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12년 집권과 소련의 74년 집권은 분명 우리가 세계를 평가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은 나치의 범죄가 역사적으로도 보기드물 정도로 심각했다고 여긴다. 이는 히틀러 스스로가 실제 이상으로 성과를 신봉한 것과 묘한 대응을 이룬다. 또 다른 사람들은 스탈린의 범죄가 비록 그 참혹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근대 국가를 지켜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을 고수한다. 이는 역사가 오직 한방향으로만 움직인다는, 따라서 어떤 정책을 쓰든 그 방향과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모두 정당하다는 스탈린의 믿음을 일깨워준다. - P21

전혀 다른 기초 위에 세우고 다져진 역사 없이는, 우리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아직도 우리를 그들의 올가미에 쥐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기초란 뭐가 될까? 이 연구는 군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지성사를 포괄하고 있지만, 사용하는 기본 연구 방법은 단순하다. 1) 과거의 어떤 사건도 역사적 이해를 초월할 수 없다. 또는 역사 탐구의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점을 고수할 것. 2) 당시 사람들이 선택할수 있는 대안이 확실히 있었는지에 대해 숙고할 것. 3) 다수의 민간인및 전쟁포로를 학살한 스탈린과 나치의 정책을 시기순으로 정연히 따져볼 것. 이는 제국의 지정학에서가 아니라, 희생자의 지리학에서 구성되는 문제다. 실제로는 허구로든 블러드랜드는 정치적 지역이 아니다. 유럽의 가장 살인적인 체제들이 가장 막대한 살육을 저지른 곳. 그저 그뿐일 따름이다. - P21

역사는 유럽의 과거사를 국민 단위에서 나누고, 그 단위들이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하면서 종종 이지적이고도 용감하게 지켜져왔다. 하지만 어느 한 집단의 학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아무리 잘 하더라도1933년에서 1945년까지 유럽에서 벌어진 일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우크라이나의 과거사를 완벽하게 안다고 해도, 그들이 겪은 굶주림의 원인을 알아낼 수는 없다. 폴란드 역사를 착실하게 익혀도 왜대숙청 시기에 그토록 많은 폴란드인이 죽어가야 했는지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벨라루스의 과거사를 연구한다 해도 그토록 많은 벨라루스인이 포로수용소와 대빨치산 전역에서 숨져가야 했던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 유대인들의 삶을 연구하면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알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원인은 설명할 수 없다. 한 집단에 벌어진일은 종종 다른 집단에 벌어진 일과 비교했을 때 이해된다. 그러나 그런 비교는 시작일 뿐이다. 나치와 소련 체제 역시 그 지도자들이 이땅들을 어떻게 장악하려 애썼는지, 그리고 이들 집단을 어떤 관계에놓고 봤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 P23

오늘날 20세기의 대량학살이야말로 21세기에도 가장 중대한 도덕적 의미를 갖는다는 데는 널리 합의가 이뤄져 있다. 그렇다면 블러드랜드의 역사에 대해 알려진 게 없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집단학살은 유대인의 역사를 유럽사에서 떨어뜨려놓고, 동유럽의 역사도 서유럽의 역사와 구분 짓게끔 한다. 살육이 국가 민족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이론적인 구분에 영향을 준다.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가 사라진 지 수십 년이 지나서도 말이다. 이 연구는 나치와 소련 체제를 하나로, 유대인사와 유럽사를 하나 - P22

로, 각 국민의 역사를 하나로 묶는다. 희생자와 집행자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그만행에 개입된 이데올로기와 실행 계획을 따지고, 그런 만행이 벌어지게 만든 체제와 사회를 분석한다. 이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지도자들이 내린 명령으로 살육당한 사람들의 역사다.
희생자들의 고향 땅은 베를린과 모스크바 사이에 있었고, 그 땅은 히틀러와 스탈린이 집권한 다음 온통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 P23

