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환영했는데, 이는 그것이 미군의 무장 속도를 늦추고 또 미국이전투를 벌이더라도 유럽보다는 태평양에서 벌이게 만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르바로사 작전과 태풍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후에도, 히틀러는 일본이 소련보다는 미국과 싸우기를 원했다. 그는1942년 초까지 소비에트 정복을 완수하고 그 뒤 태평양에서 그동안일본과의 전투로 약해진 미국을 상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 역시 줄곧 일본이 남쪽으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매우 신중하게외교 및 군사 정책을 펼쳐오고 있었다. 그가 품은 생각의 핵심은 히틀러와 똑같았다. 즉 ‘소련 땅은 내 것이니, 일본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뜨려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를린과 모스크바는 일본을 동아시아와 태평양에 묶어두길 원했고, 도쿄는 바로 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 P381

당초 독일의 침공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소련의 주요 도시들을차례로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의 식량 및 캅카스 지역의 석유를 확보하는 전격적 승리를 거두었다면, 일본의 진주만 폭격 소식은 분명베를린에 좋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이 시나리오상에서라면, 진주만공격은 독일이 새로 얻은 식민지에서 승자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동안 일본이 미국의 시선을 끌어준다는 것을 뜻했다. 독일은 자신을 식량 및 자원을 자급자족하면서 영국의 해상 봉쇄 및 미국의 수륙 양동 작전에 대응할 수 있는 거대한 대륙 제국으로 만들 ‘동유럽 종합계획, 혹은 그것을 다소간 수정한 버전을 실행에 옮길 것이었다. 물론이것은 언제나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그림이지만, 독일 군대가 모스크바를 향하고 있었던 순간만큼은 그래도 아주 약간의 현실성이있었다. - P382

1941년 12월, 히틀러는 자신이 처한 최악의 전략적 난국에 괴이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 스스로는 이미 장군들에게 1941년 말까지 "유럽 대륙에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앞으로 다가올 영국 및 미국과의 세계적 수준의 분쟁에 대비하라고 이야기해둔 상태였다. 그러나그렇게 되기는커녕 독일은 두 개의 전선에서 그것도 3개의 패권국과맞서 싸워야 한다는 전략적으로 악몽과도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히틀러는 특유의 뻔뻔함과 정치적 민첩성을 발휘하여 애초의 전쟁계획에서 심각하게 틀어져버린 상황을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서와 언어에 맞게 각색해냈다. 비현실적인 기획, 서투른 계산, 인종주의적 오만함, 어리석은 벼랑 끝 전술 말고 대체 무엇이 독일을 영국, 미국, 소련과 동시에 전쟁을 벌이도록 만들었는가? 히틀러는 이 질문에 대한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 세계적 차원에서 펼쳐지는 유대인들의 음모‘였다 - P383

만약 히틀러가 자신이 했던 예언을 실현시키고자 했다면, 학살은 이 시점에서 그가 가진 단 하나뿐인 선택지였다. 그가 원했던 것은 해양 제국이 아닌 대륙 제국이었지만,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보내버릴 불모지를 결국 손에 넣지 못했다. 마지막 해결책은 이미 여러 차례 수정과 발전을 거듭해왔고, 힘의 방식, 곧 대량학살은 강제이주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학살은 승리의 대체물조차 될 수 없었다. 전격적 승리가 애초 계획과 달리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유대인들은1941년 7월 말부터 이미 학살당해오던 터였다. 그러던 그들은 독일에맞서는 연합국들의 힘이 좀더 강력해진 1941년 12월부터는 모두 싹쓸어버려야 할 대상이 되었다. 히틀러는 여전히 좀더 깊은 감정적 요소들을 건드리고자 했고, 한층 더 악의에 찬 목표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알고 있던 독일 지도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길을 택했다. - P386

세르비아는 아마도 이를 특히나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독일이 유럽 동남부에서 벌인 전쟁은 소련 땅에서 벌인 전쟁보다 약간 앞선 시점에서부터 치러졌고, 이것은 아주 뚜렷한 선례들을 남겼다.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인 1941년 봄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침공했다. 그 주된 목적은 자신의 영양가 없는 동맹인 이탈리아를 지원해 그들이 발칸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비록 독일이 순식간에 유고슬라비아군을 제압하고 크로아티아에 꼭두각시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이 이탈리아와 함께 점령한 세르비아 지역의 저항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 중 일부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독일군 사령관은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독일인들에 대한 복수로서 ‘유대인 및 집시들만을 학살할 것이며,
그 비율은 독일인 1명당 유대인 및 집시 100명이다‘라고 명령했다. 이같은 방식으로, 세르비아에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 남성은 힘러가 유대인들을 "빨치산으로서" 죽여 없애라는 말을 꺼내기 전부터 이미 줄곧 사살당하고 있었다.  - P389

