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꽃집을 지나는데 창문에 예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우리엄마도 한때는 소녀인 적이 있었답니다." 발걸음이 멎었다. 뭐랄까. 애잔함과 서글픔과 허탈함이 차례로 밀려왔다. 매년 어버이날이면 애들한테 카네이션 달라고 조를 때는 언제고, 저문구에 쓰인 ‘우리엄마‘에 나도 해당된다는 사실이 인정하기싫었다. 어느덧 내가 효孝 마케팅의 판촉 대상으로 위로받는처지가 된 게 못마땅했다. 그럼 뭐 지금은 시들었어도 예전엔생기 어린 꽃이었다는 건가? 고쳐 주고 싶었다. "우리 엄마는지금도 소녀일 때가 있답니다."
예전에 홍익대학교 청소노동자 노문희 씨를 인터뷰한 적이있다. 그녀의 담당 구역인 건물 3층 복도 끝에 휴식 공간이 있었다. 새의 둥지처럼 몸 하나 겨우 웅크릴 공간, 책상 하나 놓이니 꽉 차는 창고 같은 방이지만, 다행히 벽면의 통유리 너머로짙푸른 나무가 흔들려 운치를 더했다. 책상 위에는 낡은 스프링 노트가 정물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학생들이 버린 노트를 주워서 일기를 쓴다고 했다. 그녀가 넘기는 노트에는 깨알 같은 글씨와 소녀 얼굴의 스케치가 마치 전혜린의 노트처럼 동경과 낭만으로 일렁였다. 나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까맣게 염색한 보글보글 억센 파마머리에, 울퉁불퉁 힘줄 튀어 - P11

나온 마른 손등에, 소매통넓은 파란색 작업복을 걸친 청소부단풍예순살의 그녀가 감수성 주체로 여기 책상에 앉곤 한다는 사실이 마냥 낯설었다. 돌아오는 길, 우리 엄마도 가을이면 ㄷ잎, 은행잎을 주워서 식탁유리 밑에 끼워 놓곤 했던 생각이 났다. 엄마가 화초 가꾸기를 좋아하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 엄마가 주운 것은 낙엽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살면서흘린 것, 놓친 것, 떨궈진 것들을 낙엽에서 봤던 게 아닐까. 잃어버린 당신 시간을 모으듯 몸을 구부려 줍고 부서질세라 쥐고고이 간직하는 동안 엄마는 가을을 통과하는 소녀였던 거다.
나는 이십 대 초반에 결혼해서 아이를 둘 낳았다. 엄마로 오래 살았다. 남들은 나보고 젊은 엄마라고 말했지만 나는 일찍엄마가 된 소녀였다. 엄마 아닌 생에 대한 갈망이 컸다. 앞치마풀어버리듯 엄마의 옷을 간단히 벗어버리고 싶었다. 체념인지적응인지 마흔에 다다르자 심신의 변화가 왔다. 최승자 시인의시구대로 "모든 일이 참을만해요. 세포가 늙어가나 봐요" 하는상태가 되었다. 그럭저럭 살만했고 얼렁뚱땅 살아졌다. 하지만 심신의 변화가 전면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체력의 저하와 감각의 퇴화가 그래프처럼 항목별로 고르게 나타나는 건 아니었단 말이다. 나는 여전히 왕성하게 분열 중인 세포를 발견했다. 두루두루 참을 만하다가도 견딜 수 없어지는 순간에 불쑥 튀어 오르는 힘, 내 피만 알아차리는 저항. 그것은 한숨이나 - P12

눈물 같은 울컥함으로 나타났다. 나는 불행을 예민하게 느꼈다. 내가 태어난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것은 아마도 본래적 자아로 회귀하려는 어떤 경향성일 것이다. 일상의 아수라장 안에서도 뭉그적뭉그적 나의 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힘이 있었으니,
그때마다 나는 어떤 소녀와 대면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올드걸‘은 고정된 인격체가 아니라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그러니까 피부에 잔주름 없애고 명품몸매 가꿔 ‘영우먼‘이 되려는 욕망처럼 눈가의 물기와 사유의탄력을 잃지 않는 올드걸이 되려는 욕망도 있다. 그런데 올드걸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영우먼은 미용산업, 성형산업, 의류산업을 거쳐야 만들어지므로 매스컴에 의해 떠들썩하게 알려지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반면, 노트 하나 시집 한 권이면 족한 올드걸은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사회의 거미줄 같은 자본 시스템을 경유하지 않는 존재는 발굴되지도 부각되지 않는법이니까. 또한 일상생활에서 엄마 역할로 기능하면 딱히 드러날 기회가 없기도 하다.
나이 든 여자를 마주하고 당신은 꿈이 뭐냐고, 무얼 욕망하느냐고, 어떤 슬픔이 있냐고 물어본다는 건 영 어색하다. 나도엄마에게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보통명사 ‘엄마‘의 사적 영역은 한때 누군가의 ‘자식‘이었던 우리 모두에게 상상 불가능한지대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드걸은 살아 있다. - P13

누군가 나에게 올드걸의 정의를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돈이나 권력, 자식을 삶의 주된 동기로 삼지 않고 본래적 자아를 동력으로 살아가는 존재, 늘 느끼고 회의하고 배우는 감수성 주체‘라고.

내 생애 첫 시집은 《한국명시선》이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의하얀 거품, 까만 포도알 같은 아이의 눈망울, 세모 지붕에 낮은울타리가 쳐진 집으로 뛰어가는 들판의 아이들 등등 70년대 지방 소도시에 있는 이발소 달력 그림에 쓰일 법한 사진에다가,
윤동주, 이육사, 김소월 등의 국정교과서 수록 시가 어우러진 사진판 양장본 책이었다. 내가 둥그런 바가지머리 아이였을 때그 시집을 방바닥에 드러누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다음 두번째 시집은 잡지 부록으로 딸려 온 《세계의 명시-애송시 200선》으로, 국내편 국외편이 섞여 있었다. 괴테의 <첫사랑>, 릴케의 <가을날〉, 롱펠로의 <인생찬가〉 등 어색한 번역에 따른 비장한 시어를 나는 아무 이물감 없이 그대로 흡수했다. 책을 읽다보면 심오하고 난해해서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느낌에 압도되는 경우가 있는데 소싯적 읽은 시들이 그랬다. - P14

아이에서 소녀로 자라면서 나는 시의 풍요를 제대로 누렸다. 문학적 감수성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그 시절에는 시가 봄날 개나리처럼 어디에나 흐드러졌다. 꼭 시집을 사지 않더라도스프링 연습장 겉표지에 조병화의 <남남>, 서정윤의 <홀로서기>,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같은 시가 예쁜 글씨체로꾸며져 있었다. 그뿐인가. 대중가요도 시적 정취가 물씬했다. 산울림과 들국화와 김광석의 어떤 가사는 시보다 시적이었다. 나는 노래와 시를 구분치 않았다. 노트를 쫙 펴고 한쪽에는 이형기의 <낙화>, 그 옆에는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베껴쓰곤 했다.
부피가 얇고 작아서 손에 쏙 들어가는 시집은 선물용으로도그만이었다. 삼천 원에 그만큼 기품 있는 선물이 또 없었다. 친구들과의 갈등에서 속상함을 표현할 때나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존경과 사랑을 고백할 때 등 언어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시집을 뒤적거렸다. 연애편지에도 시 한 편씩 꼭 곁들였다. 그렇게 꽃이 피고 낙엽이 질 때마다 한 사람과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시가 쌓였다. 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 김남주와 박노해의해방문학 시편들도 빼놓을 수 없다. 뜨겁게 달궈진 불온한 언어는 정신의 성냥불을 확 그어 주곤 했다. 비장미와 숭고미와낭만성과 유치함이 교차하던 이십 대, 온통 정서 과잉의 그 시대. 일상, 연애, 투쟁 어느 곳에서도 나는 손 길게 뻗어 시에 의 - P15

을 지했다. 시로 지은 집에는 어김없이 사람의 얼굴이 누워 있었으니, 그 인연이 매개한 ‘말들의 풍경‘은 그대로 세상 읽기의 독본이 되어 줬다.


서른 중반 즈음부터다. 결혼과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삶이복잡계 수준으로 얽혔고 이성복 시인의 시구대로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을 지나오면서 나는 더 이상 한갓 취향으로 시를 읽을 수 없었다. 생이 기울수록 시가 절실했다. 일을 마치고늦은 밤 귀가하면 식구들은 잠들고 집이 난장판이 되어 있곤했다. 식탁 위에는 라면 국물이 반쯤 남은 냄비와 뚜껑도 닫지않은 김치 보시기, 고춧가루 묻은 젓가락이 엑스자로 놓여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벗은 양말은 발아래 낙엽처럼 채였다. TV는 저 혼자 무심하게 떠들고 있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손댈 수가 없을 때면, 나는 책꽂이 앞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손에 잡히는 시집을 빼서시를 읽었다. 정신의 우물가에 앉아 한 30분씩 시를 읽으면서시간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기계적으로 일하는 노예가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임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를 - P16

읽으면서 나는 나를 연민하고 생을 회의했다. 생이 가하는 폭력과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했던가. 마치 혈관주사처럼 피로 직진하는 시 덕분에 기력을 챙겼다. 꿈 같은 피안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힘이 났다. 시가 주는 묘한 해방감의 정체가 무언지는 몰랐다. 그런데 얼마전 친구가 소설에서 봤다며 ‘조선조 사대부 여인에게는 시가짓기를 금했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그 책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결혼은 항상 숙명과 같은 엄숙한 얼굴로 가시울타리를치고 있었다. 아내는 그 울타리 안에서 순치된 가축처럼고분고분 살아갈 뿐이다. 이것이 남권 사회의 순리다. 가장 무난한 방도는 회의하지 않는 일이다. 남권 사회에 있어서 여인의 회의는 독약이나 같다. 조선조 사대부 여인들에게 시가 짓기를 금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문학에눈뜨는 것은 회의에 눈뜨는 일이 아닌가.
- 이영희의 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1권

문학에 눈뜨는 일은 회의에 눈뜨는 일이고, 회의에 눈뜨는일은 존재에 눈뜨는 일이었다. 시를 읽는 동안 나 역시 생각에 - P17

음서 생각으로 돌아눕고 곱씹고 되씹고 뒤척이기를 반복했다. 흔한 기대처럼 시는 삶을 위로하지도 치유하지도 않는다. 백석시인이 노래했듯이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할 뿐이다. 사는 일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삶을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가 내게 알려 준 것도 삶의 치유 불가능성이다. 니체가 말했듯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끔찍한재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바닥까지 시는 깊게 내려간다. 시를 통해 나는 고통과 폐허의 자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법을, 고통과의 연결 고리를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일명 진실과의 대면 작업이다.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 줬다. - P18

삶은 천연덕스럽고 시는 몸부림친다. 시가 뒤척일수록 삶은 명료해진다. 삶이 선명해지면 시는 다시 헝클어버린다. 나는 시라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가슴 아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좋은 시를 읽으면 자동인형처럼 고개가 올라간다. 가슴에 차오르는 것을 누르듯이 책장을 덮는다. 방 안을 한 바퀴돌고 나서야 다시 시 앞에 앉아 베껴 쓴다.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글쓰기 충동에 시달렸다. 시가 휘저어 놓아 화르르 떠올랐다가 층층이 가라앉는 사유의 지층들. 몸에 돌아다니는 말들을어디다 꺼내 놓고 싶었다. 꺼내 놓고 싶은 만큼 꺼내 놓고 싶지않았다. 나에게 고유한 슬픔일지라도 언어화하는 순간 구차한슬픔으로 일반화되는 게 싫었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 말의 욕망과 말의 장애가 충돌하던 어느 가을날, 나는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말은 나를떠났다. 계속 쓰고 싶었다. 궁여지책으로 사유를 자극한 시 한 - P19

편과 차오르는 말들을 나란히 블로그에 올렸다. 혹여 누가 그섬에 닿더라도 시 한수 나눈다면 덜 민망하리라 더 인정 어리리라 생각했다. 그 후로 사는 일이 힘에 부치고 싱숭생숭이 극에 달하는 날이면 시를 읽고 글을 썼다. 글을 쓰고 싶을 때마다시를 핑계 삼았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고, 회한이 쌓이고, 시집이 늘었고, 눈물이 마르고, 아이들이 커 가고, 《올드걸의 시집》이 자랐다. - P20

이 책은 단순하게는 서른을 지나 마흔에 들어선 한 여성의 이야기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간식 챙겨 주고픈 구닥다리 모성관의 소유자이자, 문득 일상을 전면 중지하고 홀연한떠남을 꿈꾸는 몽상가이자, 시시때때로 아름다운 언어에 익사당하고 싶은 문자중독자이고, 밥벌이용 글을 써야 하는 문필하청업자이며, 사람 만나 이야기하고 그 소소한 행복을 글로 쓰길 좋아하는 데이트 생활자인 나. 수많은 존재로 증식되는 나를 추스르느라 휘청거리며 살아온 날들을 담았다. 요란한 삶이고 빈 수레다.
살면서 공부를 중단하지 않았지만 학위가 없고, 책 읽기와 - P20

글쓰기로 생활비를 벌지만 명함이 없고, 시를 늘 곁에 두지만 등단이나 전공을 목표로 하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능력이 닿지 않는다 해야겠다. 이런 나의 삶의 이력이 부끄럽지는 않지만 살면서 민망한 적 많았다. 하나의 목적으로 수렴되지 않고 성과를 축적하지 않는 삶은 설명하기도 이해받기도 어려웠다. 오직 노릇과 역할로 한 사람을 정의하고 성과와 목표로 한 생애를 평가하는 가부장제 언어로는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말이 바닥났을 때, 시가 내게로 왔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이 잘 정의한대로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말하려 하는 시", 그 포기하지 않음에 기대어 존재 증명을 시도했다. 동시에, 익숙한 나로부터 떠나는 연습을 일삼았다. 지금나는 손에 쥔 것은 없으나 눈에 보이는 사람은 더 많아졌으니그리 나쁘지 않은 삶이었구나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엄연하게는 삶과 시의 합작품이다. - P21