나치와 소련 체제의 기원, 그리고 그들이 왜블러드랜드에서 만나게되었는지의 기원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에 있다. 이 전쟁은 유럽의 옛 대륙 제국들을 무너뜨리는 한편, 새로운 제국에 대한 꿈을 일으켰다. 황제들의 왕조 통치 방식을 국민 주권에 의한 통치라는 약하디약한 개념으로 바꿔놓았다. 수백만 명의 사람이 명령에 따라 싸우고 죽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목적이라는 것은 추상적이고 멀게만 느껴지는 것, ‘조국을 위하여‘였다. 그 조국이란 이미 수명을 다했거나, 이제 막 태어나려 하는 것이었건만. 새 국가들은 거의 무에서부터 만들어졌으며, 수많은 민간인 집단이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옮겨지거나 말살되었다. 10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이 오스만 정권에 의해 학살되었다. 독일계 주민과 유대인들이 러시아 제국에 의해 거주지에서 멀리 이동했다.  - P27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이 전쟁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던 세계 경제를 조각내버렸다는 사실이다. 1914년에 살아 있던 유럽의 성인은 생전에 두번 다시 그만큼의 자유무역이 복구되는 일을 보지 못했다. 또 그런 유럽인의 대부분은 그 전 시대 수준의 번영을 다시는 누려보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간단히 말해서 두 진영의 무력 충돌이었다. 한쪽 진영에는 독일 제국, 합스부르크 왕실,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동맹 제국")가, 반대 진영에는 프랑스, 러시아 제국, 영국, 이탈리아, 세르비아, 미국("협상 제국")이 있었다. 1918년 협상 제국의 승리는 3대 유럽 대륙 제국인 합스부르크, 독일, 오스만의 종말을 가져왔다.  - P28

레닌은 평화를 얻은 대신 러시아 제국의 서쪽 변방이던 곳들을 독일의 식민 지배 아래 내주었다. 그러나 물론, 독일 제국도 폭압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나머지와 함께 곧 쓰러져버릴 테니 별문제는 아니라고 볼셰비키는 믿었다. 그때가 되면 러시아와 다른 혁명 세력은 그들의 새 질서를 서쪽으로, 지금 빼앗긴 땅의 훨씬 너머까지 퍼뜨릴 수있으리라. 레닌과 트로츠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서부 전선에서의 독일의 패배를 그리고 독일 내에서의 노동자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주장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중부와 서부 유럽의 좀더 산업화된 땅에서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으로 그들과 다른마르크스주의자들의 러시아 혁명을 정당화한 것이다. 1918년 말과1919년에는 레닌의 생각이 맞아떨어지는 듯 보였다. 1918년 가을,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프랑스, 영국, 미국에게 확실히 패배했다. 그리고 패배하지는 않았으되 그들의 새로운 동쪽 땅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독일 혁명가들은 집권을 위해 산발적인 시도를 벌이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거저먹었다. - P31

나중에 히틀러는 독일 수상으로서 소련과 더불어 폴란드를 분할하는 조약을 맺게 된다. 이 단계를 밟으며, 그는 많은 독일인이 가졌던 극단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폴란드의 국경선은 부당하며, 그 국민은 국민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 히틀러가 여느 독일 민족주의자와 달랐던 점은 그다음에 품었던 그의 생각에 있었다. 모든 독일인을하나로 모은 독일을 세우고, 폴란드를 정복한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 P38

쓸어버리고, 소련을 무너뜨린다! 그 과정에서 히틀러는 폴란드와 소련 모두에 우호적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여느 독일인보다 더 극단적인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감추었다. 하지만 국가사회주의에는 처음부터 이 파멸적인 비전이 나타나 있었다. - P39

