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가 녹는다‘는 흔한 말은 틀린 건 아니지만 한가한 표현이었다. 빙하는 녹을 뿐 아니라 붕괴되고 있었다. 슈테펜이 2002년〈사이언스> 논문에서 밝힌 빙상의 ‘동적 반응Dynamic Response‘, 즉빙상 표면의 용해-증발이나 해양 경계면 붕괴는 드러난 현상일뿐, 결정적인 건 대륙빙하 바닥까지 스민 물이 윤활작용을 하면서 대륙빙하 자체가 거대한 썰매처럼 바다로 미끄러지고 있다는사실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연구는 학계를 경악시켰고, 기후 위기의 모든 시나리오를 다시 쓰게 했다. - P28
먼저 용어를 알자. 극지 얼음은 크게 바닷물이 얼어서 형성된해빙과, 수만 년간 쌓인 눈이 다져진 민물 얼음, 즉 빙하로 나뉜다. 지구는 민물의 약 99퍼센트를 극지와 고산의 빙하 형태로 담고 있고, 지구의 모든 강과 호수 등의 물을 다 합친 게 나머지 1퍼센트다. 빙하는 다시 빙상과 빙붕, 빙산으로 나뉜다. 빙상은 면적이 5만제곱킬로미터(남한 면적의 절반 이상인 거대 얼음 평원으로 대부분 남극과 그린란드에 펼쳐져 있다. 빙붕은 빙상이 바다로 이어져물에 잠긴 경계 권역이다. 빙붕은 바다에 떠서 녹기도 하지만 빙상으로부터 계속 얼음을 공급받기 때문에 크기와 두께(300~900미터)가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해수 온도 상승 등의 변수가 빙상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이를테면 빙상의 방벽이다. 빙상과 빙붕의 파편 중 해수면 위로 5미터 이상 솟아 바다에 떠다니는 것들이 빙산이고, 5미터 미만은 그냥 얼음 덩어리다. - P28
상식 하나도 환기하자. 대양의 모든 빙산이 녹더라도 해수면은그대로다. 빙산의 90퍼센트는 이미 물에 잠겨 있고, 10퍼센트의 ‘일각‘이 녹더라도 얼음이 물로 변하면서 부피가 10퍼센트 줄기때문이다. 물론 수온 상승은 그 자체로 해수면을 높인다. 물 분자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부피가 팽창하기 때문(열팽창)이다. 하지만 해수면 상승의 주범은 대륙빙하, 즉 빙상의 붕괴다. 빙상 면적이 줄어들면 ‘알베도albedo, 물체가 빛을 받았을 때 반사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단위가 낮아져, 햇빛을 덜 반사하고 열을 더 흡수하기 때문에 온난화와 빙상 붕괴는 더 가속화한다. 거기에 더해 슈테펜이 밝힌 ‘동적 반응‘은 빨라진 노화를 걱정하는 이에게 사고로 인한 급사의 가능성을 더한 카산드라적 충격이었다. - P29
과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그린란드 빙상이 모두 녹으면 지구 해수면은 약 6미터 오르고, 남극까지 녹으면 60미터 상승한다. 그린란드 빙상은 2012년에만 약 4천억 톤이 사라져 10년 전보다 소실 속도가 네 배가량 빨라졌다. 이제 적지 않은 과학자들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섰다고 예측하고 있다. 빙상은 이름과 달리 고르게 평평하지 않다. 오히려 파도처럼 거칠고 불규칙하다. 깊은 균열과 골짜기(크레바스)가 있고, 강과 여울이 있고, ‘물랑moulin‘이라 불리는 수직의 동굴들도 즐비하다. 캘리포니아대 빙하학자 로런스 스미스 Lawrence Smith는 2015년한 인터뷰에서 빙상 구조를 ‘스위스 치즈‘에 비유하며, 물랑과 크레바스를 통해 바닥까지 흘러든 물이 ‘칼로 버터를 자르듯‘ 빙상을 결딴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현상은 오직 현장에서만 포착할 수 있는 거였다. - P29
그는 전 미국 부통령 앨 고어와 현 미국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 등 유력 정치인과 기자들을스위스캠프에 초대해 기후 위기의 실태를 직접 보게 했다. 현장에 가려면 군수송기로 래브라도해를 건너 설상 착륙용 경비행기나 헬기로 갈아탄 뒤, 다시 설상차로 캠프까지 이동해야 한다. 식량과 장비도 물론 싣고 가야 한다. 헬기의 경우 1회 화물 적재한도는 360킬로그램, 시간당 비용은 약 5천 달러다(2007년 기준). 경비를 아끼기 위해 다 싼 화물을 풀어 359킬로그램에 맞추는연구원들의 수고도, 그는 예산을 줄 정치인들이 보게 했을 것이다. 2007년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그는 "매년 사라지는 그린란드빙상의 물을 워싱턴 DC에 부으면 당신들은 수심 약 1마일(1.6킬로미터) 물 밑에 잠길 것"이라고 말했다. 방대한 민물이 극지 바다로 유입되면 조류와 해양생태계가 격동하고, 줄어든 빙상이 제트기류를 흔들어 지구의 기후를 요동치게 한다. 극지는 기후 위기의 미래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자, 슈테펜의 표현에 따르면 거대한 ‘기상 기계 Weather Machine‘다. 그 재생 불능의 기계가 무서운 속도로 망가지고 있다고도 증언했다. 기후 연구는 돈이 많이 드는장기 프로젝트다. 그는 빼어난 학자이자 교육자였을 뿐 아니라 예산을 따내는 데도 탁월한 행정가였다. - P31
"우리는 ‘그가 인간이 아닐지 모른다‘고, 혈관에 피 대신 에스프레소가 흐를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그는 담배를만 24시간 동안 딱 한 번 ‘끊은 적이 있었다. 한 동료와 배핀만 인근 랭커스터 해협Lancaster Sound의 부빙에서 학위 논문을 위해 현장연구를 하던 1978년, 혼자 얼음 경사면을 횡단하다 눈사태로 설상차가 전복돼 다리가 부러진 때였다. 그는 관측 장비 표식용 알루미늄 막대로 부목을 대고 설상차로 눈보라를 막으며 만 하루를 버틴 끝에, 품에 ‘유서‘를 지닌 채 구조됐다. 그는 한 기자에게 "담배까지 피우면 혈관이 확장돼 얼어 죽을 판이었다"고 말했다. 당시썼던 유서를 늘 간직하고 살았던 그는 1984년 결혼해 아들 둘을낳았고, 2017년 재혼했다. - P32
