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 부고를 일삼아 읽고 끌리는 이들을 골라 소개하는 지면(<한국일보> ‘가만한 당신‘)을 2년 남짓 맡아왔다. 관련 보도들을 종합하고, 보충 자료를 찾고, 책이나 영화 등 도움 되는 것들은 최대한 참조했다. 국내에 알려진 이들은 어떻게든 기억되리라 여겨 외면했고, 떠난 자리에 잔물결도 일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을 편파적으로 주목했다. 그들 중 특히 기억하고 싶은 이들의 이야기를 어렵게 골라 이책을 엮었다.
그들이 왜 끌렸는지 한두 마디로 설명하긴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차별과 억압과 무지와 위선에 맞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가치와 권리를 쟁취하고자 우리 대신 우리보다 앞서 싸워준 이들이라고 하겠다. 글을 깊이 읽은 내 친구는 그들을 "생을 거의 완전연소한 이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글보다 먼저 사진 속 표정과 미소와주름살들을 먼저 ‘영접하곤 했다고 말했다. 나는 낯선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 P6
그들을 알아가는 과정이 빚을 갚는 일 같아 조금은 행복했다. 떠듬떠듬 원서로 된 탐정소설 읽듯 그들의 말투나 표정을 상상하기도 했고, 매개변수가 빠져 해명되지 않는 단층이 보이면 탐정처럼 자료와 인터뷰, 그 무렵의 사건 따위를 다시 뒤지기도했다. 물론미제로 남을 때가 많았지만 억지로라도 잇고 싶을 땐 내 상상이나 희망 따위를 표 나게 끼워 넣기도 했다. 나처럼, 쓰이지 않은 내용과 행간을 뒤져 읽어준 독자들이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이 책의 어떤 대목이 읽을 만하다면, 책 속 그들의 삶과 그들이추구한 세상이 아름다워서일 테고, 책바깥 독자들의 세상이 너무고약해서일 테다. 그 간극을 메우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바란다.
2016년 6월 최윤필 - P7
콩고의 마마 전쟁 속에서 끌어안은 인간의 존엄
콩고의 레베카 마시카 카츄바Rebecca Masika Katsuva는 ‘마마‘라는 애칭으로 널리 불렸다. 그는 콩고전쟁중 강간당한 여성과 고아, 성폭행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거둬 치료하고 함께 먹고 자고 일하고 가르쳤다. 그의 품을 거쳐 간 여성만 약 6000여명. 아이들이 부르던호칭을 그들이 따라 불렀고, 친해진 뒤로는 이름을 포개 ‘마마시카‘ 라고도 했다. 카바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참혹한 강간 피해자, 아니 생존자였다. 콩고의 여성들은 그런 그에게서 용기를 얻고조금은 덜 힘들게 다시 일어서곤 했다. 콩고의 ‘마마‘가 2016년 2월2일 별세했다. 향년 49세.
그의 삶을 되돌아보려면 콩고 현대사를 짧게라도 들춰봐야 한다. 벨기에의 오랜 식민지에서 1960년 독립. 1961년 독립 영웅이자 초대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mba, 1925~1961 암살, 미국·소련·벨기에의 암투와 내전, 1965년 미국을 등에 업은 모부투 세세세코Mobutu Sese Seko, 1930~1997 집권과 32년간의 독재, 동쪽 국경 너머 르 - P15
완다의 1994년 내전과 반군들의 월경, 1996년 제1차 콩고전쟁으로 이듬해 5월 로랑 카빌라Laurent Kabila, 1939~2001 의 콩고민주공화국 탄생, 1998~2003년 제2차 콩고전쟁, 전쟁 중이던 2001년에 카빌라 암살(사실상 집권 세력에 의한 숙청)과 그의 아들 조제프 카빌라Joseph Kabila, 1971~의 집권. 콩고전쟁이 내전이 아닌 까닭은 이웃 국가의 무력이 공공연히 개입했기 때문이다. 특히 앙골라, 짐바브웨, 우간다, 르완다 등 중부아프리카 8개국이 각각 콩고 정부군과 반군을 편들어 벌인 제2차전쟁은 당시 미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Madeleine Albright, 1937~의 표현처럼 콩고를 무대로 한 ‘아프리카 세계대전‘이었다. - P16
전쟁 원인은 구리와 우라늄, 다이아몬드 등 콩고의 자원, 특히 동부 지역에집중 매장된 콜탄 때문이었다. ‘잿빛 골드‘라 불리는 분쟁 광물 콜탄은 희소원소 ‘나이오븀ND‘과 ‘탄탈룸‘의 원광석이고, 두 광물은 각각 초경합금과 첨단 전자 장비의 재료로 쓰인다. 특히 탄탈룸은 전자무기와 스마트폰, 노트북 등 IT 장비 전자회로와 전지의 필수 광물, 전 세계 콜탄 매장량의 70퍼센트 이상이 콩고에 있고, 그 대부분이 동부 콩고우간다 르완다 부룬디와 국경을 맞댄 남·북키부주에 묻혀 있다. 콩고의 서쪽 끝 수도 킨샤사의 권력은 동부까지 미치지 못했고, 쿠데타군은 동부의 자원을 떡밥 삼아 저들 국가의 군대를 끌어들였다. 제2차 전쟁 희생자는 400~600만 명에 달했고, 집단 학살과 강간, 고문, 기아, 질병으로 숨진 민간인이 전투에서 숨진 군인보다 훨씬 많았다. 반군 진영은 광산들을 꿰찬 채 아동·여성 노동력을 노예처럼 부려콜탄을 채석했고, 걸러진 탄탈룸은 여러 경로로 팔려 - P16
나가 무기로 바뀌어 동부로 되돌아왔다.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곳도 당연히 동부 키부 지역, 카추바가 나고 자라 결혼해 살던 곳이 거기였다. - P17
얻는 게 있다" "아이들이 나를 안정시켜준다"라고 그는 말했다. 피오나의 다큐멘터리에는 그가 아이들을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병원에데려가는 뭉클한 장면들이 나온다. "나 역시 죽을 마음을 여러 차례 먹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내 도움을 원하는 아이들과 여성들을 본다"
