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가 녹는다‘는 흔한 말은 틀린 건 아니지만 한가한 표현이었다. 빙하는 녹을 뿐 아니라 붕괴되고 있었다. 슈테펜이 2002년〈사이언스> 논문에서 밝힌 빙상의 ‘동적 반응Dynamic Response‘, 즉빙상 표면의 용해-증발이나 해양 경계면 붕괴는 드러난 현상일뿐, 결정적인 건 대륙빙하 바닥까지 스민 물이 윤활작용을 하면서 대륙빙하 자체가 거대한 썰매처럼 바다로 미끄러지고 있다는사실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연구는 학계를 경악시켰고, 기후 위기의 모든 시나리오를 다시 쓰게 했다. - P28

먼저 용어를 알자. 극지 얼음은 크게 바닷물이 얼어서 형성된해빙과, 수만 년간 쌓인 눈이 다져진 민물 얼음, 즉 빙하로 나뉜다.
지구는 민물의 약 99퍼센트를 극지와 고산의 빙하 형태로 담고 있고, 지구의 모든 강과 호수 등의 물을 다 합친 게 나머지 1퍼센트다. 빙하는 다시 빙상과 빙붕, 빙산으로 나뉜다. 빙상은 면적이 5만제곱킬로미터(남한 면적의 절반 이상인 거대 얼음 평원으로 대부분 남극과 그린란드에 펼쳐져 있다. 빙붕은 빙상이 바다로 이어져물에 잠긴 경계 권역이다. 빙붕은 바다에 떠서 녹기도 하지만 빙상으로부터 계속 얼음을 공급받기 때문에 크기와 두께(300~900미터)가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해수 온도 상승 등의 변수가 빙상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이를테면 빙상의 방벽이다. 빙상과 빙붕의 파편 중 해수면 위로 5미터 이상 솟아 바다에 떠다니는 것들이 빙산이고, 5미터 미만은 그냥 얼음 덩어리다. - P28

상식 하나도 환기하자. 대양의 모든 빙산이 녹더라도 해수면은그대로다. 빙산의 90퍼센트는 이미 물에 잠겨 있고, 10퍼센트의
‘일각‘이 녹더라도 얼음이 물로 변하면서 부피가 10퍼센트 줄기때문이다. 물론 수온 상승은 그 자체로 해수면을 높인다. 물 분자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부피가 팽창하기 때문(열팽창)이다. 하지만 해수면 상승의 주범은 대륙빙하, 즉 빙상의 붕괴다. 빙상 면적이 줄어들면 ‘알베도albedo, 물체가 빛을 받았을 때 반사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단위가 낮아져, 햇빛을 덜 반사하고 열을 더 흡수하기 때문에 온난화와 빙상 붕괴는 더 가속화한다. 거기에 더해 슈테펜이 밝힌 ‘동적 반응‘은 빨라진 노화를 걱정하는 이에게 사고로 인한 급사의 가능성을 더한 카산드라적 충격이었다.  - P29

과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그린란드 빙상이 모두 녹으면 지구 해수면은 약 6미터 오르고, 남극까지 녹으면 60미터 상승한다. 그린란드 빙상은 2012년에만 약 4천억 톤이 사라져 10년 전보다 소실 속도가 네 배가량 빨라졌다. 이제 적지 않은 과학자들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섰다고 예측하고 있다.
빙상은 이름과 달리 고르게 평평하지 않다. 오히려 파도처럼 거칠고 불규칙하다. 깊은 균열과 골짜기(크레바스)가 있고, 강과 여울이 있고, ‘물랑moulin‘이라 불리는 수직의 동굴들도 즐비하다. 캘리포니아대 빙하학자 로런스 스미스 Lawrence Smith는 2015년한 인터뷰에서 빙상 구조를 ‘스위스 치즈‘에 비유하며, 물랑과 크레바스를 통해 바닥까지 흘러든 물이 ‘칼로 버터를 자르듯‘ 빙상을 결딴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현상은 오직 현장에서만 포착할 수 있는 거였다. - P29

그는 전 미국 부통령 앨 고어와 현 미국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 등 유력 정치인과 기자들을스위스캠프에 초대해 기후 위기의 실태를 직접 보게 했다. 현장에 가려면 군수송기로 래브라도해를 건너 설상 착륙용 경비행기나 헬기로 갈아탄 뒤, 다시 설상차로 캠프까지 이동해야 한다. 식량과 장비도 물론 싣고 가야 한다. 헬기의 경우 1회 화물 적재한도는 360킬로그램, 시간당 비용은 약 5천 달러다(2007년 기준). 경비를 아끼기 위해 다 싼 화물을 풀어 359킬로그램에 맞추는연구원들의 수고도, 그는 예산을 줄 정치인들이 보게 했을 것이다. 2007년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그는 "매년 사라지는 그린란드빙상의 물을 워싱턴 DC에 부으면 당신들은 수심 약 1마일(1.6킬로미터) 물 밑에 잠길 것"이라고 말했다. 방대한 민물이 극지 바다로 유입되면 조류와 해양생태계가 격동하고, 줄어든 빙상이 제트기류를 흔들어 지구의 기후를 요동치게 한다. 극지는 기후 위기의 미래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자, 슈테펜의 표현에 따르면 거대한 ‘기상 기계 Weather Machine‘다. 그 재생 불능의 기계가 무서운 속도로 망가지고 있다고도 증언했다. 기후 연구는 돈이 많이 드는장기 프로젝트다. 그는 빼어난 학자이자 교육자였을 뿐 아니라 예산을 따내는 데도 탁월한 행정가였다. - P31

 "우리는 ‘그가 인간이 아닐지 모른다‘고, 혈관에 피 대신 에스프레소가 흐를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그는 담배를만 24시간 동안 딱 한 번 ‘끊은 적이 있었다. 한 동료와 배핀만 인근 랭커스터 해협Lancaster Sound의 부빙에서 학위 논문을 위해 현장연구를 하던 1978년, 혼자 얼음 경사면을 횡단하다 눈사태로 설상차가 전복돼 다리가 부러진 때였다. 그는 관측 장비 표식용 알루미늄 막대로 부목을 대고 설상차로 눈보라를 막으며 만 하루를 버틴 끝에, 품에 ‘유서‘를 지닌 채 구조됐다. 그는 한 기자에게 "담배까지 피우면 혈관이 확장돼 얼어 죽을 판이었다"고 말했다. 당시썼던 유서를 늘 간직하고 살았던 그는 1984년 결혼해 아들 둘을낳았고, 2017년 재혼했다. - P32

저 세월을 거쳐오는 동안 그는, 그래도 언젠가는 조금은 다른전망과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으리란 기대와 낙담을 거듭했을것이다. 2007년 IPCC 보고서는 "지금 추세라면 2100년 해수면은약 18~58센티미터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근년 NASA 보고서는 ‘최소 65센티미터 상승해 3천 2백만~8천 6백만 명의 기후난민이 발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2007년 무렵부터 "(해수면이) 1미터 이상 상승할 수도 있다"고, "그래도 지금이 낫다"고말했다. "우선 사람들이 과학자들의 말을 듣고, 정치인들이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고, "빙상의 과학자가 나 혼자가 아니기때문"이었다. 그를 멘토 삼아 우주공학에서 기후빙하학으로 전공을 바꾼, 현 지구과학협동연구소 소장 윌리드 압달라티waleedAbdalati는 슈테펜을 따라 스위스캠프에 처음 갔을 때 "헬기에서내리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가슴을 활짝 열고 지그시 그린란드의 - P32

공기를 음미하던 그를 회상하며 "그에겐 그게 노동이 아니라 열정이고 기쁨이었다"고, "그곳이 그에겐 집이었다"고 말했다. - P33

컬럼비아대학교 영문학과 35세 대학원생 캐서린 "케이트" 머리밀렛Katherine "Kate" Murray Millett 이 논문 「성 정치학Sexual Politics」으로박사학위를 받은 해가 1969년, 저 소용돌이의 한복판이었다.
1970년 7월 출간된 동명의 책은 시사주간지 <타임>이 8월 31일자 여성운동 특집호 표지로 밀렛의 초상화를 실을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뉴욕타임스>는 그를 "페미니스트들의 제사장"이라 소개했다. 서평의 압권은 <타임>이 인용한 밀렛의 논문지도교수 조지 스테이드George Stade의 말이었다. "호두까기 집게에불알을 물린 기분으로 이 책을 읽게 될 것이다."
페미니즘 이론의 고전이자 2세대 페미니즘의 정전正典, 페미니스트 문학비평의 첫 장을 연 책으로 꼽히는 『성 정치학』의 저자케이트 밀렛이 2017년 9월 6일 별세했다. 향년 82세. - P36

밀렛은 문학뿐 아니라 에덴동산의 이브에서부터 프로이트의
‘남근선망‘, 당대 기능주의 철학과 인류학, 심리학, 정치·경제학,
법·의학, 교육학 등 곳곳에 내장된젠더정치의 장치와 권력 메커니즘을 해부하고 폭로했다. 그 거시 권력의 뿌리를 그는 가정에서 찾았다. "가장은 가부장 권력 안의 가부장 권력으로서, 거대사회의 거울이자 연결고리다." 책 3부에서 그는 당대의 문학권력이던 D. H. 로런스, 헨리 밀러, 노먼 메일러의 대표작 비평을 통해문학이 묘사하는 이성애 관계 안에서 여성이 어떻게 수동적·순종적 존재로 대상화되며 ‘내면적으로 식민화‘하는지에 집중했다. - P37

그는 『성 정치학』 2000년판 서문에 "나는 가부장제를 지위와 기질, 성 역할에 근거한 지배적인 정치제도로, 사회적으로 조건 지어진 믿음의 체계로 간주하려 했다. 이 체계는 스스로를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한다"라고 썼다.
가장 미시적인 침실 풍경에서부터 현대사회 젠더정치의 구조로까지 거침없이 나아간 그의 저작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것"이라는 페미니즘 2세대 슬로건의 이론적·철학적 뼈대가 됐다.
『성 정치학』 출간 2주 만에 1만 부가 팔리는 등 연말까지 8만부가 팔렸고,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과 동갑인 밀렛은 가장 뜨거운 이론가 겸 리더로 급부상했다. - P38

페미니즘 운동은 1970년대 중반 이후, 급진 동력을 잃어가던 사회 분위기와 더불어 ‘문화 페미니즘‘으로 선회했다. 그들은 가부장권력에 적극적으로 맞서기보다 여성적 ‘반문화 공간‘ 개척에 주력했다. 그 공간은 "일종의 능동적 저항의 문화로 상상됐지만, 에이드리언 리치의 지적처럼, 가부장 권력을 회피하기 위한 ‘그것 자체가 목적인 이주의 장소가 됐다. (…) 사회 변혁보다는 개인 변혁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2세대 페미니즘의 이념은 그렇게 변색됐다.
밀렛은 서서히 잊혔고, 1990년대 들면서 『정치학』을 비롯한 그의 대다수 "과격하고 급진적인 책들도 절판됐다. 미국 시인이자 활동가였던 로빈 모건Robin Morgan과 점심 식사를 하며 페미니즘 권장 도서 목록에조차 자신들의 책이 포함되지 않는 현실을탄식했다는 게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밀렛에게 그건 명예나 대의의 문제 이전에 생계의 문제였다. - P43

모아둔 돈을 다 쓰고 난 뒤 닥쳐올 가난이, 감당해야 할 굴욕이, 어쩌면 노숙자의 삶이 겁이 난다."그 무렵의 그는 언젠가 한인터뷰에서 베티 프리던과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을 언급하며 "그들은 모두 뛰어난 정치인들이지만, 나는 아니다. ‘여성해방의케이트 밀렛‘도 아니다"라며 냉소하던 때의 그와 달랐다.
2000년 『성 정치학』 등 그의 책들이 복간된 것은 그의 저 칼럼덕이 아니라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상호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의 새로운 문제의식이 부각된 결과일 것이다.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는 다양하고 복합적이므로 개별적인 것들을 교차시키며 파악해야 한다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은 밀렛의 성 정치학과 레즈비언 페미니즘, 흑인 페미니즘 등 2세대 하위 진영을 활발히 재조명했다. 걸출한 페미니스트들의 밀렛에 대한 헌사도 대부분 그 무렵 쏟아졌다. - P44