저 세월을 거쳐오는 동안 그는, 그래도 언젠가는 조금은 다른전망과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으리란 기대와 낙담을 거듭했을것이다. 2007년 IPCC 보고서는 "지금 추세라면 2100년 해수면은약 18~58센티미터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근년 NASA 보고서는 ‘최소 65센티미터 상승해 3천 2백만~8천 6백만 명의 기후난민이 발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2007년 무렵부터 "(해수면이) 1미터 이상 상승할 수도 있다"고, "그래도 지금이 낫다"고말했다. "우선 사람들이 과학자들의 말을 듣고, 정치인들이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고, "빙상의 과학자가 나 혼자가 아니기때문"이었다. 그를 멘토 삼아 우주공학에서 기후빙하학으로 전공을 바꾼, 현 지구과학협동연구소 소장 윌리드 압달라티waleedAbdalati는 슈테펜을 따라 스위스캠프에 처음 갔을 때 "헬기에서내리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가슴을 활짝 열고 지그시 그린란드의 - P32
공기를 음미하던 그를 회상하며 "그에겐 그게 노동이 아니라 열정이고 기쁨이었다"고, "그곳이 그에겐 집이었다"고 말했다. - P33
컬럼비아대학교 영문학과 35세 대학원생 캐서린 "케이트" 머리밀렛Katherine "Kate" Murray Millett 이 논문 「성 정치학Sexual Politics」으로박사학위를 받은 해가 1969년, 저 소용돌이의 한복판이었다. 1970년 7월 출간된 동명의 책은 시사주간지 <타임>이 8월 31일자 여성운동 특집호 표지로 밀렛의 초상화를 실을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뉴욕타임스>는 그를 "페미니스트들의 제사장"이라 소개했다. 서평의 압권은 <타임>이 인용한 밀렛의 논문지도교수 조지 스테이드George Stade의 말이었다. "호두까기 집게에불알을 물린 기분으로 이 책을 읽게 될 것이다." 페미니즘 이론의 고전이자 2세대 페미니즘의 정전正典, 페미니스트 문학비평의 첫 장을 연 책으로 꼽히는 『성 정치학』의 저자케이트 밀렛이 2017년 9월 6일 별세했다. 향년 82세. - P36
밀렛은 문학뿐 아니라 에덴동산의 이브에서부터 프로이트의 ‘남근선망‘, 당대 기능주의 철학과 인류학, 심리학, 정치·경제학, 법·의학, 교육학 등 곳곳에 내장된젠더정치의 장치와 권력 메커니즘을 해부하고 폭로했다. 그 거시 권력의 뿌리를 그는 가정에서 찾았다. "가장은 가부장 권력 안의 가부장 권력으로서, 거대사회의 거울이자 연결고리다." 책 3부에서 그는 당대의 문학권력이던 D. H. 로런스, 헨리 밀러, 노먼 메일러의 대표작 비평을 통해문학이 묘사하는 이성애 관계 안에서 여성이 어떻게 수동적·순종적 존재로 대상화되며 ‘내면적으로 식민화‘하는지에 집중했다. - P37
그는 『성 정치학』 2000년판 서문에 "나는 가부장제를 지위와 기질, 성 역할에 근거한 지배적인 정치제도로, 사회적으로 조건 지어진 믿음의 체계로 간주하려 했다. 이 체계는 스스로를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한다"라고 썼다. 가장 미시적인 침실 풍경에서부터 현대사회 젠더정치의 구조로까지 거침없이 나아간 그의 저작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것"이라는 페미니즘 2세대 슬로건의 이론적·철학적 뼈대가 됐다. 『성 정치학』 출간 2주 만에 1만 부가 팔리는 등 연말까지 8만부가 팔렸고,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과 동갑인 밀렛은 가장 뜨거운 이론가 겸 리더로 급부상했다. - P38
페미니즘 운동은 1970년대 중반 이후, 급진 동력을 잃어가던 사회 분위기와 더불어 ‘문화 페미니즘‘으로 선회했다. 그들은 가부장권력에 적극적으로 맞서기보다 여성적 ‘반문화 공간‘ 개척에 주력했다. 그 공간은 "일종의 능동적 저항의 문화로 상상됐지만, 에이드리언 리치의 지적처럼, 가부장 권력을 회피하기 위한 ‘그것 자체가 목적인 이주의 장소가 됐다. (…) 사회 변혁보다는 개인 변혁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2세대 페미니즘의 이념은 그렇게 변색됐다. 밀렛은 서서히 잊혔고, 1990년대 들면서 『정치학』을 비롯한 그의 대다수 "과격하고 급진적인 책들도 절판됐다. 미국 시인이자 활동가였던 로빈 모건Robin Morgan과 점심 식사를 하며 페미니즘 권장 도서 목록에조차 자신들의 책이 포함되지 않는 현실을탄식했다는 게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밀렛에게 그건 명예나 대의의 문제 이전에 생계의 문제였다. - P43
