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는 노동법을 날치기했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 소속 의원 154명이 야당에 회의 개최 사실도 통보하지 않은채 버스를 대절해 국회 본회의장에 몰래 들어가 파견근무제, 정리해고제, 파트타임근로제와 변형시간근로제 등 노동자의 지위에 엄청난악영향을 주는 조항이 담긴 노동관계법을 의결했다. 민주노총이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시작했다. 공안당국이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체포조를 투입하는 등초강경 대응에 나섰지만 하루 최대 35만 명 넘게 참여하는 등 파업은더욱 확산되었다. 천주교 사제들의 시국미사를 시작으로 대학교수와지식인, 각계각층 단체의 노동법 재개정 요구 서명발표가 줄을 이었다. 농민들은 쌀과 음식을 싣고 와 농성 노동자를 격려했으며 대학생과 시민들의 격려 방문과 파업을 지지하는 신문광고가 줄을 이었다.
해외교민들도 정부를 규탄하고 파업을 지지하는 집회를 벌였다. 내가 있던 독일 마인츠대학교 한국 유학생들도 돈을 모아 『한겨레에 총파업 지지 생활광고를 냈다.
- P272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숙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통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야당과 언론의 입을 막거나 시민들의 기본권행사를 제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정부와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견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김대중 대통령이 정리해고제를도입하는 등 노동법을 개정함으로써 노동자의 지위를 현저히 약화시켰다. 1996년 정부여당이 날치기 처리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다. 정부는 정리해고제 반대 파업을 경찰력으로 해산하고 주동자를 구속했지만 대규모 파업이나 시민사회의 연대투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구제금융을 제공한 IMF가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리해고제 도입을 강요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노동계와 합의하려고 노력했으며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을 지원하는 등 정리해고의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벼랑 끝에 몰려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심정에 공감하면서도 정부를 심하게 비난하지는 않은 것이다. - P273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권력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평검사들과 치열한 공개토론을 함으로써 대통령이 검찰을 정치적으로 이용 - P273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국정원장의 독대보고를 받지않았다. 자신의 대선자금 가운데 일부가 불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민에게 사과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폐기를 주장하며 서울도심에서 시위를 하던 농민이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사고가났을 때도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경찰청장을 경질했다. 한나라당과민주당이 손잡고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을 때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육탄으로 저지하지 말라고 권했다. 국회에 탄핵권이 있고, 탄핵을 의결해도 헌법재판소 결정이 남아 있는 만큼 헌법 절차에 따라 다투는것이 옳다고 했다. 이라크 파병 등 중요한 문제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통령과 다른 견해를 밝혀도 문제 삼지 않았다. - P274

2004년 봄의 탄핵규탄 촛불집회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들이 현직 대통령의 편이 되어 자발적으로 전국적 · 동시다발적 · 연속적 집회시위를 벌인 적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후에도 없었다. 탄핵규탄 촛불집회의 투쟁대상은 야당이었다. 임기가 넉 달밖에 남지 않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뽑은 임기 5년 대통령의 직무를 겨우 1년 만에 정지시킨 사건에 대해국민들은 분개했다.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얻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를 기각함으로써 대통령 탄핵은 야당이 국회의헌법적 권한을 오남용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촛불시위는 국회가국민의 주권을 부당하게 침해한 데 대한 항의였으므로 헌법을 지키는 민주화운동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 P275

는 민주화운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발병 확률은 매우낮았다. 문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완화하는 결정을 내린 과정이었다. 아무 예고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공론화 과정도 없이,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가 그런 결정을한 것이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다른 일도 모두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여중생들이 광화문 인근에서 작은 촛불집회를시작했을 때 그것이 국민운동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별로 없었다. 그런데 촛불집회는 재야, 학생운동, 시민단체, 야당 등전통적인 민주화운동 세력과 전혀 상관없이 젊은 어머니들과 직장인 - P275

들에게 번져나가 거대한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집회시위로 확산되었다. 물대포와 최루액을 동원한 경찰의 진압과 ‘명박산성‘이라고 불린 경찰차벽에도 굴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거짓 사과 말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지만, 촛불집회는 자발적으로 행동하면서 수평적으로 연대할 줄 아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예IN고했다.
2013년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었다. 이번에는 2012년 대통령선거에 국정원과 기무사,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이 불법 개입한 것을 규탄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미사를 열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기관을 정치적으로사유화해서 같은 당의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국민을 상대로 온라인 심리전을 벌인 조직범죄였다. - P276

