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이 점령한 땅에서 폴란드의 교육받은 계층을 이미 싹쓸이했다고 착각한 독일과 달리, 소련은 이를 실제로 상당 부분 달성하고 있었다. 독일 동방 총독부 관할 구역에서는 폴란드의 저항세력들이 점점 세를 불리고 있었지만, 소련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소련의치밀한 조직망에 의해 순식간에 분쇄되었으며 활동가들은 체포되거나, 추방, 경우에 따라 처형되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소련의 지배에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도전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불거지고 있었다. 폴란드는 약 500만에 달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터전이었고, 그들 대다수는 이제 소련령 우크라이나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들이 소련이라는 새로운 지배 체제에 만족해야 할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양차 대전 사이 폴란드 내에서 불법 조직으로 낙인찍혀 활동하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방법에도가 튼 이들이었다. 이제 그들에게 불법이라고 낙인찍었던 폴란드는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의 목표는 자연스레 소련이라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 P268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조직들은 이제 소련이 설치한 각종 제도에 맞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미 주도적인 민족주의자 몇몇은 양차 대전 사이에 독일 군사정보부를 비롯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나치정보기관인 SS 보안방첩부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스탈린이 짐작했던 것처럼 그들 일부는 여전히 베를린을 위해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새롭게 병합된 폴란드 동부에서 이뤄진 네 번째 강제이주의 주요대상이 우크라이나인들이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들에 앞선 강제이주의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주로 폴란드인들을 세 번째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이뤄졌었다. 네 번째 강제이주는 1940년 5월에 이뤄졌고, 그 대부분이 우크라이나인이었던 1만1328명이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특별 정착지로 보내졌다. 다음 달 19일의 마지막 강제이주는 2만2353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는데, 그들 대다수는 폴란드인이었다. - P269

진지한 인물이었던 그는 이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폴란드는 이제 독일에 맞서 싸울 두 번째 기회를 얻을 것이고 참스키의 임무는 사람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설 장교들을 찾는 것이었다. 모스크바로의 여정 동안 그의 마음속은 먼저 신에게 그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십자가에 못 박힌 폴란드를 지켜달라는, 율리우시 스와바츠키의 자학적인 폴란드 낭만주의 시구들로 가득 찼다. 그러고는 너무나 순수한 동료 폴란드인들에게 말을 건네며, 그는 치프리안 노르비트가 망명길에 고국에 대한 바람을 담아적은 가장 유명한 시구를 떠올렸다. "나는 바라네. 옳은 것에는 예라고 그른 것에는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을 흔들림 없는 등불을." 민족과 국적이 뒤섞인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자 점잖고 지적인 인물이었던 찹스키는 자신과 조국이 처한 상황을 낭만적 이상주의의 언어로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위안을 얻고 있었다. - P271

그 순간 두 사람이 느꼈던 슬픔, 즉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점령했던 시간은 이제 옛일이 되었다. 동맹국으로서 독일과 소련은1939년 9월에서 1941년 6월 사이 추정상 20만 명의 폴란드인을 살해했고, 약 100만 명을 삶의 터전에서 쫓아냈다. 폴란드인들은 앞으로 몇 달 또 몇 년 내에 수만 명이 죽음을 맞이할 소련 강제수용소와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독일이 점령한 지역에 있던 폴란드 유대인들은 게토에 갇힌 채 언제 어떻게 들이닥칠지 모를 운명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에 앞서 이미 수만 명의 유대인이 배고픔과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터였다. - P273

이것은 그야말로 근대성에 대한 공격이자, 특정 지역과 사회에 자리하던 이른바 계몽의 화신에 대한 공격에 다름 아니었다. 동유럽에서특정 사회가 갖고 있는 자부심은 바로 지식인 계급을 뜻하는 "인텔리겐차"에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특히 조국이 고난에 처했거나 타인의 손에 떨어졌을 때 그런 조국을 이끌어가는 자들로 여겼다. 아울러 저술, 연설,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모국의 문화를 잘 지키는 것 또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 여기던 자들이었다. 독일어에도 이와 똑같은 단어가 똑같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그러했기에 히틀러가명확하게 내린 명령이 "폴란드 인텔리겐차의 절멸"이었던 것이다. 앞서 소련 코젤스크 심문관들의 수장은 "서로 다른 두 철학을 이야기했고, AB 악치온이 펼쳐질 당시 어느 독일 심문관은 곧 사형당할 노인에게 "폴란드인들만의 사고방식을 보이라고 명령했다. 그 대상들은바로 폴란드 문명의 화신이자, 그것만의 특별한 사고방식을 나타낸다고 여겨진 지식인 계층이었다. "
두 점령국의 손에 자행된 대량학살, 그것은 바로 폴란드 인텔리겐차가 자신들의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는 비극의 증거였다. - P274

