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밀턴만이 울프에게 당혹감, 소외감, 열등감, 다소간의 죄의식을 안겨주고 있다. 그리스어나 형이상학 같은 지적인 남성성의 다른 요새들처럼, 밀턴은 울프에게 엄청나게 복잡한 대수학 방정식, 자신이 풀어야 한다고 느끼는(그러나 풀 수는 없는 ) 문제다. (‘나는 많은 수수께끼를 풀지 않은 채 남겨두었다.‘) 동시에 밀턴의 대작은 사물에 대한 울프 특유의 여성적인 인식과는 거의 또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 보인다. (어떤 위대한 시가 우리의 기쁨과 슬픔에 그토록 적은 빛을 들여보낸 적이 있었던가?) 더 나아가 울프는 특히 모호하고 추상적인 언어로 밀턴의 시를 칭송한다. 그 모든 것은 얼마나 매끄럽고 강렬하며 정교한가!) 그리고 (울프가 애호하는 양성적인 셰익스피어 드라마가 아니라) 밀턴의 운문이 ‘정수이며, 대다수 다른 시는 그것을 희석한 것에 불과하다‘는 울프의 느낌은 아마도 밀턴시의 깊은 곳에 ‘남자가 생각하는 우주에서 차지하는 우리의 위 - P365

치, 신과 종교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요약되어 있다‘는 억지스러운 주장으로 울프가 공손하게 결론을 내린 이유를 설명해줄것이다. 우리의 여기에서 울프가 좋아하는 표현 중 하나를 빌려 말하자면 ‘그녀는 분명 여성으로서 말하고 있다. 울프의 의식적 무의식적 진술 또한 분명하다. 밀턴의 악령은 그것이 무엇이든 결국 밀턴의 우주론이고, ‘남자가 생각했던 것‘에 대한 그의 시선이며, 대부분의 다른 여성 문인들처럼 울프가 서구의 문학적 가부장제의 핵심에서 감지했던 문화적 신화에 대한 밀턴자신의 강력한 표현인 것이다. - P366

여성적 오염에서 격리된 ‘옥스브리지‘의 전형적이고 가부장적 도서관의 심장부(말하자면 도서관들의 천국)에는 권력의 언어가 있는데, 그 언어는 밀턴의 것이다.
비록 《자기만의 방》이 그저 밀턴의 글과 그것의 여성 혐오적맥락이 지닌 비밀스럽지만 치명적인 힘을 암시한다 하더라도 울프는 문인으로서 생애 내내 밀턴을 비판적이기보다) 허구적으로 이용했을 때나 이용하지 않았을 때나 그를 무서운 ‘억압자‘로 분명하게 규정했다.  - P367

샬럿 브론테는 틀림없이 그렇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매우 수준 높은 문학비평가였던 울프는 밀턴의 문화적 신화를 의식적인 동시에 아주 불안해하며 상속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여성 작가들 가운데 밀턴의 위협적인 특징, 특히 그가 여성의 운명에 미친 영향이 해로운 (동음이의어를 사용하는 블룸의재치를 빌려 말하자면) 인플루엔자로 여길 만큼이었음을 가장 잘 인식했던 사람은 브론테였다. 『셜리』에서 브론테는 특히가부장적인 밀턴의 우주론을 공격했다. 브론테는 여성에게 해로운 이 우주론 안에서 자신의 여자 주인공들이 남성 지배적 사회 때문에 아프거나 고아가 되거나 굶어죽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밀턴은 위대했다. 그러나 그는 좋은 사람이었는가? (그이름이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셜리 킬다는 질문한다.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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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철은 전시장으로 가는 길에 폭죽을 샀다. 가게에 들어가서도 폭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 위해 잠시 멈칫했다. 폭죽이라는 단어가 낯설었다. 폭과 죽, 뭐 이렇게 이상한 단어가 다 있어. 용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한번 폭죽이라는 단어를 발음했다. 용철은 단어를 자주 잊어버렸다. 잃어버린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최근 들어 더욱 그랬다. 쉬운 단어부터 어려운 단어까지, 맥락도 공통점도 이유도 없었다. 폭죽처럼, 발코니라는 말도 잃어버렸다. 어떤 날은 배꼽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배꼽을 들여다보면서도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정강이라는 단어도 잊어버렸고, 뒤꿈치라는 말도 잃어버렸다. 단어를 떠올리려고 하면 수십만 개의 단어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몰려들었고, 용철은 단어들의 더미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단어와 단어가 서로 얽히고는 알수 없는 형체로 변했다. 용철은 단어를 떠올리려던 생각조차 잊어버리고 멍한 얼굴로 단어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민희는 병원에 가보라고 조언했지만 용철은 그럴 정도는 아니라고 무시했다. - P165