유엔 등 국제사회의 중재와 분쟁 광물 무역 규제 등에 떠밀려 콩고 정부군과 반군은 2003년 휴전했다. 하지만 동부는 지금도 사실상 반군 수중에 놓여 있고, 분쟁과 강간도 지속되고 있다. 옥스팜은2004~2008년 사이 남키부 주 유일한 산부인과 병원인 판지병원에서 진료받은 강간 피해자 9709명 가운데 4311명을 인터뷰한 결과를 2010년 4월 공개했다. 피해자의 56퍼센트는 들판이나 숲속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밤중에, 다시 말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당했다. 남편과 함께 병원에 온 이는 1퍼센트가 되지 않았고, 세 명 중한 명은 혼자 왔으며, 절반 이상은 강간당한 지 1년질병 등 후유증 때문에 온 이들이었다. - P20
휴전 뒤 민간인에 의한 강간범죄도 그사이 무려 열일곱 배나 증가했다. 2004년 1퍼센트 미만이던 민간인 강간 비율은 2008년 전체의 38퍼센트였다. 카추바도 2006년 이후 무려 세 차례나 더 집단강간을 당했다. 2009년 1월 강간은 카추바가 군인들의 강간 사실을 고발 · 폭로해온데 대한 보복·협박 강간이었다. 카추바의 어머니도 그의 일을 돕다2010년 4월 마시카 카쿠바는 국제사면위원회의 지네타사강상을수상했다. "끊임없는 공격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성폭력 생존자 - P20
와 청소년, 아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돌본" 공로였다.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시상식에 그는 불참했지만, 국제사면위원회 미국 지부의 수잔느 트리멜은 카바가 상금 1만 달러를 어떻게 쓸지궁리 중이었다고 전했다. "돈을 집에 둘 수 없으니 우선 은행에 넣어두려고 한다. 나중에 고마에 집을 한 채 사서 세를 놓을 생각이다. 아이들의 학비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돈이 남으면 그 아이들과여성들을 입히고 먹이는 데 쓸 거다." 그에겐 함께 돌보는 아이들 외에 입양한 고아 열여덟 명이 있었다. 콩고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해온 인권운동가 바바 탐파는 <가디언>기고문에서 작년 말 카추바가 재봉틀을 구해 달라고 했으며 "다섯 대가 있었는데 세 대는 망가지고 하나는 도둑맞았다"라고 했고, 몇 달 뒤에는 "수확한 농작물을 시장에 내가기 위해 밴 한 대가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렇게 여성과 아이들과 마을살림을 챙기느라 정작 자신의 몸은 못 챙겼던지, 카추바는 2016년2월 2일 오전 8시에 병원에 갔다가 오후 4시에 숨졌다. - P21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HRW의 콩고 담당 선임연구원 아이다 여는 "카추바가 떠난 뒤 세상이 더황량해진 것 같다"라고 HRW 홈페이지에 썼다. 그는 "카추바 덕에모진 일을 겪었던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자신들도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됐고 또 힘을 얻었다" "내 삶도 그를 알아더 풍요로워졌다"라고 추모했다. 유엔의 분쟁 지역 성폭력 특별대표자이납 하와 방구라Zainab Hawa Bangura, 1959~는 "마시카는 영웅이었다. (…) 그 어떤 야만도 인간의 존엄과 평화를 향한 인류의 열망을이길 수 없음을 그는 내게, 이 세계에 보여주었다"라고 밝혔다. - P21
"이듬해 만나면 우리는 누가 안 왔는지,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서로 묻곤 했고, 점점 그 질문은 누가 죽었는지로 바뀌어갔다." 그들 다수는 혈우병 때문이 아니라 에이즈로 숨졌고, 그가 10대 중반에 이르러 캠프가 문 닫을 즈음까지 살아남은이는 그를 포함해 단 두 명뿐이었다.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콜트와 같은 생존자를 대상으로 HIV 내성 인자 보유 여부를 검사, 그중 일부가 실제로 돌연변이를 통해 HIV 면역에 기여하는 케모카인Chemokine 단백질과 수용체를 보유한 것으로 훗날 밝혀냈다. 콜트는 그런 변이 없이 감염되지 않은, 기적 같은 행운의 주인공이었다. 13세 때 감염된 혈액제제 때문에 C형 간염에 걸려 약 2개월간 입원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완전항체반응full antibody response‘, 즉 몸 면역시스템이 스스로 병을 치유해내는 또 한 번의 마법 같은 일을 경험하기도 했다. 혈액제제가 안전해지고, 유전자재조합 방식의 새로운치료제, 즉 비감염 혈액의 특정 단백질을 햄스터의 난소 등에 주입해 혈액응고인자를 추출해 만드는 농축제제가 나온 것은 1990년대이후였다. 콜트는 ‘행운‘이라고 했지만 그건 사무치게 원망스러웠을자신의 몸을, 그래도 믿고 사랑한다는 고백이었을 것이다. - P26
"효과적인 치료법을 가지지 못한 채 암환자를 대하는 건 참 힘든 일이다. 그럴 때마다 조금이라도 빨리 실험실로 돌아가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 그것만큼 더 중요한 일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환자들의 심정을 잘 알았을 것이다. "미래가 불확실한 만큼 내 모든 걸 과학과 환자들에게 쏟아야 한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만일 당신이 어려서부터 심각한 질병을앓아왔다면, 아마 당신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걸알 수 있을 거다." 그는 "그건 인간관계에서는 썩 좋은 일이 아니어서 나는 결혼을 두 번 했다"라고 덧붙였다. - P29