소련의 민족들은 새로운 공산주의적 이미지로 재탄생해야 했다. 농민은 정복당할 때까지 살살 달래졌다. 볼셰비키는 지방의 농민들과 일시적으로 타협했지만 이는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의 잠시 동안만이었다. 새 소련 체제는 농민들이 지주들에게서 빼앗은) 토지를 보유하고 시장에 상품을 내다 파는 일을 허용했다. 전쟁과 혁명의 결과 초래된 파괴로 심각한 식량 부족 문제가 발생했다. 볼셰비키는 그들 자신과 그들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의 수요를 위해 곡물을 요구했다. 1921년에서 1922년까지 수백만 명이 굶주림이나 그와 관련된 질병으로 죽었다. 볼셰비키는 이 경험으로 식량이 무기가 될 수 있음을깨달았다. 그러나 일단 이 갈등기가 끝나고, 볼셰비키가 승리했을 때, 그들은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인민에게 평화와빵을 약속했으며,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그 두 가지를 헐값으로 제공해야만 했다. - P41

대공황의 도래는 스탈린이 시장의 불안정성‘에 대해 한 말을 입증해주는 듯 보였다. 1929년 10월 7일의 ‘검은 목요일‘에 미국의 주식시장은 붕괴되었다. 1929년 11월 7일, 이날은 볼셰비키 혁명 12주년 기념일이었는데, 스탈린은 스스로의 정책으로 소련을 빠르게 바꾸고 있는 ‘시장에 대한 사회주의 경제의 대안을 강조했다. 그는 1930년이면 "위대한 전환이 이뤄지는 해가 될 것이라고, 집단화가 안정과 번영을가져올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때쯤이면 옛 농촌 지역은 자취를 감추게 되리라. 그리고 혁명은 여러 도시에서 완성되리라. 프롤레타리아는순화된 농업노동자들이 생산한 식량을 기반으로 부쩍 성장해 있으리라. 그들 노동자는 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사회를 창출할 것이며, 강력한 국가는 외부의 적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리라. 스탈린은 근대화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듯이, 스스로의 권력욕 역시실현되게끔 했다. - P45

1933년, 민주주의에 대한 소련과 나치식 대안은 단순한 토지개혁따위는 하지 않겠다(실패한 민주 국가들은 그마저 이뤄내지 못했지만)는그들의 입장이 어떤 성과를 내놓느냐에 달려 있었다. 서로 그토록 다른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스탈린은 문제의 핵심 중 하나가 농업 부문에 있으며 그 해결책은 과감한 국가 개입에 있다는 데서 의견이 일치했다. 국가가 급진적인 경제 개혁을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새로운 유형의 정치체제를 뒷받침하게 될 것이었다. 1928년스탈린의 5개년 경제계획이 시작된 이래 공공연해진 스탈린식 접근법은 집단화였다. 소련 지도자들은 1920년대에 농민들이 번영하도록놔두었으나, 1930년대 초부터 농민들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농민이국가를 위해 일해야 하는 집단농장을 만들어냈다. - P51

히틀러와 스탈린은 베를린과 모스크바에서 권좌에 올랐으나, 그들의 혁신 비전은 그 둘 사이에 놓인 모든 땅에 걸쳐 있었다. 그들이 통제하려는 유토피아는 우크라이나에서 겹쳤다. 히틀러는 1918년에 독일이 잠시 지배했던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의 식민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직후에 자신의 혁명을 우크라이나에서 실행한 스탈린은 그 땅을 히틀러와 거의 같은 시각에서 바라봤다. 그 농토와 농민은 현대산업국가를 만들기 위해 최대한 쥐어짜야할 대상이었다. 히틀러는집단화가 형편없는 실패로 끝날 거라고 보며, 이는 또한 소련 공산주의의 실패의 증거라고 내세웠다. 그러나 스스로는 독일인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야 함을 추호도 의심치않았다 - P53

