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에서 일어난 스탈린의 두 ‘혁명‘, 집단화와 기근은 독일에서 히틀러의 집권 과정에 가려져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독일의 나치화를 보고 실망한 많은 유럽인은 모스크바에서 동맹자를 찾았다. 개러스 존스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권력을 강화하던 1933년 초반, 두 체제를 모두 목격한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1933년 2월 25일, 그는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베를린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날아감으로써 신임 독일 수상과 함께 비행기를 탄 최초의 언론인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 비행기가 추락한다면, 유럽의 역사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존스는 ‘나의 투쟁』을 읽었고, 독일 정복, 동유럽 식민화, 유대인 말살이라는 히틀러의 야망에 대해 감을 잡고 있었다. 이미 수상이었던 히틀러는 제국 의회Reichstag의 해산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다음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자신의 재임 기 - P119

간을 늘리고 독일 의회에서 나치당이 차지하는 자리도 더 넓히려 했다. 존스는 신임 수상에 대한 독일인들의 반응을 처음에는 베를린에서, 나중에는 프랑크푸르트 집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느낀 것은 "순수한 원시적 숭배‘였다.‘
그 뒤 모스크바로 떠남으로써, 존스는 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독재 정권이 막 시작된 땅에서 "노동 계급이 독재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존스는 두 체제 간의 중요한 차이점을 알고 있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에서는 새로운 체제가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반면 스탈린은 조직적인 거대한 폭력을 구사하는 강력한 경찰 기구를 바탕으로,
일당 독재국가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존스가 목격하고보고했듯이,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은 시민 수만 명을 총살하고, 수십만 명을 추방하며, 수백만 명을 아사 직전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스탈린은 사회 계급과 민족을 기준으로 소련 시민 수만 명을 추가로 사살할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은 1930년대 히틀러의 역량을 훨씬 넘어서 있었고, 어쩌면 당시의 히틀러로서는 그렇게 할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 P120

히틀러는 우크라이나 기근을 자신의 선거운동에 활용해, 이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 되기에 앞서 분노를 유발하는 이데올로기 정치 문제가 되게끔 만들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상대로 분노를 터뜨리며, 우크라이나 기근을 마르크스주의의 폐단을 증명하는 증거로사용했다. 1933년 3월 2일 베를린 슈포르트팔라스트 집회에서 히틀러는 "전 세계의 곡창지대가 될 수 있는 나라에서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외쳤다. 단 한 단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단어만으로 히틀러는 소련에서의 떼죽음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호자인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결부시켜버렸다. 히틀러의 평가를 전적으로 거부 또는 수용하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그의 말이 거짓과 진실의 묘한 복합체였기 때문이다. 소련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사람은 기근에 대한 히틀러의 평가를 받아들이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와 뒤섞여 있던, 좌파 정치에 대한 그의 비난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 P122

1932년 하반기와 1933년 초반, 자신이 일으킨 대재앙이 지속되는와중에 스탈린이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이라는 국제 노선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됐든 소련 인민의 끔찍한 고통과 떼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부농에 대한 계급투쟁‘이었다. 독일 국내정치에서 이 노선은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더 열심히 지지토록 하는역할을 했다. 그러나 소련 기근의 중대한 몇 달은 독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대한 시기이기도 했다. 즉각적인 계급 혁명을 주장하던 독일공산주의자들 덕분에 나치는 중산층의 표를 얻을 수 있었다. 사무직과 자영업자도 사회민주당보다는 나치에 표를 던졌다. 그래도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을 합산하면 나치당의 지지율보다 더 컸다.
그러나 두 정당은 스탈린의 노선 때문에 서로 협력할 수가 없었다.  - P123

스탈린 경제 정책의 진정한 결과를 당시 해외의 보도인들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히틀러는 독재자로서 시행한 최초의 정책 중에서 재분배에 관심이 쏠리도록 치밀하게 의도했다. 소련의 기아가 절정으로치닫던 순간, 독일은 유대계 시민의 재산을 빼앗기 시작했다. 1933년3월 5일 선거에서 승리한 후, 나치는 독일 전역에서 유대계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집단화와 마찬가지로, 불매운동은 다가오는 사회경제적 변화에서 가장 손해를 보게 될 사회 계층이 어디인지보여주고 있었다. 소련에서는 농민이었지만, 독일에서는 유대인이었던것이다. 실제로는 나치 지도자와 나치 준군사 조직들의 엄격한 관리의 산물이었으나, 불매운동은 유대인 착취에 대한 사람들의 ‘자발적분노‘에 따른 산물인 양 묘사되었다.
이 점에서 히틀러의 정책은 스탈린의 정책과 비슷했다. 소련 지도자는 소련 변방에서의 혼란이, 그리고 부농의 제거가 진정한 계급 전쟁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베를린과 모스크바 모두 같은 정치적 결론을 내렸다. 필요한 재분배가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되려면 국가가개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P124