지금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참여의 시대다.
2008년 이후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지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가 헌법을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행태를 보이지만 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를 통해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박근혜 정부 역시 국가운영의 많은 분야에서 민주화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정책과 행태를 보이는데, 그 기반은 불합리한 제도나 경찰과 군대의 폭력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거대 보수언론과 재벌, 공안세력이 반복 주입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시민들의 의식이 그 기반이다. - P276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유익하듯이, 삶의 실험도 다양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주지 않는 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고유한 개성이 아니라 전통이나 관습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자 개인과 사회 발전의 불가결한 요소인 개별성을 잃게 된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지난 55년 동안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다. 어느 하나도 쉽지 않았지만 우리는 둘 모두를 해냈다.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자유는 개개인의 생활방식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반공 난민촌‘이었던 대한민국은 사회 전체가 ‘병영‘과 비슷했던산업화시대를 통과해 각자의 개성과 문화적 다양성이 발현되는 민주화시대의 ‘광장‘으로 바뀌었다. 지난 55년 동안 대한민국이 겪은 사회문화적 변화는 그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 P279

앞에서 나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동력이 대중의 욕망이었다고 주장했다. 사회적·문화적 변화를 만든 것도 욕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욕망의 위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아실현의 욕망이었다. 자아를 실현하려면 ‘살아가는 방식‘ life style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라이프 스타일은 신념이나 이상의 선택과 같은 추상적 · 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생활을 설계하는 개인적 취향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언제 잠들고 깨어날지,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입을지, 어떤 직업을 선택하며 무엇으로여가를 보낼지, 결혼을 할지 말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노래를 부를지, 자녀를 몇이나 낳을지, 종교를 믿을지, 믿는다면 어떤 종교를 어떻게 믿을지, 이웃이나 직장 동료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지, 어느 정당을 지지하며 어떤 방식으로 자기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지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라이프 스타일은 그 사람의 신념과취향, 개성과 욕망을 드러낸다. - P279

지금 광장에서 살고 있다. 병영시대 정부가 한 일의 목적과 방식, 결과가 다 나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괜찮은 방법으로 훌륭한 목적을 제대로 이룬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나쁜 방법으로 좋은 목적을 이루기도 했다. 목적과 방법, 결과가 모두 추악한 것도 많았다. 국가의명령에 복종하면서 병영사회의 양지에서 살아간 사람도 있었지만 자유를 얻기 위해 병영의 담벼락을 허무는 일에 인생을 바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박해받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맨손으로 정부와싸우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많지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그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대통령의 신민이 아니라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서 자유롭게 원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담벼락은 결국 무너졌고 병영은 서서히 광장으로바뀌었다. - P280

저출산 현상은 산업화에 따른 출산율의 자연적 감소와 정부의 강력한 출산억제정책의 합작품이었다. 정부는 출산율 억제를 정책 목표로 설정했으며 강압적이고 노골적인 방법을 동원해 그 목표를 달성했다. 우리의 어머니 세대는 생기는 대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1960년대에는 6남매, 7남매가 보통이었다. 셋 이하면 자손이 귀하다고들 했다. 남아선호 사상이 만연한 가운데 노동시장은 고학력 사무관리직과 저학력 생산직으로 양분되어 있어서 공부를 해야 사람 노릇을 한다는 전통적인 의식이 더욱 강고해졌다. 돈이 없어서 자녀들을 다 공부시킬 수 없는 부모들은 아들 교육에 집중했다.  - P287

오늘날은 정부가 시민의 재산권 행사를 마음대로 제약하지 못한다. 정부는 2003년 전북 부안군에 방사능폐기물 처리장을 지으려 했던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외곽순환고속도로 사패산 터널 공사와 부산 천성산 터널 공사는 자연 생태계 파괴에 대한 우려와 스님들의 강력한 반대투쟁 때문에 장기간 지연되었다. 서울 용산 미군기지가 옮겨가는 평택 대추리, 해군기지를 세우는 제주 강정마을, 한전이 고압선 송전선을 설치한 경남 밀양시 상동면에서도 지역주민들과 시민단체들이 길고 끈질긴 반대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병영시대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았다. 정부의 정책을 내놓고 반대하는 것은 병사가 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과 같았다.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갈 위
‘험을 무릅쓰고 대통령에게 대들 만한 토지소유자는 별로 없었다. 정부는 여론수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그린벨트를 지정했다. - P307

