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2021~2022년 배우 김혜자와 나눈 긴 시간에 걸친 대면 및전화 인터뷰, 구술, 누구에게도 고백한 적 없는 평생을 써 온 일기 형식의 글들, 신문 방송 등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 기사 등을 토대로 편집자가 초고를 만들고, 저자가 다시 기억과 사실을 수정하고 추가하는 방식으로 원고가 완성되었다. 조명 눈부신 드라마와 직사각형의스크린에서 걸어 나온 인간 김혜자와의 특별한 만남을 기대해 본다.

배우를 한다고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미쳤다며 모두 반대했지만 아버지(김혜자의 부친 김용택은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대한민국 2호 경제학박사이며, 미군정 시절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는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명한 배우의 한마디는 어떤 정치인이나 학자 못지않게 영향력이 있다. 찰리 채플린을 봐라. 웃기는 짓을 하는 것 같지만그 사람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아니? 좋은 배우가 되거라.
좋은 배우가 되면 톨스토이나 셰익스피어처럼 세상에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라. 그리고 책을 많이 읽어라."
내가 태어나기 직전, 아버지는 높은 연단에 서서 많은 군중 - P11

의 박수를 받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버지 옆에 놓인 어항속에
‘예쁜 빨간색 붕어‘가 헤엄치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박수는 어항을 향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 혜자는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 박수를 받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금붕어가 한 마리라 외롭겠다 하셨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은 그저 국어 시간이면 책 잘 읽는 정도의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부모의사랑이나 간섭을 모르고 살아서 어려서부터 웬만한 일들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해결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별히 예뻤다거나 뛰어난 재주꾼도 못 되었고, 그래서 그런지 부모님이나교사들이 내게 별로 큰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 P12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미치도록 좋아해서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화를 봤습니다. 수업 시간이 왜 그렇게 지루했던지, 학교가 끝나는 종이 울리기 무섭게 감옥에서 풀려난기분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영화관에 가서도 보았고, 텔레비전의AFKN(1957년부터 1996년까지 송출된 주한미군방송)에서 틀어주는 흑백영화로도 보았습니다. 영어 대사를 이해할 수 없으면 영상만으로도 보았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에바 가드너, 라나 터너, 오드리 헵번, 진피터스, 마릴린 먼로, 앤박스터, 잉그리드 버그먼, 데보라카,
진 시몬스……. 이런 여배우들의 얼굴 표정에서부터 발끝 움직이는 것까지 내 머릿속을 온통 사로잡았습니다. 나의 조그만가슴을 설레게 한 남자 배우는 로버트 테일러, 조셉 거튼, 제임스 메이슨, 게리 쿠퍼, 로런스 올리비에, 타이론 파워, 클라크 게이블이었습니다. - P13

내가 맡은 배역이 아무리 인생의 속박에서 고통받는 역이라해도 그 속에 바늘귀만 한 희망이 보이는가, 그것이 내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삶의 밑바닥을 헤매어도 그곳에 희망이 있나, 그 희망을 연기할 구석이 있나, 내일의이야기가, 혹은 그다음이 보이는가? 끝없는 절망 속에서 이 여자가 그냥 죽음을 선택해 버리나? 그렇지 않고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어디엔가 있나? 그것을 찾고 그것을 연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가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합니다. 얼마 전 강수연 배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속으로 "잘 가." 하고말했습니다. 강수연이 생전에 김혜자, 윤정희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늙어서 집으로」에 나오는 할머니 같은 역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나라를 빛낸 배우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그녀에게 연기할 수있는 좋은 배역이 있었어야 했는데…… - P19

배우는 연기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배우에게는 유일한 빛이고 희망입니다. 또한 그것이 배우가 세상에 줄 수 있는 희망의빛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수연에게 모든 것이 너무 일찍 왔고일찍 가 버렸습니다. 갓 스무 살 넘은 나이에 세계적인 무대(베니스 국제영화제와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연기상을 타고, 너무어려서 월드스타가 되고 나니 아무것이나 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작품이 있어야 배우로서 ‘이렇게 해 볼까, 저렇게 해 볼까?‘
고민하고, 설레고, 한 장면을 백 번 넘게 연습해 보고……. 그것이 배우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배우는 살아 있다고 느낌니다. 그것이 은총의 순간입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가슴 설레는것이 있을 때 삶이 은총으로 빛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로서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삶이되는 것입니다. 삶이 뒤엉키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더라도 배우는 자신이 연기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 P20