이것을 왜 책으로까지 묶어야 하는지 고민이 길었다. 블로그와 웹진 <위클리 수유너머>에 연재한 ‘올드걸의 시집‘을 읽고
"시가 좋아졌다" "시집을 샀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용기를 냈다. 시의 사적 소유가 아닌 시의 공적 순환을 위해서 뻔뻔해지기로 했다. 내가 구상하는 좋은 세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 이는 아주 일상적으로는 끼니마다 밥 차리는 엄마의 고단함을 남편과 아들이 알아보 - P21

는 것이고, 음식점이나 편의점이나 경비실에서 일하는 사람과눈을 마주치는 것이다. 시를 읽는 것은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는 일이고, 나를 허물어뜨린 자리에 남을 들여놓는 행위다.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고 존재가 존재를 닦달하지 않는 세상. 그것을 ‘시‘와 ‘시에 곁들여진 수다‘가 조금이라도 도우면 좋겠다.
2011년 가을부터 연구실에서 시 세미나 ‘말들의 풍경‘을 진행하며 열 명 남짓한 벗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 시를 읽었다. 시의 이해도와 삶의 만족도가 동시에 상승했다. 말을 들어 주고, 말을 만들어 가는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벌써 몇 해 전 일이다. 엄마의 돌연한 죽음으로 삶의 일회성을 자각했고 존재의요청을 들을 수 있었다. 나로 하여금 생을 귀히 여기도록 영감과 자극을 준 눈물겨운 인연들이 있다. 이 책에는 수많은 타인의 지분과 체온이 깃들어 있음을 말하고 싶다.
2012년 다시 가을 - P22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 장석남의 시 <옛노트에서> - P35

홍상수는 사랑을 교통사고라고 생각할까. 그런 것도 같고아닌 것도 같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사랑의 숭고함을 말하지않고 신발처럼 일상의 맨바닥을 지탱하는 소모품 같은 사랑을얘기한다는 점에서 교통사고는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랑이합리적 판단을 거치지 않고 감정중추로 바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또 본능적이고 실재적이다. 그러니까 사랑을 피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달콤한 충돌을 왜 피하냐고 묻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 번개처럼 이미 와 있는 사건으로서의 사랑을 얘기한다. <옥희의 영화>에서 그의 사랑관이 드러나는 대사.
"사랑 절대로 하지 마. 정말로 안 하겠다, 결심하고 버텨 봐. 그래도 뭔가 사랑하고 있을 걸……." 받아 적고 싶어 손이 움찔했다. 니체가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라고 가르쳐 줬듯이, 속물 대마왕 홍상수가 사랑의 사이비 신도였던 나를 일깨운다. 사랑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 P38

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으리라 우리의 옛 맹세를 저버리지만 그때는 진실했으니,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지꽃이 피는 날엔 목련꽃 담 밑에서 서성이고 꽃이 질 땐붉은 꽃나무 우거진 그늘로 옮겨가지 거기에서 나는 너의 애절을 통한할 뿐 나는 새로운 사랑의 가지에서 잠시머물 뿐이니 이 잔인에 대해서 나는 아무 죄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배고파서 먹었으니 어쩔 수 없었으니, 남아일언이라도 나는 말과 행동이 다르니 단지, 변치 말자던 약속에는 절절했으니 나는 새로운 욕망에 사로잡힌 거지 운명이라고 해도 잡놈이라고 해도 나는, 지금, 순간속에 있네 그대의 장구한 약속도 벌써 나는 잊었다네 그러나 모든 꽃들이 시든다고 해도 모든 진리가 인생의 덧없음을 속삭인다 해도 나는 말하고 싶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절없이, 어찌할 수 없이
_함성호의 시 <낙화유수〉 - P39

삶이라는 극지

그대라는 대륙

목표도 없이, 계획도 없이 그대를 여행하는 것이 이번 생을 횡단하는 나의 본질적 계획이었네
-박정대의 시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부분 - P45

한 사람은 끝없이 자기를 바닥으로 몰아간다
더 이상 가라앉지 않을 때까지
그녀는 대기중으로 그녀의 전부를 흩어놓고 싶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껍데기의 공허를 맛보고 싶다
사랑이 그녀를 밑바닥에 이르게 한다
그녀의 텅 빈 육체 안엔 이제까지의 그녀가 아닌 다른 영혼이 심어진다
-이선영의 시 <사랑하는 두 사람> 부분 - P51

1
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알 수 없는 차가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 - P54

2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
_채호기의 시 <사랑은> 부분 - P55

직감이라는 것. 선천적인 부분도 있지만 나이 들면서 경험치에비례해 발달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고통 체험이 감각세포를단련시키는 것 같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도 있듯이 번뇌 그 후, 눈에 들어오는 세계는 넓고 깊어진다. 암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한테 가을날 단풍이나 밤하늘 둥근 달이 이전처럼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또 자아 붕괴의 통증으로 몸부림쳐 본 사람은 누군가의 표정과 말투에서도 고유의 느낌을 짚어내는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다.
나름의 곡절을 겪으며 나도 철이 좀 들었을까. 지난주에는선배한테 ‘아현동 철거 사진전‘을 보러 가자고 문자 메시지가왔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담에 가자고 하려다가 왠지 느낌이 이상해서 망설였다. 좀처럼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지 않고강인하며 냉철하기 이를 데 없는, 나하고는 종 자체가 다른 사람인데 그날은 문자만으로도 어떤 ‘흔들림‘과 ‘갈망‘이 읽혔다.
난 발목 잡는 일 더미를 제쳐 놓고,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연탄이었느냐"를 읊조리며 나갔다. - P56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메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 - P58

그렇게 부산스럽게 준비한 저녁 먹고서 식탁을 정리하고는, 한쪽에 밀어 두었던 책과 노트북을 끌어와서 긴긴밤을 보냈다. 둥근 모서리에 배를 붙이고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이유식을 먹었던 그곳에서, 나 역시 더운 밥덩이를 넘기고 매운 책뭉치를 삼키고 비린 언어들을 게웠다. 일명 생계형 글쓰기. 밥상에서 밥을 위한 글을 쓰면서 나는 밥의 절실함과 서러움을 배웠다.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을 위해서 운다는 말처럼 배 굶고 아픈 것들이 더 잘 눈에 들어왔다. 나의 반려가구인 그 원형식탁 의자 한 개는 삐걱거려 두꺼운 테이프로 붙여 가며 버티다가 결국 버렸다. 다른 하나는 쿠션이 푹 꺼졌다. 멀쩡한 의자가 두 개뿐이다. 식탁도 다리 쪽 부품이 빠져서 살짝 피었다.  - P64

이 틈이 좋아요
내 살과 당신의 살 사이, 서로 다른 육즙의 신선한 향내
뭍으로도 가고 바다로도 가는
여기는 시들지 않는 신접살림이 바람개비처럼 까불거리죠
이쪽이기도 하고 이쪽 아니기도 한 소슬한 틈새의 배갯머리에서
시간이 숨구멍처럼 휘는 이곳의 혼돈이 좋아요
-김선우의 시 <빨에 울다> 부분 - P66

사람 떠나고 침대 방향 바꾸었다
내가 할수 있는 일은 그것뿐
이불과 베개 새것으로 바꾸고
벽으로 놓던 흰머리 창가로 두고 잔다
밤새 은현리 바람에 유리창 덜컹거리지만
나는 그 소리가 있어 잠들고
그 소리에 잠깬다. 빈방에서
적막 깊어 아무소리 들을수 없다면
나는 무덤에 갇힌 미라였을 것이다. 내가내 손목 긋는 악몽에 몸서리쳤을 것이다
먹은 것 없어도 저녁마다 체하고
밤에 혼자 일어나, 열 손가락
열 발가락 바늘로 따며
내 검은피 다시 붉어지길 기다린다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는 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어 잊고 산다
어리석어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심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_정일근의 시 <그 후〉 - P69

생의 거품을 제거하는 방식이든 생의 금을 덧입히는 방식이든, 저마다 나답게 잘 살기 위한 몸부림이 치열하다. 학벌, 가족, 직급, 재산 등을 제외한 나머지 그 실재를 열망하거나, 이름과 얼굴을 바꾸면서 과거 청산을 도모하거나, 기민한 태도로 이익을 챙기거나, 그런다. 연예인만이 아니라 주변에서도 자기를 지우고 바꾸고 숨기고 갱신한다. 남루한 혹은 지루한 생을 리모델링하는 그 힘들이 놀랍다. 인생이라는 책에서 한페이지만 찢어 낼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잠시 헷갈린다. 어지럽고 어리둥절하다. 그들의 변신 욕망이 어떤 가치를 낳는지를물어야 할 것이다. 자기를 억압하느냐 해방하느냐.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묵묵한 살아냄보다 무구한 조작이우세할수록 삶은 꼬인다는 것. "나는 오해될 것"이고 "결국 나는 나를 비켜 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삶은 명사로 고정하는 게아니라 동사로 구성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을 오해받을지라도 순간의 진실을 추구하고,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며 살아갈 때만 아주 미미하게 조금씩, 삶은 변하는 거 같다. 살면서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들은 이름, 감각, 느낌, 음악,
이야기...... 나에게 존재를 위해 금가루 뿌리는 일이란 음악이내미는 손 잡는 것,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는 것, 느낌을 나누는 것. 그리 호사 누리며 살기로 한다. - P71

나는 오해될 것이다. 너에게도
바람에게도
달력에게도

나는 오해될 것이다. 아침 식탁에서
신호등 앞에서
기나긴 터널을 뚫고 지금 막 지상으로 나전철 안에서
결국 나는
나를 비켜갈 것이다.
_이장욱의 시 <오해> 부분 - P72

할 말 못할 말, 들을 말 못 들을 말. 찬란한 말, 쓰라린 말, 참담한 말, 간절한 말, 희미한 말, 비정한 말, 흔드는 말, 지독한 말,
다정한 말, 사는 동안 숱한 말의 숲을 통과한다. 도무지 그 말이 어려워 서성이기도 했고, 그 말에 채여서 주저앉기도 했고, 그말이 따스해 눈물짓기도 했다. 그렇게 추억이란 말의 기억이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말대로 모든 흔적은 상흔이다. 완전한 제거는 없다. 누렇게 곰팡이 슨 말들과 소화되지 않은 말들을 껴안고 한평생 살아간다. 가끔 텅 빈 몸에서 말의 편린들이 덜컹거리면, 외로운 몸뚱이 안에서 들려오는 그 인기척이 반갑기까지 하다. 어느새 정이 든 게다. - P73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산에 묻히는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 이성복의 시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 P79

어디 살림만 그러겠는가 싶다. 삶은 그 자체가 낭비다. 책 한권을 어렵사리 읽어도 돌아서면 내용을 까먹지 않던가. 두툼한책 한 권에서 단어 하나 내 것으로 만들기가 어렵다. 수학도 몇번을 풀어야 자신 있게 답을 쓴다. 수년간 다달이 부은 보험금을 해약하면 푼돈만 남는다. 사는 게 총체적으로 낭비라는 걸인지하지 못할 때는 살림만 미워했다. 살림이, 정확히 가사노동이 지겹고 하찮게 느껴져서 제발 집안일 안 하고 살길 간절히 염원했다. 지금은 아니다. 좀 나아졌다. 콩나물을 다듬고 깻잎을 씻고 쌀을 씻으면서, 땅에서 난 그것들을 만지면 마음이순해지고 위로를 얻는다. 바닥 구석구석에 어질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담으며 헝클어진 번뇌를 같이 모아 버린다. 떨어진 단추를 달고 터진 솔기를 꿰매면서 벌어진 마음의 틈을 메운다. 해 드는 오후 마루에 앉아 빨래를 반에서 반으로 접으며 미련과 회한을 접는다. 날 괴롭히는 것이 날 들게 한다더니 살림이 그렇다. - P82

온전한 순결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대를 다 닦겠는가
더러워진 방
팍팍 문질러 훔치다보면
그대를 내가 닦는 것인가
나를 그대가 닦는 것인가
후줄그레한 걸레의 물기에 어른거리는
세월이여, 조각난 마음이여
-이재무의 시 <걸레질> - P83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몸이 말라비틀어지고
영혼이 꺼멓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의지는 사랑이다

오, 가난에 찌든 모과여 망신의 사랑이여!
- 김중식의 시 <모과> - P87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한다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
내가 속한 시간과
나를 벗어난 시간을
생각한다
-신해욱의 시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부분 - P91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 장미 한송이 참예쁜 애구나 뒤에서 웃고 있는 남자 한때 무지 좋아했던 사람 목사가 되었다 하네 이주 노동자들 모이는 교회라지하도 괴롭혀서 도망치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하하하 그가웃네 감격적인 해후야 비록 내가 낭송한시라는 게 성직자에게 들려주긴 참 뭐한거였지만

우린 조금 걸었어 슬며시 그의 딸 손을 잡았네 뭐가이리작고 부드러울까 장갑을 빼려다 그만두네 노란 코트에반짝거리는 머리띠 큰 눈동자는 내 눈을 닮았구나 이 애엄마는 아마 모를 거야 근처 미술관까지 차가운 저녁 바람 속을 걸어가네 휴관이라 적혀있네 우리는 마주 보고웃다가 헤어지려네 전화번호라도 물어볼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할 거라 하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서로 뜻밖의 사람이 되었어 넌 내 곁을 떠나 붉게 물든 침대보 같은 석양으로 걸어가네 다른 여자랑 잠자겠지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_김이듬의 시 <겨울휴관> - P96

아득한 고층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난간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 P100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 심보선의 시 <슬픔이 없는십오초> - P101