"1963년 베티 프리던이 ‘여성의 신비‘라고 지적한 문제에 ‘성 정치학‘이란 이름을 부여하고 ‘가부장 권력‘이라는 원인을 규명한 이가 밀렛이었다." -캐럴 J. 애덤스Carol J. Adams


밀렛은 2012년 성소수자 문학단체인 람다 문학재단 LambdaLiterary Foundation의 ‘개척자상‘과 오랜 친구인 오노 요코가 제정한 ‘용기 있는 예술인 상‘을 탔고, 이듬해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수락 연설에서 밀렛은 활동가 시절의 행복과 참여의 기쁨, 시대의 전위에서 그 시대의 일부가 되는 삶의 흥분을 회고한 뒤, 젠더정치의 불의에 끊임없이 맞서자고 촉구했다. "살면서 일상의 불만을 표출하듯, 거리에서, 연인에게, 또 친구에게 항의의 목소리를 내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얼굴이 여성의 얼굴이 돼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P45

마이클 큐잭
경계를 가르며 헤엄친 두 팔


지적장애인 국제 체육 행사인 ‘스페셜올림픽‘의 창설에 기여한다운증후군 수영선수 마이클 큐잭Michael Cusack이 2020년 12월17일 별세했다. 향년 64세. 그가 한 일은 물만 보면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들어 신나게 활개친 게 거의 전부였지만, 그 소박한 열정이 세상 한편을 달라지게 했다. 소수의 사람들을 열정으로 사로잡아 뭐든 해야겠다는 의지를 품게 했고 실천하게 했다.
정반대로 말할 수도 있겠다. 한 어린 장애인의 그리 대단할 것없는 열정에 특별히 주목한 이들이 있었다고. 몸으로 물을 미는동안, 그의 장애는 장애가 아니었다. 극복해야 할 제약도, 도움받아야 할 결핍도 아니었다. 장애는 타고나거나 후천적으로 생기지만, 어떤 제약과 불편은 세상이 만들고 사회가 강요한다는 것, 폄하와 차별이 그렇게 시작된다는 것을 그를 보며 깨달아갔다. - P47

장애·비장애, 무능-유능의 이분법

큐잭은 1956년 5월 6일, 미국 시카고 라잉인 병원에서 경찰관아버지 존과 전업주부 어머니 에스더의 둘째로, 다운증후군을지닌 채 태어났다. 의사는 ‘아이가 정상적 삶을 누릴 수 없으니,
돌보느라 고생하지 말고 일찌감치 시설로 보내라‘고 조언했다.
다운증후군은 선천성 염색체 질환이다. 부모에게서 각 23개씩46개의 염색체를 받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수태전후알수없는 이유로 21번 염색체에 여분의 염색체가 끼어들어 47개의 염색체를 지니면 그리 된다. 신생아 800~1000명 당 한 명꼴로 태어나며, 지적장애 등 육체적·정신적인 차이를 발현하고, 여러 잠재적 합병증에도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아직 예방도 완치도 불가능하다. - P48

장애-비장애를 비정상-정상, 무능-유능의 이분법으로 나누고, 장애인을 우생학적 단종수술로 도태시키거나 시설에 강제수용해 격리 · 배제하던 때가 있었다. 미국연방대법원이 장애인 시설 수용자에 대한 불임·단종수술을 수정헌법 14조(평등 조항)위반이 아니라고 판결한 게 1927년이었고(Buck v. Bell), 큐잭이 태어난 1950년대에도 장애인은 시민적 자질인 자립·자결 능력이결여된 존재여서 시설에 수용하는 게 그들과 공동체 모두에 이롭다는 게 상식이었다."
의사의 조언도 아마 선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는 그를 집 - P48

으로 데려와 보살폈다. 일리노이주는 1960년대 말에야 지적장애인 공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부모는 큐잭과 유사한 장애를지닌 아이의 부모들을 수소문해 돈을 모아 창고를 임대하고, 은퇴 교사를 고용해 함께 아이들을 가르쳤다.
어린 큐잭은 세발자전거 타기나 공놀이 등 몸 쓰는 놀이에 유난히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가족은 그의 애칭 ‘미키Micky‘ 뒤에 ‘마우Mouse‘ 대신 ‘무스Moose, 크고 힘센 사슴종인 말코손바닥사슴‘란 별명을 붙였다. ‘미키 무스‘는 무스처럼 건강하게 성장했다.
1965년 시카고 파크디스트릭트 당국이 장애인 레크리에이션프로그램을 시범 운영한다는 공고를 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만 20세 체육교사 앤 버크Anne Burke가 거기 자원했고, 첫 학생으로 큐잭을 만났다. 물만 보면 환장을 해서 제어하기조차 힘들던 큐잭은 점차 놀이와 학습을 구분하게 됐고, 고된 훈련에도 성실히 임했다. 버크는 연습이 끝난 뒤 큐잭 가족과 함께 식사도 하면서 친구처럼 지내게 됐다. 2년 뒤 버크의 제자는 약 100명으로 늘어났다. - P49

1972년 LA 대회 땐 경기 도중 수영복 끈이 풀리자 아예 트렁크를 벗고 경기를 마친 뒤 곧장 풀에서 나와 자기 기록을 확인한뒤 다시 물에 뛰어들어 수영복을 챙겨 입었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아이처럼 경기에 몰두했고, 기량도 뛰어나 한 코치는 "내 수영 실력도 꽤 좋은 편이지만 그는 물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 나를 앞지르곤 했다"고 말했다. 더 인상적인 건 이긴 뒤에도 승리감에 도취돼 으스대는 법 없이, 무심히 제 할 일을 하곤 했다는 점이었다고 코치는 덧붙였다. 큐잭은 관중들의 주목과 갈채를 즐겼지만, "그건 자의식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랑했고, 사랑받고자 했기 때문이었다"고, "시합에 졌을 때도 늘 경쟁자에게 먼저다가가 축하했고, 단 한 번도 결코 질투하지 않았다"고 그의 가족들은 회고했다. - P51

젠더 · 인종차별의 의·과학적 근거가 된 저런 주장을 믿는 사람은 이제 드물지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지금도 비장애인의의식과 무의식 속에, 사회제도와 구조 속에 온존하고 있다. 장애라는 렌즈로 미국사를 조명한 킴 닐슨은 자신의 책 『장애의 역사』에서 장애는 고정불변의 몰역사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지고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고 썼다. 큐잭의 수영장처럼 물리적 · 구체적 장애를 포용할 수 있는 기회와 제도, 시설과 공간을 마련할 책임은 공동체에게,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정치인과 행정가에게 있다. 헬렌 켈러처럼 장애인으로서 큰 성취를이룬 위인을 칭송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다. 하지만 책임 있는정치인이라면, 헬렌 켈러가 차별적으로 누린 교육 등 여러 기회에 주목해야 한다. - P53

보비 레이먼드
공존 가능한 마을의 설계자


‘분리 segregation‘는 차별의 양식이자 하나의 이념이다. 법·제도가 쇠사슬과 채찍을 금지해도 차별로서의 분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을 모색한다. 아파트단지 등 주거지역 전체에 담장을 두르고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는 이른바 ‘빗장 공동체‘가 단적인 예다. 경제적 신분과 지위는 주거와 교육, 문화 등현대인의 삶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뻔한 얘기지만, 가난한 지역일수록 공공 인프라가 부실하고, 교육의 질과 직업 선택의 기회, 구직 네트워크 같은 사회적 자본이 취약하기 마련이다. 분리는 차별을 재생산하는 무한 폐쇄회로이자 하나의 메커니즘이다 - P55

분리와 차별의 채찍은 살갗이 아니라 영혼을 할퀸다. 모욕감과분노를 자극하고, 막막한 절망감으로 까라지게 한다. 분리는 공동체 안에 철조망 없는 ‘게토ghetto‘를 구축한다. 그 게토의 담장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내면화한다. 분리, 격리, 배제는 점점 이상하지 않은 일, 바람직하진 않아도 어쩌지는 못할 일이 된다. - P55

인종과 피부색, 출신 지역에 따라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는, 대도시 주변이면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나는 현상을 ‘재분리resegregation‘라 부른다. 거기엔 인종에 따른 주거 분리가 개개인의부의 격차나 문화 동질성에 이끌린 탓만이 아니라, 은밀하고도집요한 분리와 차별의 결과라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1968년민권법 제8조 ‘공정주택 Fair Housing‘ 조항은 인종을 근거로 주거지선택권을 제한하는 모든 제도와 관행을 불법화했지만, 지배집단(백인)의 의식과 텃세까지 통제하진 못했다. 주택금융기관과 부동산 소개 및 관리업체들도 법 이전에 주민들의 바람을 존중해야 했다. 그들은 법을 우회하는 다양한 경로를 개척했다. - P56

미국 연방 · 주정부가 의료 보건 시스템과 함께 가장 난감해하는 사회문제 중 하나도 재분리, 즉 주거 분리 차별이다. 2010년 ‘오바마 케어‘라 불리는 의료 개혁으로 임기를 시작한 오바마 행정부가 2015년 집권 2기의 주력 정책으로 ‘공정주택 원칙 및 빈민지역 주거 환경 개선‘을 상정한 것도 그래서였다. 주무장관이던 연방도시주택개발부의 훌리안 카스트로는 그 정책의 지향이 복지가 아닌 인권 옹호와 반차별에 있다며 "우편번호가 누군가의 꿈과 포부를 저지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2018년1월 출범한 트럼프 행정부가 맨 먼저 전면 중단, 재검토를 선언한것도 이 정책이었다. - P56

자치 의회 겸 행정기관인 마을 이사회는 연방 민권법보다 앞서 공정주택 조례를 제정, 금융기관과 중개업소 등이 재분리를부추기는 행위를 금지했고, 주민소통위원회를 설립해 건물주협회 등 이익단체 대표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활동의 주역은시민단체인 ‘오크파크 주택센터OPHC, 현재는 OPRHC‘였다. 그들은 주택 매매·임대 시장의 최전선에서 직접 소비자들을 상대하며 조화로운 점묘도를 그렸다.
보비 레이먼드Bobbie Raymond 센터를 설립하고 만 26년간사무총장을 지낸, ‘오크파크 전략‘의 총괄 리더였다. 그는 1971년자신의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오크파크의 도전: 인종 변화에 직면한 교외 한 공동체The challenge to Oak Park: A Suburban Community FacesRacial Change」의 구상을 주민들과 함께 실험했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일어나는 일에 끌려가지 않고 우리의 뜻에 따라 공동체의미래를 함께 만들어가고자 했던 보비 레이먼드가 2019년 5월7일 심장질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0세. - P57

레이먼드는 1996년 센터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났고, 지역 주간지는 16쪽짜리 레이먼드 특집을 기획했다. 그의 후임으로 12년간사무총장을 지낸 롭 브라이메이어는 "오크파크 역사상 가장 큰영향을 미친 인물이 아마 보비일 것"이라고, "오크파크는 그의 헌신 덕에 훨씬 나은 공동체로 변모했다"고 말했다. 공정주택 문제의 권위자 하버드대 게리 오필드 교수는 "보비는 미국 공정주택운동의 가장 열정적인 주역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레이먼드는 "나는 나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 적이있다. "나는 아이였던 때가 없었다. 네댓 살 무렵의 나와 지금의 내 - P62