모아둔 돈을 다 쓰고 난 뒤 닥쳐올 가난이, 감당해야 할 굴욕이, 어쩌면 노숙자의 삶이 겁이 난다."그 무렵의 그는 언젠가 한인터뷰에서 베티 프리던과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을 언급하며 "그들은 모두 뛰어난 정치인들이지만, 나는 아니다. ‘여성해방의케이트 밀렛‘도 아니다"라며 냉소하던 때의 그와 달랐다. 2000년 『성 정치학』 등 그의 책들이 복간된 것은 그의 저 칼럼덕이 아니라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상호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의 새로운 문제의식이 부각된 결과일 것이다.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는 다양하고 복합적이므로 개별적인 것들을 교차시키며 파악해야 한다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은 밀렛의 성 정치학과 레즈비언 페미니즘, 흑인 페미니즘 등 2세대 하위 진영을 활발히 재조명했다. 걸출한 페미니스트들의 밀렛에 대한 헌사도 대부분 그 무렵 쏟아졌다. - P44
"1963년 베티 프리던이 ‘여성의 신비‘라고 지적한 문제에 ‘성 정치학‘이란 이름을 부여하고 ‘가부장 권력‘이라는 원인을 규명한 이가 밀렛이었다." -캐럴 J. 애덤스Carol J. Adams
밀렛은 2012년 성소수자 문학단체인 람다 문학재단 LambdaLiterary Foundation의 ‘개척자상‘과 오랜 친구인 오노 요코가 제정한 ‘용기 있는 예술인 상‘을 탔고, 이듬해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수락 연설에서 밀렛은 활동가 시절의 행복과 참여의 기쁨, 시대의 전위에서 그 시대의 일부가 되는 삶의 흥분을 회고한 뒤, 젠더정치의 불의에 끊임없이 맞서자고 촉구했다. "살면서 일상의 불만을 표출하듯, 거리에서, 연인에게, 또 친구에게 항의의 목소리를 내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얼굴이 여성의 얼굴이 돼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P45
마이클 큐잭 경계를 가르며 헤엄친 두 팔
지적장애인 국제 체육 행사인 ‘스페셜올림픽‘의 창설에 기여한다운증후군 수영선수 마이클 큐잭Michael Cusack이 2020년 12월17일 별세했다. 향년 64세. 그가 한 일은 물만 보면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들어 신나게 활개친 게 거의 전부였지만, 그 소박한 열정이 세상 한편을 달라지게 했다. 소수의 사람들을 열정으로 사로잡아 뭐든 해야겠다는 의지를 품게 했고 실천하게 했다. 정반대로 말할 수도 있겠다. 한 어린 장애인의 그리 대단할 것없는 열정에 특별히 주목한 이들이 있었다고. 몸으로 물을 미는동안, 그의 장애는 장애가 아니었다. 극복해야 할 제약도, 도움받아야 할 결핍도 아니었다. 장애는 타고나거나 후천적으로 생기지만, 어떤 제약과 불편은 세상이 만들고 사회가 강요한다는 것, 폄하와 차별이 그렇게 시작된다는 것을 그를 보며 깨달아갔다. - P47
장애·비장애, 무능-유능의 이분법
큐잭은 1956년 5월 6일, 미국 시카고 라잉인 병원에서 경찰관아버지 존과 전업주부 어머니 에스더의 둘째로, 다운증후군을지닌 채 태어났다. 의사는 ‘아이가 정상적 삶을 누릴 수 없으니, 돌보느라 고생하지 말고 일찌감치 시설로 보내라‘고 조언했다. 다운증후군은 선천성 염색체 질환이다. 부모에게서 각 23개씩46개의 염색체를 받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수태전후알수없는 이유로 21번 염색체에 여분의 염색체가 끼어들어 47개의 염색체를 지니면 그리 된다. 신생아 800~1000명 당 한 명꼴로 태어나며, 지적장애 등 육체적·정신적인 차이를 발현하고, 여러 잠재적 합병증에도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아직 예방도 완치도 불가능하다. - P48
장애-비장애를 비정상-정상, 무능-유능의 이분법으로 나누고, 장애인을 우생학적 단종수술로 도태시키거나 시설에 강제수용해 격리 · 배제하던 때가 있었다. 미국연방대법원이 장애인 시설 수용자에 대한 불임·단종수술을 수정헌법 14조(평등 조항)위반이 아니라고 판결한 게 1927년이었고(Buck v. Bell), 큐잭이 태어난 1950년대에도 장애인은 시민적 자질인 자립·자결 능력이결여된 존재여서 시설에 수용하는 게 그들과 공동체 모두에 이롭다는 게 상식이었다." 의사의 조언도 아마 선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는 그를 집 - P48
으로 데려와 보살폈다. 일리노이주는 1960년대 말에야 지적장애인 공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부모는 큐잭과 유사한 장애를지닌 아이의 부모들을 수소문해 돈을 모아 창고를 임대하고, 은퇴 교사를 고용해 함께 아이들을 가르쳤다. 어린 큐잭은 세발자전거 타기나 공놀이 등 몸 쓰는 놀이에 유난히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가족은 그의 애칭 ‘미키Micky‘ 뒤에 ‘마우Mouse‘ 대신 ‘무스Moose, 크고 힘센 사슴종인 말코손바닥사슴‘란 별명을 붙였다. ‘미키 무스‘는 무스처럼 건강하게 성장했다. 1965년 시카고 파크디스트릭트 당국이 장애인 레크리에이션프로그램을 시범 운영한다는 공고를 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만 20세 체육교사 앤 버크Anne Burke가 거기 자원했고, 첫 학생으로 큐잭을 만났다. 물만 보면 환장을 해서 제어하기조차 힘들던 큐잭은 점차 놀이와 학습을 구분하게 됐고, 고된 훈련에도 성실히 임했다. 버크는 연습이 끝난 뒤 큐잭 가족과 함께 식사도 하면서 친구처럼 지내게 됐다. 2년 뒤 버크의 제자는 약 100명으로 늘어났다. - P49