강수연 배우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전해 받고 또다시 죽음에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에대해 생각했습니다. 배우를 살게 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존엄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죽는다는 것은 슬픕니다. 어렸을 때 영화제에서 상타지 않고 평범한 주부 역할도 하고, 세계적인 배우는 아닐지라도 평범한 여성으로 살았으면 더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에 강수연에게 너무 큰 것이 왔습니다.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가엾어서, 김혜자, 윤정희 같은 배우, 「집으로」의 할머니같은 역을 하고 싶다 했는데.......
그래도 멋있어, 강수연 배우답게 갔구나. 그곳에서 만나. - P21

내가 인생에서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연기자로 살아오면서 몰입의 순간들을 많이 가진 것입니다.
어떤 것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반쯤은 몽유병자처럼흉내만 내면서 살아가는 나를 잘 아시는 신이 내가 몰입할 수있도록 계속해서 작품들을 내 앞에 가져다주셨습니다. 그러면흐릿한 불씨처럼 존재하던 나는 뜨거운 불로 타오를 수 있었습니다. - P23

키키 키린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렇게 몰입하는 순간 인생의 허무와 고통, 슬픔, 갈등, 부질없는 생각들을 다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나자신이 되고 어느 때보다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생의 모든 것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토록 부족한 인간인데 나를 배우로 만들어 주셨으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기 생활을 정말로 그만둘 때가 되면 그것으로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문장을 대사처럼 외웁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내 인생은매 순간순간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 P25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글을 읽고 있으면 행주 냄새가 납니다. 그분이 내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2004년 오래된미래 간)에 추천사를 써 주신 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김혜자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나라도 저럴 수밖에 없다고생각한 나머지 그에게 내가, 아니 모든 여편네들이 쓴 것처럼오싹해질 때가 있다. 저런 연기의 깊이는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혹시 드라마 밖에서의 그녀는 힘이 다 빠져 무기력하게 지내는 건 아닐까, 궁금해하곤 했다.‘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나를 보신 것입니다. 평소에 나 널브러져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아마 그분도 그런 거겠지. 소설한편 완성하고 나면 그러시겠지? 우린 같은 ‘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입니다. - P37

이제는 슬픈 이야기도 웃으면서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펑펑 울고, 심각한 장면은 내내 힘주며 했습니다. 그것이지난날의 연기였다면, 연기를 계속하면서 배운 것은 힘을 빼때 정말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실 힘을 빼는 게 더어렵습니다.
「눈이 부시게」에서 ‘등가교환‘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수(손호준)가 자고 있을 때 인터넷 방송 채팅방에 들어온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장면에서는 정색하고 말하면 안 됩니다. "니네들 그렇게 살다가 나처럼 된다." 이 말을장난처럼 툭 던져야 합니다. 무방비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졸고 있다가 잠결에 들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 P40

그 대사를 한 백 번쯤 연습했습니다.
거저 얻어지는 건 없습니다. 내 귀중한 것을 희생하지 않으면얻는 게 없습니다. 그것이 등가교환의 법칙입니다. 운이 좋았다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나는 이해력도 부족한 사람이라 열심히 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꿈에서도맨날 대본이 나올까요.
어느 날 걸레질을 하면서, 오늘이 내가 전에 좋아했던 사람이 결혼을 하는 날이라고 혼자 상상했습니다. 이제 시작했겠네,
지금쯤 식장에 걸어 들어가겠지. 그러면서 걸레질하는데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그 와중에도 내가 지금 어떻게 눈물을 떨어뜨리고 무슨 표정을 짓는지 스스로 살피고 있었습니다.
기억하려고 굳이 안 해도 그런 것들이 저장됩니다. - P41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연기가 있습니다. 촛대 훔친 장 발장을회개하게 해 준 신부님 같은 역입니다. 너무나도 나쁜 사람을변화하게 해 주는 할머니역할을 해보고싶습니다. 어디로 가서 살 수도 없는 흉악범입니다. 도망다니다가 다 쓰러져 가는집, 살 만한 집이었는데 오래되어서 폐허가 되어 가는 집에서들리는 피아노 소리 때문에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낡은풍금이나 피아노로 감동적인 곡을 치는 할머니, 나 혼자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런 역을 하고 싶어서 피아노를 배우고 있습니다. - P41

그래서 요즘에 99세 할머니가 피아노 독학으로 배우는 유튜브를 많이 봅니다. 이 할머니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는데도혼자 하시는데, 나는 피아노 선생님도 있고 다 갖춰 놓고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나는 항상 열망은 가득합니다. 피아노를잘 치고 싶습니다. 그런데 연기 외에는 실천이 부족합니다. 종종 후회합니다. 10년만 일찍 시작했더라면 지금쯤 한 곡 정도는 멋있게 연주할 수 있을 텐데, 그때 잠깐 시도했다가 다시 놓은 것을 후회합니다.
나는 직업란에 ‘탤런트‘라고 쓰는 사람을 보면 무심결에 ‘아,
저이는 저걸 직업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하면서 놀랍니다. 아주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해 와서 그런지 나는 연기가 직업이라고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직업이라고 하면 왠지 자존심이 상합니다. 「마더」의 엄마가 아들 도준(원빈)한테 "너는 나야" 하듯이 연기는 나입니다. 숨 쉬는 것처럼. - P42