하나의 시험대가 주어졌음을 알아챘다. 내 신체가 거부하는 그곳, 불편함을 느끼는 대상에 바로 나를 성장시킬 무언가가 있다며 니체는 "금단의 땅에서 열매를 구하라"라고 했다. 유목은 한국에서유럽으로 여행 가는 게 아니라, 자기로부터 떠나는 능력이다.
나의 정체성은 다른 내가 될 가능성이다. 그동안 배운 이론들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앞으로 삶을 뚫어야 하는 상황. 불현듯용기가 났다. 원한 감정을 털어버리자. 나를 개방하자. 내 살 곳은 속세다. 산 중턱 절간에 절대 고요를 원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심심해서 살지 못한다. 사람과 사건이 넘쳐 나는 이 대지가나의 삶의 절대 조건이다.
- P104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 어디에 있을까. 금수저 물고 태어나지 않은 나는 적어도 그랬다. 근데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뭔가 늘 못마땅하고 모자란 현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치를 들고 정자를 짓고 물길도 트고, 그렇게 땀 흘리면서 친구도 만나고 하루가 가고 한 시절이 갔으니 말이다. 이마 위에 불어오는 산들바람에서 느끼는 자유 지옥을 느끼던 그곳이 천국으로 변하기도 하는 경험은 매우 짜릿하다. 밥 짓고 아이 키우고 두세 시간 출퇴근 기분 내면서 살아 보고 싶어졌다. 동료한테 우리 앞으로 삼성전자 직원보다 더 열심히 살아 보자며 웃었다. 즐겁게 이사했고 부엌도 정리했다.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개운하다. 정이 생겨서 다니는 게 아니라 다니다 보면 정이 - P104

들게 마련이다. 우선은 시 세미나를 시작하고 니체를 일독할참이다. 삼선동에 놓인 나는 또 어떻게 변할 것인가, 자못 궁금하다. 이것이 셀프 구원 - P105

내가 늙은 부모를 봉양하는 내가 늙어 자식에게 의탁하든, 비참하고 비루한 생이 지겨워 눈물바람 할 테고 태어난걸 후회하다가도 또 어떤 날은 살 만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하겠지. 육아가 힘들 때 아이들이 족쇄 같아 ‘괜히 낳았다‘고 워망했던 것처럼 더러는 괜히 죄 없는 부모님을 탓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나는 안다. 힘든 일 포기하고 떠난다고 자유롭지 않다. 그건 자유에 대한 환영이고 망상이다. 넘지 못할 것 같은 산도 한 걸음 내딛으면서 다리 힘이 길러지고, 그러면 다음 봉우리는 더 쉽게 건널 수 있다. 근육이 튼튼해지고 체력이 길러지면 삶의 어느 고비에서도 성큼성큼 문제 안으로 들어가는 궁극적인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런데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가면걸린 데서 또 걸린다. 살아보니 그랬다.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고 좋기만 한 관계는 가짜이고, 아무런 사건도 생기지 않은 무탈한 일상이 행복은 아니었다. - P112

호남선 터미널에 나가면
아직도 파김치 올라온다
고속버스 트렁크를 열 때마다
비닐봉지에 싼 파김치 냄새

텃밭에서 자라 우북하였지만
소금 몇 줌에 기죽은 파들이
고춧가루를 벌겋게 뒤집어쓰고
가끔 국물을 흘린다

호남선 터미널에 나가면
대처에 사는 자식들을 못 잊어
젓국에 절여진 뻣뻣한 파들이
파김치 되어 오늘도 올라온다
우리들 어머니 함께.
-강형철의 시 <사랑을 위한 각서8 - 파김치> - P113

<바다> 라는 시를 읽다가 청승맞게 공상에 빠져버렸다. 푸른하늘의 ‘겨울 바다‘가 생각나서 찾아들었다.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
‘바다‘가 연상되어 또 그것을 듣고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정말이지 이럴 때만 좋다. 이럴 때만 사는 것 같다. 나의 영혼이 촛불처럼 환해지고 기타처럼 딩가딩가 자유롭게 춤을 춘다.
가족들이랑 캐리비안베이 가는 거 말고, 내가 정말 가고 싶은 데는 여수 밤바다다. 혼자서 가고프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여수행 우등고속을 끊고 떠났다가 여수에서 며칠 묵고, 또백석이 "자다가도 바다가 보러 나가고 싶다"라고 한 통영에도가고, 민박집에서 하루 종일 방 끝에서 방 끝으로 뒹굴면서 책보고 밤이면 파도 소리 들으면서 글 쓰고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붙박이 인생 청산하고 떠돌이처럼 살면 내가 어떻게 될지궁금하다. 그럼 사는 일이 덜 지겨울까. 역할에서 빠져나오면 나비처럼 자유로울까. 여섯 시간째 뱃속이 텅 비었다고 전화하는 딸내미에게 즉시 달려가지 않아도 되면 나의 인생이 더 고상해질까. 밥에 묶인 삶. 늘 떠남의 욕망에 시달린다.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이 바다 되어 출렁이고, 마음만은 지중지중 물가를 거닌다. - P118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하구려 섧기만하구려
_백석의 시 <바다> - P119

가난한 사람들의 아파트엔 싸움이 많다
건너뛰면 가닿을 것 같은 집집마다
형광등 눈밑이 검고 핼쑥하다
누군가는 죽여달라고 외쳤고 또 누구는 실제로 칼로 목을 긋기도 한다
밤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유체이탈한 영혼들처럼 기다란 복도에 나와열대야 속에 멍하니 앉아 있다
여자들은 남자처럼 힘이 세어지고 눈빛에서 쇳소리가 울린다
대개는 이유도 없는 적개심으로 술을 마시고까닭도 없이 제 마누라와 애들을 팬다
아침에 보면 십팔평 칸칸의 집들이 밤새 욕설처럼 뱉어낸
악몽을 열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
운명도 팔자도 모르는 화단의 꽃들은 표정이 없다
동네를 떠나는 이들은 정해져 있다
전보다 조금 더 살림을 말아먹은 아내와
그들을 자식으로 두고 죽은 노인들이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교과서를 족보책처럼 싸짊어지고 아이들이 돌아오면
아파트는 서서히 눈에 불을 켠다 - P125

이빨이 가려운 잡견처럼 무언가를 갉아먹고 싶은 아이들을 곁에 세워놓고
잘사는 법과 싸움의 엉성한 방어자세를 가르치는 젊은부부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밤이면 아파트가 울고 울음소리는
근처 으슥한 공원으로 기어나가 흉흉한 소문들을 갈기처럼 세우고 돌아온다
새벽까지 으르렁거린다
십팔, 십팔평 임대 아파트에 평생을 건 사람들을 품고
아파트가 앓는다. 아파트가 운다
아프다고 콘크리트 벽을 쾅쾅 주먹으로 머리로 받으면서
사람들이 운다
_최금진의 시 아파트가 운다> - P126

원래 큰 사건이 생기면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끊임없이 이어지기 일쑤다. 수습하다가 지치셨다. 그래도 엄마의 표정은 늘 그렇듯이 밝았지만 가슴속은 이미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고 허물어지고 있었다. "나는 집이 좁아도 괜찮다, 오빠도 몸이 불편하지만 자유롭게 잘 살지 않느냐, 왜 내 행복을 남들 기준으로 평가하느냐"라고 아무리 말해도 내 집 마련해서가정 꾸리고 사는 자식 보는 것을 부모 임무의 완결판이라고생각하는 엄마를 설득하기엔 논리가 부족했다.
모든 엄마들이 그럴 거다. ‘남들처럼 평범하게‘가 이 땅의 엄마들에게는 너무 소박한 바람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자동차나보험회사 광고에 나오는 정상가족의 판타지를 버리지 못하는한, 엄마의 자리에서는 늘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미 한 방향으로만 사고가 굳어져버렸기에, 적극적으로 다른 삶의 유형을 기대하고 상상하면서 희망을 찾을 수가 없는 거다. 우리 엄마 역시, 결핍과 우울에 겨워하다가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놓고 몸 안에서 스위치를 내려버린 것이라고, 나는 엄마의 죽음 - P130

을 이해했다.
김중식 시인의 시구대로 내가 아프면 당신도 않으시는 어머니, 원초적 모성으로서의 엄니, 신문이 조종하는 대로 사고하고 광고에 나오는 대로 욕망하는 엄마, 사회적 모성으로서의엄마. 어떤 개념을 걸어도 ‘엄마‘는 문화적 산물이고, 가부장제의 희생양이다. 더 이상 엄마들이 아프지 않은 세상을 위해, 나부터 아프지 않고 울지 않는 엄마가 되는 일이 남았다. 자식이울까 봐 미리 우는 엄마가 아니라, 엄마가 웃어서 자식도 옷게하는 그런 행복한 엄마들이 많아지는 세상, 엄마가 내게 남겨주신 숙제다. - P131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라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_김경주의 시 <주저흔> 부분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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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다른 시간이리라. 그 시간을 다른 여인이 살게 되리라.
그 시간은 다른 세계에 존재하리라.
그 세계가 다른 삶을 열어 주리라.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빌라 아말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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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의 첫 독서는 <울프 일기》였다. 버지니아 울프가 서른여섯 살부터 쉰아홉 살까지 쓴 일기를 연도별로 정리한 책이다.
나는 목차에서 ‘50세‘를 찾아 그곳부터 펼쳤다. 내 나이 즈음 울프는 어떤 경험과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더 이상 고칠 수 없을 때까지 고친다" "이번 책은 내가 내 안에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실들을쏟아 내고 있다." 같은 구절들이 눈에 박혔다. 쓰는 자의 근심, 집념, 희열 같은 감정이 잔파도처럼 일렁였다. 대작가도 말 그대로 일희일비했구나 싶으니 숙연해졌다. - P5

사는 게 만만해지는 날이 오지 않듯이 쓰는 게 담담해지는날도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내심 기대했다. 글 써서 생활한 지 십수 년이 지났고 단행본을 몇 권 냈으면 점차적으로쓰는 일에 의연해지지 않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건 글쓰기가
‘기준의 문제이기 때문인 것 같다. 독자가 늘었고 시간이 경과하면 글이 나아져야 한다는 내적 압력은 커진다. 기대치는 높아지는데 실력은 더디게 쌓이니 도통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막막할 때면 미래가 아닌 과거를 더듬는다. 예전엔 내가 글을어떻게 썼더라, 하고.
그 시작에는 《올드걸의 시집》이 있다. 지금부터 12년 전이다. 2008년 11월 개인 블로그에 ‘올드걸의 시집‘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생활에서 자라나는 감정에 시를 덧대어 한 편 두 - P5

글 편 글을 올렸다. 돈을 벌거나 책을 내려고 쓴 게 아니라 속을 달래려고 일이 버거워서, 어쩌면 쓴다는 의식도 없이 쓴 글들이다. 생애 가장 눈물 많던 시절이다. 몸의 우기를 지나며 썼던지라 자기 연민이 과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가 글과 삶의거리가 없었던 유일한 시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가장 고통 없이 글을 썼던 것이다.
한 무명작가의 글은 운 좋게 출판 기회를 얻었다. ‘은유‘라는필명으로 2012년 첫 단행본 《올드걸의 시집》을 펴냈다. 그런데 3년 후 출판사가 경영상의 이유로 절판을 결정하고 책의 판권과 남은 책 백 권을 돌려줬다. 혼자서는 들지도 못할 책 무더기가 현관에 무덤처럼 놓여 있던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 P6

그렇지만 슬픈 일 다음에는 좋은 일이 오기도 하는 법. 사연을 전해 들은 은평구의 작은 서점 ‘책방비엥‘에서 책을 위탁판매해줬고, 《올드걸의 시집》을 아끼는 독자들과 모여 책을 추억하자며 ‘절판 기념회‘를 열어 줬다. 그 후로도 책방에는 ‘그 책‘을 구할 수 있느냐는 문의가 꾸준했다고 한다. 외부 강연에서 내가만난 독자들도 ‘그 책‘을 읽고 싶다는 바람을 전해 왔고, 실제로중고 책이 정가보다 두세 배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2016년 12월에 《올드걸의 시집》의 전부는 아니고 절반을추려 그간 쓴 다른 글들과 묶어 개정증보판 격인 《싸울 때마다투명해진다》를 펴냈다. 나는 새로 나온 분홍 표지의 책을 ‘그 - P6

책‘을 찾는 이들에게 권하곤 했는데 일부 독자들은 말했다. "이책이 그 책은 아니다"라고
‘그 책‘, <올드걸의 시집》을 원본 그대로 다시 세상에 내놓게되었다. 절판된 지 5년 만이다.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오면 저자의 손을 떠나 제 운명을 산다더니 정말 그런가보다. 곡절이많아서 나에겐 ‘감정 꽃다발‘ 같은 책이 되었다. 어느 날 저자가되는 어색한 기쁨을 안겨 주더니 불쑥 절판되는 쓸쓸한 아픔을느끼게 해 줬고 이번에는 복간이라는 애틋한 설렘과 부끄러움을 선물해 준다. 가끔 강연회에서 《올드걸의 시집》을 들고 오는 분들을 만나면 나는 ‘인연의 증표‘라도 발견한 것처럼 북받치다가 마음이 녹아버렸다. 책에 대한 감상으로 "실컷 울었다"
- P7

는 고백을 종종 듣는다. 초보 저자의 책을 무려 사고 읽고 아끼고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 초판본을 지닌 삼천 명의 독자는 한 사람이 쓰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튼튼한 뗏목이되어 줬다. 첫 책의 부족함을 아는 만큼 고마움이 크다.
"내가 감히 이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을까? 자기가 쓴 것이 출판되어 나온 것을 얼굴을 붉히거나, 떨거나, 얼굴을 가리려 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날이 언제고 오기는 올까?" 버지니아 울프가 ‘37세 일기에 쓴 문장이다. 내 나이 서른일곱부터 쓴 글들을 보는 지금 내 심정이 딱 이렇다. 두 번째 서문을 쓰기 위해 - P7