국민교육헌장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말씀‘이었다. 정부는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는 것은 곧 국가를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1978년 송기숙, 명노근, 이홍길, 홍승기 등 전남대 교수 열한 명은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성명에서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며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을 하기 위해 학교를 인간화·민주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교육헌장은 제정경위와 선포절차, 내용 모두 민주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며 일제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고 비판했다. 초안은 서울대 백낙청 교수가 작성했다. 정부는 관련 교수들을 전원 해직하고 송기숙 교수와 성명서를 외신기자들에게 배포한 연세대 성내운 교수를 구속했다. 이런 일로 대학교수들을 구속한다는 게 어처구니없는 일로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감히 국가가 하는 일에 반기를 들다니! 물론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거짓말이었다. 그런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민교육헌장은 1993년 초등학교 교과서와 정부 공식 행사에서 사라졌다. - P311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인가?
그 판단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우리 헌법이 국민 각자에게 준 것은 교육, 근로, 납세, 국방의 의무뿐이다. 그런데 교육과 근로는 권리에 가깝기 때문에 국민의 의무는 결국 소득을 얻으면 법에 따라 세금을 내는 것,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대에 가는 것, 이 두 가지밖에 없으며 우리는 이 두 가지만 제대로 하면 된다. 그와 다른 방법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지 말지는 각자 선택할 문제다. 할 마음은 있지만 공개적으로 고백하기가 쑥스러우면 맹세를 하지 않아도된다. 헌법은 양심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할 권리를 보장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국민들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맹세하게 한다. 나는 이것도 헌법 위반이라고 생각한다. - P312

로기인간의 기억은 선택적이며 주관적이다. 야간통금은 신체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구속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그것을 즐거운 추억으로간직하고 있다. 그때는 자정이 다가오면 버스와 지하철이 북새통을이루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자기 발로 파출소나 경찰서에 가서 기다리다가 오전 4시가 지난 다음 귀가해야 했다. 술집과 학원은 심야영업을 할 수 없었고 기업은 철야작업 야간교대를 하기 어려웠다. 국제선 항공기가 통금 때문에 김포공항에 내리지 못하고 일본이나 홍콩으로 회항하는 일도 벌어졌다. 남자들은 교외로 데이트를 나갔다가 막차를 일부러 놓치는 것을 ‘작업의 정석‘으로 삼았다. 부처님 오신 날, 크리스마스, 12월 31일만 예외였다. 사람들은 단순히 밤거리를 걷고 싶어서 시내로 나갔다. 중학생 시절 크리스마스이브 때 대구 시내 동성로에 나갔다가 어른들 어깨 틈에 끼어발을 땅에 딛지도 못하고 둥둥 떠다녔던 기억이 난다. - P316

이것은 주민등록제도 도입 당시에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디지털 부작용이다. 2014년 1월에 터진 농협카드, 롯데카드, 국민카드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계기로 정부와 국회는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지 않고 인터넷 본인 인증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남의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차제에 국민의 주민등록번호 전체를 다시 만들고 국가기관 말고는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하거나 보유하지 못하게 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지구촌 문명국가들 가운데 우리와 같은 주민등록제도를 가진 나라는 거의 없다. 주민등록번호는 대한민국의 진화과정에 병영국가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화석이라 할 수 있다. - P320