1972년 LA 대회 땐 경기 도중 수영복 끈이 풀리자 아예 트렁크를 벗고 경기를 마친 뒤 곧장 풀에서 나와 자기 기록을 확인한뒤 다시 물에 뛰어들어 수영복을 챙겨 입었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아이처럼 경기에 몰두했고, 기량도 뛰어나 한 코치는 "내 수영 실력도 꽤 좋은 편이지만 그는 물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 나를 앞지르곤 했다"고 말했다. 더 인상적인 건 이긴 뒤에도 승리감에 도취돼 으스대는 법 없이, 무심히 제 할 일을 하곤 했다는 점이었다고 코치는 덧붙였다. 큐잭은 관중들의 주목과 갈채를 즐겼지만, "그건 자의식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랑했고, 사랑받고자 했기 때문이었다"고, "시합에 졌을 때도 늘 경쟁자에게 먼저다가가 축하했고, 단 한 번도 결코 질투하지 않았다"고 그의 가족들은 회고했다. - P51
젠더 · 인종차별의 의·과학적 근거가 된 저런 주장을 믿는 사람은 이제 드물지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지금도 비장애인의의식과 무의식 속에, 사회제도와 구조 속에 온존하고 있다. 장애라는 렌즈로 미국사를 조명한 킴 닐슨은 자신의 책 『장애의 역사』에서 장애는 고정불변의 몰역사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지고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고 썼다. 큐잭의 수영장처럼 물리적 · 구체적 장애를 포용할 수 있는 기회와 제도, 시설과 공간을 마련할 책임은 공동체에게,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정치인과 행정가에게 있다. 헬렌 켈러처럼 장애인으로서 큰 성취를이룬 위인을 칭송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다. 하지만 책임 있는정치인이라면, 헬렌 켈러가 차별적으로 누린 교육 등 여러 기회에 주목해야 한다. - P53
보비 레이먼드 공존 가능한 마을의 설계자
‘분리 segregation‘는 차별의 양식이자 하나의 이념이다. 법·제도가 쇠사슬과 채찍을 금지해도 차별로서의 분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을 모색한다. 아파트단지 등 주거지역 전체에 담장을 두르고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는 이른바 ‘빗장 공동체‘가 단적인 예다. 경제적 신분과 지위는 주거와 교육, 문화 등현대인의 삶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뻔한 얘기지만, 가난한 지역일수록 공공 인프라가 부실하고, 교육의 질과 직업 선택의 기회, 구직 네트워크 같은 사회적 자본이 취약하기 마련이다. 분리는 차별을 재생산하는 무한 폐쇄회로이자 하나의 메커니즘이다 - P55
분리와 차별의 채찍은 살갗이 아니라 영혼을 할퀸다. 모욕감과분노를 자극하고, 막막한 절망감으로 까라지게 한다. 분리는 공동체 안에 철조망 없는 ‘게토ghetto‘를 구축한다. 그 게토의 담장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내면화한다. 분리, 격리, 배제는 점점 이상하지 않은 일, 바람직하진 않아도 어쩌지는 못할 일이 된다. - P55
인종과 피부색, 출신 지역에 따라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는, 대도시 주변이면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나는 현상을 ‘재분리resegregation‘라 부른다. 거기엔 인종에 따른 주거 분리가 개개인의부의 격차나 문화 동질성에 이끌린 탓만이 아니라, 은밀하고도집요한 분리와 차별의 결과라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1968년민권법 제8조 ‘공정주택 Fair Housing‘ 조항은 인종을 근거로 주거지선택권을 제한하는 모든 제도와 관행을 불법화했지만, 지배집단(백인)의 의식과 텃세까지 통제하진 못했다. 주택금융기관과 부동산 소개 및 관리업체들도 법 이전에 주민들의 바람을 존중해야 했다. 그들은 법을 우회하는 다양한 경로를 개척했다. - P56
미국 연방 · 주정부가 의료 보건 시스템과 함께 가장 난감해하는 사회문제 중 하나도 재분리, 즉 주거 분리 차별이다. 2010년 ‘오바마 케어‘라 불리는 의료 개혁으로 임기를 시작한 오바마 행정부가 2015년 집권 2기의 주력 정책으로 ‘공정주택 원칙 및 빈민지역 주거 환경 개선‘을 상정한 것도 그래서였다. 주무장관이던 연방도시주택개발부의 훌리안 카스트로는 그 정책의 지향이 복지가 아닌 인권 옹호와 반차별에 있다며 "우편번호가 누군가의 꿈과 포부를 저지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2018년1월 출범한 트럼프 행정부가 맨 먼저 전면 중단, 재검토를 선언한것도 이 정책이었다. - P56
자치 의회 겸 행정기관인 마을 이사회는 연방 민권법보다 앞서 공정주택 조례를 제정, 금융기관과 중개업소 등이 재분리를부추기는 행위를 금지했고, 주민소통위원회를 설립해 건물주협회 등 이익단체 대표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활동의 주역은시민단체인 ‘오크파크 주택센터OPHC, 현재는 OPRHC‘였다. 그들은 주택 매매·임대 시장의 최전선에서 직접 소비자들을 상대하며 조화로운 점묘도를 그렸다. 보비 레이먼드Bobbie Raymond 센터를 설립하고 만 26년간사무총장을 지낸, ‘오크파크 전략‘의 총괄 리더였다. 그는 1971년자신의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오크파크의 도전: 인종 변화에 직면한 교외 한 공동체The challenge to Oak Park: A Suburban Community FacesRacial Change」의 구상을 주민들과 함께 실험했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일어나는 일에 끌려가지 않고 우리의 뜻에 따라 공동체의미래를 함께 만들어가고자 했던 보비 레이먼드가 2019년 5월7일 심장질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0세. - P57
