 정부가 과거 원주민에게 범한 야만적인 일들을 사과하고 잊지 않겠다는 취지로 비슷한 잘못을 다 함께 경계하자는 취지로 1998년에 지정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나 점령국에 가한 약탈과 학살 등의 악행은 보편적인 역사지만 호주의 과거는 좀특별하다. 당시 호주의 백인 정부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태어난아이들을 부모와 혈족의 품에서 강탈해 집단시설에 수용한 뒤 결혼과 교육과 노동으로 원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탈색하고 백인화했다. - P197

그 만행은 합법적으로 장장 두 세대를 넘겨 1905~1970 자행됐고,
사실상의 ‘국가 유괴‘로 최소 10만 명의 아이들이 수용소로 끌려갔다. 자신의 언어와 종교와 관습과 핏줄을 도둑맞은 그들이 이른바호주의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다. 호주 정부의 첫 공식 사과는 2008년 2월 13일에 이루어졌다. 당시 수상이었던 케빈 러드 Kevin - P197

Rudd, 1957~는 의회 연설에서 "We are sorry (우리가 잘못했습니다)"를연발했다.
도둑맞은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상처를 극적으로 증언하고 호주의 국가적 양심과 인류 보편 윤리의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내딛게 한 원주민 작가 도리스 필킹턴 가리마라Doris Pilkington Garimara가 2014년 4월 10일에 영면했다. 향년 76세. 그는 한국에도 번역 출간된 책 『토끼 울타리』의 저자이자 백인수용시설을 탈출해 장장1000마일약 1600킬로미터 걸어 가족 품으로 돌아온 토끼 울타리의실제 주인공 몰리 켈리의 장녀다. - P198

1931년 7월, 호주 북서부 깁슨 사막 인근 원주민 마을 지갈롱의열네 살 몰리는 동생 데이지, 사촌 동생 그레이시와 함께 백인 경찰에게 끌려갔다. 부모는 저항도 못한 채 통곡만 했고 할머니와 친척들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려는 부족 전래의 방식대로 제 머리를돌로 찧으며 함께 아파했다. 그들 형제는 원주민 어머니 모드가 토끼 울타리‘ 감독관이던 백인 아버지와 낳은, 마을 최초의 혼혈아다. 토끼 울타리는 동부 지역의 야생 토끼들이 서호주 목장의 목초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호주 정부가 1907년에 세 갈래로 나누어 설치한 연장 2023마일 3256킬로미터의 철조망으로, 그 철조망의 한 기점이 몰리의 고향 지갈롱이었다. - P198

아이들은 부족 언어를 쓰면 혼이 났고, 영어로 성경을 읽고 주기도문을 암송해야 했다. 하지만 몰리를 가장 분노하게 한 것은 수녀의 말 한마디였다. "우리에겐 엄마가 없다고 했다. 우리 말은말이 아니라고 했다."
며칠 뒤 아침, 수용소 아이들이 예배를 보러 교회로 이동한 사이몰리는 "엄마에게 가자"라며 두 동생을 이끌고 숲으로 도망쳤다. 어릴 적부터 고향에서 익힌 사냥 기술과 감각, 그리고 토끼 울타리만찾아 따라가면 아무리 멀어도 집에 닿는다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다. 그들은 헬기까지 동원한 추적을 피해가며,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난생처음 맞닥뜨리는 사막과 벌판과 숲을 헤쳐가며, 사냥과 구걸로 허기를 달래고 추위와 공포를 견뎌가며, 상처로 곪은 발의 통증을 참으며, 칭얼대는 동생들을 번갈아 입어주면서, 장장 9주 동안거의 맨발로 호주 대륙을 중단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수용소 탈출에 성공한 예는 몰리 일행이 처음이었다. 아이들을 추적하느라 큰돈을 쓰고 체면까지 깎인 원주민보호국은 몰리와 데이지를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 P199

하지만 시련은 끝이 아니었다. 백인 목장의 하녀로 살며 목부牧夫토비 켈리와 결혼, 도리스와 애너벨을 낳은 몰리는 1940년 11월에맹장염으로 수술을 받은 직후 두 아이와 함께 다시 무어 강 원주민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리고 9개월 뒤 네 살이었던 도리스는 남겨둔채 18개월 된 애너벨만 안고 다시 탈출, 지갈롱으로 돌아오지만 3년뒤 애너벨을 또 빼앗겼다. - P199