그는 2016년 2월 22일에 바하마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뇌출혈을일으켜 마이애미의 잭슨메모리얼병원으로 후송됐고, 이틀 뒤 24일에 별세했다. 향년 38세. 근년 들어 그의 육체는 응고인자제제를 거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체 면역 체계가 농축제제를 항원으로 인식해 공격에 나선 거였다. 항체반응은 대개 초기에 발현하지만, 그의 경우처럼 드물게늦게 나타나기도 한다. 스탠퍼드 의대 종양학과장 조지 슬레지 주니어는 "그는 재능과 헌신, 끈기 면에서 예외적으로 탁월한 동료로 존경받았다"라며 "수많은 선배 연구자들도 그를 통해 많이 배웠다며슬픔을 전해왔다"라고 전했다. 가장 가까운 스승이었을 레비는 "그는 항암 면역요법 분야에서 아주 중요한 몇 가지 발견을 해냈고, 환자에게 직접 혜택을 줄 수 있는 여러 임상 실험을 디자인해 추진해왔다"라고 말했다." - P29
작은 거인 장애 편견과 고통 앞에서 춤추다
스텔라 영Stella Young은 호주의 코미디언 겸 방송인이었고 칼럼니스트였다. 그는 불완전골형성증osteogenesis imperfecta이란 희귀 유전병을 갖고 태어난 장애인이었다. 뼈가 약하고 변형되는 저 증상 때문에1미터가 되지 않는 키에 골절상을 달고 살았는데, 일곱 살 무렵 친구생일잔치에 초대받아 가서 과자를 먹던 중 사레가 들려 쇄골이 부러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맹렬한 장애인인권운동가였다. 2013년 11월, 31세의 영은 <시드니모닝포스트>에 여든 살의 나에게」란 제목의 칼럼을 썼다. 편지 형식의 글에서 영은 "와인이라도몇 잔 마신 날이면 잔망스럽게 혼자 하던 생각이지만 ‘나는 이 세상에 잘 살려고 왔지, 오래 살려고 온 게 아니야‘라고 한 말은 진심"이라고 하지만 당신(여든 살의 나)을 만나러 가는 동안 모든 가능성을움켜쥐고 늘 긍정적이고 진취적으로 지혜롭게, 즐겁게 살겠다고 약속하겠다"라고 썼다. 그는 그 약속을 지켰지만 여든 살의 자신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는 2014년 12월 6일에 숨졌다. 향년 32세. - P31
금요일 밤이면 영은 댄스클럽의 플로어에 서서 춤을 추곤 했다. 그의 춤은 휠체어 안에서 펼쳐지는 아주 절제된 동작이었을 것이다. 호르몬이 충동질하는 만큼, 아니 여린 뼈와 근육이 허락하는만큼, 리듬을 타며 춤추는 것을 즐겼던 영에게 그 순간은 몸의 감각을 가장 예민하게,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롭게 의식하는 순간이기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도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껴야 했다. 그들에게 영의 춤은 춤이 아니었을지 모르고, 영의 존재 자체가 이채로웠을지 모른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즐기기 위해 추는 춤이 비장애인에게는 ‘특별한 행위‘로 느껴지는 현실, 그는 그 시선들을 ‘논평의 시선‘이라고 했다. 놀랍다, 대단하다, 라며 말을 건네는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램프>의 한 칼럼에 이렇게 썼다. "음악에 영혼을 맡기고 춤으로 근심 따위를 털어내는 그 공간에서조차 그들, 비장애인들은 나의 존재를 교훈적 타자로 대상화한다." "장애인의 몸은 그 자체로써 정치적이기 때문에, 나의 춤은 정치적발언이 된다." 하지만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난 춤을 추고플 땐 출것"이라고 썼다. "문제는 우리의 장애가 아니라 장애를 바라보는 당신들의 방식입니다." - P38
2014년 12월 18일 멜버른 타운홀에서 열린 영의 추도식 드레스코드는 ‘재미있는, 멋진 fabulous‘이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큐빅장식의 스팽글 드레스나 물방울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꽃 장식을 달았다. 진행을 맡은 방송인 월리드앨리는 "오늘은 맘껏, 무제한 즐기는 자리"라며 "환호하고 박수치고 춤추자"라고 말했다. 온당치 못한 사회와 싸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그것을 또 나눠주기까지한 고인의 삶처럼 영을 잃은 슬픔도 행복한 웃음으로 기억하자는취지였을 것이다. 행사가 끝난 뒤 참석자들은 타운홀 바깥 연방광장으로 나가 영이 그렇게 즐기던 춤으로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 P39
비행하는 인간 육체의 해방을 꿈꾼 익스트리머
그는 날고 싶어 했다. 오래 날기 위해 점점 높이 올라갔고(클라이밍), 그러자니 더 가벼워져야 했다(프리솔로잉), 부력을 아끼려면 정밀한 몸의 균형은 필수였다(하이라이닝). 윙슈트플라잉은 그의 꿈에가장 근접한 익스트림스포츠였다. 그의 마지막 꿈은 맨몸에 윙슈트로만 날아 낙하산 없이 착지하는 거였다. 땅의 속박으로부터 최대한 벗어나기. 그에게 비행은 자유였다. 어쩌면 그는 추락과 비행의 차이를 활강하는 육체의 방향각이 아니라 의지의 지향각에 두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절벽에 부딪쳐 부서져버린 몸이 균형과 부력을 잃고 수직으로 내리꽂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이 비로소 날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죽음의 추락이 아닌, 마침내 삶의 비행. 다만 그 비행은 너무 짧았다. 2009년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뽑은 ‘올해의 모험가‘ 딘 포터DeanPotter가 2015년 5월 16일 요세미티국립공원 윙슈트플라잉 도중 사고로 숨졌다. 향년 43세. - P41