가 똑같다. 나는 항상 매사에 진지했고, 모든 것에 관심이 많았다." 센터 일을 하며 그는 제 뜻을 굽히거나 주도적 역할을 동료에게 넘기는 데 인색해 가부장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자신이쏟은 관심과 열정만큼 세상의 관심이 자신에게 쏟아지기를 과도하게 바라는 유형의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함께 고생한 이들이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일을 비판적으로 말하는 이들도 없잖아 있었다. 당연하게도, 오크파크의 성취는 그가 혼자 이룬 게아니었다. 원년 마을 이사회 멤버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레이먼드와 함께 센터 창립 및 운영의 3인방으로 꼽히는 셔를린 라이드Sherlynn Reid와 버네트 슐츠vernette Schultz 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대학에서 연극·연기를 전공한 라이드와 슐츠는 레이먼드의 친구이자동지로서 저 모든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갔다.  - P63

1968년 오크파크로이주한 흑인 여성 라이드는 흑인 이주자들과의 소통에 크게 기여했고, 훗날 주민소통센터 책임자가 돼 건물주협회 등 집단과의 상충하는 이해를 도맡아 조정했다. 슐츠역시 원년활동가로, 공정주택 운동의 전미 협의체인 ‘오크파크교류협의회OPEC‘ 창립을 주도하고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고교 시절 펜화를 출품해 ‘전미학업상‘의 회화 부문에서 수상한 적이 있는 레이먼드는 은퇴 후 수채화 작가로 활동했고, 두 편의 장편동화를 썼으며, 지역 신문에 가드닝 관련 에세이를 정기적으로 기고했다. 그는 두 차례 결혼과 이혼을 했고, 첫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며, 수학자인 세 번째 남편과 해로했다. - P63

벤 바레스
성차별에 맞선 트랜스젠더 과학자


뇌와 척수 등 신경조직은 크게 나눠, 뉴런이라 불리는 신경세포와 뉴런을 감싸고 있는 신경교세포neuroglia cell, 신경아교세포라고도 불림로 구성된다. 과학이 최근 100년간 주목해온 건 당연히 뉴런이었다. 뉴런은 전기화학적 신호를 주고받으며 감각, 운동, 사고 등 복잡한 인지·생명 활동을 담당한다. 뉴런보다 열 배가량 세포 수가많은 신경교세포는, 아교라는 이름처럼, 뉴런을 붙잡아주는 지지대 혹은 산소나 영양을 공급하는 보조역 정도로 홀대당했다. - P65

그런데, 뉴런과 신경교세포(이하 교세포)가 주종 관계가 아닌 대등한 협력관계라는 사실이 10여년전 밝혀졌다. 교세포에도 여러종류가 있으며, 저마다 기능이 달라 뉴런 확장과 정보 처리 속도및 효율 증강, 뇌 면역을 포함한 신경활동 전반에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슨병, 다발성경화증, 루게릭병 등 다양한 난치·불치 신경 퇴행성질병들과 ‘만성‘이나 ‘신경성‘이라고 얼버무려야 했던 ‘원인 모를통증들도 교세포 이상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그렇게 알게 됐다. - P65

바레스는 미국의 4~18세 청소년 2만 명의 수학 성적을 조사한결과 유의미한 젠더 차이가 없었다는 데이터, 여성과 소수자가 연구비를 타기 위해서는 남자보다 2.5배의 연구 실적이 필요하더라는 조사 자료, 2005년 미국 국립보건원의 혁신과학자상 PioneerAward 심사위원 64명 중 60명이 남성이었고 수상자 9명 전원이 남성이었다는 사실을 활용했다. 서머스를 편든 하버드대 정치학자하비 맨스필드Harvey Mansfield가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감정적(덜 이성적)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서는, 분노에 의한 폭력 범죄를 저지르는 건 여성보다 남성이 25배나 많다는 데이터를 들어 반박했다. - P67

하버드 의대 신경학과 교수 베스 스티븐스는 2004~2008년 바레스연구소에서 성상세포와 미세아교세포의 면역기능 연구를주도한 연구자였다. 그가 하버드대에 자리를 얻어 스탠퍼드대를떠나게 되자 바레스는 스티븐스에게 그 연구를 하버드로 가져가서 계속하라고 권하며 "너보다 그걸 더 잘 해낼 사람은 없을 것" 이라고 했다고 한다. 자기 연구소의 아이템을 후배 연구자에게떼어주는 예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앞서 바레스는 자신이 찾아낸 교세포를 종류별로 배양하는 독자적이고 효율적인 기법을 조건 없이 공유하기도 했다.
그의 후임으로 스탠퍼드대 신경생물학과장을 맡은 앤드루 휴버먼은 저 모든 그의 미덕을 ‘과학의 열정‘이란 말로 압축했다.
"그의 모든 열정은 오롯이 과학을 향해 있었다.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고, 과학 안에서 더불어 성장하게 하는 것을 그는 소명이라 여겼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바레스연구소의 연구진은 다양성의 모범적인 표본 같았고, 여성이 남성보다 많을 때도 많았다고 한다. 스티븐스는 "그렇게 즐겁고 창조적으로 다이내믹한 - P72

연구소는 없을 것"이라고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말했다.
바레스는 2016년 4월 췌장암 진단을 받고 20개월의 투병 끝에2017년 12월 27일 별세했다. 향년 63세. 스탠퍼드대는 부고에서투병 말기의 바레스가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든 반드시 해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며 매달린 것이 제자 및 연구원들의 추천서를 쓰는 일이었다고 전했다. 그렇게 분화한 연구자들이 하버드대와 듀크대, 뉴욕대를 비롯한 각지로 퍼져서 각자 교세포와 씨름하고 있다.
2017년 1월 스탠퍼드대가 개최한 ‘바레스 헌정 심포지엄‘은 드물게 성대했다고 한다. 그 행사는 물론 학술대회였지만, 연구자로서, 교육자로서, 반차별 · 다양성 옹호활동가로서의 스승이자 동지였던 바레스의 정신과 업적을 기린 자리이기도 했다. 스탠퍼드대 총장 마크 테시에 라빈은 기조 발언에서 30년 동안 쌓아온바레스와의 우정과 그의 헌신, 용기를 회고하며 "우리가 그처럼낡은 생각에 도전하는 용기와, 차이를 포용하며 서로에게 배우려는 자세를 유지하는 한 우리의 잠재력은 무한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벤이 가르쳐준) 다양성의 힘이다"라고 말했다. - P73

이문자
피해 여성의 곁을 지킨 ‘여성의전화‘의 대모


한국 여성운동이 종속적 운동에서 벗어나 여성주의(페미니즘)의 독자적 운동으로 갈래를 형성한 시기를 여성사 학계는1980년대 어름으로 본다. 도식화하면 여성운동은 개화기 신여성의 계몽-교육 운동으로 시작해 일제시대 민족주의 계급운동과구국-독립운동에 동참했고, 해방 직후에는 이념 정치단체의 선전 활동에 머물거나 직능단체의 권익 운동에 치우친 경향이 강했다. 1960~70년대 개발독재 시대 들어 여러 단체가 가족법 개정과 여성·노동·인권 등 이슈들을 부각했지만 그 역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큰 흐름 안에 있었다. - P77

이러한 오랜 활동 경험과 반성 위에서, 1970년대 서구 페미니즘 이론을 학습한 활동가들은 1979년 독재 권력의 붕괴와1980년 ‘서울의 봄‘을 거치며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젠더 차별 및억압의 근원적 문제로 눈을 돌렸다. 신군부가 올림픽 유치 등을통해 학살의 흔적을 지우느라 바쁘던 무렵인 1983년, ‘서울의 봄‘의 좌절과 위축감을 떨쳐낸 활동가들이 6월 11일 ‘여성의전화‘를, - P77

6월 18일 ‘여성평우회‘를 각각 창립했다.


"(우리의 목적은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아내들과 성폭력 (피해)여성들을 돕고 가정에서 폭력을 추방하는 동시에 사회 전체의 심리적 건강에 기여" 하며 "여성들에게 비인간적 삶을 강요하는 모든 제도나 관습, 인습을 없애고 남녀의 평등한 인격 관계를 수립해 정의롭고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를 이루는 데 있다."
-여성의전화 창립취지문


"인간은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 한국 여성은 가부장적 제도의 희생자요, 산업사회의 소외된 계층이고 국토 분단의 비극적 피해자이다. (.…)한국 여성이여, 우리 모두 단결하여 여성의 인간화 운동에 앞장서 나가자."
-여성평우회 발기취지문 - P78

‘25세 여성조기정년제 철폐‘ 등 제도-정치 투쟁과 활동가 재생산을 위한 이념 교육에 치중하던 여성평우회는, 1980년대 중반운동 진영의 이념-노선 갈등과 분열 속에 1987년 8월 해산했다.
활동가 일부는 노동운동과 제도권, 1987년 출범한 ‘여성민우회‘
등 여성단체로 무대를 옮겼다.
이념보다는 현실, 즉 가정폭력과 성폭력이라는 선명하고 구체적인 문제와 대치했던 여성의전화(이하 여전)는, 역설적으로 너무나만연한 범죄적 사례들 덕에, 공감과 분노라 해도 좋을 ‘현장의 힘‘ - P78

덕에 조직의 역량과 규모를 키우며 운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심화해왔다. 서울 중구의 한 건물 옥탑방에서 달랑 전화기 한 대로 문을 연 여전은 2021년 현재 전국 25개 지부에 32개 상담소와 10개의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를 둔 우람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가정폭력과 성폭력이라는 말 자체를 대부분 생경해하던 때였다.
작가 박완서가 여전 사무소 개소식 축사에서 언급한 "여자 팔자" 란 말이 가정폭력을 아우르는 잔혹한 일상어였고, 남의 가정사는모른 척하는 게 미덕으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창립 첫해 여전이 서울 지역 기혼 여성 708명을 상대로 벌인 한국 최초 가정폭력 실태조사의 공식 용어도 가정폭력이 아니라 ‘아내 구타‘였다. 조사 결과 구타당한 경험이 있는 이는 응답자의 42.2퍼센트였다. 그해 여전에는 6개월 동안 4천여 통의 전화가 쇄도했다. - P79

이문자는 광의의 젠더폭력 피해자였다가 활동가로 변신해 여전의 역사를 몸으로 지탱해온 수많은 이들 중 한 명이다. 그는1988년 자원봉사자로 여전과 인연을 맺은 이래 상담부장과 부설쉼터 관장, 여성인권상담소장 등을 역임했고, 오늘날 여전 안팎에서 맹렬히 활동 중인 수많은 전문 상담가를 양성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성폭력 관련법 제정 등 여러 정책적 진전을 위한 청문회와 투쟁을 이끌었다. 저 세월 동안 그는 피해 여성들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고, 정년퇴직 후에도 김포와 성남 등의지역에서 여전 활동을 거들었다. 선후배 및 동료 활동가들이 정당의 공천을 받아 정치인이 되고, 관변 여성단체나 공직의 장을맡아 떠나는 동안에도 그는, 적어도 이력으로 드러난 바에 따르 - P79

면, 울타리 너머를 기웃대지 않았고 오히려 더 안으로, 피해 여성의 곁으로 다가가고자 했다. 1990년대 말 정년에 가까운 나이로이화여대 대학원에 진학하며 여성학이나 사회학이 아니라 사회복지학을, 다시 말해 이론보다는 실천에 가까운 전공을 선택한까닭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외적 활동이 드물었던 탓에 그는 진영 바깥에는 상대적으로덜 알려졌지만, 그랬기 때문에 여전의 활동가들은 그를 조직의
‘대모‘나 ‘맏언니‘ 혹은 ‘끈끈이 같은 존재‘라 부르며 존경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리 길지 않은 한국 여성·시민운동 역사에서정부기구NGO의 참된 가치와 현장 활동가의 위태로운 존엄을 지켜냈다. 이문자가 별세했다. 향년 78세. - P80

