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지하층의 경비원 배치 사무실 앞에 빈 예술품 운송 상자들이 쌓여 있다. 1층의 무기와 갑옷 전시관 바로아래에 있는 사무실이다. 놓여 있는 운송 상자들은 형태와 크기가 제각각이어서 커다란 박스처럼 생긴 것도 있고, 캔버스처럼폭은 넓고 두께가 얇은 것도 있다. 그러나 하나같이 위풍당당하고, 옅은 색의 가공하지 않은 원목으로 단단하게 만들어져서 희귀한 보물 혹은 이국적인 야수까지도 담아 운반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듯 보인다. 근무복을 입고 출근한 첫날, 이 견고하고 낭만적인 물건들 곁에 서서 앞으로 이곳에서 어떤 일들을 하게 될지 상상해본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너무 강렬하게 사로잡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 P13

그녀가 평범한 철제 문을 밀어 열자 마치 <오즈의 마법사>처럼 흑백 세상에 갑자기 색이 입혀지듯 환상 같은 〈톨레도 풍경Heworlado(스페인의 도시 톨레도를 묘사한 엘 그레코티El Greco의 대그는 그리스 출신이자 스페인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신비롭고 역동적이며 표현적인 회화로 명성을 얻었다 - 옮긴이)이 우리를 마주한다. 감탄할 시간은 없다. 아다가 걸어가는 속도대로 플립북을 넘기듯 그림들을 스쳐 지나가며 수세기를 넘나든다. 그림의 내용은 신성과 세속을 오가고, 배경은 스페인이었다가 프랑스가 되었다가 네덜란드였다가 다시 이탈리아가 된다. 마침내 우리는 높이가 2.5미터에 달하는 라파엘로의 대작 <성좌에앉은 성모자와 성인들 Macdonna and Child Enthroned with Saints> (라파엘로 특유의 우아한 색감과 대칭적인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 <콜론나 제단화있다. ‘지저분하도록‘
Pala Coleter)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옮긴이)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 P14

"여기가 첫 근무지인 C구역이야." 아다가 말한다. "우리는 10시까지 여기에 서 있어야 해. 그다음은 저기. 11시에는 저쪽 A구역으로 갈 거야. 조금씩 돌아다니거나 서성거리는 건 괜찮지만 친구, 우리 자리는 여기야. 명심해. 자, 그다음에는 커피를 마시러 갈 거야. 여기가 당신의 전속 근무지지? 옛 거장의 OldMaster Paintings(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에는 "European Paintings"
으로 소개되고 있다-옮긴이) 전시실." 나는 그런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 운이 좋은 거야." 그녀는 계속 말을 잇는다. "결국에는 다른 곳으로도 배정받게 되겠지. 고대 이집트 전시실에 서 있다가 갑자기 잭슨 폴록으로 보내질 수도 있고. 하지만 처음 몇달간은 당신을 여기로 배치할 거야. 나중에는, 흠, 아마 근무일의 60퍼센트 정도만 여기서 일하게 될 테지. 여기서 근무하는 동안에는...." 그녀는 발을 두 번 구른다. "나무 바닥이라 발이 덜 피곤할 거야.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날 믿어. 나무 바닥에서 열두 시간 근무하는 건 대리석 바닥에서 여덟 시간 근무하는 거랑 동급이야. 여기서 열두 시간 근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발이 거의 아프지도 않을 거야." - P15

이어지는 순찰 구역은 13세기와 14세기 이탈리아의 그림뿐만 아니라 바로 옆 커다란 전시실의 프랑스혁명 시기 그림들까지 아우른 곳이라 우리는 역사의 타임라인을 오르락내리락한다. 돌아다니면서 때때로 아다는, 필요하긴 하지만 능력은 자신보다 한수 아래로 치는 감시 카메라와 경보기의 위치를 알려준다. 인간 노동자들을 더 대단하다고 여기는 그녀는 우리 경비원들과 거의 맞먹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곳의 숨은 조연들을열거하는 데 더 열을 올린다. 관리인, 우리의 노조 형제자매, 진통제를 나눠주는 간호사, 한 달에 하루밖에 쉬지 않는 계약직 엘 - P20

리베이터 관리인, 은퇴했거나 비번일 때 미술관에 상주하는 소방관 두 명, 무거운 작품을 옮기는 인부, 더 섬세한 작품들을 다루는 전문 아트 핸들러, 목수, 페인트공, 목공 기술자, 엔지니어, 전기 기술자, 조명 기술자 그리고 우리가 비교적 덜 마주치게 되는 큐레이터와 보존 연구원, 경영진까지.
이 모든 것이 매우 흥미롭지만, 나는 우리가 1300년경에 그려진 두초 Duccio 의 <성모와 성자Madonna and Child〉로부터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수다를 떨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없었다. 오전 내내 어떤 그림과도 마주 서서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가 없던 터라 나는 4500만 달러라고 알려진 이 그림의 가격을화제 삼아 아다의 주의를 이쪽으로 끌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러나 아다는 내가 그런 저속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에 슬퍼할 뿐이다.  - P21

몇 과목밖에 듣지 않았던 미술사 강좌는 학부 수업 중 가장설레는 시간들이었다. 강의실의 불이 꺼지고 슬라이드 프로젝터가 웅웅거리며 살아나면 스크린 위로 성당들, 이슬람 사원들,
궁전들과 같은 세상의 모든 웅장함이 딸깍 딸깍 딸깍 소리를내며 튀어 올랐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은 초크 그림이 백 배로부풀어 올라 초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밝은 스크린 위에서 고요히 진동하는 더 정적인 순간도 있었다.
공부를 하면서 겸손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 같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 벽화 청소 작업에 참여하셨던 교수님께 수업을 받을 때면 마치 내가 촉망받는 학자가 되어 그 현장의 작업대 위에 올라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 P31