그곳은 그들이 기존 경제학의 법칙을 깨뜨릴 수 있게 해주는 땅이자, 그들의 나라를 궁핍과 고립에서 벗어나게 해줄 땅, 그리고 그들의 이미지대로 유럽 대륙을 바꿔나가게 해줄 땅이었다. 그들의 프로그림과 그들 권력의 성패는 온통 우크라이나의 기름진 땅과 그곳의수백만 명의 농업노동자에 기대고 있었다. 1933년, 우크라이나인들은사상 최대의 인위적 기근 때문에 수백만 명씩 굶어 죽었다. 그것은우크라이나의 특별했던 한 시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끝은 아니었다.
1941년에는 히틀러가 우크라이나를 스탈린의 손에서 빼앗았다. 그리고 스스로의 식민지 건설을 위해, 먼저 유대인들을 총살하고 소련군 포로들을 굶겨 죽이기 시작했다. 스탈린 일파는 그들 스스로의 국가를 식민지화했으며, 나치는 점령한 소련의 우크라이나를 식민지화했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권좌에 있었던 세월 동안, 블러드랜드의 다른 어느 지역에서보다. 또한 다른 유럽 지역, 나아가 세계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우크라이나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 P54

1933년의 대규모 기아는 1928~1932년 실시한 스탈린의 첫 번째 5개년 계획의 산물이었다. 이 기간에 스탈린은 공산당 최상부를 장악했고, 산업화와 집단화 정책을 강행했으며, 패배한 국민을 이끌 무서운아버지로 부상했다. 그는 시장을 계획경제로, 농민을 노예로, 시베리 - P62

아와 카자흐스탄의 불모지를 강제수용소 단지로 바꿔버렸다. 그의 정책은 수만 명을 처형으로, 수십만 명을 탈진으로 죽게 했고, 수백만명을 굶주림의 위험에 빠뜨렸다. 물론 공산당 내부의 반발을 우려하긴 했지만, 스탈린에게는 엄청난 정치적 재능과 총독들의 자발적인지지,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를 예견하며 미래를 만든다고 주장하는관료 체제가 있었다. 그 미래는 공산주의였다. 중공업이 필요하며, 따라서 집단농장이 필요하고, 결과적으로 소련 사회의 최대 집단인 농민을 통제해야 하는 공산주의 말이다. - P63

강제추방은 계속되었고, 집단화도 진행되었다. 1930년 후반과1931년 초반에는 약 3만2127가구가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 추가로추방당했는데, 1년 전 첫 번째 추방 물결에서 쫓겨난 사람과 비슷한숫자였다. 농민은 굴라크에서 탈진해 죽거나 집과 가까운 곳에서 굶어 죽게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나마 후자가 낫다고 여겼다. 추방당한친구와 가족의 편지가 간혹 검열을 피해 도착하기도 했다. 그중 하나는 이런 조언을 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든, 여기 오지 마 우린 여기서 죽어가고 있어. 숨거나 차라리 거기서 죽어.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긴 오지 마." 어느 공산당원의 생각처럼, 집단화에 굴복한 우크라이나 농민은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사라지느니 집에서 굶주리는 쪽을 선택했다. 1931년 집단화가 마을 전체 차원이 아닌 가구별로 세세히 진행되면서, 저항은 더 어려워졌다. 필사적인 방어를 유발하는기습도 없었다. 연말이 되자 새로운 접근법이 성공을 거두었다. 소련령 우크라이나 농지의 약 70퍼센트가 집단화되었다. 이로써 1930년3월 수준에 다시 도달했으며, 이번에는 그 수준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 P75

1932년의 마지막 몇 주 동안, 외부의 안보 위협도 없고 내부의 도전 세력도 없으며, 자신의 통치가 불가피함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돌아보지 않아도 된 상태에서, 스탈린은 소련령 우크라이나주민 수백만 명을 죽이기로 결정한다. 그는 우크라이나 농민이 가해 - P89

자이며, 자신은 피해자라는 순전한 적대적 태도를 택했다. 굶주림은카가노비치에 대한 계급투쟁이었고, 스탈린에 대한 민족주의 투쟁이었다. 오로지 굶주림만이 방어 수단이 되는 투쟁,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농민에 대한 지배를 과시하고 싶었고, 심지어 그런 태도가 요구하는 극심한 고통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르티아 센의 말처럼 굶주림이란 "부여되는 것이며, 식량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소련령 우크라이나 주민 수백만 명을 죽인 것은 식량 부족이 아닌 식량 배급이었고, 누가 무엇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스탈린이 결정했다. - P90