2005년 책 왜 여성주의 상담인가』에 수록된 자전에세이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세상을 보다」에 이문자는 아이들과의 생이별을 자초했다는 자책감과 이혼 직후의 고립감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이제는 다 잃은 상태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친정어머니도 세상을 떠난 뒤였고, 아버지는 젊은 여성과 재혼해 깨를 볶고 있었으며, 하소연이라도 할 만한 자매들은 모두 외국에나가 살던 때였다.
1988년 ‘변월수 사건‘이 터졌다. 강간하려는 남자의 혀를 깨물어 자른 혐의(상해)로 피의자가 된 32세 여성 변월수에게 1심 법원은 징역 6개월과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며, 판결문에 "앞길이구만리 같은 청년의 혀를 잘라 …" 라고 썼다. 이문자가 여전과 - P81

인연을 맺은 게 그해였다.
그는 한 후배의 소개로 1988년 3월 여전 상담원 교육을 받고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그해 6월 어느 바닷가에서 가진 수련회에서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어렵사리 털어놓자 모두가 이혼의 용기를칭찬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 자리의 감동을 그는 평생 마음에새겼고, "(그것이) 여성주의에서 말하는 임파워먼트empowerment였다"고 훗날 썼다. 그는 만 2년간 자원봉사자로 일한 뒤 정식 상담자가 됐다. 상근자 월급이 40만 원쯤이던 시절이었다. - P82

 ‘양육비해결총연합회‘를 설립해 이끌어온 조카 이영 씨도 고모 이문자를 "살가운 분이라고 말하긴 힘든, 어려운 분"이라고 기억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고모는 결코 남에게 치대지 않는 독립적인 성향의 여성이셨다"고, "일상에서도 부당하거나 잘못된 일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분이 아니어서, 피해자를대할 때도 상담과 위로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깊이 고뇌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고모여서, 이영 씨는 새 단체를 꾸려 활동을 시작하면서도 ‘의존하고 치대는 인상을 줄까 봐 고모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자문을 구하지 못했다고한다. - P86

이영 씨가 2000년대 초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친구를 고모에게소개한 일이 있었다. 듣는 사람조차 답답해할 만큼 ‘바보같이 너무 착하기만 한 친구여서, 혹시 고모가 호통이라도 치지 않을까조마조마했는데, 웬걸 그렇게 자상할 수 없더라고, 조곤조곤 위로하고 격려하며 조언을 건네는 모습이 "진짜 내 고모 맞나 싶더라"고 했다. 이문자는 내담자에게서 젊은 날 수련회 바닷가에 앉아 있던 자신을 보고, 그를 보듬어주며 ‘임파워먼트‘를 알게 한동료들의 자리에 자신을 놓아보곤 했을지 모른다. 그것이 이문자가 생각하는 ‘전문가‘였다.
2013년 여전 후배들이 마련한 ‘우리가 사랑하는 여자 이문자고희 파티‘에서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발을 디뎠고 지금까지 한눈팔지 않았다"고, "여전은 내 삶"이라고 말했다.
은퇴 후 그는 서울 마포의 작은 빌라에서 혼자 지내며 지역 독서 모임과 후배들과의 산책 모임 등으로 활동적인 말년을 보냈다. - P86

연금과 ‘노인 일자리‘월급 28만원까지 합쳐월 100만원 남짓 되는 돈이 그의 수입의 전부였다고 한다. 생전의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스스로를 "가난한 독거노인"이라 말하곤 했다지만, 그건 농담도 엄살도 아니었다. 그의 사정을 아는 후배들이 언젠가 1박 2일여행을 함께 한 뒤 그의 몫의 경비를 대신 부담하려 하자, 버럭 역정을 내며 "이러면 함께 안 놀겠다"고 하더라고, 한 후배는 전했다.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 사태로 모임도 활동도 줄었고 ‘노인일자리‘도 끊겼다. 그는 좀 더 고독해졌고, 가난해졌다.
가까운 후배들은 개별적으로 연락해서 만나는 것과 별개로,
‘문자리 산책방 with 이문자‘ 등 이름을 붙인 정기 모임을 만들어그의 안부를 챙겼다. 그는 8월 2일 모임에 참여하지 못했다. - P87

샤론 머톨라
길 잃은 동물들의 수호자


벨리즈Belize는 ‘카리브해의 보석‘이라 불리는 중앙아메리카 작은 나라다. 국토 면적(2만2970제곱킬로미터)은 경기도의 약 두배. 그중 60퍼센트가 야생의 우림이고, 25개의 자연보존지구가있다. 카리브해와 면한 386킬로미터 해안선 연안은 호주 그레이트배리어리프 다음으로 긴 산호초 띠를 둘렀고, 450여 개 섬들이구슬처럼 꿰여 있다. 그런 환경 덕에 주력산업도, 코로나19 사태로 지금은 어렵지만, 농어업에서 관광서비스업으로 바뀌었다.
1990년대 GDP의 10퍼센트 남짓이던 관광업 비중은 2019년44.7퍼센트였다.
긴 식민지 침탈을 겪고도 온전했던 건 이렇다 할 자원이 없어서였다. 2011년까지 종주국이었던 영국이 군대를 파견해 국경을지켜준 덕에 정정이 불안한 이웃 나라의 침탈을 면했고, 인구 급중의 압박도 적어 1981년 독립 당시 약 20만 명이던 인구는 근년에도 40만 명 정도다. - P89

벨리즈 국민들에게 자연-생태의 가치를 일깨운 존재가 있었다. 결코 동물원 같지 않은, 벨리즈 유일의 ‘벨리즈 동물원‘이었다. 그동물원은 1983년 문을 연 때부터 지금까지, 다치거나 병들거나어미를 잃고 구조된 녀석들이 한 식구처럼 지내는 매너만 지키면 철창 없이 사는 곳이다. 2021년 현재 식구는 45종 200여 마리. 다리 하나를 잃은 재규어 ‘엔젤‘과 벨리즈의 스타라는 고아 테이퍼 ‘에이프릴‘ 등 모두가 사연이 있고 이름이 있다. 시민들도 그들을 고유명사로 부르며, 이웃처럼 안부를 챙긴다.
한마디로 그곳은 진귀한 쇼의 공간이 아니라, 종의 존재를 이해시키고 공존의 가치를 도모하는 야생의 대사관 같은 곳이고,
국제야생보존트러스트WPTI, wildlife Preservation Trust International 전의장 빌 콘스턴트의 말처럼 "좋은 동물원이란 게 뭔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곳"이다. 시민들은 ‘나는 벨리즈 동물원을 사랑해 I Love TheBelize Zoo‘란 문구의 스티커를 자랑삼아 자동차 범퍼나 바이크에 붙이고 다닌다. - P90

동물원만큼이나 유명한 게 설립자 샤론 머톨라sharon Matola다.
서커스단 댄서 겸 맹수 조련사로 일하던 무일푼의 28세 여성이맨몸으로 야생에 울타리를 두르고 동물원 간판을 내건 사연에서부터, 동물들 먹이느라 닭을 키워 팔고 ‘막노동꾼‘ 같은 관광가이드로 5년 넘게 뛰어다닌 초기의 고생, 무슨 행사 소식만 들리면배낭에 드레스를 챙겨 넣고 낡은 모터바이크로 달려가서는 동물원 사진첩을 펼쳐 보이며 후원을 청하던 일상, 때로는 배낭에 보아뱀 ‘벨보아‘를 담아 초등학교를 돌며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 P90

가르치고, 초청장(어린이 무료)을 돌리고, 동요를 짓고 동화책을내 읽힌 일, ‘국가의 공적enemy of the state‘이란 비난까지 들으며 댐건설 반대운동을 주도한 일까지………. 그의 이름은 몰라도 ‘주 레이디Zoo Lady‘를 모르는 이는 드물었고, 불량배들도 그를 마주치면 돌아설 정도였다. 벨리즈 출신인 캐리비언 기후변화센터 사무총장 콜린 영은 "벨리즈 시민들이 갖게 된 자연에 대한 이해의대부분이 머톨라에게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동물들과 함께 뒹굴며 살 수 있어서.……… 세상에서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던 벨리즈의 ‘주 레이디‘ 샤론 머톨라가 2021년 3월 21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 P91

2019년 지구의 날(4월22일), 벨리즈 미국대사관은 "벨리즈 청년들의 롤모델"인 머톨라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머톨라는1988년 인터뷰에서 "벨리즈에서 평생 살 것"이라고, "지금 입은이 재킷도 단돈 25센트짜리"라고 말했다. 1990년 그는 벨리즈인으로 귀화했다. 2017년 그는 동물원 운영권 일체를 직원들에게물려주었고, 숨지기 2주 전까지 동물들의 야생 복귀 훈련을 도우며 어린 동물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1992년 인터뷰에서 그는 벨리즈에 오던 무렵만 해도 동물원운영은커녕 "환경에 대한 생각 자체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동물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동물을 알아가며 변화해온 벨리즈시민들이 그를 환경보호론자로 만들었다고, "(그렇지만) 결코 엘리트 환경론자가 되고 싶진 않으며 "다만 땅바닥에 엎드려 땀흘리는 게 좋다"고 했다. 뒤를 이어 동물원 운영을 맡은 셀소 푸트의 말처럼 벨리즈 동물원은 샤론 머톨라의 삶 자체였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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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인권은 과분하지 않은가."

친구가 제게 한 말입니다.
현실을 묻는데 당위로 답할 순 없는 노릇이죠. 말이나 글로 된멀끔한 당위는 더러 식상하고, 모욕적일만큼 공허하기도 합니다.
저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친구의 말이 질문이었다면, 저는 아직 답을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것이 추궁이었다면, 솔직히 저는 맞장구치고 싶을 때가 잦습니다. 형사의 집요한 추궁에 마침내 무너지는 용의자처럼 말이죠.
냉소와 염세, 악마의 유혹이라고도 한다는 달콤한 포기. - P6

어쩌면 저 질문은, 말년의 마더 테레사가 신의 존재를 의심했던것처럼, 이 책에 엮인 이들이 평생 힘겹게 품었던 질문, 그들이 답해야 할 질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책 속의 ‘당신‘들은 위인전의 주인공들과 달리 세상으로부터 부단히 외면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 실패했거나 기대한 바의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한 이들입니다. - P6

대체로 늘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듯, 사필귀정이나 인과응보의미끈한 논리는 당위의 멀끔함만큼이나 믿음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 책의 글들은 저 추궁에 투항하지않기위해제 나름 아둥거린 작은 흔적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022년 11월최윤필 - P7

도티 프레이저
여성 최초 스쿠버 강사가 헤쳐온 길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 토박이 도티 프레이저 Dottie Frazier는2019년 만 7세에 자신의 애마 ‘가와사키‘ 모터바이크를 팔았다.
차량면허관리국이 그에게 면허증을 갱신해주지 않아서였다. 십대 말부터 바이크를 몰고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 멕시코 국경 너머까지 누비고 다닌 그였다.
나이 때문에 겪는 짜증스러운 일들이 못마땅했던 그는 구십대에 접어든 이후 "나를 평범한 노파로 여긴다면 그게 당신의 첫번째 실수가 될 것"이란 문구를 새긴 티셔츠를 보란 듯 입고 다니곤 했다. 물론 그를 아는 자라면, 롱비치 해양 레포츠의 산 역사인 그에게 그런 실수를 저지를 리 없었다.
프레이저는 걸음마와 함께 수영을 익혀 대여섯 살 무렵부터 스킨다이빙을 시작했고, 고교 시절엔 눈뜨자마자 강아지를 안고한바탕 서핑을 한 뒤에야 등교하는 게 그의 일과였다. 그는 롱비치 바이크 서클의 유일한 여성 정회원이었고, 롱비치 최초 다이버 클럽 ‘롱비치 넵튠스Long Beach Neptunes‘의 1940년 창립 멤버였다. - P17