마지막 해결책의 다섯 번째이자 최종판은 말 그대로 대량학살이었다. 나치의 언어에서 재정착이라는 말은 이제 다른 말의 완곡한 표현이 되었다. 수년 동안 독일의 지도부는 유대인들을 특정 지역에 재정착시키는 것을 통해 자신들이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옮겨간 어느 곳에서든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해야만 할 것이고, 어쩌면 완전히 씨가 말라 더는 종족 번식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앞서처럼 그들을 죽여 없앤다는 것은 없었다. 따라서 재정착은 비록 1940년 그리고 1941년에 들어선 유대인 정책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더라도 어찌됐든 불완전한 것이었다. 이후 이른바 재정착 혹은 동부로의 재정착은 곧 대량학살을 뜻하게 된다. 아마도 재정착이라는 완곡어법은 기존 나치 유대인 정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것을 통해 나치가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을 못 본 체하고 넘어갈 수 있도록 해준 듯 보인다. 그 사실은 바로 독일의 정책은 변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기에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는 독일인들로 하여금 군사적 재앙이 자신들의 유대인 정책을 좌우해버린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위안할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 P390

그런 점에서 독일과 루마니아의 정책이 정반대로 갈라선 1942년은 하나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독일은 전쟁의 패색이 짙어졌기에 모든 유대인을 죽이려들 것이었고, 루마니아는 똑같은 이유에서 그해말부터 약간의 유대인들을 살려두고자 할 것이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는 이제 미국 및 영국과 협상의 여지를 열어둘 것인 반면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그들의 죄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완전히 닫아버렸다. - P393

감시하던 독일인들은 이들에게 앞으로 그곳에서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 숨기려들기는커녕 구덩이를 잘 파라. 내일 네놈들 아내와 엄마가 묻힐 거니까‘라고 했다. 이튿날인 8월21일, 우츠크에 있던 여자와 아이들이 그곳으로 끌려왔다. 즐겁게 웃으면서 먹고 마시던 독일인들은 여인들에게 "나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므로 살 권리가 없습니다"라고 외도록 했다. 그러고는 한 번에 다섯명씩 옷을 벗고 구덩이 앞에 나체로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했다. 다음차례인 여인들은 앞서 사망한 시체들 위에 나체로 누운 채 총을 맞았다. 같은 날, 유대인 남성들은 우츠크성 뜰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 P399

한 여인은 아내로서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남겨남편이 자신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그들 아이의 운명을 알 수 있기를 바랐다. 두 소녀는 함께 "너무나 살고 싶어. 하지만 그들이 허락하지 않아. 복수해줘. 복수해줘"라며 삶에 대한 갈구를 남겼다. 또 다른젊은 여인은 조금 더 체념한 듯 "나는 내가 스무 살에 죽는다는 것을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이상하리만큼 차분한 상태다"라고 적었다.
누군가의 부모는 자신들을 위해 아이들이 카디시를 올려주기를, 또유대교의 관습을 잘 지키기를 부탁했다.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전한 어느 딸의 메시지는 이랬다. "사랑하는 엄마! 이제 난 더 못 살거예요. 저들은 우리를 게토 밖에서 이곳으로 끌고 왔고, 우리는 끔찍한 죽음을 맞이해야 해요. 엄마가 우리와 이곳에 함께 있지 못하다는사실이 참 안타깝네요. 한편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지만요. 사랑해요, 엄마. 그동안 제게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해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끝없는 입맞춤을 보내요." - P400

민스크는 나치의 파괴적 본성을 가장 뚜렷하게 살펴볼 수 있었던곳이다. 독일 공군은 민스크가 항복을 선언한 1941년 6월 24일까지줄기차게 폭격을 퍼부었고, 심지어 독일 국방군은 그로 인한 불길이잦아들 때까지 도시 입성을 미뤄야 할 정도였다. 독일인들은 7월 말까지 교육 수준이 높은 현지인 수천 명을 사살했으며, 유대인들을 도시 북쪽 구역으로 몰아넣었다. 민스크에는 이제 게토, 강제수용소, 포로수용소, 대량학살을 위한 구역들이 생길 것이었다. 그곳은 결국승리의 대체물로, 즉 독일인들이 유대인 학살을 시연하는 일종의 무시무시한 죽음의 극장으로 바뀐다. - P404

041941년 가을 민스크. 당시 그곳의 독일인들은 모스크바가 여전히굳게 버티고 있는 와중에도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기념일인 11월 7일, 독일인은 단순한 대규모 사살보다 뭔가 더 극적인 것을 내놓기로 했다. 그날 아침, 그들은먼저 게토에 있던 유대인 수천 명을 체포했다. 또한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이 마치 소비에트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런 것인 양,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진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오게끔 해둔 상태였다. 그러고는 체포한 이들을 길게 늘어서게 한 뒤, 그들 손에 소련 깃발을 쥐여주며 소련의 혁명가를 부르라고 강요했다. 유대인들은자신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을 수밖에없었다. 이들 6624명의 유대인은 트럭에 실려 민스크 너머 투친카 근 - P404