‘죄스러운 열정‘으로 철 지난 글들을 찬찬히 일독했다. 얼굴이화끈거려 지우고 싶은 문장들, 거친생각과 서툰감정들에 한없이 난감해졌지만 그대로 두었다. 시대정신의 변화에 따른 중요한 오류는 각주를 달았다.
가족과 결합된 시간과 사건이 많았던 시기라서 동거인들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일상에서 발아한글이기에 불가피했다. 육아 집중기 시절 나는 좋은 엄마에 대한 높은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나와 남을 부단히 들볶았던 것 같다. 아이들이 먹을 밥을차리는데 자꾸 한숨이 나는 내가 미워서 쓰기 시작한 글들이다.
아이들용으로 손이 가는 반찬을 해 놓았을 때 그걸 먹는 남편이미운 내가 싫어서 쓰기 시작한 글들이다. 먹는 이를 미워하는사람은 예정에 없던 내 모습이었다.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으로인간의 품위를 지키고 싶었던 한 여자의 분투, 수없이 무너졌던실패의 기록을 너그러이 품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 P8

나는 슬픔의 친척인가?
우리는 친척인가?
이리도 자주 내 문 앞에서
오, 들어오라!
_
빈센트 밀레이의 시 <슬픔의 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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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
고양이와 인간을 사랑한 고릴라


코코Koko는 인간의 언어로 인간과 소통한 암컷 서부 롤런드고릴라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영어 단어 2천여 개를 알아듣고 수어 천여 개를 구사했다. 그의 수란, 연구자들이 미국표준수어를 변형해 만든 ‘고릴라수어Gorilla Sign Language‘여서 극소수만이해하는 일종의 암호였지만, 그와 인간이 ‘대화‘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코코는, 언어능력을 떠나 인간이 다른 영장류에게품을 만한 환상을 채워줄 만큼 위엄 있고 점잖았으며, 여린 생명, 특히 어린 고양이들에게 자애로웠다.
코코는 단일 개체로선 가장 오래 인간의 실험-관찰 연구 대상이었던 비호모사피엔스였다. 코코는 한 살이 채 안 된 1972년부터 45년여 동안 발달심리학자 프랜신 "페니" 패터슨Francine "Penny"
Patterson과 그가 설립한 고릴라재단 The Gorilla Foundation 연구자·사육사들과 함께 살았다. 코코는 넘치도록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지만, 동물원 고릴라에게 대체로 허용되는 무리 생활을 누리지는 못했다.  - P171

페니의 연구는 르완다의 야생 고릴라 무리에 섞여 그들을 연구한 다이앤 포시Dian Fossey의 그것과 방법론이나 연구 목적 등에서 상반되는 거였다. 1977년 포시도 코코를 만난 적이 있지만, 그의 논평은 알려진 바 없다. 다만 표시는 자신이 익힌 야생 고릴라들의 발성 언어를 코코에게 시연했고, 코코가 무척 호기심을보였다는 짤막한 글만 재단 연표에 실려 있다.
일부 스타 아역배우들이 타의로 은퇴한 뒤 겪는 어려움처럼,
실험이 끝나고 동물원으로 복귀한 동물들도 새 삶에 쉽사리 적,. - P178

응하지 못한다. 인간의 살뜰한 보살핌을 더 이상 못 받고 무리에서 경쟁해야 하는 일상은 우울증이나 과도한 공격성의 원인이 되고, 더러는 조기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그들에 비하면 코코는행운아였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2011년 매거진 <더 위크The Week> 기자는 자신의 갓난아이 적사진을 본 코코가 두 팔로 아이를 안고 어르는 흉내를 내더니 사진을 가져가서는 물끄러미 쳐다본 뒤 입을 맞추고 제 인형을 건네더라는 일화를 전했다. 언어 능력을 덮어두더라도, 코코는 저런 뭉클한 이야기로 동시대 인간에게 큰 감동과 사랑을 전한 비범한 고릴라였다. 그리고 그런 비범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보이는 그의 모습 뒤에 가려진 것들을 애써 살피게 했고, 인간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게 했다. - P179

첫 고양이 올볼의 사고사(1984) 소식을 전해 들은 코코가 "고양이, 울다, 안됐다, 코코-사랑 Cat, cry, have-sorry, Koko-love"라 말하면서슬퍼했다는 일화를 환기하면서 ‘비인간 영장류의 슬픔과 언어적표현에 감동했던 『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의 저자 바버라 J. 킹Barbara J. King은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보낸 이메일에서 "코코는 인간의 과학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개별 동물들이 치르는 회생에 대해서도 새삼 깨닫게 했다. 코코의 삶에 박수를 보내더라도, 우리는 그가 고도로 통제된 비자연적 환경에 갇혀 평생을 보내야 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썼다. - P179

엘리 아비비
시오니즘에 맞선 유대인 히피


세속주의 시오니즘Zionism의 핵심은 이스라엘 국가 건설이다.
그건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꿈꿨던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과 닮았다. 현대 시오니즘 운동의 이론가이자 선동가로, 오늘날 이스라엘 시민들이 국부쯤으로 추앙하는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은 1896년 책 『유대 국가』에서 국가의 완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는 단순히 우리의 복장, 관습, 전통, 그리고 언어를 되찾는 외적 동질성뿐 아니라, 느낌이나 태도까지도 동일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 물샐틈없는 일체주의는 구약 이사야서의 "흩어짐은 하나의 심판이요, 흩어진 유대인들이 다시 ‘뭉침‘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문장에 기반한다. - P181

19세기 말 본격화한 시오니즘 운동은 2차대전과 홀로코스트를 거치며 더 맹렬해졌고, 이런저런 곡절을 거쳐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실현됐다. 하지만 헤르츨의 이상은 국가 건설만으로완성될 수 없는 종교 이데올로기이기도 했다. 민족의 단결을 방해하는 온갖 사상들(이를테면 자유주의)이나 물리적 제약들(예컨 - P181

대 협소한 영토)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뒤따라야 한다. 따라서 시오니스트에게 보편 인권과 자유, 정의, 휴머니즘 같은 근대적 가치는 바빌론의 시대에서부터 이어져온 신의 지침 안에서만 대접받는다. 이스라엘 독립선언문이 "모든 이웃 국가들과 그 국민들에게" 제안한 "평화와 우호 협력과 유대"도 근본적으로는 자기편에게만 유의미하다.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이라고도 불리는1948년의 1차 중동전쟁부터 근년의 가자 전쟁Gaza War까지, 국제사회가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만 십여 차례를 치렀다. 온전한 침을 위해 전쟁을 하고 전쟁을 위해 더 굳게 뭉치는 시오니즘의 중식 회로 안에서, 이스라엘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민족) 구심력과 장악력을 발휘해왔다. - P182

엘리 아비비Eli Avivi는 그런 이스라엘의 히피였다. 그는 건국 직후인 1950년대 초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시오니스트 국가권력에맞서, 히피들의 미덕이라 할 만한 자유와 평화, 탈권위, 억압 없는 사랑과 게으름을 추구했다. 국가의 압력과 알력에 맞서던 끝에 자신의 여권을 찢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71년 레바논 접경의 텅 빈 마을 아크지브Akhziv 에 초소형국가 ‘아크지브랜드 Akhzivland‘를 수립해 스스로 대통령이 됐다. 자칭 "오만의 술탄에 이은 중동 최장수 권력자"로서, 중동 국가로는 유일하게 단한 번도 무력분쟁에 개입하지 않은 ‘업적‘을 남긴 그가 2018년5월 16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 P182

윌리엄 디멘트
졸음의 몽매에서 인류를 깨운 의학자


미국 연방 고속도로교통안전국(이하 교통안전국) 국장을 지낸 마크 로즈킨드가 1970년대 스탠퍼드대를 다니던 시절, 학부 졸업생 약 80퍼센트가 수강했다는 ‘전설‘의 두 교양 강좌가 있었다. 정신의학자 헤런트 카차두리안Herant Katchadourian의 ‘인간과 성생활‘, 그리고 수면의학자 윌리엄 디멘트william Dement의 ‘잠과 꿈sleep and18‘이다. 청년기 갈증(섹스와 잠)의 반영일 수 있지만, 거기에는 전복적 의미도 있었다. 전자는 당연히 1960~70년대 성 혁명의 연장선 위에 있었고, 후자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자본주의 정신』이래의 절대 미덕, 즉 근면성실과 ‘깨어 있음‘에 대한 반박이었다. 디멘트는 졸리면 무조건 자야 하고, 더 중요한건 졸리지 않도록 미리 충분히 자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 P191

잠은 왜 자고 꿈은 왜 꾸는지, 인류는 아직 온전히 알진 못한다.
하지만 건강한 잠은 어떠해야 하는지는 뇌파와 체온, 혈압, 맥박, 혈중산소농도 같은 다양한 기준들을 통해 웬만큼 밝혀냈다. 그게수면다원검사다. 연령대별 적정 수면 시간도, 물론 개인차가 있지만, 대체로 성인 기준 하루 7~9시간 정도로 수렴돼왔다. (디멘트는 "더 잘 수 없을 때까지 자는 게 적정 시간"이란 입장이었다.)수면의학자들은 수면 부족 및 장애가 혈압과 콜레스테롤을 높 - P195

여 뇌와 심혈관에 악영향을 끼치며, 비만과 2형당뇨, 인지기능 저하와 우울증 등의 질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밝혀왔다. 하지만 디멘트가 미국인 약 20퍼센트가 수면무호흡 증상을 겪고있다는 가설을 제기하던 1980년대 말 학계는 ‘그가 미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정도였다. 디멘트의 판단은 오히려 보수적이었다.
디멘트는 대학 농구팀 선수들을 대상으로 수면량과 자유투 성공률의 상관관계를 연구했고, 2002년엔 만 11일, 264시간 동안잠을 안 자 기네스북에 오른 고교생 랜디 가드너를 관찰하며 새벽 3시까지 테이블 야구 동전 게임을 무려 100회나 치르기도 했다. 만 74세의 그는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그는 십대의 에너지에 도전할 만큼 용감했다. - P196

동료와 제자들은 한목소리로 그를 ‘수면의학의 아버지‘라고 애도하고 있다. 스탠퍼드대 교수 에마뉘엘 미뇨는 "(수면의학의 거의 모든 게 실은 빌로부터 시작됐다"라며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잠에 대해 무지했거나 적어도 10년은 늦게 알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10년은 무수한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브라운대 교수 메리 카스카던은 "아무도 잠에 관심을 두지 않던 그황무지에서 디멘트 혼자 잠의 문제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
했고, "거의 혼자서 연구비를 타내고, 의회를 설득해 이만큼 오게 했다"고 말했다.
디멘트는 1928년 워싱턴주에서 태어나 시카고대에 진학했고,
2차대전 종전 직후 일본 주둔군 정훈병으로 파병돼 신문을 제작했으며, 학부 시절엔 수준급 베이시스트로서 퀸시 존스, 스탠 게츠 등과 잼세션을 하기도 했다. 훗날 그는 "고만고만한 음악가보단고만고만한 의사가 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공부에 몰두했다고말했다. 그는 2003년 정년 퇴임 하고도 2015년까지 ‘잠과 꿈‘ 강의를 계속했다.  - P197

왕슈핑
중국 혈장 경제의 위험을 경고한 내부고발자


미국 뉴요커들이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이냐‘고 묻는 건, 질문이 아니라 대개는 ‘촌놈‘이라는 의미의 조롱이다. 굳이 웨스트버지니아인 까닭은, 지리적으로 적당히 가까우면서 정서 면에서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가수 존 덴버가 <Take Me Home, CountryRoads>란 노래에서 웨스트버지니아를 "거의 천국"이라고 너무 표나게 추켜세운 탓일 수도 있겠다. - P201

중국 상하이나 칭다오의 도시인들에겐 ‘허난성이 그런곳이다. 광역 행정단위 가운데 소수민족 자치구를 제외하면 가장 가난하고 낙후한, 황하강 남쪽 내륙농업지역이 허난성이다.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의 여진이 가장 오래 지속됐고, 1970년대 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과 1980년대 자본주의화 과정에서도동중국해 도시들에 밀려 소외됐다. 대신 인구는 많아서 허난성의 인구수는 31개 성·시·자치구 가운데 경제 선진 지역인 광둥산둥에 이은 3위(2019년 기준 약 9600만 명)다. - P201

허난성이 1990년대 초중반 이른바 ‘혈장 경제Plasma Economy‘의거점이 된 배경이 그러했다. 혈장 경제란 국가와 허난성 보건국이 주민들의 피(혈장)를 헐값에 사들여 혈액제제 제약회사에 비싸게 팔아넘기는 매혈 시스템이다. 1990년대 초 허난성에서117개 현에 400여 개의 채혈 센터가 운영됐다. 센터 입구에는 "팔 뻗어 혈관을 보여주고 주먹 쥐고 계십시오. 50위안(당시 기준 약 7.5~8달러)을 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어지간한 농가가 1년 동안 농사지어 쥘 수 있는 돈이200달러 안팎이던 시절이었다. 중국 문학계 거장 옌롄커의 소설『딩씨 마을의 꿈』에는 한창때의 허난성 마을들이 ‘쇠 냄새(피 냄새)‘로 흥건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게 과장이나 허구가 아니라는 증언도 있다. - P202

그 돈 냄새, 피 냄새가 사실은 죽음의 냄새였다. 비용과 효율성 때문에 주삿바늘을 재활용하는 일은 예사였고, 채취한 혈액을 원심분리기로 돌려 혈장만 남기고 나머지 혈액 성분은 식염수에 섞어 재수혈하는 과정에 타인의 혈액이 섞이는 일도 허다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허난성 주민들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감염되고,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을 앓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2001년에야 저 사실을 처음 공식 인정했다. 중국 보건성 관계자는 매혈로 에이즈에 감염된 허난성 주민이 최소 6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인류 최대·최악의 의료 스캔들이었다.
허난성 저우커우시의 감염질환 연구자 왕슈핑은 매혈자들 - P202