그가 고집을 부린 덕분에 롱비치 작살낚시대회 여성 부문이 만들어졌고 그는 꽤 오래 혼자 출전해 우승을 독차지했다.
무엇보다 그는 미국에서 최초로 여성 스쿠버다이버 강사 자격증을 획득했고, 여성으로는 처음 다이버 클럽을 열어 운영했으며, 여성용 다이빙 슈트를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해 보급하면서미 해군과도 협업한 개척자였다. 한마디로 그는 다이버들의 전설이었다.
다이빙 전문지 〈스쿠버뉴스scubanews>의 평가처럼, 그의 진짜놀라운 점은 ‘무엇을 해냈느냐가 아니라 언제 해냈느냐‘를 살펴야 비로소 드러난다. 그는 여자 수영복도 없던 1920년대에 수영을 시작했고, 여성 직업이랄 게 뻔하던 1940년 18세 때부터 프리다이빙 강사로 돈을 벌었다. 스쿠버다이빙이 갓 등장하던 무렵당국과 싸우다시피 해서 강사 자격증을 땄고, 여자라서 못 미더워하는 남성 수강생들을 가르쳤다.
파도와 조류, 수압 못지않게 거칠고 억센 젠더 차별의 장애물들과 부딪치며 여성 다이버의 세계를 연 파이터, 도티 프레이가 2022년 2월 8일 별세했다. 향년 만 99세.
- P18

1950년대 초 등장한 스쿠버다이빙은 남성 레포츠였다. 장비며 옷이며 모두 남성 체형에 맞춰 제작됐다. 여성에겐 너무 무겁고 컸다. 고무 소재 슈트는 비싼 탓에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고, 1950년대 말 등장한 네오프렌 소재의 웨트슈트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여성들의 몸에 맞지 않았다. 프레이저보다 2년 뒤인1957년 스쿠버 강사 자격증을 딴 미국 ‘여성 다이버 명예의 전당‘ 회원 바버라 앨런Barbara Allen도 당시 상하의로 나뉜 남성 다이빙복을 입다가 나중에야 맞춤복을 입었다. 1980년대 여성용 웨트슈트가 출시됐지만, 역시 명예의 전당 멤버인 로레인 새들러Lorraine Sadler에 따르면 "바비인형 몸매의 여성이나 입을 수 있는옷"이었다. 신축성이 가미된 네오프렌 원단 슈트가 출시된 것은1980년대 말부터였다. 1970년대 말 등장한 방수 드라이슈트 역시여성용 기성복은 1995년에야 출시됐다. 새들러는 옷이 너무 커서몸에 덕트테이프를 친친 감곤 했다고 말했다. 부력을 조절해 원하는 수심에 머물 수 있게 돕는 다이빙 장비인 부력 조절기도 여성용은 1988년에야 처음 출시됐다. 초창기 여성 다이버들은 장비의 허들까지 넘어야 했다. - P21

그는 배나 자동차 변속기를 직접 교체할 만큼 기계 수리에도 능했다. 그가 바버라 앨런을 태우고 샌타카탈리나섬으로 다이빙투어를 갔다가 보트 엔진이 멎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앨런은 "배를 견인하려고 다가온 해안경비대 순시선에 프레이저가 손사래치더니 ‘이걸 못 고치면 내가 아니지‘라고 하곤 공구 상자를 들고 와 기어코 고치더라"고 회고했다.
프레이저는 스키와 수상스키에도 능했고, 라켓볼과 당구는 선수급이었다. 하지만 그의 직업은 다이빙 강사였고 ‘상업 어부commercial fisher‘였다. 그에게 다이빙은 대다수의 초창기 여성 다이버들과 달리 놀이에 앞서 생업이었다. 스키 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수술을 받은 뒤에도 다이빙복에 지퍼를 달아 입었고, 작살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노리고 달려든 대형 바다표범에게 부딪쳐 갈비뼈 네 대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샌타카탈리나섬에선 달려드는맷돼지를 작살총으로 제압한 적도 있었고, 바하멕시코Baja Mexico에선 거대한 백상아리와 맞닥뜨린 적도 있었다. 그는 호기심을보이던 백상아리를 향해 정면으로 유영해 다가가자 상어꽁무니를 빼더라고 했다.  - P22

말년의 프레이저는 롱비치에 위치한 자신의 집 뜰을 텃밭으로가꾸는 일에 몰두했다. 뜰에는 꽃이 아니라 콩, 토마토, 베리, 비트, 아티초크, 브로콜리 등 식용 채소와 유실수로 가득했다. 바다에서처럼 그는 마당에서도 실용적 가치를 함께 추구했다. 지역소방대장을 지내고 은퇴한 아들 대니 프레이저 Danny Frazier는 "어머니는 자급자족을 원했다……. 심지어 밭에 뿌릴 물도 커다란통에 빗물을 받아썼다"고 말했다. - P23

그는 아버지에 이어 롱비치 운영위원으로 말년까지 일했고, 만93세였던 2016년 샌버나디노산San Bernardino Mt. 집라인 최고령도전 기록을 세웠다. 2008년 넘어져 경미한 뇌진탕을 입고도 "나를 물러서게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호언했다는 그다. 2020년 3월그를 인터뷰한 한 기자에게 만 99세에 별세한 아버지의 수명 기록도 넘어서겠다며 "만 100세 생일파티에 초대할 테니 시간 비워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2019년 미국 다이빙협회 개척자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여성 다이버 명예의 전당에 합류했다.
그와 같은 해 명예의 전당에 든 다이버 겸 작가진 B. 슬리퍼Jeanne B. Sleeper는 "프레이저가 앞서 파도를 부수며 길을 터준 덕에 우리는 그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 산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 P23

콘라트 슈테펜
사라지는 빙하의 최초 목격자


지구온난화는 위기가 아니라 축복(빙하기 지연설)이며 인간 탓이 아니라 자연현상의 일부(자연 주기설)라는 끈질긴 가설들이47 년 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해양학자 윌리스 브로커WallaceBroecker에 의해 사실상 처음, 과학적으로 부정됐다. 브로커는 ‘기후 화석‘ 중 하나인 심해퇴적물을 분석한 1975년 <사이언스> 논문에서 기후변화의 원인과 충격적 추이를 ‘데이터‘로 처음 입증했다. 기후 연구는 그를 기점으로 옳은 방향을 찾았고 표나게다급해졌다. 1970년대 말 무렵엔 한 해 평균 20~30 편의 주목할만한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기후 위기의 실질적 분수령은 1980년대 말 이후의 냉전 종식이라 해야 한다. 미국물리학회 과학사센터장 스펜서 워트Spencer Weart의 말처럼, 냉전기 두 진영은 ‘상대의 핵탄두 숫자에더듬이를 대느라 바빠 50년 뒤 세상에 대비할 여유도 의지도‘ 없었다. 냉전 이후에야 기후 위기 연구 예산이 실질적으로 책정됐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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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1967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이성애자 사내아이로 태어나 서울대 사회학과를 거쳐 1992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다만 서자여서 어른들의 ‘호적 타령‘을 들으며 자랐다. 2006년말 신문사에 사표를 내고 가구 일을 배우며 수도권 변두리 함바집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잠깐 한솥밥을 먹은 적도 있다. 솜씨도 벌이도 변변찮아 2009년 직장에 복귀한 사실을 [가만한 당신] 약력에 누락했다. 국적·지역·성·젠더 · 학력 차별의양지에서 살아온 내게 ‘소수자성‘이란 게 있다면 미미하나마저 경험 덕일지 모른다.
지은 책으로 [가만한 당신』 『함께 가만한 당신』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겹겹의 공간들]이 있다.


나는 윤리야말로 궁극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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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던 선숙은 사람들의 시선이 연달아 자신에게 꽂히고 나서야 마스크를 안 쓴 걸 깨달았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현관문 옆 고리에 걸린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까먹지 말라고 문 옆에걸어두고서도 그냥 집을 나서기를 수차례...... 이놈의 마스크는 써도 써도 적응이 안 됐다.
코로나 시대 역시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던데, 이번에는 이 종족도 어쩔 수 없는지 백신도 영 신통치 않아 보였고 치료제도 지지부진이었다. 변이 바이러스인지 뭔지는 해괴한 이름을 달고 계속 튀어나왔고, 돌파 감염이니 뭐니 해서 맞은 백신을 또 맞으라고 했다. 그것도 이번에는 다른 상표의 백신을 맞아야 할지 모른다는데, 부작용도 있다고 하고 노인들에게 - P7

위험하다고도 하는 둥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바이러스가 요동치는 세상에서 선숙 같은 소시민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집에서 편의점까지 500미터 남짓 거리를 걷는데도 숨 가빴다.
한여름 열기에 마스크로 호흡까지 힘들어지니 살집이 있는 선숙으로선 밖에 나오는 일 자체가 불편했다. 선숙은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산책할 수 있는 예삐와 까미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밤까지 일해야 해서 녀석들 산책이나 시킬 수 있을는지 걱정이 들었다. - P8

아들은 이제 OTT 시대라면서 넷플릭스라는 돈 내고 보는 채널이 있다고 했다. 자기 회사는 그곳에 작품을 걸 거라고 했다. 선숙은 용어부터 이해가 잘 안 됐지만 아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설명해주는 모습이 그저 흡족했다. 자랑하고 싶은 자기 일을 하게 된아들이 대견했고, 그걸 엄마에게 표현해준다는 게 고마웠다. 불과1년 반 동안 일어난 두 사람 사이의 변화였다.
선숙은 이제 아들을 닦달하지 않는다. 안정적인 고시 같은 걸 보라고도 안 한다. 결혼하라는 말도 안 하기로 했다. 아들 세대 앞에놓인 세상 형편이 자신이 젊을 때의 기준과 다르다는 걸, 아들의 설명을 듣고 인정한 뒤에 일어난 변화였다. 자신과 분리되려는 아들의 모습을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서로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거리를 지키게 되었다. - P17

평소 같았으면 선숙은 거침없이 생각을 털어놓았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신중해야 했다.
막무가내. 어찌 보면 자신의 지난 삶에서 선숙이 일을 해결하는방식이었다. 남편과 아들을 대할 때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았다.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있고, 그때는 ‘나‘가 아니라 관찰자의시점으로 자신의 사안을 바라봐야 한다고 배웠다. 누구에게? 영숙언니에게 아들과 대화의 물꼬를 튼 시점에서 얼마 안 지나 다시 성질이 끓어오르던 찰나, 그녀의 주의 깊은 조언으로 아들에게 막무가내 따지는 버릇을 잠재울 수 있었다.
이후 선숙은 영숙 언니에게 고맙다고 밥을 샀고, 당시 유행하던마라탕이란 걸 먹으며 한바탕 수다를 떨었다. 조언 덕에 아들과 관계가 한결 나아졌다는 말에 영숙 언니는 그런데 그게 도대체 자기문제에는 안 먹히는 게 수수께끼라며 풀이 죽었다.  - P27

취준생 3년 차에 접어드는 소진은 그동안 수많은 면접에서 떨어졌다. 서른 번이 넘고 나서는 더 이상 낙방 횟수를 세는 걸 포기했다. 학점도 스펙도 나쁘지 않았다. 영어 성적은 최상급이었고 프리토킹도 가능했다. 하지만 구직 전선에서는 점점 후퇴해 밀려나고있었다.
1년 차 때는 면접에서 많이 떨어졌다. 2년 차에는 서류 전형에서도 많이 떨어졌다. 3년 차인 지금은 어디서부터 얼마나 떨어질지가늠도 안 됐다. 딱지가 앉은 거 같아도 늘 쓰라렸다. 그렇게 떨어지고 떨어지다 보면 서울에서도 떨어져 나가겠지. 멀리 더 멀리 떨어져 나가 목포의 고향 동네로 돌아가겠지.
어쩌면 소진은 그날이 올 때를 기다리며 무모한 도전을 이어가는 듯했다. 그렇게 완전연소 하고 나면 귀향해도 후회가 없을 거란명분, 그 명분이 소진을 서울에서 버티게 하는 이상한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었다. - P48