2009년 여름, 등산화도 스틱도 없이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윙슈트에 낙하산 하나 달랑 메고 아이거 북벽 디프블루시 Deep BlueSea 루트의 해발 3970미터 벼랑에 섰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떨어진돌이 바닥에 닿는 데 약 8초가 걸리는 그 높이에서, 그는 장장 2분50초 동안 5.5킬로미터를 날았다. 윙슈트플라잉 최장 기록이었다. 2011년 11월 그는 아이거 서벽수직 고도 2804미터에서도 3분 20초 동안7.5킬로미터를 날아 자신의 세계기록을 경신했다. 윙슈트의 활공비는 2.5쯤 된다. 1미터 하강하는 동안 2.5미터를수평 이동한다는 얘기다. 땅의 수평선을 기준으로 하강하는 각, 즉활강각은 50.7도다. 그의 2011년 활강각은 20.5도였다. <토니윙슈트>사이트에 올린 글에서 그는 "내가 사람보다 새에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라고 썼다. - P46
1990년대 말의 그는 세계적 클라이머가 돼 있었고, 굴지의 스포츠 용품 업체들-파타고니아, 블랙다이아몬드, 파이브탠과 스폰서십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2006년 파란의 스캔들로 기억되는 유타주 아치스국립공원 프리솔로잉으로 그는 저 스폰서들을 잃고 만다. 무른 사암岩들의 풍화로 조성된 유타 주 남부의 랜드마크들중에서도 크기로나 모양에서 가장 돋보이는 델리키트아치 DelicateArch 프리솔로잉한 거였다. 불법은 아니지만 클라이머들조차 신성시하며 넘보지 않던 바위였다. 거기에서 촬영팀의 밧줄에 긁힌 듯한 자국이 발견됐다. 클라이머들의 성토가 이어졌고, 공원 측도 공식 조사에 착수했다. 딘은 "바람 불면 날아갈 초크 자국 외엔 남긴흔적이 없다"라고 결백을 주장했지만 정황상 궁지에 몰릴 수밖에없었다. 그 일로 2002년에 결혼한 클라이머이자 아내 스테프 데이 - P48
비스Steph Davis, 1973~의 스폰서 계약마저 끊겼다. 둘은 2010년 이혼했다. 2008년 ESPN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들은 자연을 신성하게지키기 위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그 사건 이후 아치스국립공원은 일체의 등반 행위를 공식적으로 금했다. 물론 더트백에게법은 대수로운 게 아니다. 그들을 멈추게 하는 것은 자기 몸이 바위(자연)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따지고 보면 요세미티를비롯한 국립공원 베이스점핑도 모두 불법이다. 점퍼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해가 진 뒤 주로 점핑을 한다. 어두워서 더 위험한 대신, 어둡기 때문에 공기의 미세한 흐름에 더 예민해질 수 있다고 딘 포터는 말했다. "인간이 난다는 게 미친 생각이란걸 나도 안다. 하지만 언젠가그게 가능해지려면 생각이 허용하지 않는 곳으로 누군가는 나아가야 한다." 그는 동료 그레이엄 헌트와 2015년 5월 16일 저녁 7시 30분, 요세미티 협곡의 고도 914 미터 ‘태프트 포인트 Taft point‘에 올랐다. 다음 날 시신으로 발견된 그의 몸에는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은 채매여 있었다. - P41
모성이라는 환상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
낯선 이의 가만한 미소 혹은 가만히 건네는 손의 온기가 값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힘겨운 자리에 혼자 섰거나 그런 기분에 지친이에게는 마주 서는 것보다 나란히 서서 가만히 같은 곳을 바라봐주는 게 더 고마운 일일지 모른다. 바버라 아몬드 Barbara Almond는 정신분석 · 상담 의사로 어머니는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라는 책을 썼다. 책에서 그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 희생을 뭉뚱그려 ‘모성motherhood은 무조건 완벽하고 최고여야 한다는 아득한 기준을 부정했다. 끊임없이 ‘모범 어머니‘를 찾아 전시하는 사회, 모든 어머니가 그런 모범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고 채찍질하는 사회를 비판했다. 책의 제목처럼, 그녀는 모성에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나란히 있고 모든 어머니는자식을 진심으로 미워할 때도 있다고 썼다. 당신만 아이를 미워하는게 아니고, 그게 잘못된 일도 아니며 한결같이 감싸주는 게 아이에게 좋은 일도 아니라고, 그러니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라고 썼다. 실패의 예감과 불안, 실패했거나 하고 있다는 자책과 죄의식에 - P51
시달리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게 든든한 ‘어머니‘ 같았던 그가2016년 3월 6일 별세했다. 향년 77세.