저도 자주 그래요.
그래요?
혼자 병명도 지었어요.
뭐요?
명사 분실중,
그러고보니..…
그렇죠?
명사만 잃어버리네요.
원래 그런 거래요.
뭐가 원래 그래요?
명사부터 잃어버리고 다음엔 형용사와 동사를 잊어버리고……정전될 때처럼 완전 깜깜해지죠?
맞아요.
하나씩, 결국 다 잃는 거래요?
안 그런 사람도 있겠죠.
그럼 저는 분실증 초기 환자인 거네요. 다행이다.
위로가 되죠?
무척.
언제부터 그랬어요?
모르겠어요.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기억 안 나요.
힘든 시기를 통과한 뒤에 그럴 수 있대요. - P171

이것은 아마도 마지막 기록이 될 것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기억의 상한선을 미리 정해놓아야 할 것 같다. 무작정 기억을거슬러올라갈 수는 없다. 기억은 시간의 순서대로 늘어서 있지 않고,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관계없는 내용들이 링크된 것도 많으므로 기억을 골라낼 때는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집어내야 한다. 기억의 상한선을 넘지 않으려면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집중해야한다.
상한선은 아마도 2개월 전이 될 것 같다. 다른 기준은 있을 수 없다. 2개월 전, 도시 가득 눈발이 흩날리던 크리스마스이브에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물론 그 이전의 기억들이 섬광처럼 번쩍일것이다. 지금은 10년 전의 일처럼 아득하지만, 때로는 어제처럼 생생한 기억들이 순간순간 의식의 수면 위로 튀어오를 것이다.  - P201

릴케의 책 『말테의 수기 첫 문장이 어렵풋하게 떠오른다. 정확하게 떠올릴 수는 없다. 찾아볼 곳도 물어볼사람도 없다. 내 기억으로는,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으로 오지만 실은 여기에서 죽어갈 것이다‘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책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오직 시작 부분만 떠올랐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이 정확히 그렇다. 나도 마찬가지다. 시카고를 떠나 살기위해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여기에서 죽어갈 것이다. 죽어갈것이다. 라고 소리내어 발음하면 오히려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기도 한다. 죽어갈 것이다. 곧 죽어갈 것이다. 인간이란, 스스로 죽을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 동물인가.
이제 더이상 기억의 상한선을 넘지 않겠다.  - P204

비행물체를 이용해 땅에다 구멍을 만든 게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지능이 있는 존재인 것만은 분명했다. 게다가 그 존재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도 확실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나오는 크리스마스이브를 공격 날짜로 정했을 리 없다. ‘인간적인‘ 지능이 있다는 근거는 그 외에도 많다. 땅바닥에 구멍을 내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몰아간 것도 그렇고, 저녁이 되면 작은 불빛을 내어 사람들이 잘 걸어갈 수 있게 한 것도 그렇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구멍이 없는 쪽으로 계속 이동해야 했다. 인간들이 소나 양을 한쪽으로 몰아가듯, 비행물체는 인간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구멍에 빠지거나 앞으로 걸어가야 했다. - P206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설렘에는 앞날에 대한 기대가 들어있다. 설레며 고백하는 사람은 앞에 앉은 사람과 겪게 될 수많은 경험을 짐작하고 떠올리며 미리 행복해한다. 막연한 기대는 꿈꾸는 사람의 특권이다. 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 행복이라는 덩어리의 무게를 미리 재어보는 일, 그게 사랑의 시작일 것이다. 내가 만들었던 4년 일기 애플리케이션 역시 사랑하려는 사람들, 꿈 꾸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애플리케이션을 만들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만든 애플리케이션의 ‘편리‘가 누군가에게는
‘사랑‘일 수도 있음을 이제는 알게 됐다. 그녀를 만난 다음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가지기 시작했다. - P222

한 남자가 주먹으로 맞은 다음 뒤로 떠밀리며 검은 구멍 쪽으로비틀거렸다. 나는 남자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싸움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대신 정화씨의 몸을 붙들었다. 정화씨는 손을 뻗어 남자를 잡으려고 했다. 그 순간이 영원히 기억날 것이다. 철수세미로뇌를 박박 문질러도 그 장면만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정화씨의 오른손을 잡았고, 나는 정화씨의 몸을 붙들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살아야겠다는 남자의 필사적인 힘이 정화씨를 붙들어야 한다는 나의 필사적인 힘보다 강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자책은 끝이 없지만, 죽음 앞에서의 자책은 가벼울 뿐이다. 자책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어쩌겠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책뿐이다.  - P227