2006년 개교 60주년을 맞은 서울대학교가 해방 이후 60년 동안판매가 금지되었던 책 가운데 역사적 의미가 있는 스무 권을 발표한적이 있다. 전환시대의 논리』 (영희), 신동엽전집』(신동엽), ‘순이삼촌(현기영),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빨치산의 딸』(정지아), 사회주의 인간론 (에리히 프롬), 『무림파천황』 (박영창),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광주 5월민중항쟁의 기록』(황석영),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해방 전후사의 인식』(송건호 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광주민중항쟁 참가자들이 쓴 항쟁기록을 소설가 황석영이 손질해서 출판한 책이다. 1980년대 중반 ‘넘어넘어‘라는 약칭으로 회자되었던 이 책은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국민에게 널리 알린 최초의 공개 출판물이었다. 금서가 된 바람에 더 유명해진 무협소설무림파천황이 불온서적으로 지목당한 이유는 좀 우습다. 정와 사파의 대결을 변증법으로 설명한 딱 한 쪽 때문이었다. 그때 공안당국자들은 변증법을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 P321

유신시대에는 중앙정보부의 지휘 아래 법무부, 문교부, 문화공보부, 국방부, 내무부 등 유관기관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면서 금서목록을 정했다. 명분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불온서적과 미풍양속을해치는 음란서적을 규제하는 것이었지만 정부를 비판하거나 당국자들의 눈에 거슬리는 모든 서적이 판금대상이 되었다. 대표적인 예를들어보자. 『길을 묻는 그대에게」(김동길), 『지성과 반지성』(김병익), 『이성과 혁명』(허버트 마르쿠제), 『전환시대의 논리』(영희), 학교는 죽었다』(라이머), 『죽으면 산다』(장준하), 『어느 돌멩이의 외침』(유동우), 『순 - P322

이삼촌』(현기영), 『해방의 길목에서 (박형규)가 포함되었다. 수필, 문학평론, 철학, 르포르타주, 소설, 사회비평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판매 금지한 것이다.
누가 어떤 절차를 거쳐 금서를 정하는지, 그 결정이 문제가 있을 경우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323

전두환 정부는 유신시대에 만든 금서목록에 『김형욱 회고록』 (박사월), 『혁명의 연구』 (에드워드 H. 카),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이야기 경제학』(김수길), 『변증법이란 무엇인가』(황세연), 『겨레와 어린이」(이오덕 외) 등 더 많은 책을 추가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파악한 판매금지도서목록은 노태우 정부까지다. 이때는 레닌, 마오쩌둥, 스탈린 등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책과 소련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온 역사서, 북한 주체사상과 관련된 책을 대량으로 판매 금지했다. 1980년대의 혁명적 분위기에서 대학생활을 한 이른바386세대 청년들이 그런 책을 탐독했기 때문이다. 김영삼-김대중-노 - P323

무현 대통령 때는 정부 차원의 목록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 초기에 공개된 국방부의 장병 금서목록에서 보듯 개별 국가기관의 목록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23권의 국방부 금서목록에는 『지상에 숟가락 하나』(현기영), 북한의 우리식 문화』(주강현), 『통일, 우리 민족의 마지막 블루오션』(전상봉),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노암 촘스키), 『미군 범죄와 한미 SOFA』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소금꽃 나무』(김진숙), 『나쁜 사마리아인들(장하준),
『김남주 평전』(강대석), 『대한민국史』(한홍구), 『세계화의 덫(하랄드 슈만 외), 『삼성왕국의 게릴라들』(프레시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국방부 금서목록에 오른 책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국가의 사상통제에 대한 시장의 반격이었다. - P324

민주화 이후에도 방송 사전심의제도는 폐지되지 않았다. 1993년가수 정태춘 씨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을 시작했다. 그는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받지 않고 음반을 제작·발표함으로써문화관광부가 자신을 고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법정투쟁을 하면서사전심의를 강제한 ‘음반 및 비디오물에 대한 법률‘에 관한 위헌심판제청을 재판부에 냈다. 마침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표한 4집 앨범 ‘컴백홈‘에 수록된 <시대유감>에 대해 공윤이 가사 수정을 지시하자 서태지가 가사 전체를 삭제하고 연주곡만 수록함으로써 공윤의 검열에대항한 사건이 일어났다. ‘문화 대통령‘ 서태지의 팬들은 표현의 자유를 빼앗은 공윤에 비난을 쏟아부었다. 결국 공윤은 1996년 6월 사전심의제를 폐지했고 넉 달 후 헌법재판소는 사전심의제도가 표현의자유를 규정한 헌법 제21조 위반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 P328