근배 씨가 다시 자갈치를 아작 씹었다. 소진은 연갈색 음료를 마저 비웠다. 그런 다음 꾸벅 인사하고 몸을 돌려 출입문으로 향했다.
"가물치 씨!"
근배 씨의 하이 톤 외침에 소진은 문을 잡고서야 했다.
"이제 소진 씨 내가 가물치라고 부를 겁니다. 힘센 가물치 씨. 그러니까 호구로 살지 말고 포식자로 살라고요. 알았죠?"
소진은 대답 대신 유리문을 있는 힘껏 열어젖혔다. 사우나 같은열대야의 밤으로 걸어 나갔다. 열기와 객기를 연료로 삼고 싶었다.
그러자 누구 하나 함부로 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오기가 끓어올랐다. 진짜 가물치가 된 듯했고 자정의 어둑한 골목길도, 남영역 굴다리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아빠가 일하다 돌아가신 낯선 이 도시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 P78

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가게를 마친 뒤 편의점 야외테이블에 앉아 봄바람에 묻은 벚꽃 내음을 맡으며 늦게까지 소맥을 기울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날이 더워지면서 확진자가 늘어나더니, 가게도 편의점도 밤 열시면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놈의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 조치로 인해 가뜩이나 외로운 최 사장은 더욱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죽을 맛이다.
지난해 봄, 코로나가 터졌을 때만 해도 연말쯤 되면 어떻게든 잡히겠지 했다. 미국이고 영국이고 선진국들이 백신도 개발하고 치료제도 개발할 텐데, 그리고 그걸로 돈을 벌려 할 테니 머지않아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2020년이 끝날 때까지 역병은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심해졌고, 영업 제한과 거리두기는 단계를 바꿔가며 점점 정교해졌다. - P83

손님들은 어떤가? 10년 전 단골 어르신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좀처럼 못 오시고, 주 고객이던 인근 대학 교수와 교직원들은 새로생긴 맛집들로 발걸음을 옮긴 지 오래다. 무엇보다 이 상권의 메인소비자인 대학생들에게 소고기는 비싼 음식인지라 외면 받고 있었다.
아무튼 가게라는 건 돈만 버는 게 아니라 삶의 터전이자 직원과 손님들 모두 행복한 곳이 되어야 하는데, 이제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진 이곳은 망해가는 가게의 특징들만 독버섯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고기 장사로 30년간 IMF, 사스, 구제역, 광우병 소고기 파동, 메르스 등 수많은 고비를 넘긴 최 사장이었지만, 이 전 지구적 재난앞에서는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 P88

세상은 불공평하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아빠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빠는 비 오는 날만 아니면 늘 현장에 나가지만 버는 돈은 그리 많지 않다. 하청 받는 오야지 밑에서 일하는 잡부여서 그렇다고하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빠는 늘 그 사람들 욕을 한다. 치사하고 더럽다고. 그리고 뒤이어 꼭 이 말이 이어진다.
민규, 너 인마 공부 열심히 해. 공부 못하면 나처럼 여름에 더운 데서 일하고 겨울에 추운 데서 일하는 거야.
세상은 진짜 불공평하다. 환경미화원 엄마를 봐도 역시 알 수 있다. 엄마는 용역회사 소속으로 파견 가서 일하는데, 정작 일하는 엄마와 동료 미화원보다 용역 사장이랑 직원들이 돈을 훨씬 더 많이번다고 한다.  - P125

"맙소사. 어떻게 돈이 안 중요해요!"
"진짜 안 중요해. 그러니까 너한테 오늘 독서토론 잘했다고 간식도막사줄 수 있다고. 자, 뭐 먹을래?"
돈가스 샌드위치는 역시 맛있었다.
민규가 돈가스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아저씨는 손님을 받고, 토론을 하느라 밀린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냉장고에 음료를 새로 채우고 진열대에 과자와 컵라면도 채웠다. 그러고 나서 안 팔린닭튀김은 먹어서 처리해야 한다며 전자레인지에 데우기 시작했는데, 벌써부터 군침이 났다. 아저씨가 닭튀김도 먹고 가라고 했지만,
눈치가 있는 민규는 냉큼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조용했다. 열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고 아빠는 잠든 듯했다. 민규는 내일도 비가 안 오길 바랐다. 그래야 아빠가 새벽에 일을 나가고 엄마랑 싸울 일 없이 조용할 테니. - P145

인수인계 첫날부터 근배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카운터 안은 마치 비행기 조종실처럼 복잡해 보였다. 정면의 포스기 화면은계기반 같았고, 우측에는 점포 운영 내역이 잔뜩 뜬 모니터가 있었고 그 아래엔 점포 경영 시스템 태블릿과 검수기, CCTV 본체, 인터넷 모뎀, 와이파이 기기, 오디오 기기, 프린터가 촘촘히 자리하고있었다.
왼쪽으로는 커피머신과 튀김기가 언제든지 커피를 뽑고 닭을 튀길 기세였고, 카운터 아래엔 수많은 잡동사니들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 그리고 카운터 주위를 모자이크 처리하듯 수많은 공지사항이 다닥다닥 붙어 포위하고 있었다. - P171

유통기한 체크
튀김 상미시간 등록
커피 찌꺼기 비우기
이번 주 점격 통합지표 확인
돌발상황 대처 매뉴얼 숙지
FF 배송매니저 연락처
CK 택배기사 연락처
용모/복장 점검
접객 10계명 연습
주류/담배 판매 시 신분증 꼭 확인
마스크 착용
밤 열시 이후 매장 내외 취식 금지 - P171

결제 전 통신사 할인/적립 확인
온장고/냉장고 보충 점검
상품진열/보충시 페이스 업
카드 분실 주의
봉지 유상판매
아니 편해야 할 편의점이 왜 이리 복잡하고 불편한 거지? 점원입장이니 그럴 만도 하지만 생각보다 생소한 단어도 많고 조작법을 습득해야 하는 기계도 많았다. 시재 점검과 입고된 물류 검수는틀리기 일쑤였고포스기 사용법은 유튜브를 틀어놓고 수차례 연습해야 했다. - P172

"만화점이라…… 재밌는데요. 만화책도 있을 것 같고. 하하."
곽 선생은 이미 근배를 파악했는지 반응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백화점이 영어로 디파트먼트 스토입니다. 백화점은 물건이 많지만 파트가 나뉘어 있어 해당 점원이 자기 파트만 담당하면 되죠. 하지만 편의점은 혼자서 수많은 물건을 팔아야 합니다. 그러니 일이 쉽지 않겠죠? 나도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세상에는 사소한 일 같아도 필요하지 않은 일이 없구나 느끼며 많이 배웠습니다."
근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 어르신 내가 말 많이 하니까 지지 않으려고 자기도 말씀을 많이 하시네.‘ 그럼에도 새겨들을만한 말이었다. 근배는 편의점 일을 만만히 여겼던 자신의 태도를 반성했다. - P173

엄마를 보낸 후 갖은 일을 전전하며 살게 되자 사는 건 그저 사는것일 뿐 특별한 의미 따위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걱정은 독이고비교는 암이었으며, 과거는 끝났고 미래는 없고 오직 현재만 있을뿐이었다. 지금 죽는다 해도 후회는 없었으며 남은 인생은 언제든반납할 용의가 있었다.
그즈음 코로나가 터졌다. 갑갑한 걸 못 참는 엄마가 이 답답한 재앙 전에 하늘나라로 간 게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엄마, 살아 계셨으면 매일 마스크를 쓰고 손 소독제를 로션처럼 바르고 어딜 가나 검문 받듯 방문 기록을 남겨야 하는 꼴을 겪어야 했어요. 하늘나라는안 그렇죠? 꽤 지낼 만하시죠? - P194

2021 년 새해가 밝았다. 왠지 태양도 마스크를 쓰고 일출할 것 같았다. 소의 해이고 백신이 소에서 기원한 단어라며 방송에서는 희망찬 전망을 떠들고 있었으나 근배는 별다른 희망을 품지 않았다.
코로나 시대가 시작되던 즈음 알바를 시작해 수많은 일을 전전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마스크가 숨통을 막은 것처럼 힘들어했다. 일자리는 희박하거나 불안했고, 더럽거나 위험했다. 부유한 누군가는 마스크도 좋은 걸 쓰고 거리두기로 인해 자기만의 시공간에서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겠지만, 근배와 같은 도시 빈민에게 코로나 시대는 전시체제와 다름없었다. 생존에대해 고민해야 했고 감염되고 나면 부상병처럼 후송되어 재기가불가능한 꼴이 되었다. - P203

물음표갈고리들이 엉킨 낚싯바늘이 되어 민식의 뇌를 팽팽하게당기고 있었다. 덕분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풀어줄 그 누구도없었다. 누나도 매형도 이마를 손으로 받친 채 물만 들이켜는 그를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은 민식에게 고민해봐야 투항하는 수밖에없다고 침묵의 시위를 하는 것 같았다.
어찌어찌 일어나 식당을 나왔다. 누나가 생각해본 뒤 연락하라고 했다. 매형이 보양식이라도 사 먹고 기운 내라며 봉투를 건넸다.
둘이 주차장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민식은다가온 택시를 향해 겨우 손을 들어 보였다.
집에 와 봉투를 열어보니 2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보양식만 사먹기엔 큰 액수다. 돈은 늘 무언가를 말한다. 의도가 없는 지출은없다. 남의 돈 빼먹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사업을 한 민식은 잘 알고있었다. 200만 원 먹고 자기들 편에 서라는 건데, 그건 민식의 몸값을 후려치고 뺨도 후려치는 꼴이었다.  - P224

여름이 끝났다. 난류와 한류가 섞이듯 가을밤의 따스하면서 선선한 기운이 밤의 출근길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었다. 자기 가게에알바하러 가는 기분은 늘 묘했다. 오너 알바라는 금보 형이 만든 요상한 직책이 민식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딸랑.
밤 열시다. 근무 조끼를 입고, 시재 점검을 하고, 저녁 알바 학생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뒤 검수를 끝낸 센터 물류들을 정리한다. 열한 시가 되면 신선식품이 들어오고, 자신이 요청해 들인 신상품을확인하면 일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느껴져 뿌듯하다. 그리고 그 상품이 잘 팔리면 성취감이 들고 일의 재미를 만끽한다.
새벽이 되고 편의점에 고요가 찾아오면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다.  - P245

진열대에 물건을 정돈하듯 그는엉망이 된 기억 속 오와 열을 맞췄다. 그러던 중 엄마가 빌라를 떠나 양산 이모네로 간 게 코로나 때문이 아니란 걸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엄마는 기저질환이 있었다. 엄마는 코로나를 두려워했다. 엄마는 그래서 이모네로 떠났다.
그건 엄마의 핑계였고민식의 자기합리화였다.
엄마는 민식과 함께 지내는 게 힘들어 떠난 것이었다. 그는 이제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두 해 전 겨울에 다짜고짜 엄마의빌라로 왔고, 맥주 사업을 한다고 설치고 다니고, 편의점을 팔자고 엄마를 들볶은 것을. 엄마 집에서 삼시 세끼 꼬박 받아먹으며 사업자금 지원 안 한다고 투덜댄 것을 기억해냈다. - P246

고통스러웠다. 죄스러웠다. 어떻게든 되돌려야 했다.
근무를 마친 어느 날 아침, 민식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에게 ‘오너 알바‘로 한 달째 야간근무 중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이미 소문 다 났다며, 네가 잘하고 있어 기쁘다고 했다. 민식은 백신2차까지 맞으셨냐고 물었다. 엄마는 2차는 좀 아팠는데 그래도 이제 괜찮다며, 그런 것도 물어보고 기특하다고 또 칭찬을 했다.
민식은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말했다.
"엄마. 이제 돌아와."
엄마는 말이 없었다.
"내가 데리러 갈게. 내일이라도 당장. 내가 이제 낮에 자고 밤에 - P246