호주 정부가 사과하기까지 기나긴 줄다리기가 있었고, 땅과 함께정체성을 잃어버린 다수의 원주민들은 2등 시민으로, 술과 마약으로 황폐해져갔다. 호주 비원주민으로서 조국의 어두운 역사를 고발한 첫 지식인 세대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인류학자 윌리엄 E. H. 스태너다. 그는 150여 년에 걸쳐 원주민 사회에 자행된 파괴와 약탈의 역사에 대한 정부의 외면을 ‘거대한 호주의 침묵Great AustralianSilence‘이라 불렀다. 진보 학계와 원주민단체의 요구에 1992년 폴 키팅Paul John Keating, 1944~ 정부는 약탈과 살인, 문화와 생활양식의 파괴를 제한적으로 인정했지만 사과는 거부했다. 1997년 의회 인권위원회 보고서가 나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유당 존 하워드 JohnHoward, 1939~ 정부는 ‘사과sory‘가 아니라 역사적 흠집blemish에 대해
‘유감regre‘이라고 말했다. 당시 수상인 하워드는 선조들의 행위에대해 현 수상이 사죄할 수는 없다고 했고, 그들의 행위가 그릇된 것이긴 하나 선한 의도였던 만큼 사죄할 일이 아니라고도 했다. - P204

2014년 2월 케빈 러드 전 수상은 ‘국가사죄기금National ApologyFund‘을 발족하고 초대 의장을 맡았다. 그는 "우리는 우리 역사의 원주민성을 감추려 하기보다 더 확장된 국가적 정체성의 하나로 끌어안아야 한다. 우리는 원주민과 비원주민 삶의 간극으로 하여 미래세대로부터 비난받지 않아야 한다"라고 연설, ‘토끼 울타리‘로 깎아먹은 호주의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만회했다.
도리스는 화해위원회의 창립 멤버이자 ‘국가 사과의 날‘ 제정의발의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시드니모닝헤럴드>는 도리스가 숨지기 3주 전 고향에 가 몰리가그를 낳았던 부족의 성목 윈타마라 나무 아래에 앉아 긴 영적인 시간을 보냈고, 퍼스로 돌아와 혈족들의 기도 속에서 엄마 곁으로 영원히 떠났다고 전했다. - P205

등불을 켜는 자
경찰 내부고발자로 산다는 것


로빈 무어Robin Moore, 1925~2008의 논픽션 프렌치커넥션이 출간된게 1969년이다. 프렌치커넥션은 중동 지역에서 재배된 아편이 프랑스에서 헤로인으로 가공돼 미국 동부로 반입되는, 1960년대 최대의 마약 밀매 루트와 시스템을 일컫는 말, 책은 뉴욕경찰청NYPD 마약단속국의 영웅적 형사들이 그 유통 조직을 추적 소탕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1971년 진 해크먼이 주연을 맡은 윌리엄 프리드킨의 동명 영화는 큰 인기를 끌며 아카데미작품상 등 5개 부문상을 탔다.
책 출간과 영화 개봉 사이, 1970년 4월 25일자 <뉴욕타임스>에는 로빈 무어의 책이 그렸던 경찰상과는 정반대인, 뉴욕경찰청의 만연한 부패·비리 실태를 폭로하는 기사가 1면에 실렸다. 브루클린과브롱크스 지역 순찰대 소속 이탈리아계 경찰관 프랭크 서피코FrankSerpico, 1936~의 제보에 근거한 기사였다. 정기 상납과 뇌물 단속 정보 누설….…. 그는 언론 제보 전에 그 사실들을 감찰 당국에 보고했지만 전혀 시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는 말도 했다. 보도 직후 - P207

당시 뉴욕시장이던 존 린제이는 지방검사 휘트먼 냅Whitman Knapp,
1909~2004을 의장으로 한 경찰부패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냅위원회‘는 그해 6월부터 조사 활동을 시작해 1972년 8월 첫 보고서를발표했다.
서피코의 폭로는 맛보기일 뿐이었다. 영화의 감동에 취해 있던 이들의 예상과 달리 부패 경찰이 있다 해도 얼마 안 될 테고 비리라해도 자계自戒의 선은 있으리라 여기던 시민들의 기대와도 달리, 그들은 압수한 마약을 빼돌려 유통했고 수익금을 나눴으며 그것을단속 현장에 없던 요원들에게까지 일정 비율로 분배하고 있었다. 심지어 프렌치커넥션의 카르텔 조직원이나 다름없이 협조한 이도 있었다. - P208

그냥 경찰관도 아니라 자타공인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 자부하던뉴욕경찰청 마약특별조사팀SIU의 실상이 그러했다. 마약특별조사팀은 거리의 조무래기 소매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카르텔 유통 거점과 거물들을 추적·단속하는 임무를 전담한 팀이었다. 1972년 마약특별조사팀 전체 요원 70명 가운데 52명이 기소됐다. 판사는 그렇게 벌어들인 검은 돈으로 최고급 양복에 비싼 차를 몰고 다니며돈을 물 쓰듯 하면서도 경찰 신분증까지 지니고 있던 그들을 ‘도시의 왕자들‘이라고 불렀다.