이 에이즈에 무방비로 감염되고 있다는 사실을 1995년 처음 밝혀냈다. 시와 허난성 보건국은 그의 보고를 묵살했다. 모처럼 지역 경제에 화색이 돌게 한 혈장 경제 자체를 위협하는 폭로였기때문이다. 왕슈핑은 베이징 국가보건성 산하 국립바이러스연구소에 샘플 재조사를 의뢰했다. 중국 정부는 이듬해 4월 모든 채혈 센터를 잠정 폐쇄했다. 왕슈핑은 그렇게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했지만, 대가는 훈장이 아니라 수난이었다. 허난성 당국은그를 해고했다. 직장 동료였던 남편과는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 베이징으로, 미국으로 떠돌아야 했다. 그가2019년 9월 21일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 인근 계곡에서 트레킹 도중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59세. - P203

허난성 성도 정저우의 산부인과 의사 가오 야오제 는중국 HIV 예방 캠페인과 에이즈 환자 권익 운동의 상징적 존재다. 그는 1996년 허난성의 첫 공식 에이즈 사망자로 기록된 여성환자를 돌본 이래, 사비를 털어 HIV 예방 팸플릿을 제작해 지역병원과 시민들에게 배포하고, 해열제와 진통제로나마 환자들을보살폈다. 그가 왕슈핑과 알게 된 것도 1996년이었다. 왕슈핑은HIV 감염경로와 실태, 에이즈발병과 진전 추이 등 연구 자료를지속적으로 가오에게 전달해 당국의 적극적인 조치를 촉구하게했다. 1996~2001년 베이징 미국대사관에서 일한 전 외교관 데이비드 코히그는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왕슈핑은 당시 중국의HIV 및 에이즈 감염 실태에 관해 신뢰할 만한 거의 유일한 정보원이었다"고 말했다. 왕슈핑은 가오의 ‘은밀한 배후‘이자, 중국 에이즈 원년의 내부고발자였다. - P208

왕슈핑은 2001년 가을 위스콘신의대 연구원으로 채용돼 미국으로 이주했고, 유타주의 한 아쿠아리움 재무책임자와 재혼한뒤 솔트레이크시의 유타주립대 암연구센터에서 일했다. 그는 직접 정한 영어 이름 ‘선샤인‘처럼 무척 활달하고 유쾌해서, 기자와 인터뷰하는 자리에 무지개색 발가락 양말을 신고 나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남편과 훗날 미국으로 건너온 딸 외에 조카 둘을 입양했고, 샴고양이 빌리Billy와 베이글 Bagel이란 이름의 개와 - P208

함께 지냈다. 그가 빌리의 영특함을 자랑하는 유튜브 영상이 볼만하다.
2019년 9월 초 영국 런던 햄스테드 극장이 <지옥궁의 왕 TheKing of Hell‘s Palace>이란 제목의 연극을 처음 무대에 올렸다.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 출신의 연출가 마이클 보이드가 연출을 맡은 작품으로, 왕슈핑과 1990년대 중국 혈장 경제 이야기였다. 왕슈핑은 초연 직전 인터뷰에서 중국 공안 요원이 저우커우시의 옛 동료와 친척들을 협박해 공연 취소를 종용했다면서 "내가 직접 그들에게 맞서는 것보다 친구나 친척을 인질 삼아 내 입을 막으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일이 더 힘들었다"며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거짓말 같은죽음에 일부 외신은 ‘명백한‘ 심장마비라고 굳이 적었다. - P209

조지나 메이스
멸종위기종을 정의한 과학자


세계자연기금과 런던동물학회의 생물종 다양성 지표‘리빙 플래닛 인덱스Living Planet Index‘ 2020년 보고서는 지구 야생 척추동물 개체수가 1970~2016년 사이 68퍼센트 감소했다고 밝혔다. 같은 기간 인구는 37억 명에서 74억 명으로 두 배 늘었다. 유엔 생물다양성과학기구IPBES는 2019년 5월 보고서에서 생물 약 100만종이 인간으로 인해 멸종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밝혔다. 만 년 전지구의 육상 척추동물 사이 비중이 1퍼센트에 불과하던 호모사피엔스는 2011년 32퍼센트로 늘어났고, 야생동물은 99퍼센트에서 1퍼센트로 격감했다. 나머지 67퍼센트는 인간을 위한 가축이었다. 지구의 ‘여섯 번째 대멸종sixth Mass Extinction‘ 진단을 뒷받침하는 데이터는 저것 말고도 부지기수다.
2차대전의 수많은 살육과 민족 멸절의 야수적 기획을 경험한국제사회는 유엔 창설 3년 뒤인 1948년, 유엔 회원국과 비정부기구가 연합한 세계 최대 환경단체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International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을 설립했고, 1964년부터 IUCN ‘레드리 - P211

스트Red List‘, 즉 멸종위기종 보고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IUCN은숫자 말고도 사라져가는 종의 명단을 함께 발표한다. 근년의 보고서에는 유럽햄스터, 북대서양참고래, 황금대나무여우원숭이 등3만 2천여 종이 담겼다.
IPBES가 밝힌 멸종위기종 100만 종과 IUCN의 3만 2천 종의수치 차이는, 인류가 우주의 생태계만큼 지구 생태계를 모른다는사실에 기인한다. 1980년 일군의 곤충학자가 중미 파나마 우림의나무 열아홉 그루를 털어 곤충을 채집했다가 딱정벌레의 약80퍼센트(1200여 종)가 미기록종인 사실에 경악했다는 유명한일화가 있다. 2020년 현재 인류가 아는 지구 생명체는 140만~180만 종이지만, 실제 종 수가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 P212

최소 1억 종은 되리란 추정도 있다. 그 경우 한 해 멸종률을 1퍼센트로만 잡아도 매년 100만 종이 인간도 모르게 인간에 의해 사라지는 셈이 된다. 과학자들은 인간으로 인한 생물종 멸종률이 저절로 멸종하는 자연 멸종률의 천에서 만 배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IUCN 레드리스트는 예산과 종에 대한 지식의 한계 때문에 이미 확인된 생물종 가운데 일부만을 대상으로 단위 지역 내 개체수 변화와 서식지 파괴를 실증적으로 분석해 발표하는, 가장 ‘보수적‘인 보고서다. 멸종위기종 3만 2천 종이라는 숫자는 2019년기준 기록종의 10퍼센트도 안 되는 12만 종을 조사한 결과였고, 2020년 목표는 16만 종을 조사하는 것이었다.그 때문에 환경학계와 활동가 사이에는 IUCN 보고서가 위기 실태를 온전히 반영하지못하니 조사 및 평가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UCN 레드리스트가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 - P212

는 지구 생태계 지표라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다. 생물종 다양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추정, 실질적 보존 활동은 레드리스트 덕에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1990년대 삼십대였던 무명의 여성 생물학자 조지나 메이스Georgina Mace의 공이었다. 메이스는 주먹구구식이던 IUCN 레드리스트에 과학적 선정 기준과 조사 방법론을 도입했고, IUCN을 좌지우지하던 학계 원로와 국제적권위자들을 논박하고 설득해 지금의 방식을 채택하게 했다. 담대한 추진력과 끈질긴 설득력으로 IUCN 레드리스트의 권위를 구축하고, 1990년대 이후 유엔 및 국가별 생태보전정책과학계 · 비정부기구 사이의 이견들을 조율해온 그가 2020년 9월 19일 암과의긴 투쟁 끝에 별세했다. 향년 67세. - P213

‘소프박스 사이언스Soapbox Science‘는 영국의 젊은 여성 과학자들이 여성 과학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 2011년 만든 단체다. 그들이 런던 거리에 직접 나가 각자의 연구 분야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행사를 기획하며 맨 먼저 조지나 메이스를 떠올린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세계적 팝 스타에게 무료 거리공연을 청하는일만큼이나 대담한 일이기도 했다. 단체의 창립행사 때도 축하연설을 해줬던 메이스는 흔쾌히 동참을 약속했고 동료 여성학자들의 참여도 주선했다. 그는 ‘자연의 가치는 무엇일까요what is thevalue of nature?‘라는 문구와 함께 자기 이름을 적은 피켓을 들고 행사 당일 런던 사우스뱅크 거리에서 천여 명의 시민을 만났다. 런던동물학회 회원이기도 한 소프박스 사이언스의 코디네이터 이슬라 와튼은 "메이스가 친구들에게 ‘소프박스 사이언스 거리 행사는 내 생애 최고로 짜릿한 경험이었다‘고 고백한 사실을 나는한참 뒤에야 전해 들었다"라고 부고에 썼다. 조지나 메이스는 경영 컨설턴트 로드 에번스와 1985년 결혼해 자녀 셋을 두었다.
인류의 생물종 다양성 보존 노력은 성과보다 실패의 기록이 훨씬 두텁다. 세계자연기금 설립자 피터 스콧Peter Scott 1970년에 이미 "우리는 실패했고, 단 한 종도 구해내지 못했다. 우리가 쓴 돈으 - P218

로 콘돔을 사서 배포했다면, 더 나았을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지나 메이스는 2009년 인터뷰에서 "모든 데이터가 말해주듯, 인류가 한마음으로 문제를 풀어간다면 지금도늦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사망하기 아흐레 전인 2020년 9월 10일<네이처>에 발표한 그의 논문 요지도 인류에겐 아직 종 다양성
"그래프를 반전시킬 수 있는bend the curve" 기회가 남아 있다는 거였다. 영국의 저명한 환경운동가 겸 탐사 저널리스트 조지 몽비오는 근작 『활생』에서 무엇에 맞서 싸우는지 아는 것만큼이나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도 알아야 한다며 "1온스의 희망은 1톤의 절망보다 강력하다"고 썼다. 한껏 치마를 추켜올리면서도, 다시 말해원하는 바를 한껏 추구하면서도, 끝내 현실주의자였던 메이스는1톤의 희망을 남겼다. 그는 동료들을, 인류를 믿었다. - P219

살로메 카르와
재감염의 두려움을 이겨낸 에볼라 전사


에볼라 출혈열은 이제 치사율이 30퍼센트대로 떨어졌지만, 한때 90퍼센트에 이르던 악성 바이러스 전염병이다. 2014년 ‘서아프리카 사태‘ 때의 치사율은 40퍼센트대였다. 2013년 말 기니를 진앙지로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을 강타한 에볼라 출혈열은WHO 집계에 따르면 2015년 6월까지 1만 118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 P221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의사와 연구자들은 에볼라의 실체를 온전히 알지 못했다. 면역에 관한 한, 에볼라 출혈열이 처음 발병한1970년대 이래 중복 감염된 예가 단 한 건도 보고되지 않았다는게 그들이 아는 전부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에볼라 치유자의 면역력을 100퍼센트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경없는의사회MSF, Medecins Sans Frontieres 등 국제 의료구호단체 의료진들이 에볼라에 걸렸다가 회복한 치유자들에게 도움을 청한 건 그만큼 일손이 절박하게 필요해서였다. 에볼라 희생자들 중 600여명이 의료진이었고, 발병 초기 라이베리아 내 의사는 50명에 불 - P221

과했다. 오랜 내전의 후유증도 극복하기 전이었다.
전염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회복한 뒤, 의료진의요청에 응해 다시 그 사투의 현장에 뛰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재감염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환자들과 살을 맞대며 간병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라이베리아의 28세 여성 살로메 카르와Salome Karwah는 맨처음 그 일을 시작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신처럼 바이러스에 면역된 이들을 ‘슈퍼 파워스super Powers‘라 부르곤 했다.
살로메 카르와가 제 몸의 면역력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의사들이 어떤 말로 그를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다시 사는삶을 덤이라 여겼고, 재감염의 공포에 맞설 만큼 강했다. "MSF 치료센터에 간 첫날, 시신들이 들려 나가는 걸 보고는 친구에게 ‘나,
못하겠어‘라고 울면서 말했어요. 하지만 바로 다음 날 ‘그냥 우는건 내 슬픔을 견디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차라리 그들을 도우며 최대한 나를 바쁘게 하기로 결심했어요."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 외곽의 MSF 치료센터는 불과 며칠 전그의 부모와 삼촌, 숙모와 조카가 잇달아 숨진 현장이자 카르와와언니 조세핀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곳이었다. - P222

엄마 얼굴도 못 본 막내를 포함해 여섯 살 미만 아이 넷을 도맡은 해리스는 "살로메는 아내이기 이전에 내 친구였다. 그를 대신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언니 조세핀은
"동생은 최근까지도 생존자 모유 감염 검사 등 정부 일을 도왔다"
며 "동생은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제부터 나는 더 이상 치유자가 아니다. (...) 만일 내가 아파 병원에 가더라도 나는 자신을 감출 것"이라고 말했다.
스무 쪽에 달하는 2014년 <타임> 커버스토리는 "분무기를 들고 산불과 맞섰던"초기 에볼라 전사들의 고투와 함께 ‘안개 전쟁Fog of War‘이라 불렸던 그 전쟁이 끝난 뒤 안개가 걷힌 자리에남은 진실들에 대해 썼다. "이 싸움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
다음 전쟁이 시작될 때 우리는 더 잘 대비하고 있어야 하고 덜두려워하며 더 잘 싸워야 한다는 사실, 그러기 위해서라도 - P228

2014년의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카르와의 죽음은 거기에, 아무리 불편해도 잊지 말아야 할 또하나의 진실을 보탰다. 우리의 전장에는 에볼라 바이러스 같은 명확한 적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진실, 다른 듯 다르지 않은 더 지독한 적들이 있고 전장 안에 또 다른 전장이 있다는 진실, "할 말이 없다"는 MSF 활동가의 비탄과 "이제 나를 감출 것"이라는 조세핀의 분노 어린 절규를 결코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진실. - P229