작가이자 교수인 캐럴린 시Carolyn See, 1934~는 2010년 10월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아몬드의 책 서평 첫 줄을 "우선 이 매혹적인책을 모든 새로운 엄마와 나이 든 엄마,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 아이와 남편, 아빠와 연인 들에게 권한다"라고 썼다. "(이 책은) 모두가알고 있지만 거의 아무도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사실을 전한다. 우리 중 최고의 엄마들조차 때때로 모성이란 것이 요구하는 바에서비롯된 두려움과 공포, 증오와 역겨움으로 고문당하고, 심지어 아이들을 향한 순전한 살의를 경험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들려준다. - P52
자살연구자 죽음을 이해하는 것으로 예방하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장 아메리Jean Améry, 1912~ 1978는 『자유죽음』 서문에 "이 책은 심리학이나 사회학과는 거리가 멀다. ‘자살학suicidology‘이라는 과학이 끝나는 곳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라고 썼다. 그는 책에서 생명의 논리, 삶의 논리로 죽음과 자살을 설명하고배격하는 모든 시도들을 반박하고 조롱하며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깨어 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택한 자유죽음을 옹호했다. 그에게 자유죽음은 ‘에셰크échec, 체스 게임의 외동수‘, 즉 돌이킬 수없는 총체적 삶의 실패에 직면한 이가 "모든 삶의 충동, 살아 있는존재의 끈질긴 자기 보존 충동"에 저항하며 그에셰크를 돌파하는유일한 길이고 "자유를 가장 급진적으로, 어떤 점에서는 가장 생생하게" 실천하는 행위였다. 아메리보다 6년 늦게,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시에서 태어난 심리학자 노먼 파버로 Norman Farberow는 제2차 세계대전을 아우슈비츠 수감자가 아닌 미 공군 대위로 경험했다. 그는 전후 참전군인들이 겪는 고통스러운 사회 부적응과 급증하는 자살률에 학자 - P61
로서 감응, 아메리가 "경의와 더불어 약간의 경멸도 숨기지 않았던 자살학의 토대를 닦았다. 미국 최초의 자살예방센터를 세워 ‘생명의 전화 서비스를 시작했고, 이제는 상식이 된 자살 예방 연구와자살로 친지를 잃은 생존자의 심리 치유에 생을 바쳤다. 국제자살예방협회IASP 설립을 주도한 그가 국가자살예방협회가 제정한 세계자살 예방의 날이던 2015년 9월 10일,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전혀 상반된 입장에 선 듯 보이는 아메리와 파버로는 자살에 대한 세상의 통념에 맞서 싸운 동지기도 했다. 아메리가 ‘생명의 논리‘ 로부터 죽음과 자살의 인식론적·철학적 해방을 추구했다면, 파버로는 자살이라는 행위에 드리운 종교적·사회문화적 보편 인식들, 예컨대 자살자에게 드리운 비겁함과 나약함의 이미지, 남은 자가감당하는 수치와 죄의식을 걷어내고 현상을 과학적으로 바라보게하는 데 헌신했다. - P62
그가 세계적으로 저명한 심리학자라는 사실을 알아챈 이는 거의없었다" "그가 은퇴 후 근 20여 년 동안 단 한 푼도 받지 않으면서그 일을 계속했다는 사실도 밝혀야겠다"라고 썼다.
LA 자살예방센터는 1997년 이후 ‘디디허시정신보건서비스DHMHS‘ 와 통합, 운영돼왔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실직한 여성들의 실의를 치유하고 격려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민간 자선단체인 디디허시정신보건서비스는 시대 상황에 따라 빈민, 소수인종 등 다양한소외 계층의 정신보건 증진을 위해 일했다. 디디허시정신보건서비스 디렉터인 심리학자 키타 커리는 파버로 헌정 비디오에서 "파버로는 자살의 오점‘을 지우기 위해 헌신한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P68
"자살하려는 이들이 겪는 극심한 고통을 누구보다 앞서 이해한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 2014년 파버로는 미국자살학회학술대회비디오 연설을 통해 "전화 한 통화 같은 아주 사소한 우정을 표시하는 것만으로도 자살을 막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내겐 늘 굉장한 일처럼 여겨졌다" 하고 말했다.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처럼, 그는 저 ‘소박한 말로 자신의 학자이자 봉사자로서의 생애와 자살학의 역사를 포괄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살과 자유죽음은 동의어가 아니고, 노먼 파버로가 막고자 한 모든 자살이 장 아메리가 옹호한 자유죽음은 아니다. 심리부검을 포함한 자살 연구와 예방 활동, 또 자살 후 생존자에 대한 심리 치료의 목적이 "(자살자 본인보다는 가족, 나아가사회의 보상 심리에 달려 있다"라고 한 아메리의 비판에는 부인하기 - P68
힘든 진실이 있고, 여전히 자살을 죄악시하는 종교와 관습과 법이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아메리의 목소리는 좀 더 커져야 할 필요가있다. 하지만 심리학과 자살학이 자유죽음의 "존엄성을 박탈"한다는아메리의 단죄에 파버로와 슈나이드먼 같은 이들이 고분고분하게수긍할 것 같지도 않다. 그들은 아마 아메리가 책에서 예로 든 숱한이들의 자살이 모두 그의 기준에 부합하는 자유죽음이었는지 심리부검을 통해 규명하자고 따져 물을 것이고, 아메리는 삶의 외통수를 판별하는 판관은 개인과 사회이지만 둘의 판단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응수할 것 같다. 그렇게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사례와철학적 논리로 끝도 없이 맞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전선 너머에서 ‘자살=죄악‘이라는 해묵은 주장이라도 끼어들면 금세 나란히 서서 사회의 위선에 맞서 동지로 싸웠을 것이다. 그들로 하여 우리는 자살이라는 죽음의 한 형태와 거기 이르는 삶의 보편과 특수를, 지금 우리 삶의 양상을 조금은 더 느긋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 P69
사랑의 합법성 동성혼의 법제화를 위하여