1934년 6월,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스탈린은 마침내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선포된 인터내셔널의 새노선에 따르면 이제 정치는 더 이상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 문제가아니었다. 대신 소련과 세계 공산당은 ‘반파시스트‘ 캠프에서 널리 좌파 세력을 결집하기로 했다. 계급투쟁을 엄격히 수행하는 대신, 공산주의자들은 부상하는 파시즘으로부터 문명을 구해야 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때문에 유명해진 단어인 파시즘을 소련은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부패의 결과물로 제시했다. 파시즘의 확산은 기존 자본주의 질서의 종식을 의미했던 한편, 소련에 대한 파시즘의 극심한증오(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는 소련과 여타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소련 수호를 위해) 다른 자본주의 세력과 타협하는 것을 정당화해주었다.  - P130

인민 전선은 소련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인프랑스와 스페인에서 가장 큰 성공을 누렸다. 최고의 승리는 파리에서 거뒀는데, 이곳에서 인민 전선 정부는 1936년 5월 실제로 집권에성공한다. (에리오의 급진당을 포함한) 좌익 연합이 선거에서 승리했고, 사회주의자 레옹 블룸이 총리가 되었다. 승리를 거둔 선거 연합의 일원인 프랑스 공산당은 공식적으로는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의회 다수당이 되었고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투표 결과는 개혁에 힘을 실어주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프랑스 외교정책을 소련에 우호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파리에서 인민전선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좌파가 거둔 승리로 간주되었다.  - P131

스페인에서는 정당 연합이 인민 전선을 형성했고, 1936년 2월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건이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다.
7월에는 극우 집단의 지지를 받는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정부는 저항했고, 그 결과 스페인내전이 시작되었다. 스페인인에게는 본질적으로 국내 문제였지만, 인민 전선에 대한 이념적 적들이 참전했다. 소련은 1936년 10월 궁지에몰린 스페인 공화국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우익 세력을 지원했다. 스페인 내전은 베를린과 로마의 관계가 개선되는 계기가 되었고, 스페인은 유럽 내 소련 정책의 관심이 집중되는 격전지가 되었다.
스페인은 몇 달 동안 주요 소련 신문의 1면을 차지했다. - P132

‘스페인을 돕자!‘는 위험에 빠진 공화국 편에서 싸운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구호가 되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소련이 민주주의 편에 선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통찰력이 뛰어난 유럽 사회주의자의 한 명이었던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스페인 좌파를 제압하려는 스페인 내 스탈린주의자들의 행동에 경악했다. 그의 통찰처럼, 소련은 무기와 함께 정치 행위까지 수출했다. 스탈린의 스페인 공화국 지원에는 대가가 따랐다. 스페인 영토에서 파벌 싸움을 벌일 권리를 준 것이다. 스
"탈린의 숙적인 트로츠키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멀리 떨어진 멕시코로추방당하긴 했지만), 공화국을 지키던 수많은 스페인 사람은 스탈린의 - P132

소련보다는 트로츠키라는 개인에게 더 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주의 선전물은 스페인의 트로츠키파를 파시스트로 낙인찍었고,
그들을 ‘반역죄‘로 사살하고자 소련 내무인민위원회 장교들이 스페인으로 파견되었다. - P133

스탈린은 소련 시베리아에 대한 일본의 직접적인 공격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의 힘이 점점 강대해지는 점도 신경 써야 했다. 만주국은 역사적으로 중국 영토였던 곳을 빼앗아 만든 일본 식민지였다. 이러한 식민지는 더 늘어날 기세였다. 중국은 소련과의 국경이 가장 긴 나라이자 정치가 불안한 국가였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중국 공산당과 진행 중인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대장정 "
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부대는 중국 서북부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중국의 무력을 독점하는 수준에 이르지는못했다. 민족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던 지역에서조차, 그들은 지역군벌에 의존해야 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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