레이먼드는 1996년 센터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났고, 지역 주간지는 16쪽짜리 레이먼드 특집을 기획했다. 그의 후임으로 12년간사무총장을 지낸 롭 브라이메이어는 "오크파크 역사상 가장 큰영향을 미친 인물이 아마 보비일 것"이라고, "오크파크는 그의 헌신 덕에 훨씬 나은 공동체로 변모했다"고 말했다. 공정주택 문제의 권위자 하버드대 게리 오필드 교수는 "보비는 미국 공정주택운동의 가장 열정적인 주역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레이먼드는 "나는 나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 적이있다. "나는 아이였던 때가 없었다. 네댓 살 무렵의 나와 지금의 내 - P62
가 똑같다. 나는 항상 매사에 진지했고, 모든 것에 관심이 많았다." 센터 일을 하며 그는 제 뜻을 굽히거나 주도적 역할을 동료에게 넘기는 데 인색해 가부장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자신이쏟은 관심과 열정만큼 세상의 관심이 자신에게 쏟아지기를 과도하게 바라는 유형의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함께 고생한 이들이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일을 비판적으로 말하는 이들도 없잖아 있었다. 당연하게도, 오크파크의 성취는 그가 혼자 이룬 게아니었다. 원년 마을 이사회 멤버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레이먼드와 함께 센터 창립 및 운영의 3인방으로 꼽히는 셔를린 라이드Sherlynn Reid와 버네트 슐츠vernette Schultz 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대학에서 연극·연기를 전공한 라이드와 슐츠는 레이먼드의 친구이자동지로서 저 모든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갔다. - P63
1968년 오크파크로이주한 흑인 여성 라이드는 흑인 이주자들과의 소통에 크게 기여했고, 훗날 주민소통센터 책임자가 돼 건물주협회 등 집단과의 상충하는 이해를 도맡아 조정했다. 슐츠역시 원년활동가로, 공정주택 운동의 전미 협의체인 ‘오크파크교류협의회OPEC‘ 창립을 주도하고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고교 시절 펜화를 출품해 ‘전미학업상‘의 회화 부문에서 수상한 적이 있는 레이먼드는 은퇴 후 수채화 작가로 활동했고, 두 편의 장편동화를 썼으며, 지역 신문에 가드닝 관련 에세이를 정기적으로 기고했다. 그는 두 차례 결혼과 이혼을 했고, 첫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며, 수학자인 세 번째 남편과 해로했다. - P63
벤 바레스 성차별에 맞선 트랜스젠더 과학자
뇌와 척수 등 신경조직은 크게 나눠, 뉴런이라 불리는 신경세포와 뉴런을 감싸고 있는 신경교세포neuroglia cell, 신경아교세포라고도 불림로 구성된다. 과학이 최근 100년간 주목해온 건 당연히 뉴런이었다. 뉴런은 전기화학적 신호를 주고받으며 감각, 운동, 사고 등 복잡한 인지·생명 활동을 담당한다. 뉴런보다 열 배가량 세포 수가많은 신경교세포는, 아교라는 이름처럼, 뉴런을 붙잡아주는 지지대 혹은 산소나 영양을 공급하는 보조역 정도로 홀대당했다. - P65
그런데, 뉴런과 신경교세포(이하 교세포)가 주종 관계가 아닌 대등한 협력관계라는 사실이 10여년전 밝혀졌다. 교세포에도 여러종류가 있으며, 저마다 기능이 달라 뉴런 확장과 정보 처리 속도및 효율 증강, 뇌 면역을 포함한 신경활동 전반에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슨병, 다발성경화증, 루게릭병 등 다양한 난치·불치 신경 퇴행성질병들과 ‘만성‘이나 ‘신경성‘이라고 얼버무려야 했던 ‘원인 모를통증들도 교세포 이상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그렇게 알게 됐다. - P65
바레스는 미국의 4~18세 청소년 2만 명의 수학 성적을 조사한결과 유의미한 젠더 차이가 없었다는 데이터, 여성과 소수자가 연구비를 타기 위해서는 남자보다 2.5배의 연구 실적이 필요하더라는 조사 자료, 2005년 미국 국립보건원의 혁신과학자상 PioneerAward 심사위원 64명 중 60명이 남성이었고 수상자 9명 전원이 남성이었다는 사실을 활용했다. 서머스를 편든 하버드대 정치학자하비 맨스필드Harvey Mansfield가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감정적(덜 이성적)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서는, 분노에 의한 폭력 범죄를 저지르는 건 여성보다 남성이 25배나 많다는 데이터를 들어 반박했다. - P67