난소암을 앓던 니키 콰스니Niki Quasney는 2014년 3월, 운전 중 찌르는 듯한 가슴 통증을 느꼈다. 곧장 응급실로 와야 한다며 의사가경고했던 바로 그 증상이었다. 하지만 콰스니는 통증을 견디며 혼자 40여 분을 더 달려 인디애나 주 경계를 넘어 일리노이 주 병원을찾아갔다. 지난해 8월 AP통신 인터뷰에서 그는 "두려워서 그랬다" 라고 말했다. 그가 두려워한 건 병과 죽음보다 법과 제도의 억압이었다.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는 인디애나 주법에 따르면 13년 반려자 에이미샌들러도 완벽한 타인일 뿐이어서, 가족에게만 면회가 허용되는 투병 과정이 더 고독하고 절망적이리라 그는 두려워했다. 다행히 퇴원한 그는 곧장 인디애나 주 연방지방법원에 자신들을법적 부부로 인정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한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의사망진단서에 샌들러가 아내로 기록될 수 있도록, 사망 후 유산과연금 등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거였다. 앞서 콰스니와 샌들러는 2011년 일리노이 주에서 시민결합Civil Union, 동성혼 대신 부부 지위만 - P71
보장을 했고, 2013년에 매사추세츠 주에서 결혼도 했지만 인디애나주는 다른 주의 동성혼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연방지방법원은 그해 4월 주정부가 두 사람의 결혼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한다. 이례적으로 빠른 판결이었다. 그리고 6월 동성혼을 허용해달라는 소송 10여 건에 대해서도 주정부가 승인해야한다고 판결한다. 주정부는 즉각 항소했지만 9월에 제7항소법원은만장일치로 연방지방법원의 판결을 편들었다. 인디애나 주는 10월부터 동성 커플의 혼인확인서 발급을 시작했다. 소송을 시작한 지6개월 만이었다. 목숨을 건 사랑과 호소로 연방법원을 감동시키며, 미국의 모든주를 통틀어 법정투쟁 최단 기록으로 인디애나 주의 동성혼 합법화를 이끈 니키 스니가 2015년 2월 5일에 별세했다. 향년 38세. - P72
사회를 치료하는 경제학 안정된 진로를 벗어나 학문의 의미를 찾다
교황 레오 13세1878~1903 재위의 회칙 ‘레룸노바룸Rerum Novarum‘이발표된 것이 1891년이다. 교황은 19세기의 10년을 남겨둔 인류가 20세기를 맞이하며 감당해야 할 숙제와 지향을 밝힌 그 회칙의 뼈대를 "자본주의의 폐해와 사회주의의 환상"이라는 함축적인 표현 안에 담았다. 그로부터 100년 뒤인 1991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재위는 같은 이름의 새로운 교황청 회칙 ‘뉴 레룸바룸‘을 내놓는다. 이 시기는 공산주의의 패배와 자본주의의 전일적 지배가 확연해진문명사적 전환기였다. 바오로 2세는 회칙에 레오 13세의 구절을 뒤집은 "사회주의의 폐해와 자본주의의 환상"이라는 예언적인 표현을굵은 글씨로 담았다. - P77
귀국 후 그가 처음 쓴 책은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이었다. 당시로선 신선하고 충격적인 발전의 이면, 즉 1970년대 광화학스모그와시민의 위협받는 안전 등을 폭로한 책이었다. 근대경제학을 반성적으로 고찰한 근대경제학의 재검토』라는 책도 썼다. 농지 위에 활주로를 닦아 나리타공항을 국제공항으로 확장하려던 일본 정부의 계획에 맞서 1966년부터 20년 넘게 싸운 산리즈카 마을 주민들의 투쟁을 일본 경제사회의 현실과 맞물려 환기시킨 나리타란 무엇인가뿐 아니라 ‘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 『일본의 교육을 생각한다』등등 그의 저서들은 경제 이론의 경계를 벗어나 현실 속으로 뻗어나갔다. 일본 출판업계의 거물인 이와나미문고의 편집자 출신이자사장이었던 오쓰카 노부카즈大信- 1939~는 책으로 찾아가는 유 - P84
토피아』라는 책에서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출간 이후 우자와가감당해야 했던 괴롭힘과 협박, 『나리타란 무엇인가 이후 몇 년간외출할 때마다 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을 소개했다. 1970년대 이와나미문고에서 열린 한 연구회 일화도 있다. 당시 우자와는 근대경제학의 모델과 수식으로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문제들을 명쾌하게 분석해 경제·사회학자들을 매료한 뒤 칠판에커다란 X표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모델로는 일본 사회의진정한 모습을 포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환경 파괴나 공해 등가장 중요한 요소가 이 모델에는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P85
그는 노벨경제학상의 단골 후보였다. 하지만 시카고대학교나MIT, 프린스턴의 강단 학자들이 그의 이질적인‘ 연구와 사회 활동을 어떻게 평가했을지는 의문이다. 어리석은 가정이지만, 만일 베트남전쟁이 없었다면, 그래서 그가 미국의 대학에서 연구 활동에 전념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훗날 우자와는 경제학을 공부하면서도 예비 의학도 시절 히포크라테스선서 앞에서 좌절했던 기억을 간직했다고 말했다. 길다면 긴생을 청년기의 어떤 기획 속에두고 마름질하듯 주무를 수는 없겠지만 경제학자로서 그의 마음속에는 ‘사회를 치료하는 경제학자로서 자신만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환자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는 없었지만사회를 위해 자신에게 더 유리한 자리를 포기했다. 그는 학문의 보수적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자신이 설정한 경제학자로서의 경계를지켰고, 그건 그에게 노벨상으로도 채울 수 없는 커다란 야심이었을지 모른다. - P85
잘려나간 장미 여성 할례 금지 운동의 시작
피렐리, 샤넬의 브랜드 모델로 1980, 1990년대 <엘르> <보그> 등 패션지 표지를 장식했던 소말리아 출신 모델리스 디리Waris Dirie, 1965~가 자신의 상처를 세상에 공개한 게 1997년 <마리끌레르> 인터뷰에서였다. 세 살 때 ‘미드간여성 할례 시술자‘에게 클리토리스와 음순을 잘린 이야기, "성냥개비 머리만 한 구멍만 남긴 채 질구를 봉합당한 이야기, 시술 후 자신은 살아남았으나 동생은 과다 출혈로숨진 이야기. ‘사막의 꽃‘으로 불리던 세계적 패션 스타의 고백은 아프리카와중동 대다수 국가들이 종교와 전통의 이름으로 수천 년 동안 자행해온 끔찍한 가혹 행위의 실상을 극적으로 폭로했다. 그는 1998년에 수기 ‘사막의 꽃을 썼고, 2009년 셰리 호만 감독은 에티오피아의 모델 겸 배우 리야 케베데Liya Kebede를 주연으로 이를 영화화했다. 와리스는 유엔 아프리카인권특사, 아프리카연합AU 평화대사 등을 역임하며 여성성기절제FGM, Female Genital Mutilation 근절과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 P87