1941년 6월 22일은 유럽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날 중 하나다. 이날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개시된 독일의소련 침공은 단순한 기습 공격, 독소 동맹관계의 변화, 전쟁의 새로운국면 따위를 뛰어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재앙의 시작점이었다. 독일 국방군(그리고 그 동맹군)과붉은 군대의 교전은 1000만이 넘는 군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물론여기에 더해 비슷한 숫자의 민간인 역시 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비행 중에 폭격으로, 또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목숨을 잃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또한 독일은 이 기간에 약 1000만명 이상을 계획적으로 살해했는데, 여기에는 500만 명을 웃도는 유대인과 300만 명이 넘는 전쟁포로가 포함되어 있었다. - P277

1940년 말에서 1941년 초, 소련과 나치 독일은 유럽 대륙 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양대 강대국이었지만, 좀더 넓은 차원에서까지 그랬던 것은 아니다. 확실히 그때까지 두 국가는 유럽의 판을새롭게 싸오고 있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미 전 세계의 판을 짜오던 세력이었다. 소련과 나치 독일은 특정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양쪽 다 자신들의 동맹에 저항하던 대영제국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단기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대영제국과 그들의 해군력이 만들어놓은 세계 체제는 나치든 소련이든 당장에 뒤엎을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 길을 택하는 대신 다른 길, 즉 비록대영제국과 영국 해군이 위용을 떨치고 있지만 일단은 자신들 눈 - P282

앞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혁명 과업을 완수하며, 제국을 만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서로 동맹이든 아니면 적이든, 또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나치 지도부 앞에는 강력한 영국의 존재라는 현실이 던지는 근본적인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바로 현대 세계에서 거대한 대륙 제국이 세계 시장으로의 안정된 연결 통로 없이, 그리고 막강한 해군력 없이, 어떻게 번영을 누리며 자신의 지배력을 확보해낼 수 있을까라는 문제였다.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스탈린과 히틀러가 내놓은 기본 답안은똑같았다. 즉 그런 국가는 반드시 넓은 땅을 보유하고 경제적 자급자족을 일궈낼 수 있어야 하며, 체제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따라서 스탈린주의의 내부적 산업화 혹은 나치의 식민지 토지개혁과 같은 이른바 자신들의 역사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시민들을 보유해야만 한다.  - P283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은 풍부한 식량, 원자재, 광물자원으로뒷받침되는 거대 규모의 제국주의적 경제 자립국가를 지향했다. 아울러 스탈린의 이름이 철을 의미하는 스틸Steel에서 따온 것이라는점, 그리고 히틀러 또한 철 생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데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현대에 특정 자원이 갖는 중요한 의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과 히틀러 모두 농업을 자신들의 혁명 완수를 위한 핵심 요소로 파악했다. 두 사람 눈에, 자신들의 체제는 식량 생산을 통해 나머지 세계로부터 좌우되지 않는 경제적 자립을 일궈낼 것이며, 타락한 자본주의 체제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줄 것이었다. - P283

우크라이나의 식량은 소련의 완전무결성을 지키고자 했던 스탈린의 계획에서만큼이나 나치의 동부 제국 계획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것이었다.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요새지대는 곧 히틀러의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였다. 독일군 작전 참모진은 일련의 연구를 통해1940년 8월, 우크라이나가 "농업적으로나 공업적으로 소련에서 가장가치 있는 지역"이라고 결론 내렸다. 1941년 1월 민간 계획을 책임지고 있던 헤르베르트 바케는 히틀러에게 "우크라이나 점령은 우리를모든 경제적 걱정거리에서 벗어나도록 해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를 통해 히틀러가 원한 것은 "이제 그 누구도 지난처럼 우리를 배고픔에 허덕이게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정복은 독일을 영국의 해상 봉쇄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것이고, 그곳에대한 식민화는 독일을 미국과 같은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만들어줄것이었다. - P289