나는 그녀가 사라져간 검은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암흑 속에서 무언가 나타나나를 잡아챌 것 같았다. 솔직히, 나는 두려웠다. 누가 나를 검은 구멍 속으로 떠밀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아마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이것은 진심이다. 나는 그녀를 따라 곧장 검은 구멍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검은 구멍 속으로 떨어지며 그녀의 손을 잡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떨고 있을, 그녀를 안아줄 것이다.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짧은 순간 그녀와작별 인사를 할 것이다. 그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쿡쿡 쑤셔온다. 그녀는 검은 구멍 속으로 빠지면서 위를 쳐다보았을 것이다.
내 얼굴의 윤곽을 보았을 것이다. 나는 볼 수 없었지만 그녀는 나를 보았을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내 얼굴을 몸에서 뜯어내버리고싶다. - P228

나는 곧 죽을 것이다. 섬으로 헤엄쳐가다가 물에 빠져 죽거나 바닷속에서 얼어 죽거나 여기에 남아서 미친 사람들에게 맞아 죽거나 아니면 구멍 속으로 떨어져 죽을 것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죽기 전에 뭐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수첩과 볼펜이 긴요하게 쓰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중간에 버릴까도 생각했던 물건들이다.
이 기록은 내 생각과 달리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읽을 사람도 없을 것이고, 누군가 혹여 읽는다 하더라도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진실도 없고 역사도 없다. 한 개인의 변변찮은 그나마도 정확하지 않은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기록은 그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그녀가 했던 말들, 그녀의 생각들을 적어두는 것만으로도 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P229

나는 관계를 부수는 사람이다. 고리를 끊는 사람이다. 폐허 위에서 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내내 차선재의 일기장 맨 앞에는 그말들이 적혀 있었다.
매일 새벽 3시, 모든 소음이 아래로 가라앉으면 차선재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책을 읽기도 하고 노트에다 뭔가적기도 하고 낙서를 하기도 했다. 의미 없는 말들을 주로 적었다.
연필이 하는 말을 따라다녔다. 의자, 창문, 형광등, 새벽의 자전거소리...... 들리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적었다. 의미 있는 말을 적는게 무서웠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새벽 3시부터의 시간이 차선재를 버티게 해주었다. 6시가 되면 학교 갈 준비를 했다. 학교에 가면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학교에서는 무의미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 P265

차선재는 서랍에다 〈Station>을 넣어두었다. 지난 시간을 다시태어나게 할 마음은 없었다. 돌아갈 수 없었다. 책상을 정리하고스케치북을 펼쳤다. 만년필로 원을 그렸다. 원 속에 새로운 시간이흐르게 하고 싶었다. 다이얼과 문자판을 그려넣는 중에 제목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 제목을 생각하지 않고 번호만 붙인 작품만 만들었는데, 갑자기 제목이 떠올랐다. 그래, 요요로 하자. 가까워지고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 요요의 시간으로 하자. 그래,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아. 차선재는 만년필로 새로운 원을 그렸다. 스케치를 하고 또 새로운 원을 그렸다. 원에다 계속 또다른 시계를 그려넣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였다. 새벽 3시의 시계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방에서, 대학교 때의기숙사에서 그렇게 자주 만났던 시간인데, 한동안 그 시간을 잊고지냈다. 시침과 분침이 단정하게 90도의 각을 만들고 있었다. 시침과 분침 사이를 초침이 막 지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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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방에 갇힌 지 사흘째가 되자 기민지는 파도의 흐름을 알게되었다. 지식으로 암기한 것이 아니라 눈으로 반복해서 본 다음 궤적을 이해하게 되었다. 기민지는 책도 읽지 않고 더이상 노트북도 들여다보지 않고 바다만 바라보았다. 사람이 없는 바다의 풍경은 구간반복으로 설정해놓은 영상 같았다. 기민지는 반복되는 풍경 속에서 다른 그림 찾기를 했다. 파도의 높이가 달라졌고,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의 일렁임이 변했고, 빛이 약해졌고, 먼바다로 지나가는 배의 위치가 바뀌었다. 기민지는 바닷속으로 들어가서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풍경의 일부가 되면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 P63

노트북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기민지는 바다를 한참 더 들여다보다 노트북 앞으로 갔다. 메시지를 읽는 기민지의 표정은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입가가 다시 일그러졌다.
넷째 날 아침, 기민지는 소파에 누운 채 잠이 들었다 깼다 하며하늘을 보고 있었다. 흐린 날씨였다. 먹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언제라도 호텔에 닿을 것 같았다. 기민지는 먹구름을 타고 호텔에서 도망치는 상상을 했다. 만화영화의 주인공처럼 먹구름 속으로 풀쩍뛰어내린 다음 유유히 하늘 속으로 사라진다. 하늘은 화창하게 맑고 먹구름은 폭신폭신하고 발밑에서는 비가 시작된다. 먹구름을타고 공중회전을 하는 상상을 할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민지는 상상 속에서 현실로 잘못 튀어나온 소리라고 생각했다. - P63