하버드 의대 신경학과 교수 베스 스티븐스는 2004~2008년 바레스연구소에서 성상세포와 미세아교세포의 면역기능 연구를주도한 연구자였다. 그가 하버드대에 자리를 얻어 스탠퍼드대를떠나게 되자 바레스는 스티븐스에게 그 연구를 하버드로 가져가서 계속하라고 권하며 "너보다 그걸 더 잘 해낼 사람은 없을 것" 이라고 했다고 한다. 자기 연구소의 아이템을 후배 연구자에게떼어주는 예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앞서 바레스는 자신이 찾아낸 교세포를 종류별로 배양하는 독자적이고 효율적인 기법을 조건 없이 공유하기도 했다. 그의 후임으로 스탠퍼드대 신경생물학과장을 맡은 앤드루 휴버먼은 저 모든 그의 미덕을 ‘과학의 열정‘이란 말로 압축했다. "그의 모든 열정은 오롯이 과학을 향해 있었다.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고, 과학 안에서 더불어 성장하게 하는 것을 그는 소명이라 여겼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바레스연구소의 연구진은 다양성의 모범적인 표본 같았고, 여성이 남성보다 많을 때도 많았다고 한다. 스티븐스는 "그렇게 즐겁고 창조적으로 다이내믹한 - P72
연구소는 없을 것"이라고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말했다. 바레스는 2016년 4월 췌장암 진단을 받고 20개월의 투병 끝에2017년 12월 27일 별세했다. 향년 63세. 스탠퍼드대는 부고에서투병 말기의 바레스가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든 반드시 해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며 매달린 것이 제자 및 연구원들의 추천서를 쓰는 일이었다고 전했다. 그렇게 분화한 연구자들이 하버드대와 듀크대, 뉴욕대를 비롯한 각지로 퍼져서 각자 교세포와 씨름하고 있다. 2017년 1월 스탠퍼드대가 개최한 ‘바레스 헌정 심포지엄‘은 드물게 성대했다고 한다. 그 행사는 물론 학술대회였지만, 연구자로서, 교육자로서, 반차별 · 다양성 옹호활동가로서의 스승이자 동지였던 바레스의 정신과 업적을 기린 자리이기도 했다. 스탠퍼드대 총장 마크 테시에 라빈은 기조 발언에서 30년 동안 쌓아온바레스와의 우정과 그의 헌신, 용기를 회고하며 "우리가 그처럼낡은 생각에 도전하는 용기와, 차이를 포용하며 서로에게 배우려는 자세를 유지하는 한 우리의 잠재력은 무한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벤이 가르쳐준) 다양성의 힘이다"라고 말했다. - P73
이문자 피해 여성의 곁을 지킨 ‘여성의전화‘의 대모
한국 여성운동이 종속적 운동에서 벗어나 여성주의(페미니즘)의 독자적 운동으로 갈래를 형성한 시기를 여성사 학계는1980년대 어름으로 본다. 도식화하면 여성운동은 개화기 신여성의 계몽-교육 운동으로 시작해 일제시대 민족주의 계급운동과구국-독립운동에 동참했고, 해방 직후에는 이념 정치단체의 선전 활동에 머물거나 직능단체의 권익 운동에 치우친 경향이 강했다. 1960~70년대 개발독재 시대 들어 여러 단체가 가족법 개정과 여성·노동·인권 등 이슈들을 부각했지만 그 역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큰 흐름 안에 있었다. - P77
이러한 오랜 활동 경험과 반성 위에서, 1970년대 서구 페미니즘 이론을 학습한 활동가들은 1979년 독재 권력의 붕괴와1980년 ‘서울의 봄‘을 거치며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젠더 차별 및억압의 근원적 문제로 눈을 돌렸다. 신군부가 올림픽 유치 등을통해 학살의 흔적을 지우느라 바쁘던 무렵인 1983년, ‘서울의 봄‘의 좌절과 위축감을 떨쳐낸 활동가들이 6월 11일 ‘여성의전화‘를, - P77
6월 18일 ‘여성평우회‘를 각각 창립했다.
"(우리의 목적은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아내들과 성폭력 (피해)여성들을 돕고 가정에서 폭력을 추방하는 동시에 사회 전체의 심리적 건강에 기여" 하며 "여성들에게 비인간적 삶을 강요하는 모든 제도나 관습, 인습을 없애고 남녀의 평등한 인격 관계를 수립해 정의롭고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를 이루는 데 있다." -여성의전화 창립취지문
"인간은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 한국 여성은 가부장적 제도의 희생자요, 산업사회의 소외된 계층이고 국토 분단의 비극적 피해자이다. (.…)한국 여성이여, 우리 모두 단결하여 여성의 인간화 운동에 앞장서 나가자." -여성평우회 발기취지문 - P78
‘25세 여성조기정년제 철폐‘ 등 제도-정치 투쟁과 활동가 재생산을 위한 이념 교육에 치중하던 여성평우회는, 1980년대 중반운동 진영의 이념-노선 갈등과 분열 속에 1987년 8월 해산했다. 활동가 일부는 노동운동과 제도권, 1987년 출범한 ‘여성민우회‘ 등 여성단체로 무대를 옮겼다. 이념보다는 현실, 즉 가정폭력과 성폭력이라는 선명하고 구체적인 문제와 대치했던 여성의전화(이하 여전)는, 역설적으로 너무나만연한 범죄적 사례들 덕에, 공감과 분노라 해도 좋을 ‘현장의 힘‘ - P78
덕에 조직의 역량과 규모를 키우며 운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심화해왔다. 서울 중구의 한 건물 옥탑방에서 달랑 전화기 한 대로 문을 연 여전은 2021년 현재 전국 25개 지부에 32개 상담소와 10개의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를 둔 우람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가정폭력과 성폭력이라는 말 자체를 대부분 생경해하던 때였다. 작가 박완서가 여전 사무소 개소식 축사에서 언급한 "여자 팔자" 란 말이 가정폭력을 아우르는 잔혹한 일상어였고, 남의 가정사는모른 척하는 게 미덕으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창립 첫해 여전이 서울 지역 기혼 여성 708명을 상대로 벌인 한국 최초 가정폭력 실태조사의 공식 용어도 가정폭력이 아니라 ‘아내 구타‘였다. 조사 결과 구타당한 경험이 있는 이는 응답자의 42.2퍼센트였다. 그해 여전에는 6개월 동안 4천여 통의 전화가 쇄도했다. - P79