질 서워드
강간의 피해자 스스로의 구원자


1986년 3월 6일 일요일 오후, 영국 런던 일링Ealing 자치구 목사영국국교회 목사 마이클 서워드Michael Saward와 스물한 살 딸질 서워드 Jill Saward, 질의 남자 친구 데이비드 커David Kerr는 함께TV를 보며 담소 중이었다. 초인종이 울렸고, 마이클은 아무런 경계심 없이 문을 열었다. 들이닥친 건 술과 마약에 취한 4인조 복면강도였다. 주범 로버트 호스크로프트(당시 34세)와 앤드루 번은 마이클과 데이비드를 묶고 금고 있는 곳을 대라며 크리켓 배트로 무차별 구타했다. 나머지 둘(마틴 매콜, 크리스토퍼 번, 당시22세)은 질을 칼로 위협하며 2층 침실로 끌고 가 강간했다. 질은임신도 못 하게 만들어버리겠다는 둥 강간범들이 내뱉는 비열한말들 사이사이 아버지와 연인의 처절한 비명까지 견디며 속으로이렇게 되뇌었다고 한다. ‘나중에 저들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가기억할 수 있는 모든 사소한 것들까지 기억해야 해.‘
주말 한낮 목사관에서 벌어진 그 야만적인 사건은 ‘일링 목사관 강간 사건‘으로 불리며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언론사 - P231

들의 취재 열기가 뜨거웠고, 일부 타블로이드 신문은 이성을 잃었다. <더 선>은 사건 직후 교회를 다녀오던 질의 전신 사진을 찍어 눈만 가린 채 1면에 게재하는 ‘특종‘ 경쟁에 취했다.
11개월 뒤 올드베일리 형사법원에서 범인 세 명에 대한 재판이열렸다(크리스토퍼 번의 형 앤드루는 수감 중 죄수들에게 폭행당해숨졌다). 검찰은 질이 성경험이 없었다는 점, 다시 말해 ‘완벽하게 순결한 희생자‘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며 죄의 무게를늘리려 했다. 법정에서 질은 적어도 겉으로는 의연했다. 훗날 아버지 마이클은 "(질은) 장기간 심리치료를 받았고,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상황이었지만 흔들리고 상처받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내 딸은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말했다. - P232

판사 존 레너드 John Leonard는 그 모습을 오해했다. 그는 강간에가담하지 않은 주범 호스크로프트에게는 강도죄로 14년 형을,
강간을 범한 둘에게는 강도죄와 강간죄를 적용해 각각 10년 형과8년 형을 선고하며 "피해자의 정신적 외상이 그리 심하지 않아형량을 경감한다"고 판결문에 밝혔다. 여성단체는 물론이고 정치권까지 나서 성범죄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성토했다. 대처 총리도 "매우 유감"이라고 밝혔다. 가장 크게 절망한 건물론 질을 포함한 피해자들이었다. 그는 너절한 법과 제도, 법원·검찰·언론을비롯한 사회 전반의 나태한 성범죄 인식에 한 번 더 상처 입고 분노했다. - P232

일링 목사관 사건은 성범죄에 대한 영국 사회의 총체적 몰이해를 폭로한 계기가 됐다. 의회는 1987년 법을 개정해 강간 피해자의 익명성을 보장했고, 언론은 보도지침을 마련했다. 사건 전까지 영국 형사재판에서는 검사가 "무죄 판결에 대해 법률 위반이나 절차 문제로만 항소할 수 있었고, 사실의 오인 또는 양형이 부당하다는 이유로는 원칙적으로 항소할 수 없었다." 그 규정이 바항소할뀌어, 현저하게 양형이 관대하다고 판단할 경우‘ 검찰이수 있게 된 것도 그 사건 이후부터였다. - P233

사건 4년 뒤인 1990년, 질은 강간 나의 이야기 Rape: My Story』(웬디 그린 공저)라는 제목의 책을 자신의 이름으로 냈다. 그의 책출간은 그 자체로 강간 피해자가 자신의 실명과 얼굴을 스스로공개한 영국 최초의 사건이 됐다. 책은 사건 정황과 재판, 그 이후 겪은 고통과 사회제도의 또 다른 폭력에 대한 고발이었다. 한편 사회의 야만과 관음증적 관심에 대한 질의 당당한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강간은 당신의 삶을 바꾼다. 당신은 결코 과거의당신과 똑같아질 수 없다." 책 출간 이후 질은 신문·방송 인터뷰와 각종 강연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또 여러 단체를 설립해 성폭력 피해여성 구제와 성범죄 관련 법 개정 운동, 성폭력에 대한 인식 개선에 생을 바쳤다. 그가 2017년 1월 5일 뇌출혈로 별세했다. 향년 51세.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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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 리히너
캄보디아 어린이를 보듬은 첼리스트 의사


캄보디아 시엠레아프 Siem Reap의 앙코르와트를 여행한 이라면, 남문에서 도보로 5분 남짓 거리의 아동 전문병원 자야바르만7세Jayavarman VI‘ 앞에 걸린 ‘비토첼로Beatocello‘의 자선 콘서트 홍보 입간판을 봤을 수도 있다. 혹시 짬이 나서 거기 들렀다면, 어린이 환자와 보호자들, 관광객들에 둘러싸인 비토첼로의 바흐나 카잘스, 혹은 자작곡 연주와, 그 연주를 배경음악 삼아 판소리 사설처럼조리는 캄보디아의 의료 현실, 그리고 자기 병원 이야기를 듣기도 했을 것이다. 토요일 저녁, 관광 성수기엔 목요일까지 매주 두차례 열리던 자선 콘서트의 마지막 멘트는 으레 후원 요청이었다.
"나이 든 방문객은 돈을, 청년들은 헌혈을 해달라. 청년도 노인도아니면 둘 다 기부해달라." 그의 말에 대개는 웃었지만, 그는 늘 간절했다. 웬만한 여행자 하루 숙박비면 결핵이나 폐렴으로 입원한어린이 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P99

그는 캄보디아 내전이 끝난 직후인 1992년 수도프놈펜에 무료 아동병원 ‘칸타보파 제1병원Kantha Bophal‘을 연이래 시엠레아프의 자야바르만까지 총 5개 아동 · 산모 병원을 개설해 운영하며 지금까지 25년여간 약 1천 7백만 명을 진료하고 중환자 170만 명을 치료했다. 병원을 늘리고, 의료 기구를 장만하고, 의사 등 직원 2500여 명의 급여를 마련하는 모든 책임이 그의 것이었다. 그는 병원 운영을 동료에게 맡긴 채 고국 스위스의여러 도시를 첼로를 메고 다니며 모금 연주회를 열곤 했고, 스위스와 캄보디아 정부 당국자들의 지원을 부탁하러 다녔으며, 그의
"지속 불가능한" 의료봉사 모델을 비판한 세계보건기구WHO 등국제기구와 글로벌 비정부기구NGO 등에 맞서 싸웠다. 스스로 지은 예명 비토첼로로 더 알려진 비트 리히너가 2018년 9월 9일 별세했다. 향년 71세. - P100

캄보디아 현대사는 1991년 파리평화협정 전과 후로 나뉜다.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다 1954년 독립했지만 이내 인도차이나-베트남전쟁에 휩쓸렸고, 크메르루주Khmer Rouge 집권기(1975~1979)의 폭압 이후에도 약 10년간 베트남 등이 개입한 내전을 치러야 했다. 그 끝이 파리평화협정이었고, 1년의 과도기를거쳐 망명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와 훈센Hun Sen총리 체제의 입헌군주정이 시작됐다. 농업사회주의를 표방했던크메르루주 정권은 부르주아와 인텔리겐치아를 표적 삼아 탄압했고, 그 결과 지식인과 의사 등 전문인 다수가 학살당하거나 수 - P100

용소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숨졌다. 독립 이후 어렵사리 구축해온사회·의료 시스템이 사실상 와해된 것이었다. 리히너가 자신이운영하던 취리히의 병원을 동료에게 넘기고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으로 건너간 게 1991년 그해였다.
캄보디아 병원 재건은 평화협정이 진행 중이던 1991년, 프랑스파리의 한 모임에서 시아누크가 리히너에게 즉흥적으로 건넨 제안이었다고 한다. 칸타보파 병원은 시아누크가 1952년 숨진 네 살딸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국립 아동병원이었고, 리히너는 신참의사였던 1974~75년 스위스 적십자 의료봉사단의 일원으로 거기서 일한 인연이 있었다. 크메르루주 집권으로 중도에 되돌아온 게안타까웠던 그는 즉석에서 시아누크의 제안을 수락했지만, 출국하는 날까지 스스로도 불안했다고 훗날에야 인터뷰에서 말했다.
국왕은 실권 없는 상징적 존재였고, 신생 내각은 가난했다. 병원은거의 폐허 상태였다. 의료진도 장비도 새로 구해야 했고, 건물도수리해야 했다. 그 난관을 그는 돈키호테 같은 낭만적 기질과 용기로, 그리고 스위스 시민들의 후원으로 돌파해나갔다. - P101

그는 1991년으로 되돌아간다면 국왕의 제안을 거절할지 모른다고, 취리히 호반의 안락한 집에 살면서 성공한 의사로 가끔 첼로콘서트나 열며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건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슈투더는 "한번 생각해봐라. 그는 하루 평균12만 스위스프랑을 모금해야 했다"고 말했다. 리히너는 "입원한아이들을 안고 사진 찍는 걸 싫어한다.(....) 그건 저속하고 kitsch,
무례한 짓이다. 그들을 돕는다는 발상 자체가 무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모금을 위해 그런 사진들을 찍어야 했다. 기억을 잃어가는 퇴행성 뇌질환을 얻은 그는 2017년 3월 스위스로 귀국해 치료를 받았다.
그의 별세 소식에 병원 전 직원은 묵념으로 애도했고, 삶은 계 - P106

란 두 개와 커피 한 잔을 놓은 빈소를 마련했다. 일주일의 애도기간을 선포했던 캄보디아 정부는 조문객이 쇄도하자 기간을100일로 늘렸다. 슈투더는 "그가 바란 건 아픈 아이들을 돌보는일뿐이었다"고, "(나는 슬프지만 그에게 죽음은 어쩌면 구원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캄보디아는 내가 살 곳이 아니고, 결코 그걸 바란 적도 없다.
재정문제만 해결되면 홀가분하게 스위스로 돌아갈 것"이라던 그였지만 죽어서는 캄보디아에 묻히길 원했다. 슈투더는 "병원 한편에 리히너가 즐겨 머물곤 하던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있다"고말했다. 이제 그의 공연은 볼 수 없지만, 그의 나무를 보러 가는이들은 있을 것이다. - P107

프레더릭 D. 톰슨
흑인 여성에게 육상의 길 열어준 코치


미국 연방의회는 1972년 6월 교육법을 개정Title IX, 타이틀 나인, 초·중등 공립학교 커리큘럼과 특별활동에서의 성차별을 금지했다. 지역과 여건에 따라 다르긴 했겠지만, 그전까지 학교 운동장과 체육관은 주로 남학생 차지였고, 운동부도 대부분 남자들만받았다. 여학생 커리큘럼에는 체육 수업이 아예 없는 곳도 많았다. 한마디로 스포츠는 남성의 영역이었다. 참가 신청서에 성별란이 아예 없던 1967년 보스턴마라톤에 ‘K. U. 스위처‘라는 중성적인 이름으로 참여한 최초의 여성 캐서린 스위처 Katherine Switzer보다. 뒤늦게 여성인 걸 알아채고 그의 달리기를 저지하려 한 대회운영위원들과 남성 참가자들이 더 ‘상식적인‘ 이들이었다.
그러니 뉴욕 브루클린의 변호사 프레더릭 D. 톰슨Frederick D.Thompson이 1959년 흑인 여성 육상 클럽 ‘아톰 트랙 클럽Atom TrackClub, 이하 아톰클럽‘을 만든 건, 조금 과장하자면 자메이카에서 봅슬레이 팀을 만드는 것에 견줄 만한 일이었다. 당연히 아무런 지원이 없었다. 시민회관 복도가 그들의 트랙이었고, 몰래 학교 담장 - P109

을 넘나들기도 했다. 멤버는 여덟 살 아이부터 삼십대 주부까지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십대였다. 가입과 강습은 당연히 무료. 하지만 청소년의 경우 엄격한 가입 요건이 있었다. 성실히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것. 당시 뉴욕, 특히 브루클린의 가난한 십대 흑인청소년들에겐 학교보다, 달리기보다 훨씬 유혹적인 것들(술, 마약, 섹스, 폭력)이 널려 있었다.
그런 어려움들을 딛고 톰슨의 아톰클럽은 1960~70년대 다수의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전미육상대회 스타 선수들을 배출하며독보적인 흑인 여성 육상 명문 클럽으로 이름을 날렸다. 설립자이자 유일한 코치 겸 후원자인 톰슨은 스포츠 아마추어리즘의시대가 저문 2000년대까지, 다시 말해 트랙에 서 있을 힘이 다빠질 때까지 클럽을 지켰다.  - P110

개정 교육법 ‘타이틀 나인‘의 영향으로 여학생 운동부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1973년, 그는 생활용품 회사인 콜게이트의 요청으로 미국 최대 여성 아마추어 육상대회인 ‘콜게이트 위민스 게임Colgate Women‘s Game‘을 창설했다. 그는 그해 변호사업을 아예 접고 대회 운영위원장으로 2014년까지일했다.
아톰의 ‘아이들‘은 톰슨을 코치란 호칭 대신 ‘프레디‘라 불렀고, 성인이 된 뒤에도 힘들 때면 찾아와 기대곤 했다. 그들에게톰슨은 ‘스톱워치‘로는 잴 수 없는 귀한 것들을 베푼 멘토이자 친구였다. 프레더릭 D. 톰슨이 2019년 1월 22일 별세했다. 향년85세. - P110