냅위원회의 거의 모든 조사 성과는 30세 신참 마약특별조사팀요원 로버트 루시Robert Leuci의 목숨 건 활약 덕이었다. 냅위원회의설득으로 비밀요원 Undercover이 된 그는 16개월 조사 기간 동안 무선마이크를 숨긴 채 동료들과 생활했고, 도청기가 발각돼 두 차례나 살 - P208

해당할 위기까지 겪으며 비리 현장의 대화를 위원회에 생중계했다.
서피코도, 그보다 네 살 아래인 루시도, 브루클린 출신의 이탈리아계 이민 2세였다. 루시는 파이프 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봉제공장 직공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1940년 2월28일에 태어났다. 그의아버지는 어린 루시에게 성을 이탈리아어식 발음레우치이 아닌 영어식투시으로 발음하게 했다. "아버지는 미국인이 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끊임없이 주입하곤 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퀸스의 존애덤스고교를 졸업하고 캔자스베이커대학교에 입학한 열아홉 살에 그는
‘미국인이 되기 위해‘ 뉴욕경찰아카데미에 입교했고, 2년 뒤 자신과가족의 염원이던 뉴욕경찰청 배지와 휘장을 단다. 퀸스와 맨해튼,
브롱크스 등지의 순찰대원으로 일하던 그가 마약단속국 사복형사로 승진한 것은 스물네 살이던 1964년이었고, 또 몇 년 뒤 선망하던 마약특별조사팀에 발탁됐다.  - P209

그는 발군의 검거 실적을 쌓은 뛰어난경찰관이었다. 그리고 그도 이내 부패경찰이 됐다. 훗날 자서전 『올더 센추리언스All the Centurions에서 고백했듯, 당시의 그에겐 소속감이 절실했다. 부패는 가장 강력한 유대의 끈이었다.
냅위원회가 그를 선택한 배경은 확실하지 않다. 위원회 출범 초기, 검사였던 니콜라스 스코페타라는 이가 그를 설득했다고 한다.
스코페타는 "루시는 나쁜 경찰이었지만 그에겐 좋은 편이 되려는의지가 있었고, 그 일에 목숨을 걸었다"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젊어(그 무렵 30세) 물이 덜 들었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고, 1972년 <라이프> 보도처럼 "흑발에 구레나룻, 잘생긴 얼굴에 젊음의 기대감이 가득 담긴 온화한 갈색 눈동자의 그가 누구에게든 어떤 일에서든 확신을 줄 만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끄나풀‘이 되지 - P209

않으면 ‘미국인‘으로 남을 수 없을 만한 결정적인 약점을 잡혔을지도 모른다.
루시도 위원회의 제안에 선뜻 응한 건 아니었다. 오래 망설였고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는 조건을 달았다. 냅위원회가 경찰 비리에만초점을 맞춘다면 협조하지 않겠다, 뉴욕의 범죄 정의 시스템 전체가 부패했고 경찰은 50여 년 동안 굳어진 그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라는 거였다. 그가 요구한 ‘대의‘는 정의와 직업윤리 이전에 배반에 따를 인간적 고뇌를 견디기 위한 버팀목이기도 했을것이다.
스코페타가 그의 조건에 어떻게 답변했는지 역시 알려진 바 없다. 어쨌건 그는 협력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동기를 말하라면,
그건 (처벌의) 두려움이 아니라 죄의식이었다"라고 말했다. 그 죄의식은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서피코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 P210

미국의 감시자
스페인내전 참전 병사가 본 세계 정치


선택과 판단은 늘 곤혹스럽지만 특히 어려운 선택도 있다. 입바른 말 한마디로 앞길이 어긋나기도 하고, 투자나 빚보증에 자식들의 팔자가 출렁일 수도 있다. 좀 거창하지만 시대나 역사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선택도 있다. 시대가 가파를수록, 예컨대 전쟁이나 혁명의 시대라면 그 선택은 더 어려워진다. 100년 전 대한제국의 적지않은 이들은 선택의 자리 위에 제 목숨까지 얹고 고민했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 잘 만나고 나라 잘 만나는 것 못지않게 시대를 잘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목숨 걸 일도 없고, 비겁함을 드러내지 않아도되고, 비교적 안전하게 용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내전이 터진 1936년, 지구에는 약 20억 명이 살았다. 그들가운데 3만여 명이 파시스트 반란군에 맞서 스페인공화국 합법 정부를 지키기 위해 조직된 ‘국제여단‘에 가담했다. 그들 대부분은 국가나 조직의 명령에 등 떠밀려 나선 게 아니었다. 조국과 민족,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돈이나 명예를 좋은 것도 아니었다.
이름 없는 그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위해 유럽과 아메 - P217

리카, 더 멀리 중국에서 목숨을 걸고 달려간, 말 그대로 의용군이었다.(스탈린 체제의 코민테른이 그 안에서 어떻게 무정부주의자와 대립하고 억압했는지는 나중 일이니 덮어두자.)올해는 스페인내전 발발 80주년이다. 국제여단의 가장 어린 세대였을 10대 후반, 20대 초반 청년들 중 용케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도 이제 대부분 세상을 떴다. 델머 버그 Delmer Berg 는 국제여단 미국인 의용군 부대 ‘에이브러햄링컨여단‘의 평범한 병사였지만, 가장 오래 살아남아 특별한 병사가 됐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싶어서가아니라 그냥 스페인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라고 말했던 그 마지막병사가 두 달 넘긴 100년을 살고 2016년2월28일 별세했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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