이 최후의 사람들은 살해당하고 마는데, 살인을 실행하는 이들은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곤 했다. 한 활동가의 기억에 따르면, 그해 봄 그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봤다. 여자와 아이들은 배가 부풀어 오르고, 얼굴이 창백하며, 숨은 쉬지만 눈빛은 공허하고생기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광경을 봤음에도 정신이나가거나 자살하진 않았다.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여전히 나는 - P95

믿고 싶기에 믿었을 뿐이다." 다른 활동가들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두려움이 많았던 게 분명했다. 그 전해에는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모든서열에서 숙청자가 나왔다. 1933년 1월, 스탈린은 당 지도부를 장악하고자 심복을 보냈다. 더 이상 당에 대한 믿음을 내보일 수 없던 공산주의자들은 안에 있는 모든 이를 파멸로 몰아넣는 ‘침묵의 벽‘을 이루었다. 그들은 저항하는 자는 숙청당하며, 숙청당한다는 것은 곧 그들 자신이 처형하는 사람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임을 알고있었다. - P96

굶주림은 반란 대신 도덕의 부재, 범죄, 무관심, 광기, 무기력, 그리고 종국에는 죽음을 불러왔다. 농민들은 수개월 동안 형언할 수 없는고통을 겪었는데, 워낙 길고 악랄한 고통인 탓도 있었지만 사람들이너무 약하고, 가난하며, 대체로 문맹이라 자신이 겪은 일을 기록하지못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생존자들 가운데는 그 일을 기록한 사람들도 있다. 한 생존자는 농민이 무슨 일을 하든, "그들은 죽고, 죽고, 또죽었다"고 회상했다. 죽음은 느리고, 굴욕적이며, 넘쳐흐르고, 흔해빠진 일이었다. 품위 있게 굶어 죽는다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페트로 벨디는 죽음을 예감한 날 안간힘을 써서 고향마을을 기어다녔다. 다른 마을 주민들이 어디 가냐고 물어봤는데, 그는 자신을 매장하러 묘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낯선 이들이자신의 몸을 구덩이까지 끌고 가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자기 무덤을미리 파두었지만, 묘지에 도착했을 때는 다른 시체가 이미 그곳에 있었다. 그는 다른 무덤을 팠고, 몸을 누인 다음, 죽기를 기다렸다. - P97

1933년에는 소비에트 시민 약 14만2000명이 추가로 굴라크로 이송당했는데, 대부분은 굶주리거나 티푸스에 걸린 상태였고, 다수는 소련령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다.
수용소에서 그들은 식량을 찾아 헤맸다. 굴라크에는 건강 상태가 나은 자에게는 음식을 주고 약자에게는 음식을 주지 않는다는 방침이 있었고, 추방자들은 이미 배고픔 때문에 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 일은 정말로 쉽지 않았다. 굶주린 포로들이 야생 식물과 쓰레기를먹어 스스로 중독 상태가 되자, 수용소 관료들은 태죄를 걸어 그들을 처벌했다. 1933년 굶주림 및 관련 질병으로 수용소에서는 최소한6만7297명이 죽었고 특별 정착지에서는 24만1355명이 사망했는데,
대다수는 소련령 우크라이나 태생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카자흐스탄이나 최북단으로 가는 오랜 여정에서 수천 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시체는 기차에서 꺼내 바로 매장했고, 이름과 숫자는 기록하지 않았다. - P99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들은 주인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빵 한 조각만 달라고 구걸했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 위에, 목욕탕과 헛간 안에 수많은 시체가 있었다. 배고프고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길에서 기어다니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경찰이 그들을 일으켜주었지만, 몇 시간 뒤 숨을 거두고말았다. 4월 말, 나는 수사관과 함께 헛간을 지나다 시체 한 구를 발견했다. 시체 수거를 위해 경찰과 의사를 불렀는데, 그들은 헛간 안에서 다른 시체를 찾아냈다. 두 시체 모두 굶어 죽어 있었고, 폭력의 흔적은 없었다. 우크라이나 교외 지역은 식량을 다른 소련 지역으로 공출한 상태였으며, 이제는 그에 따른 결과, 즉 굶주림을 굴라크로 공출하고 있었다. - P100