그런 설움과 어려움에도, 마분지를 잘라 잉크로 직접 찍은 ‘ATOM CLUB‘ 티셔츠 유니폼을 아이들은 자랑스러워했다. 클럽 구성원은 그들의 새로운 가족이었고, 점점 나아지는 기록은 열정을 쏟아 도전할 만한 일이었다. 아톰클럽 멤버는 평균 50여 명,
많을 땐 근 200명에 이르기도 했다. 딸의 연습 장면을 구경하고응원하기 위해 가족들이 찾아오는 예도 점차 늘어났다. 간식거리를 챙겨오는 이들, 어두울 때 쓰라고 플래시를 만들어 선물한 부모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대회에 학교 대표팀이 아닌 아톰클럽 소속으로 출전하는 것이 대회 규정상 쉽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심지어 육상 트랙이 아닌 실내 구기 코트에서, 코너링 연습도 못하는 직선 코스만 주로 달린 아이들이었지만, 20주년이던 1979년 무렵 그들은이미 다섯 차례 전미 실내 육상대회 팀 우승과 옥외 대회 3번 우승, 10여 개의 개인 금메달을 획득한 명문 팀이 돼 있었다. 텍사스대와 애리조나대 등이 톰슨에게 꽤 탐나는 연봉을 제시하며육상 팀 코치를 맡아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제 돈을써야 하는 아톰클럽 코치로 남았다. - P113

아누차 브라운 샌더스 Anucha Browne Sanders는 아톰클럽을 거쳐 노스웨스턴대 농구팀에서 활약하며 두 차례 ‘올해의 선수‘에 뽑힌 이력의 스타였다. 그는 여자프로농구WNBA 출범 전인 1985년대학을 졸업(커뮤니케이션 전공), 플로리다주립대에서 마케팅-커뮤니케이션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IBM의 스포츠 마케팅 프로그램 매니저와 올림픽 국가대표팀 홍보팀으로 일했다. 그는 NBA뉴욕 닉스의 마케팅 이사와 팀 수석부회장을 지내다 2006년갑자기 해고당했다. 그 직후 샌더스는 자신의 상관인 총괄매니저의 성희롱 사실을 폭로하며 그와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상관의 성적 요구를 거부한 데 대한 보복성 해고라고 그는 주장했고, 회사 측은 샌더스의 미흡한 업무 성과가 해고 사유이며성희롱은 없었다고 맞섰다.
샌더스의 곁에 73세의 전직 변호사이자 전 코치이자 오랜 친구인 톰슨이 있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소송 제기 후샌더스와 그의 가족이 겪은 직간접적 협박과 위협들을 폭로하며가해자 측의 비열한 행위를 고발했다. 그리고 "아톰클럽의 모든어린 선수들에게 샌더스는 모범적인 롤 모델 중 한 명이다. 그의 - P116

꿈이 지금 무참히 부서졌다. 농구는 그의 사랑이고 삶이었다. 지금 나는 무척 화가 나 있다"고 말했다. 2007년 10월 법원은 상사의 성희롱 사실과 사측의 은폐 혐의를 인정, 회사가 징벌적 손해배상금 1160만 달러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양측은 그해 12월1150만 달러에 합의했다.
톰슨은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 셰릴 투생은 1999년부터 콜게이트 대회 부위원장을 맡아 노쇠한 스승을 도왔고, 로나 포드는이웃에 살며 그를 아버지처럼 간병했다. 그가 사망한 뒤 열린 제45회 콜게이트 대회 결승은 상복 차림의 투생이 위원장을 맡아치렀다. 그리고 닷새 뒤 브루클린의 한 교회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제자들은 단체 추도사에서 "우리는 톰슨처럼 놀랍고 비범한이를 만나 함께 지내는 커다란 행운을 누렸습니다. 지금 우리가미소 지을 수 있는 것도 모두 그의 덕입니다"라고 했다. - P117

제임스 르 메주리어
시리아 내전 인명구조대 ‘화이트 헬멧‘ 창설한 영웅


시리아 내전 인명구조대의 공식 명칭은 ‘시리아 민방위대 SyriaCivil Defensc‘지만 ‘화이트 헬멧White Helmets‘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2017년 만해대상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국내에도 꽤 알려졌지만, 그보다 더 전인 2014년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생후 10일된 아이를 구조한 뒤 흐느껴 우는 영상으로 세계인을 감동시킨바 있다. 그 장면이 포함된 2016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화이트헬멧: 시리아 민방위대>는 이듬해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고, 2017년 개봉한 영화 <알레포의 마지막 사람들>은그해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심사위원대상을 탔다. - P119

메주리어는 시민들이 최소한의 훈련과 장비만 갖춰도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생명을 구조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전역 후만 17년 동안 유엔과 여러 국제단체 및 민간 보안 회사에서 일해온 그는 매년 수백 수천만 달러씩 퍼붓는 중동 평화·안보 프로젝트들보다 시민들에게 헬멧과 로프를 들려주는 게 더 값지고 절박한 일이라 판단했다. 그는 영국과 미국, 일본 정부기관과 중동지원기금 운영자들을 설득해 후원금 30만 달러를 모았다. 그리고터키의 비영리 구난 단체인 ‘수색구조협회AKUT‘의 도움을 얻어7일짜리 초단기 인명구조 훈련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2013년 초시리아 제2의 도시 알레포에서 자원한 시민 스무 명이 처음 그프로그램을 이수했다. - P120

내전이 격화하면서 지원자도 점차 늘어났다. 훈련 프로그램도1개월로 확장되고 세분화해, 형식적인 팔다리 부목법은 골반 대퇴골 부목법으로, 단순 지혈은 팔다리 절단 지혈로 전문화했다.
화재 진압 장비와 기술, 생존자 유무와 위치를 보다 정교하게 파악하는 청음 장비 조작 기술도 프로그램에 포함됐다. 시리아 북부 이들리브에서 최남단 다라까지, 반군이 있고 전투와 폭격이벌어지는 곳이면 어디에나 그들이 있었다. 전국 100여 곳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그들이 2014년 10월, 단일 네트워크의 ‘시리아 민방위대‘로 정식 출범했다. 누구는 시리아인들의 희망이라고 하고 누구는 휴머니즘의 마지막 보루라고도 부른, 총 인원 3천200여 명의 화이트 헬멧이 그렇게 탄생했다. - P120

그가 숨진 채 발견되기 불과 사흘 전 러시아 외무장관은자기 트윗에 그를 ‘테러조직과 연계된 전직 MI6 (해외 파트 요원‘
이라고 비난했다.
저 모든 정황들이 그를 맥 빠지게 했을 것이다. 그의 아내는그가 우울증 치료제와 수면제를 복용했다고 터키 경찰에 진술했다. 하지만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아마도 시리아 내전의 전황자체였을 것이다.
시리아 정부와 야권, 그리고 이른바 시리아 시민사회 대표단은지난 10월 말 스위스 제네바에 모여 내전 종식을 위한 새로운 헌법 제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한 유엔 시리아특사는 "역사적 순간"이라며 "내전 고통을 끝내기 위한 실질적방안을 마련해달라"고 당부했다. - P128

러시아 전폭기를 앞세운 시리아정부군이 반군의 마지막 거점인 북부 이들리브 주 탈환을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보름 전인 10월 15일 ‘국경없는의사회‘도 시리아에서 철수했다. 위험지역에 가장 먼저 들어가 가장 마지막까지버티기로 정평이 난 그들조차 "더 이상 국제 직원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화이트 헬멧 대원들은 지금도 현지에서 활동 중이다.
근년의 메이데이 레스큐는 소말리아 모가디슈와 레바논 북부베카 계곡의 응급의료 지원 시스템 구축 사업 등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메주리어는 시리아의 저 모든 절망적 상황을 마지막까지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현장을 누빈기후 활동가들이 악화하는 기후 상황을 속절없이 지켜보며 늪처럼 빠져든다는 ‘기후 우울증climate Grief‘, 비영리 및 공익 활동가들이 흔히 겪는다는 번아웃 모두 메주리어의 사정이기도 했을것이다. - P128

룰라 콰워스
요르단의 한 세대를 가르친 페미니스트


1984년 요르단대학 영문과 대학원생 룰라 콰워스Rula Quawas에게 지도교수가 추천한 논문 주제는 T.S. 엘리엇과 타예브 살리Tayeb Salih, 영국에서 활동한 수단 출신 이슬람 작가의 작품 분석이었다. 콰워스는 그 무난한 선택이 못마땅했다고 한다. 그는 19세기 미국 페미니스트 작가 케이트 쇼팽Kate Chopin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케이트 쇼팽은 이슬람권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친서구적인 요르단에서조차 생경한 작가였다. - P131

콰워스는 케이트 쇼팽의 대표작 『각성』에 매료돼 있었다. 1899년 작품 『각성』은, 애정 없이 결혼해 두 아이를 둔 미국 남부의 한 상류층 여인(에드나)이 여름 휴양지에서 육체적·정신적 사랑에 눈뜬 뒤, 시대와 계층의 인습과 아내이자 어머니에게 부과된 사회적 금기, 윤리적 책임을 벗어던지고 여성으로서의 주체적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로선 적나라한" 육체적·심리적 성애 묘사로 "천박하고 혐오스럽다"는 평가와 불륜을 미화한 "유해한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작가는 지인들로 - P131

부터 외면당하고 책은 공공도서관에서조차 거부당하게 만든 문제작이었다.
콰워스가 논문을 쓰려던 무렵 요르단의 젠더의식은 케이트 쇼팽이 살던 19세기 말 미국 남부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콰워스는 논문을 포기하고 미국에 유학 중이던 남동생에게 건너가 석 달 남짓 거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여성 작가 이디스 워튼Edith Whatton과 윌라 캐더willa Cather, 아그네스스메들리Agnes Smelley 등을 알게 됐다. 콰워스에겐 그들의 작품뿐아니라 젠더에 갇히길 거부했던 그들의 삶, 예컨대 워튼의 여행편력과 당당한 이혼, 스메들리의 저널리스트 활동 등이 부러웠을것이다. - P132

귀국 후 그는 용기를 내 교수에게 미국 여성주의 작가 넷에 대한 논문을 쓰겠다고 했고, 대강의 작품 내용을 설명했다. "교수님의 첫 반응은 ‘섹스에 대해 쓰겠다는 거냐?‘는 거였어요." 논문을 지도해줄 만한 페미니스트는커녕 여성 교수도 전무하던 때였다. 논문 심사 통과 과정이 험난할 것이라며 교수는 만류했지만,
그는 각오가 돼 있노라 말했다고 한다.
어쨌건 그의 논문)는 교내에 모스크를 둔 그 대학의 완고한남자 교수들을 설득해냈고, 1991년 요르단에선 처음으로 페미니즘 문학 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땄다. 1995년 미국 노스텍사스대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후 모교 영문과 교수가 된 그는 비록대학원 선택과목이긴 했지만 요르단 최초의 페미니즘 강좌를 개설했고, 대학 내 여성학연구센터와 요르단 국가여성위원회 지식생산분과를 만들었다. - P132

하지만 그가 만들고 이끈 건 강좌와 연구센터가 아니라 요르단의 새로운 한 세대였다. 룰라 콰워스가 2017년 7월 25일 별세했다. 향년 57세. - P133

여성학연구센터를 설립할 수 있었던 데는 현 국왕(압둘라 2세)의고모인 바스마 빈트 탈랄Basma Bint Talal 공주의 후원 덕이 컸다고한다. 2009년 콰워스는 여성 지위 및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로탈랄 공주가 주는 리더십 · 헌신 공로훈장을 탔고, 2013년 미국국무부의 ‘국제 용기의 여성상IWCA, International Women of CourageAward‘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17년 8월 1일, 요르단 의회는 강간범이 피해자와 결혼하면기소하지 않도록 규정한 형법 308조, 이른바 ‘강간범 결혼 면책법Marry-Your Rapist Law‘을 폐지했다. 성폭력 피해를 가문의 수치로여겨 여동생이나 딸을 ‘명예살인‘하기도 하는 아랍 몇몇 나라와가톨릭 국가인 필리핀 등이 지금도 저 법을 유지하고 있다. 앞서모로코가 강간을 당한 뒤 강제 결혼을 앞두고 있던 16세 소녀 아미나 필랄리Amina Filali의 자살 2년 뒤인 2014년 저 법을 폐지했다. - P137

이미 ㄹㄹ니ㅠㅠㅠㅠ
"여성은 고깃덩이가 아니라 영혼을 지닌 주체로 인식돼야 한다.
반드시 그리되리라 나는 믿는다. 내 생애에 이뤄지지 않더라도언젠가는・・・・・・"이라고 말하던 콰워스는 저 기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는 대동맥 파열로 수술을 받았지만, 사인은 생체검사 합병증이었다.
콰워스는 이십대 무렵의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적 없다고 말했다. "내가 하는 일이 옳다는 걸 믿기 때문에, 내 소명임을 알고 내가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리고 누구도 내게 다른 길을가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좋은 교육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교육이란 스스로 뭔가를 해낼 수 있는 힘과 기술, 비판적이고 창조적이며 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 - P137

그리고 맞서 도전하며 ‘내 생각은 다르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지인과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뿐 아니라 그의 열정과 애정을 더불어 추모했다.
이십대 초반의 콰워스는 소설 『각성』을 읽으며 부러움과 막막함과 자괴감으로 흐느꼈다고 말했다. 소설은 주인공 에드가 영혼의 해방을 맞이했던 루이지애나 그랜드아일Grand Isle 의 해변에 다시가 알몸으로 헤엄쳐 나아가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헤엄을치며 앞으로 나아가던 그날 밤이 떠올랐고, 해변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공포심에 사로잡혔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에드나는 지금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어린소녀시절 시작도 끝도 없는 것 같은 푸른 초원을 가로지르던 그때가 생각났다. 팔과 다리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