독일의 기획자들이 파악했듯이, 집단농장이란 수백만의 사람을굶겨 죽이는 것이었고, 따라서 다시금 써먹어야 할 방식이었다. 그랬다. 그들은 이번에는 수백만이 아닌 수천만 명을 굶겨 죽일 작정이었다. 과거 소련의 집단화는 초기에는 비효율성으로 인한 의도치 않은결과에 따라, 그리고 비현실적인 식량 생산 목표 때문에, 그다음에는1932년 말과 1933년 초의 의도된 악의적 착취의 결과로 우크라이나에 기아를 몰고 왔다. 이와 달리 히틀러의 집단화는 사전에 짜놓은아사 계획으로, 그 대상은 바로 달갑지 않은 소련 주민들이었다. 독일의 기획자들은 이미 독일의 수중에 떨어진 유럽 지역을 다룰 때 약2500만 명을 먹여 살릴 만큼의 식량 수입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소련의 농촌 인구 역시 제1차 세계대전 이래 약 2500만명 정도로 증가했다고 파악했다. 해결책은 너무나 단순한 것, 즉 전자가 살기 위해 후자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계산한 바에따르면, 집단농장에서 생산한 식량은 독일인들을 먹여 살리기에 딱 - P290

적당한 수준이지만 그 외의 동쪽 인민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모자랐다. 그런 점에서 이들 동쪽 주민은 정치적 통제와 경제적 균형을 위한수단으로 치부되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1941년 5월 23일까지 공들여 만들어낸 굶주림 계획, 소련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기간 및 그 후 정복지의 소련시민들을, 특히 대도시 지역의 시민들을 굶김으로써 독일군과 독일(및 서유럽) 민간인들을 먹여 살린다는 계획이었다. 이제 우크라이나지역의 식량은 러시아와 나머지 소련 지역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전처럼 북쪽으로 운송되는 것이 아니라, 독일과 나머지 유럽 지역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서쪽으로 운송될 것이었다. 독일이 보기에, 우크라이나(그리고 러시아 남부 지역)는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식량이 생산되는 "식량 과잉 지역"이었고,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이와 반대로 "식량결핍 지역"이었다.  - P291

기아, 그리고 식민화는 토의되고, 합의되고, 고안되고, 할당되고, 양해된 독일의 정책이었다. 굶주림 계획의 기본 틀은 1941년 3월까지수립되었다. 이에 관한 일련의 "경제 정책 세부 지침들은 5월에 나왔다. 다음 달인 6월, 비문 등을 삭제한, 흔히 "녹색 서류철‘로 알려진지침서 1000부가 독일군 장교들 사이에 나돌았다. 침공 직전 힘러와괴링은 어땠을까? 힘러는 장기적 관점에서 동유럽 종합 계획의 인종 - P292

적 식민지 부분을, 괴링은 단기적 관점에서 굶주림 계획의 기아 및 파괴라는 전후 기획의 중요한 부분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독일의 의도는 동부 유럽을 토착 인구 말살을 전제로 하는 농업 식민지로 탈바꿈시킬 파괴적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스탈린이 했던 모든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셈이었다. 일국사회주의는 독일 인종을 위한 사회주의, 즉 국가사회주의로대체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계획이었다. - P293

잔혹하다는 것은 효율적이라는 것과는 다른 말이다. 그리고 독일의 계획은 현실로 옮기기에는 너무나 악랄한 것이었다. 독일 국방군은 굶주림 계획을 제대로 추진할 수가 없었다. 윤리나 법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독일군은 히틀러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전쟁 시 민간인들에 관련된 법이나 규칙 등을 따라야 할 의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였고,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학살하는 데 단 한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침공 첫날부터 과거 폴란드에서 했던 것 이상을 보여주었다. 침공 이튿날, 독일군은 민간인들을 전장으로 끌고 와 인간 방패로 쓰고 있었다. 폴란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련군은 잡는 즉시 사살해야 할 빨치산으로 취급되기 일쑤였고, 항복을 시도하는 이들 역시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붉은 군대에서는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제복 입은 여군들은 단지 여성이라는이유로 먼저 살해당했다. 대규모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기아 유발 정책은 현실적으로 실행에 옮기기 어렵다는 것이 바로 독일이 처한 문제였다. 더 많은 땅을 공략하는 것이 오히려 식량 재분배문제 처리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었다. - P298