살아남으려면 육체뿐 아니라 정신도 버텨내야 했다. 1933년 6월, 한 여의사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그녀가 아직 식인종이 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이 편지를 네가 볼 때쯤이면 어떨지 모르겠어"라고 밝히고 있었다. 착한 사람부터 먼저 죽어갔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몸을 파는 일을 끝내 하지 않은 사람들 말이다. 시체 뜯어먹기를 못내 거부한 사람들도 죽어야 했다. 식인을 하지 않음으로써, 부모들은자식들이 보는 가운데 죽어갔다. 1933년의 우크라이나에는 고아가넘쳐났고, 때로는 사람들이 그들을 거두었다. 그러나 먹을거리가 없는 판에는 낯선 이들이 그런 아이들에게 해줄 게 별로 없었다. 사방에 거적때기나 담요를 덮어쓴 소년 소녀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들은 자기 배설물을 먹으며 죽음을 가다리고 있었다. - P103

식인은 생명과 맞먹는 무게의 터부다. 그래서 지역사회는 그런 처절한 생존 방식에 대한 기록을 없애서 자신들의 명예를 잃지 않으려 했다. 우크라이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식인 이야기를 쉬쉬하려 안달이다. 그러나 1933년 우크라이나의 식인 행위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당시 소련 체제의 성격에 대해 커다란 의미를 지닐 따름이다. 굶주림은 식인 행위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목구멍으로 넘길 곡식 낟알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어지자, 우크라이나에도 식인 행위가 찾아왔다. 입에 댈 수 있는 게 사람의 살코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P104

어느 소련공무원이 이탈리아 외교관에게 귀띔하기로는 "우크라이나의 인종적구성은 그때 이후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찍이 카자흐스탄에서 좀더극적으로 이뤄졌던 인종 구성의 변화가 우크라이나에서도 일어났다.
어느 쪽이든 대러시아계 사람들에게 유리한 변화였다"
1930년대 초, 소련과 그 우크라이나 공화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숨졌을까? 결코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믿을 만한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기록은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보여준다. 예를 들어 키예프의 공공보건기구 기록에는 그 지역에서1933년 4월에만 49만3644명이 굶어 죽었다고 적혀 있다. 한편 지역행정 단위들은 기아 사망자 기록을 내기 두려워했고, 결국 아무것도남기지 않았다. 국가에서 사망자를 파악하려 할 때 접촉할 수 있는대상은 매장 팀원들일 뿐일 때가 많았으며, 그들도 자신들의 일을 일일이 기록해놓고 있진 않았다. - P107

우크라이나의 농업사회 구조는 검사, 압박, 착취의 과정을다 거쳤다.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은 소련 전역의 캠프들 사이에서 죽거나 능욕당하거나 흐트러뜨려졌다. 살아남은 이들은 죄의식과 무력감에, 때로는 변절과 식인 행위의 기억에 시달려야 했다. 수십만 명의고아가 소련의 시민으로 자라났지만 그들은 우크라이나계라고 할 수없었다. 적어도 그들을 탄생시킨 우크라이나 가족과의 끈이나 우크라이나 농촌의 기억은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참극에서 살아남은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은 마음의 의지가지를 잃어버렸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작가와 정치운동가는 모두 자살했다. 한사람은 1933년 5월에, 다른 사람은 같은 해 7월에 소련 국가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얼마간이라도 자치권을 지켜주려는 시도를 분쇄했으며, 그런 주장을 편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말살해버렸다.
당시 소련에 있으면서 그 기근 사태를 목격한 외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을 국가적 비극이 아니라 인도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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