이문자는 광의의 젠더폭력 피해자였다가 활동가로 변신해 여전의 역사를 몸으로 지탱해온 수많은 이들 중 한 명이다. 그는1988년 자원봉사자로 여전과 인연을 맺은 이래 상담부장과 부설쉼터 관장, 여성인권상담소장 등을 역임했고, 오늘날 여전 안팎에서 맹렬히 활동 중인 수많은 전문 상담가를 양성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성폭력 관련법 제정 등 여러 정책적 진전을 위한 청문회와 투쟁을 이끌었다. 저 세월 동안 그는 피해 여성들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고, 정년퇴직 후에도 김포와 성남 등의지역에서 여전 활동을 거들었다. 선후배 및 동료 활동가들이 정당의 공천을 받아 정치인이 되고, 관변 여성단체나 공직의 장을맡아 떠나는 동안에도 그는, 적어도 이력으로 드러난 바에 따르 - P79
면, 울타리 너머를 기웃대지 않았고 오히려 더 안으로, 피해 여성의 곁으로 다가가고자 했다. 1990년대 말 정년에 가까운 나이로이화여대 대학원에 진학하며 여성학이나 사회학이 아니라 사회복지학을, 다시 말해 이론보다는 실천에 가까운 전공을 선택한까닭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외적 활동이 드물었던 탓에 그는 진영 바깥에는 상대적으로덜 알려졌지만, 그랬기 때문에 여전의 활동가들은 그를 조직의 ‘대모‘나 ‘맏언니‘ 혹은 ‘끈끈이 같은 존재‘라 부르며 존경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리 길지 않은 한국 여성·시민운동 역사에서정부기구NGO의 참된 가치와 현장 활동가의 위태로운 존엄을 지켜냈다. 이문자가 별세했다. 향년 78세. - P80
2005년 책 왜 여성주의 상담인가』에 수록된 자전에세이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세상을 보다」에 이문자는 아이들과의 생이별을 자초했다는 자책감과 이혼 직후의 고립감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이제는 다 잃은 상태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친정어머니도 세상을 떠난 뒤였고, 아버지는 젊은 여성과 재혼해 깨를 볶고 있었으며, 하소연이라도 할 만한 자매들은 모두 외국에나가 살던 때였다. 1988년 ‘변월수 사건‘이 터졌다. 강간하려는 남자의 혀를 깨물어 자른 혐의(상해)로 피의자가 된 32세 여성 변월수에게 1심 법원은 징역 6개월과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며, 판결문에 "앞길이구만리 같은 청년의 혀를 잘라 …" 라고 썼다. 이문자가 여전과 - P81
인연을 맺은 게 그해였다. 그는 한 후배의 소개로 1988년 3월 여전 상담원 교육을 받고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그해 6월 어느 바닷가에서 가진 수련회에서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어렵사리 털어놓자 모두가 이혼의 용기를칭찬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 자리의 감동을 그는 평생 마음에새겼고, "(그것이) 여성주의에서 말하는 임파워먼트empowerment였다"고 훗날 썼다. 그는 만 2년간 자원봉사자로 일한 뒤 정식 상담자가 됐다. 상근자 월급이 40만 원쯤이던 시절이었다. - P82
‘양육비해결총연합회‘를 설립해 이끌어온 조카 이영 씨도 고모 이문자를 "살가운 분이라고 말하긴 힘든, 어려운 분"이라고 기억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고모는 결코 남에게 치대지 않는 독립적인 성향의 여성이셨다"고, "일상에서도 부당하거나 잘못된 일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분이 아니어서, 피해자를대할 때도 상담과 위로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깊이 고뇌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고모여서, 이영 씨는 새 단체를 꾸려 활동을 시작하면서도 ‘의존하고 치대는 인상을 줄까 봐 고모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자문을 구하지 못했다고한다. - P86
이영 씨가 2000년대 초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친구를 고모에게소개한 일이 있었다. 듣는 사람조차 답답해할 만큼 ‘바보같이 너무 착하기만 한 친구여서, 혹시 고모가 호통이라도 치지 않을까조마조마했는데, 웬걸 그렇게 자상할 수 없더라고, 조곤조곤 위로하고 격려하며 조언을 건네는 모습이 "진짜 내 고모 맞나 싶더라"고 했다. 이문자는 내담자에게서 젊은 날 수련회 바닷가에 앉아 있던 자신을 보고, 그를 보듬어주며 ‘임파워먼트‘를 알게 한동료들의 자리에 자신을 놓아보곤 했을지 모른다. 그것이 이문자가 생각하는 ‘전문가‘였다. 2013년 여전 후배들이 마련한 ‘우리가 사랑하는 여자 이문자고희 파티‘에서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발을 디뎠고 지금까지 한눈팔지 않았다"고, "여전은 내 삶"이라고 말했다. 은퇴 후 그는 서울 마포의 작은 빌라에서 혼자 지내며 지역 독서 모임과 후배들과의 산책 모임 등으로 활동적인 말년을 보냈다. - P86