일하러 가니, 엄마랑 집에서 마주칠 일 별로 없어. 엄마, 나 이제 편의점 도시락도 잘 먹어. 밥 차려줄 것도 없고 가게 팔겠다고 설치지도 않을게. 그러니까 이제 돌아와 내가 데리러 갈게. 응?"
여전히 전화기 너머에는 침묵이 그득했다. 민식은 울먹임이 저너머로 들리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그때 엄마의 차분한 목소리가들려왔다.
"데리러 갈게 아니고, 모시러 갈게라고 해야지."
"으응. 모시러 갈게. 엄마 모시러 갈게요!"
이번에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다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렴." - P247

아들과의 전화를 끊고 나서 잠깐 휘청했다. 다행히 벽을 짚은 뒤천천히 걸음을 옮겨 베란다로 향했다. 베란다에 놓인 갈색 캠핑 의자에 앉으니 녹음으로 가득한 정원이 한눈에 담겨왔다. 지난해 여름에도 여기서 이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던 기억이 났다. 아들의전화를 기다리며. 하지만 아들은 정원 끝 감나무가 가을의 결실을뽐낼 때도, 낙엽이 쌓인 정원에 하얀 눈이 내려앉을 때도 연락이 없었다. 안 풀리는 삶에 지쳐 자포자기한 걸까? 코로나 후유증으로여전히 몸이 불편한 걸까? 마음 나눌 사람이 곁에 없어 답답한 걸까? 아니면 잔소리 많은 엄마가 옆에 없어서 편한 걸까?
수많은 질문과 그 질문에 담을 마음의 소리가 있었지만 나는 침묵했다. 그것이 아들을 위해서인지 나 자신을 위해서인지 모르겠 - P248

다. 다만 우리 둘 모두 고난의 계절을 보내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1년 하고도 4분의 1의 시간 동안 나는 이곳에서 혼자 아닌 혼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비대면의 시절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즉에필요한 날들이었으나 챙기지 못해 결핍된, 어떤 성분이 담긴 시간에 온몸을 담가야 했다.
네 해 전 남편의 장례를 치른 뒤 나는 하루하루를 평소와 같이 살기 위해 온 힘을 써야 했다. 평범한 삶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랄까,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안간힘이랄까? 편의점을 차린 것도 어떻게보면 분주히 보내야 하는 날들이 필요해서였다. 24시간 내내 불켜진 그곳이 방범 초소인 양 내 삶을 호위하길 원했다. ALWAYS편의점이 남편의 빈자리를 그 이름처럼 ‘언제나‘ 채워주길 희망했다. - P249

팬데믹이 세상을 멈추게 하고 나서야 나는 맹목적으로 지속했던그 시간들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그즈음 편의점의 밤을 지키며 자신을 찾은 한 남자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나는 독고라는 사내의 용기에 감화되었다. 그는 내게 도움을 받았다며 감사해했지만 나 역시 그를 통해 정체된 삶에서 벗어날 기운을 얻었다. 어쨌거나 삶은계속되고 있었고, 살아야 한다면 진짜 삶을 살아야 했다. 무의식적으로 내쉬는 호흡이 아니라 힘 있게 내뿜는 숨소리를 들으며 살고싶었다.
패잔병의 몰골로 아들이 내 스무 평 공간을 찾아온 건 두 해 전이었다. 그럴 때 필요한 게 엄마이기에 따뜻하게 아들을 받아주었다. - P249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새삼스러웠다.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은둔 생활 삶의 큰 쉼표. 이곳이 있기에 가능했고, 이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언니와 개와 함께 산책을 다니던 오솔길 조카와 함께 올랐던 살구나무 많던 뒷동산, 여름에 수박을 담가놓았다 꺼내 먹던 건넛마을 계곡. 모두 잊지 못할 것 같다. 자연과 자연을 닮은 사람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마나 마음과몸에 치유를 가져오는지를, 도시에서만 살던 나는 간과했다. 철이면 철마다 산과 바다로 등산과 낚시를 다니던 남편의 행동이 얄미워서였을까, 좀처럼 나는 도시를 벗어나기 싫어했다. 하지만 이제는 자연에 스며들 수 있게 되었고, 슬며시 기댈 수 있게 되었다. - P261

그날 밤 나는 묘한 만족감에 젖어 잠을 청했다. 행복했냐고? 모르겠다. 행복은 바라지도 않는다. 삶의 순간순간에 만족하는 찰나가 잦길 바랄 뿐이다. 같이 있는 동안 언니는 내가 예전보다 느슨해져서 좋다고 했다. 사실 언니와도 같이 지낸 게 수십 년 만이라 걱정이었는데, 그동안 둘 모두 늙고 닳아 여유가 생겼는지 서로를 용인할 수 있었다. 너처럼 의지가 강한 사람은 늙어서도 고집쟁이가된다는데, 생각보다 유들유들해져 다행이라고 한 말은 좀 거슬렸지만 고집은 자기도 못잖았으면서!
나는 상경해 받을 과제에 대해 생각했다. 언니와 조카의 삶에서배운 대로 아들과 효율적인 공생관계를 맺을 것.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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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


<뉴욕 타임스>에 프란스 드 발이 쓴 어떤 글에 보노보 원숭이를 간지럽히면 완전히 인간과 같은 반응, 낄낄거리고 몸을 뒤로 빼지만 간지러움을 더 원하기도 하는 등등의 반응이 나온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놀랍고도 절묘한 글이죠. 많은 과학자들이 다른 동물들과 우리의 관계를 객관화하고 싶어 하기에,
우리는 그 어린 유인원이 딱 어린 인간처럼 행동한다는 말을할 수가 없어요. 아니다. 그 유인원은 유인원의 방식으로 반응할 뿐이다, 우린 그에 대해 결코 인간의 표현을 쓰면 안되고, 함부로 의인화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드 발이지적하다시피, 유대감에 대한 공포도 있어요. 우린 유인원이나 생쥐에게 동질감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된다는 거죠. 하지만 동질감이 없다면 시가 어디 있겠어요?










때늦게』의 서문 중에서


시는 나무나 강이 무엇인지를 말하려고 시도할 수있는 인간 언어다. 즉, 인간의 능력으로 그 대상에
‘대해서‘ 말하는 동시에 그 대상을 위해서 말한다는뜻이다. 시는 개별 인간의 관계를 어떤 대상(돌멩이든 강이든 나무든)과 관련지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도있고, 아니면 그저 대상을 최대한 진실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과학은 외부에서 정확하게 묘사하고, 시는 내부에서 정확하게 묘사한다. 과학은 밖으로 풀어내어 해설하고, 시는 안으로 풀어내어 함축한다. 둘 다 묘사 대상을 기린다. 우리의 무지나 무책임을 알려주지 못하는 ‘정보‘만 끝없이 쌓지 않으려면 우리에게는 과학의 언어와 시의 언어 둘 다 필요하다.

네이먼


작가님이 인용하신 메리 자코버스의 말 같네요. 자코버스는 "시의 절제된 언어는 아마도 우리가 그런 것들, 움직이지 않는 물체의 고요한 목소리나, 나무의 지각 없는 서 있음 같은것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일 것"이며 어쩌면이 절제된 언어가, 우리가 유대감이나 사색으로 나아가도록돕는 기술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고 말하죠. - P65

르귄


우리가 언어를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기술은 사실 도구와 연관되어 있죠. 언어는 우리가 발산하는 무엇이고, 특정시기에 배우지 않으면 안 돼요. 언어는 기이해요. - P65

르 귄


<뉴욕 타임스>에 프란스 드 발이 쓴 어떤 글에 보노보 원숭이를 간지럽히면 완전히 인간과 같은 반응, 낄낄거리고 몸을 뒤로 빼지만 간지러움을 더 원하기도 하는 등등의 반응이 나온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놀랍고도 절묘한 글이죠. 많은 과학자들이 다른 동물들과 우리의 관계를 객관화하고 싶어 하기에,
우리는 그 어린 유인원이 딱 어린 인간처럼 행동한다는 말을할 수가 없어요. 아니다. 그 유인원은 유인원의 방식으로 반응할 뿐이다, 우린 그에 대해 결코 인간의 표현을 쓰면 안되고, 함부로 의인화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드 발이지적하다시피, 유대감에 대한 공포도 있어요. 우린 유인원이나 생쥐에게 동질감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된다는 거죠. 하지만 동질감이 없다면 시가 어디 있겠어요? - P67

네이먼


「맥코이 크리크에서의 사색Contemplation at McCoy Creek」이라는시에서는 이런 우주의 주관적 해석과 바깥으로 손 뻗기라는문제를 아주 잘 다루셨어요.


르 귄


이건 철학 시 같은 것이니, 그 시에 대해 한마디 할게요. 전도서관이 없는 하니 카운티 스틴스산에 가서 사색contemplation이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단어에는 신전temple이 들어가 있고, 맨 앞에 붙은 con은 ‘함께‘라는뜻이죠. 그래서 거기서부터 시작을 했고ㅡ이게 그 시의 중반을 설명해줄 텐데 그때 묵던 집에 책이 한 권 있었거든요.
일종의 백과사전이었는데, 사색이라는 말에 아주 훌륭한 에 - P67

세이가 붙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 시는 배움의 경험을 담은셈이죠.



네어먼


시 앞부분에 "단어 안의 의미를 찾다가"라는 구절을 보니 미국 시협회와의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던데요. 협회에서 운영하는 잡지에 첫사랑First Loves」이라는 칼럼이 있었는데, 시인들에게 시를 처음 만난 경험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는 코너였죠. 작가님은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의 이야기시 모음집 고대 로마의 노래 Lays of Ancient Rome」에 대해, 또 스윈번의 시들에 대해 이야기하셨어요. 이런 시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시로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지만, 또한 이야기는 때로 단어 자체의 의미를 넘어서며, 개별 단어의 의미가 아니라단어들이 빚어내는 박자와 음악에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죠. 여기에 대해 조금 더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 P71

르 귄


더 깊은 의미란 시가 음악에 가까워지는 지점이에요. 그 의미를 분석적으로 이해하도록 만들 수는 없어요. 의미는 거기에분명히 있고, 읽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요. 그건 리듬과 박자이고 그걸 전달하는 소리가 빚는 음악이죠. 이건 너무나 신비로운 일이고 그래야 마땅해요. - P71

맥코이 크리크에서의 사색



단어 안의 의미를 찾다가, 나는 추측했다
그곳 그 성스러운 장소 안에
신전이 있음을 온전히 목격하고,
따라서 목격된 바의 제단이 된 신전.

개울 옆 그늘 속에서 나는 사색한다
이번 초여름 높은 곳에서 흘러온 큰물이
어떻게 물길을 바꿨는지에 대해.
개울 속 커다란 바위 네개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버드나무들은 무성하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범람한 물속에 뿌리를 내리기도 하고 뿌리 뽑히기도 했다.
계곡 위 환한 빛 속에서는
까마귀 한 마리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한다
그림자 날개가 까마귀처럼 고요히
벼랑 끝 바위를 가로지른다. 사색은
나에게 불연속이라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책 안을 보았을 때 나는 발견했다

시간이란 관측되고 구별된 신전-시간 자체와 공간이라는 것을一
네 개로 나뉜 하늘, 벽에 둘러싸인 땅에
성스러운 장소를 만들기 위한 신전.

연속성에 합류하기 위해, 마음은
물을 따라가고, 새들을 좇고,
움직이지 않은 바위를, 절묘한 비행을 관찰한다.
느리게, 침묵 속에서, 말없이,
장소와 시간의 제단이 올라간다.
자아는 사라져, 찬미를 위한 제물이 되고,
찬미 자체도 적막 속에 빠져든다.