이어령, 현승종, 양주동, 구상, 박종홍 등 당대의 저명한 지식인과문인들이 고전독서운동에 힘을 보탰다. 지식인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지원이 시작되면서 고전독서운동은 암기능력을 테스트하는 경연대회로 변해버렸다. 1968년 11월 제1회 대통령기쟁탈 전국자유교양대회가 열렸고 정일권 국무총리가 시상을 했다. 마치 고교야구대회나 전국체전을 할 때처럼 전국 학교와시도에서 선발한 대표선수들이 출전해 독후감을 쓰고 필기시험을 보았다. 이 대회 전성기였던 1974년에는 전국 학생의 90퍼센트가 지역예선에 참가했다. 육영수 여사는 해마다 입상자를 청와대로 초대해다과를 베풀었다. 1975년 마지막 대회를 할 때까지 연인원 1,900만명이 참가했고 협회는 132종 800만 부의 고전을 보급했다.  - P330

병영국가의 최대 피해자는 노동자였다. 국가가 특정한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강제하면 국민이 아프고 불편하다. 원하는 삶의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면 삶에 대한 회의가 생긴다. 병영국가 대한민국의 적은 북한만이 아니었다. 소련, 중국,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 같은 소위 ‘국외공산계열‘도적이었다. 그 나라들의 국가이데올로기가마르크스주의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단결을 호소하고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라고 선동했다. 그래서 병영국가 권력자들은 노동자를 북한과 ‘국외공산계열의 잠재적 협력자로 보았으며 그들이 계급적으로 각성하거나 단결하지 못하도록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여기서 특별한 관심이란 철저한 감시와 무자비한 억압을 의미한다. 노동자들은 심리적고통뿐만 아니라 생존권과 인권을 박탈당하는 ‘물리적 고통‘도 겪어야 했다. - P331

자주적인 노동조합연합체는 광장의 시대가 열린 후에야 비로소탄생했다. 1995년 11월에 출범한 민주노총이 그것이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 항의 총파업을 치르면서 대중적 기반을 구축한 민주노총은 산하에 16개 산업별 노조가 있는데, 거대한 자동차회사 노동조합이 속한 금속노조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공공운수연맹 등이 핵심이다. 민주노총은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 이후 10여 년 동안 조직적·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출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만성적인 정파갈등과 대기업 노동조합의 자기중심적행태 등으로 대중의 신망이 크게 하락했으며 2008년 이후에는 정부의 노골적이고 일상적인 탄압에 직면했다.
권력자는 역사에 자신의 인격을 각인한다. 한국현대사에 가장 뚜렷한 인격의 각인을 남긴 지도자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 지위도 권력도 없는 사람이 역사에 자신의 인격을 각인하기도 한다. ‘영원한 청년 노동자 또는 ‘노동열사‘ 전태일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 P332

스님도 권력자는 아니었지만 우리의 현대사에 인격을 각인했다. 그러나 그분들에게는 가톨릭과 불교라는 종교적 배경이 있었다. 전태일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스물두 살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1970년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책자를 껴안은 채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온몸이 불타는 고통 속에서 그는 외쳤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전신에 3도화상을 입은 전태일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타계할 때까지 40년 세월을 ‘노동자의 어머니‘ 로 살았다. - P334

전태일이 청원한 것은 하루 작업시간을 10~12시간으로 줄이고, 매주 일요일을 쉬게 하며, 건강진단을 제대로 하고, 시다의 급여를 50퍼센트 인상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 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와 사용자들은 이 요구를 냉정하게 외면하고 짓밟았다. 전태일은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분신을 결심했다.
전태일 이전에도 전태일 이후에도 억압과 착취에 항거하면서 목숨을 끊은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역사에 전태일만큼뚜렷한 각인을 남기지는 못했다. 전태일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어린여성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분신했다. 그는 평화시장 노동자들 가운데 급여수준이 가장 높은 재단사였다. 다른 유능한재단사들은 돈을 모아 양복점을 내고 사장이 되는 것을 꿈꾸었고 실제 그렇게 한 사람이 많았다. 타인의 생명과 건강과 복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행위다.  - P335