에드나처럼, 콰워스도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갔다. 그는 숨이멎을 때까지 힘을 잃지 않았다. - P138

버지니아 R. 몰런코트
퀴어 신학의 선구적 전사


원죄를 품고 태어나 동성을 사랑하는 이중의 죄를 짓고,
제 안에 든 악마의 영을 저주하며 감정도 판단도 불신하고, 심지어 교사에게 두꺼운 성경책으로 얻어맞고 그만 살자고 물에 뛰어든 적도 있는 여성이, 문학에서 위안을 얻으며 공부해 교수가 되고, 성경을 다시 읽음으로써 신에 대한 오해를 풀고 자신을 긍정하게 됐다. 그 경험과 배움을 그는 ‘잃어버린 신을 되찾아야 한다‘는 요지의 책으로, 그것도 여러 권이나 "독창적이고도 설득력있게" 썼고, 보수 교단과 열성 신자들의 위협과 조롱, 저주를 측은히 여기게 됐다. 그는 십여 권의 책과 숱한 강연을 통해 자신이 찾은 진짜 예수를 차별 없는 사랑과 다름에 대한 격려로 북돋는 신앙을 열성적으로 ‘전도‘했다.
"할렐루야, 아이 엠 퀴어 Hallelujah, I‘m Queer!" 퀴어 신학의 선구적 전사 버지니아 R. 몰런코트virginia R. Mollenkott가 2020년 9월25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 P141

몰런코트는 "부디 하나님she 그 자신과 우리에 대해, 여성 일반에 대해 하신 말씀을 떠올려보시라. 우리 모두가 신성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는데, 우리는 신성하지 않다는 말씀이냐?"라고 답장을 썼다.
몰런코트는 목숨의 위협까지 감당해가며 행한 자신의 분투를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그의 책을 읽고 강연을 들으며 죄의식을 벗고 위안과 힘을 얻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성소수자 중심 교파인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교회 목사 겸 작가로 활동해온 키트리지 체리 Kittredge Cherry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몰런코트의 1978년 책을 읽고 힘을얻어살아남은 LGBTQ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상상도 할수 없을 것"이라고, 그가 "할렐루야, 아이 엠 퀴어"라고 우람차게외친 1987년 강연 테이프를 지금도 찾아 듣곤 한다고 썼다. - P146

미국 연합감리교회 목사이자 트랜스젠더인 데이비드 위클리David Weekley와의 인터뷰에서 몰런코트는 트랜스젠더들에 대한폭력 등 혐오 범죄의 대처법에 대해 "건강한 자의식과 같고 다른이들끼리의 연대 외에는 궁극적 해법이 없다"며 상상을 통해 타인의 감정에 다가설 수 있는 능력, 즉 ‘공감적 상상력 sympatheticimagination‘이 도덕의 바탕이라고 말했다. 같고 다른 이들의 상호존중과 믿음, 힘의 북돋움cmpowering이 페미니즘의 핵심이라 했던것, 차별 없는 사랑과 연민이 성경과 신의 참모습이라 했던 것이 그렇게, 윤리학-철학-문학이 구현하고자 했던 공감적 상상력과 포개졌다. 나는 윤리야말로 궁극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신은 전능하고, 전능해야 신이다. 스스로는 보편구제설을 믿 - P146

는 복음주의자라 했지만, 몰런코트는 이미 신앙의 망토를 두른인본주의자였다.
2018년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을 "마음으로 남성이기도 하고여성이기도 한 바이젠더 bigender"라 했고, 『편재하는 젠더』에서는
"남성적 여성, 트랜스섹슈얼은 아닌 트랜스젠더"라고도 자신을소개했다. 그는 재무설계사인 데브라 모리슨과 16년간 파트너로지냈고, 1997년 연인으로 만난 고교 교사 주디스 수재너 틸턴과2013년 결혼해 사별할 때까지 해로했다. 그는 2020년 6월 낙상사고 후 치료를 받았고, 대통령선거 우편투표와 집에서 임종하고 싶다는 두 가지 마지막 소원까지 이룬 뒤, 아들 부부와 전파트너 모리슨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히 눈을 감았다. - P147

레이 힐
이데올로기를 가로지른 한 노동자


영국인 노동자 레이 힐Ray Hill의 삶은 크게 5단계로 나뉜다.

-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를 중퇴하고 거리의 거친 싸움꾼으로 성장한 청소년기
- 군 제대와 결혼 후 버스 차장 등 온갖 노동으로 돈을 벌어가족을 부양하고자 분투한 시기
- 극우 이념에 사로잡혀 네오나치 단체 활동가로 살았던 삼사십대 20년 세월
- 공개적으로는 극우파 리더로 살면서 은밀히 조직의 비밀을언론에 폭로해 여러 조직을 내파시킨 ‘변절전향‘의 5년
- 자신의 부끄러운 진실과 극우의 추한 얼굴을 폭로하고, 극우이념에 취약한 청년들의 현실을 고발하는 데 바친 여생

힐의 드라마 같은 삶에서 특히 주목되는 건, 그가 글과 말로 먹고산 ‘이데올로그‘가 아니라, 극우 활동가로 사는 동안에도 늘 - P149

몸으로 가정을 부양한 노동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옳다고 여긴바, 저 광역의 이념 지대를가로질렀다. 말년의 그는 "칠면조에게 크리스마스에 표를 주라ask turkeys to vote for Christmas‘고 설득하는 것으로는 결코 정치적 극단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공적인 해악을 알면서도 극단주의에 선동당하는 이들에게 극단주의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는 의미,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바에 동조하라는 요구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였다. 대신 그는 이렇게 주문했다.
"(한때의 나처럼 가난한 백인 청년 노동자계급이 극우의 유혹에빠지지 않게 하려면, 그들에게 영감의 리더십과 진정한 열망, 무엇보다 희망을 위한 기회의 평등을 약속하는 주류 정치의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 P150

그는 3년간의 군복무 후 자신의 딸을 임신한 웨이트리스 글레니스 샵코트Glennis Shapcott와 1966년 결혼해 레스터의 가난한 동네에 거처를 마련했다. 하지만 혼자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게 당시 그에겐 무척 버거웠다고 한다. 그는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무능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그런 그에게 솔깃하고강렬한 유혹이 찾아왔다. ‘모든 게 이민자 탓‘이라는 극우의 꼬드김이었다.
훗날 그는 자서전에 "당신의 불행이 모두 다른 누군가의 탓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무능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제 내 마음 속에서, 인종 편견은 가장으로서의 위신을세우는 동력이 된다. 가난과 고통은 더 이상 내가 못난 탓이 아니다. 모든 원인은 이민자들에게 있고, 이민자와 싸우는 것이야 - P152

말로 내 가정을 지키는 것이 된다"고 썼다.
그는 신념의 활동가이자 열정적 웅변가였다. 1968년 더 규모가큰 극우단체 국민보존협회RPS, Racial Preservation Society로 옮겨 당시영국 네오나치의 거물 콜린 조던Colin Jordan을 만났다. 힐은 조던이 1968년 설립해 초대 회장을 맡은 전국 규모의 극우단체 ‘브리티시무브먼트BM‘의 레스터시 지부장이 됐다. 조던이 이듬해 버밍엄 하원 보궐선거에 출마(낙선)했을 땐, 보디가드 겸 핵심 참모로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아내 글레니스는 점점 변해가는 남편을 못마땅해하면서도 대체로 참아줬다고 한다. - P153

공에 정착해 사는 동안 그의 가족도 유대인 등 여러 ‘2등‘ 이웃들의 도움을 받았고, 인종차별과 비백인의 비참을, 그들의 인권·저항운동을 보고 겪은 터였다. "창자가 꼬이는 느낌이었다. 그 일가족이 당한 일이 나 때문이라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세상 어디에도 갈 곳 없이 거리에 내몰린 그 불쌍한 가족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바로 내가 그들을 곤경에 처하게 했다는 자각 때문에 그 단순한 인간적 동정조차 할 수 없었다.(……) 한없이 부끄러웠다. (…) 인종주의자로서의 나의 삶이 그렇게 끝이 났다." 몇달간 번민하던 끝에 그는 1979년, 아내와 셋으로 불어난 아이들과 함께 10년 만에 레스터로 귀향했다. 2015년 인터뷰에서 그는
"인간적인 마음을 조금이라도 지닌 사람이라면 남아공에서10년을 머물며 아파르트헤이트를 혐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너무 끔찍했다. 끔찍함 그자체였다"라고도 말했다. - P154

힐의 제보 덕에 1981년 이탈리아 볼로냐, 프랑스 파리, 독일 뮌헨 등지에서 잇달았던 극우 폭탄테러의 배후, 즉 유럽 네오나치 네트워크가 드러났고, 여러 건의 무기 밀거래 현장이 적발됐으며,
1981년 런던 노팅힐 페스티벌 폭탄테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극우파 테러리스트들의 영국 내 비호 및 은신 네트워크를 적발한 것도 그의 제보 덕이었다. 극우파 리더로서 음지에서 저 활약을 펼치는 동안에도 그는 노동자였다. 택시 기사였고,
도박장 매니저였으며, 아내를 도와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했다.
1984년 BBC 채널4 다큐멘터리 〈테러의 이면The Other Face ofTerror〉에 그가 비로소 실명과 얼굴까지 공개하며 출연해 자신의진실, 즉 극우파로 산 20년과 내부 첩자로 산 지난 5년의 진실을고백하고 극우파의 이면을 폭로했다. <가디언>은 당시의 충격을두고 "(영국 극우파가) 할 말을 잃고 분노로 졸도할 지경이 됐다" 고 썼다.
보복 살해 등 힐에 대한 극우파의 위협이 이어졌다. 소이폭탄 - P156

테러로 집이 전소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말년까지 학교 강연과 집회 등을 통해 인종주의 극우집단의 해악과 비열함을, 불의와 부도덕을 폭로하는 데 헌신했다. <서치라이트>는 "그 누구도(적어도 실명을 공개할 수 있는 이들 중에서는) 영국 극우 운동에 레이 힐보다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사람은 없었고, 반파시스트 세대에 영감을 제공한 사람도 없었다"고 썼다.
그는 극우 운동에 포섭된 가난한 백인 청년 노동자 계층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한사코 삼갔다. 극우의 유혹에 그들의 처지)이 얼마나 취약한지, 유혹의 방식과 논리가 얼마나 교묘하고 능란한지, 그래서 얼마나 저항하기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극우를 자라나게 하는 궁극적인 토양, 다시 말해 책임이 정치의 실패, 정치의 부재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 P157

사디 야세프
독립 영웅과 테러리스트 사이


이라크전쟁 개전 직후인 2003년 9월 미국 국방부는 파병 장교와 백악관 안보보좌관실 관계자 등 40여 명을 모아놓고 영화 한편을 단체 관람했다. 또 이례적으로 그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초대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프랑스는 어떻게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이념 전쟁에서 패배했는가. (…) 이 영화는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드문 작품이다." 이들이 본 영화는이탈리아 감독 질로 폰테코르보Gillo Pontecorvo의 1965년 영화 <알제리 전투>였다.
영화는 130년 프랑스 식민 치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제리인들이 벌인 독립전쟁(1954~1962) 중 1956, 1957년 수도 알제에 집중된 테러와 보복 테러, 체포, 고문과 살인, 진압의 양상을 다뤘다. 네오리얼리즘 거장 폰테코르보는 뉴스 화면을 편집한 것 같은 흑백 다큐 기법으로 저 영화를 촬영했고, 출연진도 한 명을뺀 전원을 일반 시민과 여행자로 채웠다. - P159

영화 〈알제리 전투〉는 이탈리아 공산당원이던 좌파 감독 폰테코르보가, 테러 주체인 알제리 민족해방전선NLF, National LiberationFront 전투 사령관의 회고록을 토대로 만든 시나리오로, 독립 직후 알제리 자본으로 만들어졌다. 폰테코르보는, 군인들의 고문장면뿐 아니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냉혹한 테러 양상, 예컨대유럽 민간인 여성, 아이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희생시킨 폭탄테러장면까지 여과 없이 담았고, 테러 및 고문의 논리와 심리까지 파헤침으로써 값싼 선전영화의 함정을 벗어나 폭력과 해방, 야만과휴머니즘이라는 본질의 틈새로 돌진했다. 영화는 1966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과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당국은 고문 사실 자체를 부정하며 영화의 국내 상영을 5년간 금지했다. - P160

사디 야세프 Saadi Yacef는 도심 테러의 지휘자인 알제자치지구민족해방전선 게릴라 사령관이었고, 영화 시나리오의 원작인 『알제전투 회고록souvenirs de la bataille d‘Alger』을 쓴 작가였으며, 감독을섭외하고 제작비를 댄 영화 제작자였고, 직접 출연까지 해서 자신(엘 아디 자파르 역)을 연기한 배우였다. 다시 말해 그는 해방전쟁의 분수령이 된 1956~57년 알제 테러의 주역이자 영화의 숨은 주연이었다.
폰테코르보의 성취에 가려져 있던 사디 야세프의 존재가 부각된 것은 원작 필름이 고화질 영상으로 복원된 2004년 무렵이었다. 그는 후세대가 자신들의 삶과 활동을 있는 그대로 기억해주길 바랐다고. 다만 자신들의 테러에 대해선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990년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한 ‘알제리내전‘ 테러에 대해서는 "민족해방전선의 테러와 방식만 닮았을뿐 동기도 지향도 전혀 다르다"고, "그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주장했다.
20세기 무슬림 테러 역사에 논쟁적인 첫 장을 연 ‘이슬람 전사‘ 출신의 작가 겸 영화인 사디 야세프가 2021년 9월 10일 별세했다. 향년 93세.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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