네이먼


지난번에 대화를 나눌 때 작가님은 버지니아 울프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알기로 울프는 시를 별로쓰지 않았어요. 작가님이 어렸을 때 시에 대해서나 소리의 의미에 대해서 배운 바가, 산문을 쓸 때 버지니아 울프가 소리와 맺은 관계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설명하셨던 바와 비슷한 현상이라고 생각하세요?



르 귄


산문의 리듬 속 소리에 대해 말할 때는 시와 많이 달라요. 어떤 면에서는 훨씬 거칠거든요. 산문 작품의 리듬은 아주 긴박자죠. 물론 문장에도 문장의 리듬이 있어요. 울프는 그 점을 강렬하게 의식한 작가였어요. 어떻게 리듬이 자신에게 책을 선사하는지에 대해 울프가 쓴 글도 있는데, 휴,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사실상 표현할 어휘가 없는 경험적인 뭔가예요. - P72

적절한 단어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것도 음악을 말하는 것과 비슷해요. 음악에 대해 아무리 떠들어봐야 그냥 연주를 해봐야 하는 거죠. 어떤 사람은 듣고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지못할 수도 있고요.


네이먼


성인이 되어서 사랑하게 된 시인으로는 누가 있나요? 소중하게 여기는 시인은요? - P73

르 귄


릴케를 아주 윗자리에 둬야겠네요. 도움이 필요했던 어느 여름에 매킨타이어가 번역한 『두이노의 비가』번역본을 읽었어요. 그때 제 상태가 아주 나빴는데, 그 시집에 실린 비가 몇편이 저를 어둠에서 끌어낸 것 같다고 느껴요. 적어도 버텨내게 해준 건 확실하죠. 전 독일어를 몰라요. 그러니까 릴케와괴테는 번역으로 마주한 다음에 왔다 갔다 하면서 짚어봐야하죠. 보통은 저만의 형편없는 번역을 해보려고 하는데, 그러면 사전을 들고 독일어 단어를 파고들 수 있어요. 시를 읽는다는 건 아주 힘든 일이지만, 단어를 하나씩 짚어가며 읽는다면, 독일어 명사를 하나도 몰라서 모조리 찾아봐야 하고 동사는 수수께끼 같은 데다 제자리에 놓여 있지도 않으면, (웃음)겨우 다 읽었을 때는 그 시를 제대로 알게 돼요. 자기만의 번역이 만들어지는 거죠. 그래서 제가 아는 언어는 물론이고 잘모르는 언어도 번역하기를 좋아하는 거예요. 노자의 책이 그런 경우였죠. - P73

Muro


Muro fácil y extraordinario,
muro sin peso y sin color:
un poco de aire en el aire,

Pasan los pájaros de un sesgo,
pasa el columpio de la luz,
pasa el filo de los inviernos
como el resuello del verano;
pasan las hojas en las ráfagas
y las sombras incorporadas.

¡ Pero no pasan los alientos,
pero el brazo no va a los brazos
y el pecho al pecho nunca alcanza!




간단하고, 비범한 벽,
무게도 없고, 색채도 없는,
허공에 뜬 공기 같은 벽.

새들은 그 벽을 비스듬히 통과한다;
빛의 흔들거림도,
겨울의 칼날도,
지나가는 여름의 한숨도.
폭풍에 불려 온 나뭇잎들은 벽을 건너
그림자를 그릴 수 있다.

하지만 숨결은 통과하지 못하고,
팔은 뻗어오는 팔에 닿지 못하고,
숨결과 숨결은 영영 만나지 못한다.

르 귄


독재자들은 언제나 시인들을 두려워하잖아요. 시인은 정치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여기는 많은 미국인에게는 이상해 보이겠지만, 남아메리카나 다른 독재 치하의 나라에서는 사실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요. - P83

논픽션에 대하여


지난 10년간 그는 중요해진 유명 인사이자 사상가인 ‘이 세상의‘ 어슐러였다. 같은 기간 동안 어슐러는 구글이 저작권을 무시하고 책을 디지털화할 수 있게 합의한 작가조합에 항의하며 조합에서 공개적으로 탈퇴했다. 또한 많은 이가 전미도서재단 역사상 가장 맹렬한 연설로 꼽을발언도 했는데, 미국 문학에 대한 두드러진 공헌을 인정하는 상을 받으면서 그 기회에 아마존 같은 곳이 책과 저자들을 점점 더 상업화하고상품화하는 현실을 맹공격했다. 어슐러는 소위 포스트 팩추얼 시대무엇이 사실인지 중요하지 않게 된 시대에 사실이란 무슨 의미인가에서부터,  - P85

정부로부터 ‘해방‘하겠다는 이유로 민병대가 오리건주 남동부의 야생동물보호구역을 점령하는 시절에 과연 ‘공유지‘란 무슨 의미인가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많은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전국적 담론에서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어슐러는 작가로서 초기에 겪은 어려움을 나누고, 어느 웹사이트 포럼에서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했으며,
블로그에 고양이 파드의 ‘회고록‘을 연재하면서 그의 삶을 다른 식으로도 보게 해줬다.
그러니 우리의 세 번째 대화로 논픽션 쓰기를 이야기하고자 라디오 방 - P85

송국이 아니라 어슐러의 집에서 만난 것도 어울리는 일이었다. 우연히도 어슐러의 삶과 작가 경력에 대한 다큐멘터리 촬영을 돕고 있었던KBOO의 오후 뉴스 코디네이터 에린이 우리 대화를 녹음해주겠다고 자원했다. 나는 예린과 함께 그 집으로 갔고, 우리는 야외 녹음으로서는최상의 품질이 나오는 안락하고 책이 가득한 2층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세상이 계속 끼어들기는 했다. 우리는 트럭이 가까이 지나갈 때도 멈추고, 옆 침실 안의 제일 좋아하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이게다 무슨 소란인가 확인하러 나온 파드에게 인사하느라고도 멈췄다.
내가 그랬듯 독자들도 어슐러가 소설과 시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고,
선언과 주장의 세계에서는 좀 더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어둠의 왼손」에서 어슐러는 "어떤 질문이 대답할 수 없는 것인지 배우고,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  - P86

이것이야말로 압박과 어둠의 시절에 꼭 필요한 기술이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세이, 문학비평, 강연에서-과학과 환경에 대해서든, 구글과 아마존에 대해서든, 페미니즘과 문학의 정전에 대해서든 자신의 관점을 전달하는 이영역에서 어슐러는 목소리가 없는 이들을 변호하고, 모든 예술가, 아니모든 사람의 내면에 있는 답 없는 존재를 대변해 말하는 것 같다.
논픽션에 대한 이 대화를 끝내면서 나는 소설, 시, 논픽션이라는 세 장르 모두에 이렇게 깊은 역사를 지닌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말했다. 지금까지의 여정이 얼마나 특별했는지도. 사실은 달리 누구와 이런 일을 또 할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대화를 책으로 만들어야겠는데요!" 어슐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하여 이 책이 나왔다. 어슐러 K. 르 귄의 사색이 우리의 현실이 되고, 세상에 나온 오브제가 되어 우리 손안에 펼쳐졌다. - P86

르 귄


우선 제가 읽을 수 있는 글이요. 나이가 많아서이기도 할 거예요. 제게는 서사가 필요한데, 사실 언제나 서사가 필요했어요. 추상적인 생각은 잘 읽지 못해요. 그러니까 자서전과 전기, 지질학 같은 과학을 읽는 경향이 있죠. 역사 속의 이야기를 전하거나, 역사 자체를 말하는 논픽션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글은 잘 읽지 못해요. 특히 철학에는 애를 먹어요. 대학 신입생 때 철학 수업을 들었는데요. 그때는 필수로 들어야했거든요. 저도 철학이 좋기는 한데 도무지 머리에 남지가 않더라고요. 도저히 머리에 담아둘 수가 없어요. 반드시 이야기가 있어야 해요. 우화라면 저도 기억하거든요. - P90

네이먼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서문에서도 지금 하신 말씀을 넌지시 언급하셨죠. 소설 쓰기와 시 쓰기는 자연스럽고, 쓰고 싶기도 하며, 쓰면서 충족감을 느끼고 또 그 글의정직성과 품질을 판단할 수 있다고 느끼지만 논픽션은 그럴수가 없다고요. 논픽션 쓰기는 업무처럼 느껴지는 데다, 소설과 달리 글이 다루는 주제에 대해 훨씬 잘 아는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거라고요. 그런 심한 불안을 느낀다면 어떻게 든든한 토대를 찾고, 또 에세이 한 편이 제대로 완성되었는지 그 여부를 아시나요? - P90

르귄


시작하기가 힘들어요. 끝도 없이 첫 페이지를 구겨서 버리다가 겨우 시동을 걸 수 있게 되죠. 언제 끝났는지 아느냐는 문제는 가끔 정말 어려운데요. 몇 년 전에 여자 어부의 딸TheFisherwoman‘s Daughter」이라는 글을 썼는데, 그 글을 들고 강연에 나갈 때마다 청중들이 피드백을 어찌나 많이 주는지, 매번 글을 다시 써야 했어요. 결국 전 그냥 "그만! 이젠 다시 쓰기를 그만해야 해!"라고 말하고 그대로 출간했어요. 하지만그건 어떤 글을 그 자체로 완성한 게 아니라, 그저 어느 선에서 멈춰야 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전 의견을 담아내는 글이라면 어느 경우에나 글 끝에 꼭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고 느껴요. - P91

네이먼


그 책에서는 특히 예술 작품 속에서 산다는 것」이라는 에세이를 가장 좋아하는 글로 꼽으시는데요. 드물게 누구의 의뢰없이 쓰신 글이기도 하죠. 순전히 작가님이 쓰고 싶어서 쓰신글이에요. 이 글을 쓰는 과정에 대해서 무척 흥미로운 말씀을하셨는데요. "나는 소설을 쓸 때처럼 생각의 직접적인 수단이나 형식으로서 글을 이용할 수 있을 때라야, 산문을 제대로이용하고 있다고 느낀다. 내가 알거나 믿는 바를 전하는 수단으로서도 아니고, 메시지 전달의 수단으로서가 아니고, 쓰기 전까지는 몰랐던 뭔가를 초래하는 탐구이자 발견의 여행이 될 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에세이를 구성하실 때의탐구 과정에 대해 조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독자로서 그글의 즐거움 하나는 작가님과 같이 탐구하는 느낌, 작가님과같이 발견하는 느낌이었다는 걸 알기에 하는 말입니다. - P91

르 귄


아마 그 글은 저에게 자서전에 가장 가까운 글일 거예요. 제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제가 열일곱 살에 떠나기는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다시 찾던 집으로 돌아가죠. 그러니 전 한참을 돌이켜 생각했어요. 그 글은 늙은 여자가 어린시절을 탐구하는 글이기도 해요. 내가 살았던 곳, 단순하게는집이면서도 어린 나에게는 우주였던 그곳이 어땠더라? 전 그곳이 어땠는지, 그곳의 의미와 내게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
그곳이 어떻게 저를 빚어냈는지 탐구해보려고 했어요. 그 집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는 걸 아니까요. 그리고 또 제가 너무나 아끼고 사랑했던 집에 대해 쓰는 것 자체가 즐겁기도 했어요. 그 집에 다시 가서 그 집을 생각하는 즐거움이요. - P92

[예술 작품 속에서 산다는 것] 중에서


우리의 메이벡 주택을 어떤 소설에 비유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설에는 어둠과 광휘가 담겨있을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정직하고 대담하고 독창적인 구조에서, 영혼과 정신의 상냥함과 관대함에서 솟아날 것이며 또한 환상적이고 기이한 요소들도 갖추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소설이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나의 생각 중 많은 부분이 결국 그 집에 살았던 경험으로 배운 게 아닌가 싶어진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평생 단어로 그 집을 다시 지으려 애써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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