바르바로사 작전은 독일에 늦어도 석 달 안에 "전격적 승리"를 따내고자 빠르고 과감하게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붉은 군대가 연이어 후퇴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전투가 개시된 지 2주차에 접어들었을 무렵 독일은 이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폴란드 동부 전역은 물론 대부분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부를 손에 넣은 상태였다. 독일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는 1941년 7월3일의 일기에서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믿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8월 말까지 독일은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또 다른 지역일부, 남아 있던 벨라루스 지역을 추가로 병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전쟁의 속도는 애초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으며, 핵심 목표들은 달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소련 지도부는 여전히 모스크바에 남아있었다. 어느 독일 군단장이 1941년 9월 5일 간결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적었듯이, "전격전의 승리도, 러시아 군대의 괴멸도, 소련의 붕괴도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 P301

1939년11월 스탈린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에 따라 자신의 영향권 아래 있는 핀란드를 공격함으로써 핀란드인에 대한 적개심을 만천하에드러냈다. ‘겨울 전쟁‘이라 불리는 이 기간에 핀란드인들은 붉은 군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그들의 명성을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1940년 3월, 핀란드 땅의 10분의 1에 해당되는 영토를 스탈린에게 넘겨주어 레닌그라드를 둘러싼 일종의 완충지대로 만드는 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연스레 핀란드인들은잃어버린 땅을 되찾고자 또 자신들이 ‘연속 전쟁‘이라 부르게 될 전쟁을 통해 소련에 복수하고자 했고, 1941년 6월 히틀러 곁에는 이 핀란드 동맹군이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손에 넣을 생각도, 그곳을 핀란드인들에게 넘겨줄 생각도 없었다. 그가 바랐던 것은레닌그라드를 아예 지도상에서 통째로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레닌그라드에 사는 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도시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 P308

만들어버려야 한다. 그 뒤에야 비로소 그 지역을 핀란드인에게 넘겨줄수 있다는 것이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1941년 9월, 북부 집단군이 레닌그라드 남부의 도시들을 포위·포격하는 군사 작전에 돌입함에 따라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를 북쪽에서부터 봉쇄해 들어갔다. 비록 독일군 지휘관들이 소련 도시들에 대한 히틀러의 극단적인 계획들을 낱낱이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레닌그라드를 말려 죽여야 한다는 데는 동감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군 병참감 에두아르트 바그너가 아내에게 적은 편지를 살펴보자. 그는 이 군사 행동으로 인해 총 350만 명에 달하는 레닌그라드 주민은이제 스스로의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 P309

동쪽 땅에 설치된 수용소의 구조는 슬라브족이든 아시아인이든아니면 유대인이든 독일이 이들의 생명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를그대로 드러냈고, 바로 그것이 그 같은 대규모 기아를 감히 실행에 옮길 수 있게 한 원인이었다. 전쟁 기간에 붉은 군대 포로들이 갇혀 있었던 독일 포로수용소의 사망률은 575퍼센트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직후 8개월 동안의 사망률은 그보다 훨씬 더 높았던 게 틀림없다. 반면 독일이 서방 연합군 포로들을 가둬두었던 포로수용소의 사망률은 5퍼센트에 못 미쳤다. 1941년 가을 어느 하루 동안 사망한 소련군포로들의 숫자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목숨을 잃은 영국군과미군 전쟁포로 전체 숫자와 맞먹었다. - P325

그러나 이 같은 잔혹함은 소련의 사기를 꺾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소련의 의지를 더욱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정치 장교, 공산주의자, 유대인을 가려내는 작업은 무의미했다. 이미 붙잡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소련을 그다지 약화시키지 못했다.
실제로 대규모 기아 정책과 신원 선별 및 조사 작업은 붉은 군대가더욱 맹렬히 저항하도록 만들었다.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배고픔에몸부림치다 죽을 것이 빤하다면, 군인들은 싸우는 길을 택할 게 틀림없다. 붙잡히면 그 즉시 총살임을 잘 알고 있던 공산주의자와 유대인 그리고 정치 장교들이 항복을 선택할 리 만무했다. 독일이 점령한지역에서 어떤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지가 알려짐에 따라, 소련 시민들은 기존 소련의 통치에 대해 ‘구관이 명관‘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P330