옛날에 내가 열심히 외우고 무대에서 했던 대사를 다시 읽으면 그때의 나로, 그때의 내 감정으로 휙 하고 건너갑니다.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할 때는 또 지금까지의 어떤 고정관념에 따른 연기가 아니라, 가령 ‘절망‘ 같은 것을 대사에 의해서가아니라 발목의 관절이 딱 꺾인다거나 뒤로 나자빠지는 동작 등으로 표현해야 해서 그것을 고심했습니다. 연극 작품들이 그렇게 내면 연기를 키워 주었습니다. 연기를 하면서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의 정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6년 만에 다시 임신을 해서 입덧으로 다른 음식은 못 먹고 매일 딸기만 먹으며 살았습니다. 연출 선생님이 무대 뒤에서 북을 쳐 줍니다. 막이 오르면 나는 신이 오릅니다. 남편과 애인 사이에 방황하는 여인이 되어 울고 웃고 하다 보면 - P53

그대로 나 자신의 일처럼 빠져들어 갑니다. 애인과 남편의 공모로 죽임을 당하는 나...…. 요란한 박수 소리와 함께 막이 내립니다. 땀에 흠뻑 젖어 흡사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나는 딸기를 몇 개 집어먹고 또다시 저녁 공연을 위해 열심히 화장을 합니다.
함께 KBS 탤런트 공채에 합격한 배우들이 브라운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텔레비전 연속극이 활발해지자 무대 연기도 하나둘 그쪽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4년 동안 연극에 몰두하며 살다가 다시 KBS TV에 나갔지만, 이미 정상의길을 걷고 있는 동기 탤런트들을 보면서 심한 좌절감이 들었습니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커져 가는 그들을 의식하면 화제의 대상도 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내면적인 연기가 더 중요한 거야‘ 하면서 자꾸만 초라해져 가는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 P54

신은 절대로 내가 경험한 삶이 그냥 없어지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주 우울한 생각을 했든, 너무 슬픈 생각을 했든, 치졸하고 부끄러운 생각을 했든, 그 모든 것이 내가 역을 맡을 때조금씩 도움을 주었습니다. 내가 겪은 모든 일과 감정들이 연기에 다 투영되었습니다.
내 마음속이 그토록 뒤범벅일 것이라고는 누구도 모릅니다.
부잣집에 태어나 좋은 학교에 다니며 순탄한 삶을 산 것처럼보이지만, 내 마음속 회오리가 있기에, 복잡한 심리가 있기에연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배우에게는 어떤 경험도 나쁜경험이 없습니다. 물론 그것을 이겨 냈으면 말입니다. 아주 거지같이 살아도 그것도 좋은 것이고, 나쁜 남자를 만나 살아도그것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다 좋은 경험입니다. 배우로서는. - P57

슈베르트가 ‘내일 아침엔 깨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매일 잠자리에 들었다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좋아지기까지 했습니다. 작품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할 때, 그 일이 끝나면 매번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지?‘
늘 삶의 한쪽에 죽음이 함께했습니다. 신이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허무에 더 깊이 빠지기 전에 다음 작품에 온 힘을 다해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돈과명예가 아니라 그 천성적인 허무가 나에게는 연기생활에 더욱전념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나 자신은 죽음을 생각하지만사람들은 내 연기에서 위로받게 하고 싶었습니다.
‘살아, 네 힘으로 살아 네 힘을 다해, 죽지 마라는 결심이 나를 살게 했습니다. - P59

또 하나의 대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청춘이지만 현실은백수였던 스물다섯 살의 혜자가 70대가 되어서야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고 나서 하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잠방(인터넷 방송 진행자가 자는 모습을 보여 주는 수면 방송)을 하는 영수(손호준)와 그것을 보고 있는 영수TV 시청자들을 보고 혜자가말합니다
"늙는거 한순간이야. 너희들 이딴 잉여 인간 방송이나 보고있지? 어느 순간 나처럼 된다. 나도 몰랐어. 내가 이렇게 늙어버릴 줄"
극 중 대사만이 아니라 정말 그렇습니다. 나도몰랐습니다.
내가 이렇게 늙어 버릴 줄 준비할 시간도 없이 누구나 갑자기 늙어 버린다는 걸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생은 곧 시간이기 때문에,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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