백팩의 어깨끈을 붙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역 앞을 벗어나자 주택가인 듯한 조용한 동네들이 나타났다. 밤이 깊었지만 불 켜진 집이 많았다. 창문으로 사람들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모든 창문의 빛이 달라 보였다. 밤에 대도시에 갈 때면, 어둠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집마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엄숙한 생각이 든다. 그뿐인가. 집안의 방마다 비밀이 있으며, 그 방에 살고 있는수천 수백 명의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심장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상상하지 못할 비밀을 품고 있다. " 창문 하나에 비밀 하나씩이 숨어 있고, 어쩌면 기민지가 저 수많은 창문 중 하나에 있을지 모른다고, 장우영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기민지를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 P67

그의 여자친구였을 것이다. 기민지는 갑자기 화가 났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밥을 먹을 때도, 함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낄낄거릴때도 K를 자신의 남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두 사람의 실루엣을보는 순간 견디기 힘들 정도로 그 남자가 갖고 싶어졌다. 풍경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질투심이 들끓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중 누구를 질투하는지도, 질투의 근원이 무엇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을 떼어놓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기민지는 창문으로 뭔가를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모든 창문에는 비밀이 있었고, 기민지는 그 비밀이 늘 부러웠다.
비밀을 가질 수만 있다면 누군가 바깥에서 자신의 창문으로 돌을던져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벽을 쌓는 것보다 창문을 만들기가 훨씬 어려웠다. - P87

규호는 정윤이 가고 난 의자를 계속 보았다. 정윤이 누르고 있던 의자 등받이의 천이 아주 천천히 되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규호는 생맥주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소주 두 잔 정도의 양을 생맥주에다 부었다. 의자 등받이의 천은 아직도 복구되는 중이었다. 규호는 소주잔에도 소주를 따랐다. 정윤이 앉아 있던 자리의 커피잔을 옆으로 치우고, 거기에 소주잔을 놓았다. 규호는 혼자 술을 마실 때면 늘 그러곤 했다. 거기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누가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러곤 했다. 규호는 소주를 탄 생맥주를 마셨다. 의자의 천을 계속 보았다. 계속 보니 거기 누가 앉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서 땅콩 껍질이 허공에 날렸다. 자신의 몸도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 P122

강당 천장에 달린 등이 일제히 제각각의 방향으로 흔들렸고, 땅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전등의 불빛이 깜빡거리며 빛과 어둠이 반복됐다. 어둠 사이로 희미한 불꽃 같은 게 보였다. 정민철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꿈속에서 들었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할머니, 뱀들은 왜 화가 났어? 옛날 옛날 한 사람이 산길을 걷다가 새끼 한마리를 잡아서 곧바로 껍질을 벗기곤 먹어버렸어. 뒤따라가던 어미뱀이 땅바닥에 버려진 껍질을 보고 울기 시작했지. 너무 괴로워서 막 몸을 비틀면서 꿈틀거렸는데 땅속의 모든 뱀들에게 그 고통이 전해진 거야. 땅속에서는 태산보다도 더 큰 뱀들이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어. 산이 들썩거리고 나무들이 뽑혀나가고 강물이 솟아올랐어. 새끼뱀을 먹었던 사람은 갈라진 땅으로 빨려들어가서 뱀들의 먹잇감이 되었고, 세상이 조용해질 때쯤 그 사람의 뼈만 땅으로 되돌아왔어. 우리 꼬맹이 잠들었니? 지진 날 때 들리는 소리가 바로 뱀들이 우는 소리야. - P156

낮은 탄식은 좀더 큰 목소리로 변했고, 곳곳에서 엄마, 하는 비명이 들렸다. 어둠 사이로 보이던 짧은 빛이 소리를 삼켰다. 정민철은 숨이 막혔다. 누군가 자신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것 같았다. 멱살을 쥐고 흔들던 손이 자신을 번쩍 들어 내동댕이치는 것 같았다.
자신의 발목을 잡고 땅으로 끌어내리려는 것 같았다. 정민철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정민철은 강당 건너편의 화이트보드가자신에게 날아오고 있는 것 같은 환각을 보았다. 세상이 꿈틀거리면서 자신을 휘감고 있었다. 류영선은 두 손을 말아쥔 채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눈을 뜨지 않았다. 정민철은 눈을 감을 수없었다. 세상이 미친 듯 흔들렸다. 멱살을 잡고 있는 손은 정민철을 풀어주지 않았다. 정민철은 바닥을 짚고 있던 손으로 목을 만졌다. 숨이 막혔다. 류영선을 감싸고 있는 왼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가 누구를 보호하고, 누가 누구에게 의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순간이었다. 거대한 힘 앞에서 작은 힘들은 의미를 잃고, 방향을잃었다. 서로 의지하는 힘이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우우웅,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나타났다가 땅속으로 사라졌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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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그로부터 정확히 두 달 후에 돌아가셨다.
그때 연세가 예순일곱이었으며, 센마리팀 군(郡)Y...의 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한 조용한 동네에서 카페 겸 식료품점을 하고 계셨다. 1년 후에는 은퇴할 계획이셨다. 나는 종종 몇 초 동안 혼동에 사로잡히곤 한다. 리옹의 고등학교에서의 그 장면이 그 전이었는지 아니면 후였는지, 내가 크루아루스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그 바람 불던 4월이 그가 죽은 그 숨 막히던 6월보다 앞선 일이었는지 나중의 일이었는지가 명확히 분간되지 않는다. - P9