연금과 ‘노인 일자리‘월급 28만원까지 합쳐월 100만원 남짓 되는 돈이 그의 수입의 전부였다고 한다. 생전의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스스로를 "가난한 독거노인"이라 말하곤 했다지만, 그건 농담도 엄살도 아니었다. 그의 사정을 아는 후배들이 언젠가 1박 2일여행을 함께 한 뒤 그의 몫의 경비를 대신 부담하려 하자, 버럭 역정을 내며 "이러면 함께 안 놀겠다"고 하더라고, 한 후배는 전했다.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 사태로 모임도 활동도 줄었고 ‘노인일자리‘도 끊겼다. 그는 좀 더 고독해졌고, 가난해졌다. 가까운 후배들은 개별적으로 연락해서 만나는 것과 별개로, ‘문자리 산책방 with 이문자‘ 등 이름을 붙인 정기 모임을 만들어그의 안부를 챙겼다. 그는 8월 2일 모임에 참여하지 못했다. - P87
샤론 머톨라 길 잃은 동물들의 수호자
벨리즈Belize는 ‘카리브해의 보석‘이라 불리는 중앙아메리카 작은 나라다. 국토 면적(2만2970제곱킬로미터)은 경기도의 약 두배. 그중 60퍼센트가 야생의 우림이고, 25개의 자연보존지구가있다. 카리브해와 면한 386킬로미터 해안선 연안은 호주 그레이트배리어리프 다음으로 긴 산호초 띠를 둘렀고, 450여 개 섬들이구슬처럼 꿰여 있다. 그런 환경 덕에 주력산업도, 코로나19 사태로 지금은 어렵지만, 농어업에서 관광서비스업으로 바뀌었다. 1990년대 GDP의 10퍼센트 남짓이던 관광업 비중은 2019년44.7퍼센트였다. 긴 식민지 침탈을 겪고도 온전했던 건 이렇다 할 자원이 없어서였다. 2011년까지 종주국이었던 영국이 군대를 파견해 국경을지켜준 덕에 정정이 불안한 이웃 나라의 침탈을 면했고, 인구 급중의 압박도 적어 1981년 독립 당시 약 20만 명이던 인구는 근년에도 40만 명 정도다. - P89
벨리즈 국민들에게 자연-생태의 가치를 일깨운 존재가 있었다. 결코 동물원 같지 않은, 벨리즈 유일의 ‘벨리즈 동물원‘이었다. 그동물원은 1983년 문을 연 때부터 지금까지, 다치거나 병들거나어미를 잃고 구조된 녀석들이 한 식구처럼 지내는 매너만 지키면 철창 없이 사는 곳이다. 2021년 현재 식구는 45종 200여 마리. 다리 하나를 잃은 재규어 ‘엔젤‘과 벨리즈의 스타라는 고아 테이퍼 ‘에이프릴‘ 등 모두가 사연이 있고 이름이 있다. 시민들도 그들을 고유명사로 부르며, 이웃처럼 안부를 챙긴다. 한마디로 그곳은 진귀한 쇼의 공간이 아니라, 종의 존재를 이해시키고 공존의 가치를 도모하는 야생의 대사관 같은 곳이고, 국제야생보존트러스트WPTI, wildlife Preservation Trust International 전의장 빌 콘스턴트의 말처럼 "좋은 동물원이란 게 뭔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곳"이다. 시민들은 ‘나는 벨리즈 동물원을 사랑해 I Love TheBelize Zoo‘란 문구의 스티커를 자랑삼아 자동차 범퍼나 바이크에 붙이고 다닌다. - P90
동물원만큼이나 유명한 게 설립자 샤론 머톨라sharon Matola다. 서커스단 댄서 겸 맹수 조련사로 일하던 무일푼의 28세 여성이맨몸으로 야생에 울타리를 두르고 동물원 간판을 내건 사연에서부터, 동물들 먹이느라 닭을 키워 팔고 ‘막노동꾼‘ 같은 관광가이드로 5년 넘게 뛰어다닌 초기의 고생, 무슨 행사 소식만 들리면배낭에 드레스를 챙겨 넣고 낡은 모터바이크로 달려가서는 동물원 사진첩을 펼쳐 보이며 후원을 청하던 일상, 때로는 배낭에 보아뱀 ‘벨보아‘를 담아 초등학교를 돌며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 P90
가르치고, 초청장(어린이 무료)을 돌리고, 동요를 짓고 동화책을내 읽힌 일, ‘국가의 공적enemy of the state‘이란 비난까지 들으며 댐건설 반대운동을 주도한 일까지………. 그의 이름은 몰라도 ‘주 레이디Zoo Lady‘를 모르는 이는 드물었고, 불량배들도 그를 마주치면 돌아설 정도였다. 벨리즈 출신인 캐리비언 기후변화센터 사무총장 콜린 영은 "벨리즈 시민들이 갖게 된 자연에 대한 이해의대부분이 머톨라에게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동물들과 함께 뒹굴며 살 수 있어서.……… 세상에서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던 벨리즈의 ‘주 레이디‘ 샤론 머톨라가 2021년 3월 21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 P91
2019년 지구의 날(4월22일), 벨리즈 미국대사관은 "벨리즈 청년들의 롤모델"인 머톨라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머톨라는1988년 인터뷰에서 "벨리즈에서 평생 살 것"이라고, "지금 입은이 재킷도 단돈 25센트짜리"라고 말했다. 1990년 그는 벨리즈인으로 귀화했다. 2017년 그는 동물원 운영권 일체를 직원들에게물려주었고, 숨지기 2주 전까지 동물들의 야생 복귀 훈련을 도우며 어린 동물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1992년 인터뷰에서 그는 벨리즈에 오던 무렵만 해도 동물원운영은커녕 "환경에 대한 생각 자체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동물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동물을 알아가며 변화해온 벨리즈시민들이 그를 환경보호론자로 만들었다고, "(그렇지만) 결코 엘리트 환경론자가 되고 싶진 않으며 "다만 땅바닥에 엎드려 땀흘리는 게 좋다"고 했다. 뒤를 이어 동물원 운영을 맡은 셀소 푸트의 말처럼 벨리즈 동물원은 샤론 머톨라의 삶 자체였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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