독일이 애초에 계획했던 것에 비춰보면, 소련 침공은 말 그대로 완벽한 실패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전격적인 승리"를 가져다주어야했건만, 1941년 늦가을까지도 승리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독일이 처한 모든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던 소련 침공은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점령한 (예컨대) 벨기에가 나치 독일에게 있어 좀더 중요한 경제적 요충지였다. 소련의 인구는 초기 계획상쓸어버려야 할 대상이었지만, 정작 소련에서 들여올 수 있었던 가장중요한 경제적 자원은 바로 이들의 노동력이었다. 여기에 더해 정복한소련 땅은 나치가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에 있어 대안적 장소가 되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노역에 시달리거나, 아니면 우랄산맥 너머로 혹은 수용소로 추방될 것이었다. 그러나1941년 여름 소련이 보여준 방어력은 이 같은 마지막 해결책을 다시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 P331

독일인들은 굶주림과 공포로 가득 찬 포로수용소의 포로들 중 최소 100만 명을 따로 뽑아 자신들의 군대 및 경찰력을 보조하는 인원으로 썼다. 애초에는, 소련이 무너지면 이들의 도움을 통해 소련 영토를 좀더 손쉽게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소련을무너뜨리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전쟁이 길어지자, 이 소련인들에게는 히틀러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점령지역에서 시행하고자했던 대량학살을 보조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앞서 수용소의 포로였던 이들 보조자에게는 삽이 쥐어졌고,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쏴 죽일장소에 도랑을 파라는 명령이 뒤따랐다. 다른 이들은 유대인을 쫓던경찰 조직에 편성되었다. 몇몇 포로는 트라브니키에 있는 훈련소로 보내져 경비병 훈련 과정을 밟기도 했다. 나치에 봉사하도록 재훈련 받은 이 소련 시민 및 참전 군인들은 1942년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트레블린카, 소비부르, 베우제츠의 학살 시설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은앞으로 100만 명이 넘는 폴란드 유대인이 독가스를 마시고 숨져갈장소였다. - P333

히틀러가 꿈꾸던 것들은 소련과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서 완전히박살나버렸다. 하지만 그의 유토피아는 불합격이라는 판정보다는 다시금 고쳐 만들어지는 길을 밟게 된다. 히틀러는 그야말로 위대한 지도자였고, 그의 뜻을 짐작하고 실현시키는 능력이야말로 그 주변의심복들이 각자 한 자리씩 꿰차고 있던 이유였기 때문이다. 1941년의절반이 지난 시점이자 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로 히틀러의 뜻을 실행에 옮기기 어려워진 바로 그 시점에, 괴링, 힘러, 하이드리히 같은 이들의 과업은 바로 히틀러의 천재성을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나치 정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그의이상을 재조정하는 것이었다. 1941년 여름까지의 유토피아는 다음의네 가지였다. 바로 소련을 몇 주 만에 무너뜨릴 전격적 승리가 그 첫번째였고, 두 번째 유토피아는 3000만 명을 몇 달 내로 굶겨 죽일 굶 - P337

주림 계획이었으며, 전쟁 뒤 유럽의 유대인들을 완전히 쓸어버릴 마지막 해결책이 그 세 번째, 소련의 서쪽 땅들을 독일의 식민지로 만들이른바 동유럽 종합 계획이 그 네 번째 유토피아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행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 되자, 히틀러는 유대인 말살에우선순위를 배정하는 쪽으로 전쟁 목표를 수정하기에 이른다. 그때까지 그의 심복들은 그러한 바람들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행정적 책임과 재량권을 지니고 있었다전격적 승리는 끝내 없었다. 비록 수백만 명의 소련 시민이 기아에목숨을 빼앗겼지만, 굶주림 계획은 실현 불가능한다는 게 명백해졌다. 동유럽 종합 계획 또는 전후 식민화 계획은 무엇이 됐든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 P338