사망 확인을 위해 온 당직 의사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몇 시간도 안 되어 아버지의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오후가 끝나갈 무렵, 난 혼자 침실에 있었다. 햇살이 블라인드 틈으로 새어 들어와 리놀륨 바닥을 비췄다. 그것은 더이상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휑해져 버린 얼굴 한가운데 코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헐렁하게 느껴지는 진청색 양복에 감싸인 그는 누워 있는 한 마리 새 같았다. 임종 직후에 보았던, 눈을 커다랗게 부릅뜬 남자의 얼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얼굴조차도 영원히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 P12

얼마 전부터 난 소설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물질적 필요에 얽매였던 삶을 그리려고 할 때, 내겐 예술의 편을 들 권리도, 무언가 <굉장히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인> 것을 만들 권리도 없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말과 행동과 취향, 그의 생애의 주요 사건들, 나도 함께한 바 있는 그 삶의 모든 객관적 표징을 모아볼 것이다.
추억을 시적으로 꾸미는 일도, 내 행복에 들떠 그의 삶을 비웃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단순하고도 꾸밈없는 글이다.
과거 내가 부모님에게 편지를 쓸 때 핵심적인 내용들을 알리기 위해 사용했던 바로 그런 글 말이다. - P21

그런데 의혹이 찾아들었다. 어떤 여자가 장 본 물건들을 봉지에 다 넣은 뒤, <요즘 조금 곤란한 일이 있어서요. 돈은 수요일에 지불해도 되나요?>라고 나지막하게 물었을 때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가, 또 다른 여자가 그렇게 했다. 외상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공장으로 돌아갈 것인가? 둘 다 고약한 해결책이긴 마찬가지지만 그나마 외상이 조금 나아 보였다.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욕망을 포기해야 했다. 일요일 말고는 아페리티프나 맛난 통조림 같은 것은 꿈도 꾸지말아야했다.처음에는 자신들도 능력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형제자매들을 푸짐하게 대접했지만, 이제는 냉정하게 굴지 않을 수 없었다. 원금을 까먹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뇌리를 떠나지않았다. - P41

나는 이 글을 천천히 쓴다. 일련의 사실들과 선택들 가운데에서 한 생애의 의미 있는 줄기를 드러내려 애쓸 때, 나는 점차로 아버지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간 - P46

다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도식이 자리를 온통 차지해 버리고, 추상적인 생각이 제멋대로 달려가려 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는 반대로 추억의 이미지들이 미끄러져 들어오게 놔두면, 난 있는 그대로의 그의 모습, 그의 웃음과 그의 거동을 다시 보게 된다. 그는 내손을 잡아 놀이 장터로 데려가고, 놀이 기구들은 날 오싹하게 만들며,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어떤 조건의 모든 지표는 내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나의 개인적 관점이라는 덫을 떨치듯이 빠져나온다. - P47

물론 내가 들은 말과 문장들을, 때로는 이탤릭체로 강조까지 해가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제시하려 애쓰는 이런 종류의 시도에서 글쓰기의 행복이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 말들을 고딕체로 제시하는 것은거기에 이중의 의미가 있음을 암시하거나, 향수든 애잔함이든 조롱이든 독자에게 공모의 쾌감을 안겨 주고자 함이 아니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거부한다. 이런 식의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말과 문장들은 내 아버지가 살았고, 나 또한 살았던 한 세계 - P47

의 한계와 색채를 있는 그대로 그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어떤 말을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 P48