도케누는 법적 강제에 만족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그는 "금지법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건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법에만 의지할 경우 기소를 면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저지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적도 많았다. <가디언> 인터뷰에서 그는 "나의 공개적인 발언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살만 루시디에 못지않은 도발로 받아들여졌고 또 실제로 살해하려 한다는 말을 전해들은 적도 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반면에 아프리카의 여성들, 특히 FGM의 피해자들은 그를 ‘에푸아 엄마Mama Efua‘라고 불렀다. 일곱 살에 FGM을 당하고 현재 ‘더걸 제너레이션‘에서 일하고 있는 지부티 출신의 님코 알리는 "도케누는 (마치 엄마처럼) 유쾌하고 지혜로우면서 언제나 우리의 말을 끈기 있게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 우리도 아프리카의 여성들과 ‘엄마와 딸‘ 같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해왔다"라고 BBC 인터뷰에서말했다. 그는 <뉴요커> 인터뷰에서 아이작 뉴턴의 표현을 빌려 "그녀는 거인이었고, 우리는 지금 그녀의 어깨 위에 서 있을 뿐이다"라고도 말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뉴요커>에 보낸 이메일에서 "(도케누는) 희망과 변화의 기적"이라고 애도했다. - P93
탐욕스러운 환경운동가 노스페이스 창업자, 국가에 공원을 기증하다
더글러스 톰킨스Douglas Tompkins는 몽상가였다. 그의 꿈은 자연보호가 아닌 자연의 복원이었다. 이미 병들어버린 땅, 보호는 헛되고부질없는 짓이었다. 잘해봐야 증상을 잠시 완화하거나 지연시킬 뿐그나마도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보호였다. 그는 뭇 생명을 자연으로서 사랑했지만 인간만큼은 반反자연으로 여겼다. 자연과 항구적으로 공존하기에 인간은 못 믿을 존재였고, 또 너무 많았다. 그가지구 끝, 인적 드문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광막한 숲과 초원, 화산과습지와 강과 피오르해안에 제 꿈의 거처를 마련한 까닭이 그거였다. 220만 에이커약 27억 평, 서울 면적의 열다섯 배. 그 땅은 자연의 피난처가 아니라 수복의 거점이었다.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의 창업자, 더글러스 톰킨스가 2015년 12월 8일 별세했다. 향년 72세. - P95
크리스는 "이곳을 예전처럼 목장으로 이용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100년 뒤, 아니 10~20년만 지나도사람들은 여기가 공원이 아니었던 때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민들이 양을 키우기 시작한 1940년 이전에는 그 땅의주인이 농부가 아닌 야생의 동물들이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크리스는 남편과 달리 "주민 설득을 등한시한 탓에 오해와 불신을 증폭시킨 점"을 후회했고, 별도의 팀을 꾸려 주민들을 이해시키고 관계를개선하는 노력을 도맡았다. 지역 청소년들의 하이킹·캠핑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주민들의 공원안내원 취업 프로그램을 열었으며 향후국립공원이 되면 관광 수입으로 지역 경제가 더 활성화될 것이라는믿음을 전파하는 데 주력했다. - P102
자연을 복원해서 지키는 가장 근사한 해법으로 그들이 택한 게 국립공원화였다. 1929년 미국 연방정부가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인근 티턴Teton 산맥을 제외하자 록펠러가 15년 동안은밀히 그 땅들을 사들인 이야기, 지역 정치인들과 목장 주민들의반대를 뿌리치고 국립공원으로 국가에 기증해 당시 대통령이던 루스벨트가 수락한 이야기, 여름 들꽃이 그렇게 황홀하게 핀다는 그랜드티턴국립공원이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톰킨스는 들려주곤 했다. 그리고 개인이나 단체가 사적으로 넓은 땅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다만 자신은 임시 집사provisional stewards일뿐이라고 말했다. "나도 해낼 수 있다. 일이십 년만 기다려달라"라고말한 게 불과 2014년 9월이었다. 크리스는 그런 그를 늘 ‘롤로(젊은이)‘ 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 P102
하지만 그는 2015년 11월,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된 현지 잡지 <파울라 Paula>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들어 나의 생물학적 시계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서두르라고, 죽기전에 다 끝마쳐놓으라는 말이들린다"라고 말했다. 푸말린공원의 도로와 안내소, 식당 등의 시설을 갖춘 뒤 칠레 정부에 열쇠를 넘길 참이라고 했다. 은퇴를 생각한다」라는 인터뷰에서 그는 두 딸과 손자들에게 단 한 푼의 유산도남기지 않겠노라고, 노년에 쓸 작은 농장과 집만 남기고 전 재산을칠레와 아르헨티나 환경 보존을 위해 기부할 생각이라고도 했다. 베테랑 카야커이기도 했던 그는 2015년 12월 8일 지인들과 함께파타고니아 헤네랄카레라 호수 투어에 나섰고, 돌풍에 보트가 전복되면서 물에 빠져 저체온증으로 숨졌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훗날 사람들이 이 땅을 걸을 것이다. 무덤보단 이게 더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 P103
거인 같은 여성상 전쟁으로 시작된 여성해방의 상징
1943년 5월 29일, 발행 부수 400만 부에 달하던 미국 주간지 현재격월간지 <새터데이이브닝포스트>는 메모리얼데이 기념호 표지를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노먼 록웰Norman Rockwell, 1921~1978 의 그림으로 장식한다. 작업복 차림의 건장한 여성이 커다란 리벳건을 무릎에얹고 점심 도시락을 먹는 모습. 샌드위치를 든 그는 이두박근이라도과시하려는 듯 왼팔을 힘주어 구부렸고, 발은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을 짓밟고 있다. 무릎 위 도시락에 새겨진 ‘로시‘라는 이름 때문에 <리벳공 로시Rossi the Riveter>가 된 그림은 더 많은 여성 노동력을동원하기 위한 전시 국가와 자본의 홍보물로, 전시 채권 판촉용포스터로 활용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로시는 또 196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내건 여성 파워의 상징으로, 2001년 9·11사태 이후에는 애국주의의 한 표상으로 소환되기도 했다. <리벳공 로시>의 모델이었던 메리 도일 키프Mary Doyle Keefe가 2015년 4월 21일에 별세했다. 향년 92세. - P105