유토피아가 시들해지자, 정치적 미래는이러한 환상들에서 그나마 실제로 뽑아낼 수 있는 것들에 달려 있게되었다. 괴링, 힘, 하이드리히 세 사람은 엉망이 돼버린 폐허 속에서그나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차지하고자 앞다투어 움직였다. 나치 정권의 경제 전반 및 굶주림 계획을 맡았던 괴링은 최악의 상황에놓였다. "제국의 2인자이자 히틀러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그는 독일내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동쪽에서는 거의 아무런역할도 맡지 못했다. 전후의 거대한 기획에 있어 경제 문제 처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고 동시에 눈앞의 전쟁을 어떻게든 계속할 자원 마련이 좀더 시급한 일이 됨에 따라 괴링은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주도권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러했던 괴링과 달리 하이드리히와 힘러는 마지막 해결책의 재공식화, 즉 애초 계획과 달리 전쟁 중에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식의 수정을 통해 좋지 못한 전선 상황 - P338

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해먹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히틀러가 1941년 8월부터 말하기 시작했듯이 이 전쟁이 유대인과의 전쟁"이 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다힘러와 하이드리히는 유대인 말살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여기고 있었다. 1941년 7월 31일 하이드리히는 괴링으로부터 마지막 해결책수립에 관한 공식 권한을 받아냈다. 이 기획에는 여전히 앞서의 강제이주 계획에 대한 조정 및 유대인들을 정복한 소련의 동쪽 땅에서 죽을 때까지 노역을 시키겠다는 하이드리히의 계획이 들어 있었다. 그가 마지막 해결책의 조율을 위해 반제에서 회의를 열고자 했던 1941년 11월까지도, 하이드리히는 분명 그러한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일할 수 없는 유대인들을 없애야 할 것이다. 육체노동을 감당할수 있는 유대인들은 점령한 소련 땅 어딘가에서 죽을 때까지 노역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하이드리히의 생각은 당시 독일 정부 내에서 광범위하게 공감대를 사고 있었다.  - P339

스탈린 덕분에 영토를 넓힌 지 딱 반년 뒤, 리투아니아는 자신들의후원자로 보였던 이들 소련에게 정복당했다. 1940년 6월 스탈린은리투아니아와 그 외 발트 국가들, 즉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를 장악하고는 서둘러 이들 지역을 소련에 병합시켜버렸다. 이 합병 작업 후소련은 리투아니아에서 수많은 리투아니아 엘리트를 비롯한 약 2만1000명에 달하는 사람에게 강제이주 명령을 내렸다. 리투아니아 수상과 외무장관 역시 추방된 수천 명 중 하나였다. 리투아니아 정치및 군사 지도자들 중 몇몇은 수용소를 탈출해 독일로 도망치기도 했는데 - P344

흔히 사전에 베를린에 선이 닿아 있던 이들이거나 아니면 침략군인 소련에 줄곧 적의를 품고 있던 이들이었다. 독일은 리투아니아에서 온 정치적 망명자들 중 우익 민족주의자들을 선호했으며, 이들중 몇몇을 훈련시켜 자신들의 소련 침공에 함께하도록 했다.
따라서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쳤을 때 리투아니아는 매우 독특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맨 처음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으로 이익을 봤고, 그 뒤 소련에게 정복당했으며, 이제는 독일의 손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소련의 무자비한 점령을 겪은 리투아니아인들은 이 같은 변화를 반기는 분위기였고, 이들 중에는 극소수의 리투아니아 유대인도 있었다.  - P345

정치적 계산과 그간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받았던 고통들이 이들의그 같은 집단학살에의 참여를 온전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독일인들과 해당 지역 비유대인들을 한데뭉치게 만들었다. 분노는 독일이 바랐던 대로 소련에 협력한 자들보다는 유대인들을 향하게 되었다. 독일의 주장에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겪은 아픔의 원흉이 유대인들이라 믿었건 믿지않았건 이제 스스로가 새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행동을 통해 나치의 세계관을 좀더 분명히 해주고있었다. 내무인민위원회의 처형에 대한 앙갚음으로서의 유대인 학살은 소련이 유대인 국가라는 나치의 시각을 뚜렷하게 해주었다. 또한유대인에 대한 폭력은 앞서 스스로 소련에 협력했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얻은 변절자라는 오명을 벗어던질 기회였다. 유대인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은 점령한 자뿐만 아니라 몇몇 점령당한 이들에게도 요긴한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 P353