강변의 작은 뜰에서 찍은 사진 한 장 소매를 걷어올린 흰 셔츠, 아마도 플란넬 소재인 듯한 바지, 축 늘어진 어깨, 구부정한 두 팔. 불만스런 표정. 아마도 포즈를 제대로 취하기도 전에 사진이 찍혔기 때문이리라. 그는 마흔 살이다. 사진속에는 그가 겪은 불행,
혹은 그가 품고 있는 기대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은 전혀 없다. 단지 약간 나온 배, 관자놀이께가 희끗희끗해져 가는 검은 머리칼 등, 세월의 명확한 흔적들이보일 뿐이다. 그리고 보다 은밀하게 숨어 있는 사회적조건의 표지(標識들, 몸통으로부터 헤벌어져 있는 팔들, 그리고 소시민적인 취향이라면 사진의 배경으로는 선택하지 않을 화장실과 세탁실…… - P49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왠지 좁은 길을 아슬아슬 걷고있는 듯한 느낌이다. 사람들이 천하다고 여기는 삶의방식에 대한 명예 회복과 이런 작업에 수반되는 소외에 대한 고발 사이에 낀좁은길 말이다. 이러한 삶의방식들은 우리의 것이었고, 심지어는 우리의 행복이기도 했지만, 또한 우리의 조건을 둘러싼 굴욕적인 장벽들(<우리 집은 그렇게 잘 살지 못해>라는 의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행복인 동시에 소외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이렇게 표현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 모순의 이쪽에 닿았다, 저쪽에닿았다 하며 흔들흔들 나아가는 느낌이라고 말이다. - P57

그건 욕망을 위한 욕망이었을 뿐이다. 왜냐면 사실은 무엇이 아름다운지, 아니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 아버지는 무언가의 색과 형태를 선택해야 할 때면 항상 칠장이, 소목장(小木匠)의 충고에 맡겼다. 그저 요즘 유행하는 것을 따랐다. 주위를 장식하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따로따로 선택할수 있다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들의 침실에는 장식이라곤 전혀 없었다. 사진 액자 몇 개, 어머니날 선물용으로 제작된 레이스 깔개 몇 장, 그리고 벽난로 위에 코지코너를 살 때 가구 장사가 사은품으로 끼워 준도기로 된 커다란 아이 흉상이 전부였다.
가진 것 이상으로 폼을 잡아선 안 돼! 그가 입만 열면하는 소리였다. - P62

우리 식구들은 서로 쥐어짜는 어조로 말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화법을 알지 못했다. 정중한 어조는 외부인들에게만 사용했다. 이런 습관이 너무나도 강했기때문에 아버지는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점잖게 얘기하려 노력하다가도, 내가 자갈 무더기에 올라가는 게눈에 띌라치면 거친 어조에 노르망디식 억양과 욕설이 다시 튀어나와 버렸고, 그 바람에 사람들에게 좋은인상을 주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곤 했다. 그는 품위 있는 태도로 나를 혼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고,
또 나는 나대로 만일 아버지가 따귀를 때리겠다는 위협을 점잖은 방식으로 표현했다면 그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을 것이다. - P78

이들 세부적인 것들의 의미 규명은 이제 내게 하나의 절대명령으로 다가오며,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지금껏 그것을 하찮은 것으로 확신하며 억눌러 왔기 때문이다. 모욕당한 기억만이 그것을 간직해 올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세계의 욕망에 굴복해 왔던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저아래 세계의 추억을 마치 뭔가 천박한 것인 양 잊게만들려고 애쓰는 이 세계의 욕망에 말이다. - P79

내가 감시 요원으로 있던 어느 여름 방학 학교가 끝났을 때, 그는 나를 데리러 왔다. 어머니가 멀리서 <어이, 어이> 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난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햇볕을 피하려 고개를 푹 숙인구부정한 자세로 걷고 있었다. 귀는 방금 이발을 하고와서 그런지 머리통에서 불쑥 튀어나와 있었고 불그레한 색이었다. 그들은 성당 앞 보도에 서서 집으로돌아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아주 커다란 소리로 입씨름을 벌였다. 그들의 모습은 외출하는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의 그것이었다.
차 안에서 나는 그의 눈가와 관자놀이에 누런 반점들이 생긴 것을 보았다. 난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과 멀리 떨어진, 어느 젊고도 자유로운 세계에서 두달 동안 생활하고 난 참이었다. 아버지는 늙었고, 바짝 오그라들어 있었다. 난 더 이상 내게 대학교에 갈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 P95

나는 나 혼자만을 위해 살기시작했다. 어머니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편지로 보고해 주었다. 여기는 추운데, 우리는 이런 날씨가 오래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요번 일요일에는 그랑에 사는 친구들을 보러 갔었다. X 어멈은 예순 살에 죽었는데, 그렇게 늙은 나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녀는 글로는 제대로 농담을 하지 못했다. 사실, 편지에서 사용한 언어와 표현들부터가 그녀에겐 너무도 버거운 것이었다. 하지만 말을 하듯 자연스럽게 글을 쓰는 것은 한층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글을 쓰는법을 한 번도 배운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서명을 했다. 나 역시 진술서 같은 어조로 그들에게 답장을 보냈다. 만일 공들여 다듬은 문체를 사용했다면, 그들은 내가 자신들과 거리를 두려 한다고 느꼈으리라 - P100