미국리벳공시위원회는 1998년에 만들어졌다. 각자의 경험을기록하고 그 가치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설립된 이 단체는 여성주의와 애국주의의 묘한 결속 위에서 강연과 저술 등 다양한 활동을펼치고 있다. 9·11 사태 직후 <리벳공 로시>를 비롯한 노먼 록웰의 주요 작품들은 미 전역을 돌며 순회 전시됐다. 2001년 11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전시 때에는 100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그의 작품을 관람했다. 큐레이터 비비언 그린은 "록웰의 작품들이 지닌 애국주의와 미국적 삶에 대한 찬미가 관객들의 욕구에 부합한 것 같다"라고 한 잡지 인터뷰에서 말했다. 구겐하임의 홈페이지를 장식한 그림도 <리벳공로시였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또 제2차 세계대전의 숨은 공로자로 리벳공 로시>의 사연이 언급될 때마다 키프의 이름은 곁두리처럼 소 - P110
개되곤 했는데, 그는 조금은 쑥스럽고 또 조금은 뿌듯했던 듯하다. 키프가 AP통신과 인터뷰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2002년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그 일(모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나 자신을 현대 여성의 상징 같은 존재로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라고말했다. 또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록웰의 그림이 잡지에 실리기 전까지 나는 그 그림을 보지도 못했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몰랐다" 하고 덧붙였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버몬트 주 템플대학교에 진학, 치위생사 학위를 받고 고향 베닝턴에서 치위생사로 일하다가 1949년에 결혼, 네 명의 자녀를 두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림이 그려진 지 24년 뒤인 1967년 록웰은 키프에게 사과편지를 썼다. 날씬한 몸매를 우람하게 그려 미안하다고 "그때는 ‘거인 같은 여성상이 필요했다"라고 말이다. 그림 자체가 아니라 남성 지배사회의 여성 대상화, 즉 필요에 따라 모범적 여성상을 상정하고 닮게 하려 한 관행을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걸 인류가 알기까지는 또 긴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아직 뭐가 문젠지 모르는 이들도있다. - P111
잊을 수 없는 기억 챌린저 참사의 비극을 밝히다
2016년은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 참사 30주년이다. 언론이 사고 당일1986년 1월 28일을 전후해 거의 매년 저 일을 고통스럽게 환기해온 까닭은, 우주탐사 역사상 최악의 저 참사가 인재였음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사고는 추진체 부품 결함, 엄밀히 말하면 결합부 고무 패킹의 저온 손상 때문에 빚어졌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그릇된 의사 결정 구조와 추진체 제작업체 모턴사이어콜사의 안일한 판단이 원인이었다. 그들은 기술진의 사전 경고와 발사 연기 주장을 묵살했다. 대통령직속사고조사위원회의 첫 조사 보고서가 나온 건 그해 6월이었지만, NASA의 우주왕복선 프로젝트는 사고 후 근 3년간 전면 중단됐다. 사이어콜은 존폐 위기에, 직원들은 실직 위기에 몰렸다. 유타 주 브리검 시 사이어콜 공장 주변은 "살인자들"이라는 낙서로 뒤덮여 있었다. 사고에 연루된 이들, 그릇된 결정의 책임을 져야 했던 이들은 죄인처럼 살아야 했다 - P113
정년이 임박했던 이블링도 1986년 직장을 떠났다. "그들(회사)은나를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식으로 대했다" "나도 누군가의 생명에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책임도 지고 싶지 않았다"라고 그는 말했다. 자책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1989년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유타 주 철새 보호 시민단체 ‘베어 강 철새들의 피난처‘의 자원봉사자로 살았다. 1980년대 중반 솔트레이크 범람으로 무너진 제방을복구하고 수로와 데크와 탐조 루트를 다시 손보고 수초를 가꾼 건전적으로 그를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의 기부와 모금과 노동 덕이었다고 단체는 밝혔다. 공학기술자 이블링은 특히 관개시설, 수로 보강 등 기술적인 분야를 진두지휘했고, 1990년 시어도어루스벨트환경보존상‘과 2012년 국립야생보존위원회NWRA의 ‘올해의 자원봉사자상을 탔다.‘ - P120
이블링이 세상에 나선 건 2016년 1월이었다. 30년 전 익명으로NPR과 인터뷰했던 그는 다시 NPR 기자를 브리검 집에서 만나 "이제 진실을 알릴 때"라며 "당시 NASA의 발사 결심은 확고했다"라고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난 세월 혼자 감당해야 했던 자책과 죄의식을 울먹이며 토로했다. "나는 좀 더 노력할 수 있었고, 좀 더 노력했어야 했다. 신은 그 일을 내게 맡기지 않았어야 했다. 나중에 신을 만나면 따져 물을 거다. ‘왜 나였냐? 당신은 패배자 loser를 선택했다‘라고." 그의 인터뷰가 1월 28일 미국 전역에 방영되자 시민들의 격려 편지가 쇄도했다. 앨런 맥도널드도 그에게 전화해서 "알면서 아무것도 안 하거나 어찌 되든 신경도 안 쓰는 게 루저"라면서 "당신은 위너winner"라고 말했다. "만일 당신이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면, 우리 - P120
는 멈추려는 시도조차 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풀지 못했다. 그들은 사이어콜이 아니고 NASA가 아니라는 거였다. 사이어콜 부회장이던 로버트 루트와 NASA의 조지 하디가 편지를 쓴 건 그 직후였다. 하디는 "당신과 동료들은 당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NASA도 언론담당관 스테파니 쉬어홀츠 명의의 성명에서 "우주비행사들이 보다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있도록 용기 있게 발언해준 이블링 같은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라고 밝혔다. 그제야 이블링은 마음이 좀 편해져서 "모든 건 끝을 맺어야 하는법"이라 말했다고 NPR은 전했다. 말한 적 없지만 그에게는 보이스졸리에 대한 부채감도 있었을지 모른다. 모두를 대신해 그 빚을 다깊고 그는 2016년 3월 21일에 별세했다. 향년 89세.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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