하지만 이 같은 심리적 나치화는 너무나 명백했던 소련의 잔혹 행위들이 없었다면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집단학살은 소비에트가 갓 들어와 그들의 시스템을 최근까지 안착시켰던 곳, 지난 몇달 동안 소련의 강압적 기관들이 체포와 처형 및 강제이주를 집행했던 지역에서 벌어졌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소비에트와 나치의 공동작품, 즉 소비에트 텍스트의 나치 버전이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 소비에트가 남긴 폭력의 흔적들은 나치 친위대와 그 지도부에게 있어 아주 유용했다.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이전부터 ‘삶은 이데올로기들 간의 충돌이며, 법의 지배에관한 전통적인 유럽식 이해는 동쪽의 인종적·이데올로기적 적들을무찌르는 데 필요한 가차 없는 폭력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내내 고수해왔었다.  - P354

너무나 확연하게 드러나는 소비에트 폭력의 기록들로 말미암아 독일은 심지어 자신들만의 범죄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스스로를 과거소비에트가 벌인 범죄의 상처들을 원래대로 회복시켜주고 있다는 식으로 내세울 수 있었다. 그들이 귀가 따갑도록 표방한 것들에 비춰보면, 두 번의 점령을 받은 이들 지역에서 독일이 찾아낸 것들은 그들로하여금 어떤 특정한 느낌을 받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로 과거 이들이 훈련받고 또 목격할 준비가 되었다고 여겨지던 것들, 즉 추정상으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뒤에서 조종한‘ 소비에트의 범죄에 대한 일종의 확인이었다. 소비에트가 벌인 잔혹 행위들은 독일의 나치 친위대원, 경찰, 군인들이 이내 벌이게 될 유대인 여성 및 아동 학살 정책을 스스로에게 정당화하는 아주 좋은 구실이될 것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범죄 행위들을 겪은 지역 주민들에게 중대한 의미를 지녔던 교도소 수감자들에 대한 소련의 학살은,  - P355

스탈린의 정보원들이 내린 판단은 정확했다. 결정적으로 일본은 태평양에서 전쟁을 벌일 참이었고, 이는 곧 시베리아에 대한 공격 옵션이 완전히 배제되었음을 뜻했다. 일본제국주의가 남쪽으로 뻗어갈계획은 1937년까지 이미 구상이 끝난 상태였다. 그리고 이는 1940년9월, 그들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략함으로써 확실해졌다. 앞서히틀러는 동맹 일본을 자신의 소련 침공에 끼지 못하도록 했다. 이제그 침략이 실패에 이르자, 일본 역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심지어 붉은 군대가 서쪽으로 진격하던 1941년 12월 6일, 일본의항공모함대는 미국 태평양 함대가 주둔하고 있던 진주만을 향하고있었다. 어느 독일 장군은 12월 7일 당시 모스크바를 둘러싼 전투 상황을 담은 편지를 집으로 보냈는데, 그는 자신과 자신의 병사들에 대해 "우리는 시시각각 각자의 헐벗고 굶주린 몸뚱어리를 지키기 위해, - P379

모든 면에서 한 수 위인 적들과 싸우고 있소"라고 적었다. 바로 그날,
일본 전투기들의 물결은 미군 함대를 습격, 정박 중이던 전함 몇 대를파괴하고 미군 2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튿날 미국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12월 11일, 나치 독일 역시 미국과의 전쟁을 선언했는데, 이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로 하여금 독일과의 전쟁을 거리낌 없이 선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제 스탈린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꽤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만약 일본이 태평양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미국과 겨룰 생각이라면, 그들이 시베리아에서 소련과 대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스탈린은 더 이상 전선이 양쪽으로 분산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에 더해 일본의 미국 공격은 미국을 소련의동맹으로서 전쟁에 참여하도록 만들어버렸다. 일본이 독소전에 중립을 취했던 관계로, 머지않아 미국의 보급선들은 일본 잠수함들의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소련의 태평양 항구에 들어갈 것이었다.  -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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