불안해하지도 않았고, 열광하지도 않았다. 스무 살이 넘은 처녀가 아직도 학교 책상에 앉아 있는 상황을 다시 말해서 내가 그 이상하고도 비현실적인 삶을살고 있는 상황을 아버지는 체념하듯 받아들였다. 저에는 교사가 되려고 공부를 한답니다. 손님들은 무슨교사가 될 거냐고 묻지 않았다. 그들에겐 오직 직위만이 중요했다. 아버지 자신도 무슨 교사인지 좀처럼 기억하지 못했다. <현대 문학>은 수학이나 스페인어만큼 그의 머리에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나를 이 나이까지 유별나게 취급한다고 수군댈까 - P102

봐, 나를 이렇게 밀어 댈 정도로 우리 집이 부자라고생각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내가 장학금을 받고 있다고 털어놓지도 못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않는 내학비를 국가가 다 대준다고, 우리는 참 운도 좋다고사람들이 입을 삐죽댈 수도 있으니까. 항상 선망과 시샘에 둘러싸여 있었던 그로서는 <교사가 되려고 공부한다>가 자기 처지에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명쾌한설명이었을 것이다. 이따금 나는 밤을 꼬박 새워 놀고는 일요일 아침에 집에 들어가 뻗어서 저녁때까지 자곤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처녀애는 건전하게 놀 수도 있는 일이라며 내가 그래도정상적인 인간이라는 증거로서 승인해 주기까지 하는눈치였다. 혹은 그로서는 불가해한 지적이고도 부르주아적인 세계의 이상적인 표현의 하나로 받아들인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노동자의 딸이 임신한 채로 결혼을 하면, 벌써 온 동네가 다 알고 있었다. - P103

그는 가게를 파는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가게 옆에 붙어 있는 집으로 거처를 옮기리라, 옛날에 가게와 함께 사두었던 것인 듯한 그 집에는 방 두 개와 부엌이 있었고, 포도주저장 창고도 하나 있었다. 좋은 포도주들과 통조림들은 가져가리라. 신선한 달걀을 얻기 위해 닭을 키우리라. 또 오트사부아에 사는 딸애 부부도 보러 가리라.
또 그는 예순다섯 살이 되면 사회보장 연금을 받을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흐뭇해했다. 약국에서 돌아올 때면 테이블에 앉아 행복한 얼굴로 건강보험 청구용 중지를 하나하나 붙이곤 했다.

그는 삶을 점점 더 사랑하고 있었다. - P112

12시 반, 난 아이를 침대에 눕혔다. 아이는 잠들지 못하고 용수철 침대 위에서 있는 힘껏 뛰어 댔다. 아버지는 눈을 부릅뜬 채로 간신히 숨을 쉬었다. 어머니는 여느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1시경에 카페와 식료품점을 닫았다. 그러고는 다시 그의 곁으로 올라왔다.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이모와 이모부가 도착했다. 그들은 아버지를 본 다음 부엌에 내려와 자리를잡고 앉았다. 난 그들에게 커피를 대접했다. 위에서 어머니가 천천히 걷다가 층계를 내려오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답지 않게 느릿한 그 발걸음에도불구하고 난 그녀가 커피를 마시러 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계단이 꺾이는 곳에서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끝났어.」 - P124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노가 우릴 다시 집으로 데려다 주네>라는 말이 들어간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한계의 경험> 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첫 부분을 읽으면서 얼마나 낙담했던지! 거기에는 온통 형이상학과 문학 얘기뿐이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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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 - P10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 가고, 영화를 보고, 세탁소에 옷을맡기러 가고, 책을 읽고, 원고를 손보기도 하면서 전과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끔찍스럽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완전히넋을 잃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나 문장, 웃음조차도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입 속에서 저절로생겨나는 듯했다. 게다가 나는 내가 한 행동, 내가 본 영화, 내 - P11

가 만난 사람들을 또렷이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의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내 의지나 욕망, 그리고 지적 능력이 개입되어 있는 행동 예측하고, 찬성하고 반대하고, 결과를짐작하는)은 오로지 그 남자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신문에서 그 사람의 나라에 관한 기사를 읽는다(그 사람은외국인이었다).
옷과 화장품을 고른다.
그에게 편지를 쓴다.
침대 시트를 갈고 방에 꽃을 꽂아놓는다.
다음 만남을 위해 그에게 잊지 않고 말해야 할 것과 그의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들을 메모해둔다.
함께 보낼 저녁을 위해 위스키와 과일, 각종 음식을 사둔다.
그 사람이 오면 어느 방에서 사랑을 나눌지 상상한다. - P12