처에 있던 과거 소련 내무인민위원회가 창고로 쓰던 장소로 끌려갔다. 그날 저녁, 고된 강제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유대인 남성들은 자신들의 가족 모두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그곳에는 우리 가족 8명, 아내, 아이셋, 나이 드신 어머니, 내 형제들, 가운데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테러 그 자체는 생소하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과거, 1937년에서1938년에도 사람들은 내무인민위원회의 검은 차량에 실려 민스크에서 투카로 끌려갔다. 하지만 스탈린의 대숙청 작업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그때도, 내무인민위원회는 언제나 사람들을 하나둘씩 어두운 밤을 틈타 끌고 가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 P405

이와 달리 독일은 많은 대중에게 알리고자, 여러 의미를 담아, 또 선전 영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대낮에 수많은 사람을 보란 듯이 끌고 갔다. 이렇게 연출된 가두 행진은 곧 ‘공산주의자는 유대인이며 유대인이 곧 공산주의자‘라는 나치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나치의 사고방식,
‘유대인 제거는 중앙 집단군의 후방 지역 안정화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로도 일종의 승리‘라는 생각에서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공허한 승리의 표현은 좀더 명백한 자신들의 패배를 숨기기 위해 고안한거짓말로 보일 따름이었다. 중앙 집단군은 1941년 11월 7일까지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당연히 이를 달성하지못한 상태였다. - P405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처럼, 스탈린도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때문에 깊은 딜레마에 빠졌다. 히틀러는 연합국이 유대인을 위해 싸우고있다고 말했고, 따라서 (국민이 이 주장에 동조할까 우려하던 연합국은자신들이 억압받는 국가들(하지만 특히 유대인은 아닌)을 해방시키고자 싸우고 있다는 주장을 펼쳐야 했다. 히틀러의 선전에 대한 스탈린의 답은 이후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의 소련 역사를 빚어냈는데, 그 대답은 바로 독일 학살 정책의 모든 희생자는 "소련 국민이지만 이 소련 국가 구성원의 최대 다수는 바로 러시아인이라는 것이었다. 그의선전 부장 중 한 명인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는 1942년 1월 "러시아인민, 모두 평등한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인민 대중 가운데 첫째, 이들야말로 독일 침략자들과의 투쟁에서 오는 짐의 대부분을 짊어지고 있다"는 선언을 통해 이를 명백히 밝혔다. 셰르바코프가저 말을 내뱉기까지 독일인들은 이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의동쪽에서 벨라루스 유대인 약 19만 명을 비롯해 100만 명에 이르는유대인을 학살하고 있었다. - P408

1942년 하반기, 독일의 대 빨치산 작전은 유대인 대량학살과 따로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히틀러는 1942년 8월 18일 벨라루스 내 빨치산들을 그해 말까지 "완전히 몰살시킬 것"을 명령했다. 물론 그 기한까지 유대인 역시 모조리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은 이미 잘알려진 사실이었다. 총살의 완곡한 표현인 ‘특별 조치"라는 말은 유대인과 벨라루스 시민들에 대한 보고서 양쪽 모두에서 등장한다. 둘 - P430

의 시행에 대한 기본 논리는 순환적이지만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눈에 들어오는 부분들이 있다. 이를 한번 살펴보자. 먼저 유대인들은1941년부터 애초에 "빨치산으로서 죽여야 할 대상이었는데, 이때만하더라도 아직 제대로 된 빨치산들의 위협은 없던 시점이었다. 그 뒤1942년 일단 그 같은 빨치산 활동이 시작되자, 이들과 관련된 민간인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몰살시켜야 할 대상이 되었다. 빨치산과 유대인의 동일시는 오직 두 집단 모두가 완전히 사라져야만 끝난다는 하향 궤적의 수사를 통해 끊임없이 강조되었다. - P431

1942년 가을에서 1943년 초까지, 독일은 게토 및 빨치산과 관련 있다고 판단된 모든 마을을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1942년 11월에 있었던 늪지열 작전 당시 디를레방거 부대는 그때까지 바라나비치 게토에 살아남아 있던 유대인 8350명을죽이고는 389명의 "노상강도"와 1274명의 "노상강도 용의자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러한 학살을 이끈 이는 바로 동방자치정부 나치 친위대 상급 장교 및 경찰 지휘부를 맡고 있던 프리드리히 예켈른으로, 앞서 우크라이나 카네츠포딜스키에서 있었던 대량 사실과 라트비아리가 게토에서의 이른바 정리 작업을 조직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1943년 2월의 이른바 2월 작전은 슬루츠크 게토에 대한 청소 작업, 다시 말해 유대인 약 3300명에 대한 사살과 함께 시작되었다. 슬루츠크 서남부 지역에서 독일인들은 9000명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12E - 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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