그런데 전태일을 분신하게 한 것은 어떤 이념이 아니라 어리고 약한 이옷에 대한 연민이었다. 그가 남긴 일기는 그 자신도 어리고 약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어리고 약한 스물두 살 청년 노동자가 더 어리고더 약한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 행위가 수많은 국민의 영혼을 울렸다. 그는 한국 사회가 빈곤과 억압, 착취와 인권유린에 고통받는 거대한 노동자 집단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드러내 보였으며, 대한민국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려주었다.
분신 소식을 들은 대학생들이 평화시장으로 달려왔다. 조영래, 장기표 같은 사람들이었다. 반독재 · 민주화 투쟁에 몰두하던 대학생과지식인들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1970년대이후 노동운동, 노학연대와 청년지식인들의 노동현장 투신, 노동운동의 정치적 진출, 민주노총의 탄생은 모두 전태일의 분신에서 시작되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곧바로 청계피복노동조합을 결성했다. - P336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88년 7월, 문송면이라는 열다섯 살 소년이 사망했다. 그는 집이 가난해 중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서울에는야간학교에 다니게 해주는 공장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고향인 충남 서산을 떠나 혼자 서울에 왔다. 그런데 영등포구 양평동 공장에 취직해온도계에 수은 넣는 일을 한 지 겨우 두 달 만에 손발이 마비되는 증상이 나타나 집으로 돌아갔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원인을 알 수없었다. 결국 서울대병원에서 수은 중독 진단을 받았고 넉 달 뒤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은 당시 우리나라 산업보건 현실과 노동행정의후진성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그때는 직업병 전문병원이 없었다. 회사는 문송면 군의 병이 회사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산재신청서 날인을 거부했다. 노동부는 서울대병원이 산재보험 지정 의료기관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요양신청서를 반려해버렸다. - P337

문송면군 사망 직후였던 1988년 7월 원조가족협의회‘가 발족했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비롯한 환경단체와보건의료 전문가들이 여기에 결합했다. 박영숙, 노무현 등 야당의원들이 진상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부는 정부의 무관심에 격분한 원진 피해자들이 88올림픽 성화 봉송로를 막으려고 하자 비로소협상에 응했다. 원진레이온은 몇 년 후 폐업했지만 이 투쟁은 그 후10여 년 더 지속되었다. 문제의 설비를 중국 기업에 팔아치웠다는 소문이 돌았다. 1993년 설립된 비영리 공익법인 원진재단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고 치료와 재활을 돕기 위해 구리시에 원진녹색병원 원진복지관을 지었다. - P338

다시 19년이 지난 2007년 11월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가 발족했다. 스물세 살 여성 노동자 황유미 씨가 사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2003년부터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한 황유미 씨는 2년 만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2007년에 숨졌다. 1년 전에는 같은 공정에투입되었던 동료 한 사람이 림프구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두 달 만에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는 2000년 이후최소한 여섯 명의 백혈병 환자가 생겼다. 화성공장과 온양공장에서도 백혈병 환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삼성반도체는 백혈병의 업무연관성을 부인했다. 산업안전보건공단은 극히 형식적인 역학조사를 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보고서를 냈다. 2009년 5월 근로복지공단은 백혈병에 걸린 삼성반도체 노동자 다섯 명의 산재신청 승인을 거부했다. 백혈병이 직업병이라는 의학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 거부 사유였다.  - P339

황유미 씨 사건으로 출발했던 대책위원회는 2008년부터 다른 반도체 회사의 직업병 피해자 문제를 함께 다루기 위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반올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있다. 반올림에 직업병으로 제보를 해온 사람은 2013년까지 모두171명이었고 그중 70여 명이 세상을 떠났다. 백혈병, 뇌종양, 유방암, 루게릭, 다발성경화증 등 병명은 다양했지만, 모두 암이 아니면희귀질병이었고 환자는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다. 39명이 산재보험보상을 신청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단 세 사람만 산업재해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질병 원인을 입증하기 어렵다"라며 모두 기각했다. 반올림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지금까지 진행과정은 1988년 문송면 군과 원진레이온 사건 때와 거의 비슷해 보인다. 가장 큰 차이는투쟁의 대상이 글로벌 기업집단인 삼성그룹 소속 최첨단 기업이라는사실, 그리고 민주노총과 여러 시민단체, 자발적 후원자가 되어준 시민들이 지속적으로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4년 5월,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이 심장마비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황에서 뒤늦게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을 위한 협의를 시작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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