가끔, 이러한 열정을 누리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서 글을 완성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끝까지 다하고 나면 다하다‘ 라는 표현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겠다 죽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 P19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A가 떠난 지 두 달쯤지난 후부터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A와의 관계에 관련된 것들은 무엇이든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0월의 알제리 소요라든가 1989년 7월 14일의 흐린 하늘과 더위, 그리고 6월, 그 사람과만나기 전날 밤 믹서를 산 것 같은 사소한 일들까지도 기억하고있었다. 그러나 폭우에 대해서, 혹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일이나 차우세스쿠의 처형처럼 지난 5개월간 벌어진 세계적인 뉴스들 가운데 하나를 한 페이지 정도로 자세히 써내라고 한다면, 나는 할 수 없다. 글을 쓰는 시간은 열정의 시간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 P52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싶었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부터 계속해서 반과거시제를 쓴 이유는,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예전의 기다림이나 전화벨 소리, 만남을 대신하고 있는 나의 고통을 묘사하는 것이기 - P52

도 하다. (지금도 첫 페이지를 다시 읽으면 그 사람이 내 집에머무는 동안 입고 있다가 떠날 때 벗어놓은 목욕 가운을 바라보고 만지면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고통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글은 나에게, 그리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항상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내게만 의미가 있었던 목욕 가운은 언젠가는 나에게조차 아무 소용이 없어져 헌옷 더미 속으로 던져지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쓰다보니목욕 가운을 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P53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살고 있다. 다시 말해, 글을 쓴다고 해서 그 사람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쉬는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더이상은 독특한 억양을 가진 그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그 사람의 몸을 만질 수도 없다.
현실 속의 그 사람은 A라는 이니셜로 내글 속에 쓰이고 있는남자보다도 더 먼 곳에, 내 앞에 나타날 수 없는 추운 도시에서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슬픔을 가라앉혀주고, 절망밖에 없을 때 희망을 갖게 해주는 방법이란 방법은 다 써보았다.
카드점을 쳐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전화해주기를, 그 사람이돌아와주기를‘ 하고 소원을 빌며 오베르 역의 거지에게 10프랑을 주기도 했다. (사실, 글을 쓰는 것도 그런 방법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 P53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람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갈망했던 지난해 봄 그 사람을 떠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람에게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아무것도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글에는 자신이 남겨놓고자 하는 것만 남는 법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읽힐지도 모른다는 고통을 연장시키는 것과 같다.
하지만 내가 글을 써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한, 그런 건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그 필요성의 극에 다다른 지금, 써놓은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하다. 열정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갈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감정들이다. 그것은 출판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세인들의
‘정상적인 가치 기준과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글은 자서전입니까?" 하는 유의 질문에 대답해야만 하고,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다는 식으로 억지로 정당화시켜야 할지도 모른 - P59

다. 그런 질문들은 전형적인 소설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모든책이 출간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행위가 아닐까?)지금 나는 내가 아니면 도저히 읽을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삭제와 교정으로 뒤덮인 원고를 앞에 놓고 있다. 나는 이것이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않는, 철저히 개인적이고 유치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고백이나 수업 시간에 비밀노트 한쪽에갈겨쓴 외설스러운 낙서처럼, 혹은 아무도 보지 않으리라 확신하면서 조용히 아무 탈 없이 써내려간 일기처럼, 그러나 이 원고를 타자로 치기 시작하고, 마침내 원고가 출판물의 형태로 내앞에 나타나게 되면 내 순진한 생각도 끝장나고 말 것이다. - P60

세상에서 그리고 내 삶 속에서 더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원고도 더 써넣을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마무리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원고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쓰였으므로 이미 읽을 만한 글로는 손색이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쓴 원고가 아직 내 손 안에 있는 한, 글쓰기의 가능성은 아직도열려 있다. 내게는 형용사의 위치를 바꾸는 일보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덧붙이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 P61

지난해 5월 내가 글쓰기를 끝냈을 때와 지금, 1991년 2월 6일사이에 이라크와 서방 연합군 간에 오래전부터 있어온 갈등이폭발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독일에 투하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폭탄"이 이라크에 퍼부어졌다는 오늘 저녁<르몽드>지의 기사에도, 엄청난 폭음으로 귀가 먹은 아이들이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바그다드 거리를 헤매고 있다는목격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전쟁 당사자들은 그것이 ‘정당한 전쟁이라고 거듭 주장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연합군의 지상공격과 화학무기를 이용한 사담 후세인의 반격전, 그리고 라파예트 백화점 테러 등 이미 예고되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을 가슴 졸이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사랑의 열정을 겪을 때 생겨나는 것과 똑같은,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불가능한 욕망과 고뇌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유사성은 여기서그친다. 이런 기다림에는 꿈이나 상상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 P62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 P65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 P66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 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 P66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아닐까.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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