하지만 형인 톰이 갑자기 병상에 눕게 되면서 모든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2년 8개월동안 나에게 현실세계란 베스 이스라엘 병원의 병실과 퀸스에 있는 방 하나짜리형의 아파트가 전부였다. 졸업 후 뉴욕 중심가의 고층 빌딩에서화려한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정작 나에게 아름다움, 우아함,
상실 그리고 어쩌면 예술의 의미를 가르쳐준 것은 그런 조용한공간들이었다.
2008년 6월, 형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하는 일자리에 지원했다. 열한 살 때와 달리 이번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으며 그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했다. 가슴이 벅차고 찢어지는 듯했다. 한동안은 그저 가만히서 있고 싶었다. - P32

아침은 늘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더욱이 미술관 문을 열기까지30분 정도 남겨두고 근무 자리에 도착하는 날이면 말을 걸어 나를 속세로 끌어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나와 렘브란트,
나와 보티첼리, 나와 실제로 거의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 믿어질 만큼 강렬한 환영들뿐이다. 메트의 옛 거장 전시관이 마을이라면 주민은 거의 9천 명에 달한다(몇 년이 흐른 후 전시실 하나하나를 섭렵하면서 모두 세어본 결과 정확히는 8496명이었다. 전시관을 크게 확장한 다음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숫자가 되었지만 여기에는 배경에 나오는 아기 천사, 투우장의 관객, 개미 크기의 곤돌라 사공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어떻게 그런 것들까지 모두 셀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면 그건 나에게 얼마나 시간이 많았는지를 실감하지 못해서다). 주민들은 596점의 그림 속에 살고 있는데 우연히도 거의 그숫자에 맞먹는 햇수 이전에 붓으로 창조된 사람들이다. - P37

모두가 규칙을 잘 지키고 있다. 내 시선이 페르메이르가 즐겨 그렸던 조용한 집안 풍경으로 가서 멈춘다. 뺨을 손으로 받치고 졸고 있는 하녀 (<잠든 하녀 A Maid Asleep〉, 잠든 인물을 둘러싼 일상 속의 물건들이 정적인 분위기를 이루고, 실내로 들어오는 빛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절묘한 작품 - 옮긴이)가 보이고, 그 뒤로는 잘 정돈되고 텅 빈 듯한 집 안의 모습이 모든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작가 특유의 빛을 받으며 펼쳐진다. 그림을 보다가 페르메이르가 포착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는 깜짝 놀랐다. 가끔 친숙한 환경 그 자체에 장대함과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그가 바로 그 느낌을 정확히 포착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형 톰의 병실에서 끊임없이 들었던 느낌이었고, 쥐 죽은 듯 고요한 메트의 아침이면 떠올리게 되는 바로 그 느낌이기도 했다. - P41

이 작품은 너무나 아름다운 침묵의 시와도 같아서 앞에 선 내 기분까지 거기에 함몰되어버린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인간 아도니스에게 절박하게 매달리는 아마빛 금발의 비너스와 여신의 품을 거부하고 위험 가득한 속세로 돌아가려는 자신만만한 젊은이 아도니스 둘 중 누가 더 아름다운지 고를 수가 없다. 나도 티션이 본 고대의 시를 읽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결국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있다. 아도니스는 죽고 비너스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빠져 그의흐르는 피에서 붉은 아네모네 꽃이 피어나도록 한다. 아네모네라는 이름은 ‘바람에서 태어나다‘라는 뜻이다.
아직 관람객이 없는 시간,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전시실 안을 걷다가 티션의 또 다른 작품을 발견한다. <비너스와 아도니스>보다 훨씬 작고 덜 알려진 작품이다. 티션이젊었을 때 그린 <남자의 초상 Portrait of Man)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 P44

히커리 로드의 빨강 벽돌집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찍은 스냅 사진들도 많다. 낙엽 더미 위에서 뛰고, 생일 케이크를 먹고, 침대 위에서 씨름을 하는 모습들. 포착된 그 모든 순간과 수많은 기억은 낡아진 사진들처럼 시간 속으로 사라져버릴 듯 위태롭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합친 총합은 그보다 훨씬 큰 것, 바로 톰에 관한 기억을 만들어내서 눈을 감으면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된다. 그 기억은 티션의 초상화와 매우 비슷하다. 밝고,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고, 퇴색하지 않는 이미지 말이다.
오늘의 첫 방문객이 도착한다. 나는 경비원이 서 있기에 좋은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 그러면서 미술관에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느끼고 싶은 것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닫는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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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억은 원천적으로 날조다. 스스로에게 거는 주술이요, 판타지다. 사건은 끊임없이 흘러가는데 나의 시선은 한곳에 머무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뒤늦게 사건들이 흘러가버렸음을 깨닫고 소위 ‘진실‘을 뒤쫓지만 늘 뒷북이요, 변죽이다. 아, 그렇다고 절망할 것까진 없다. 이런 식의 날조와 뒷북이야말로 삶의 대가이자 인간의 숙명이므로 어쩌면 인간이란 사건과 기억, 주술과 진실사이의 ‘밀당‘을 즐기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밀당속에서 문득 예기치 않은 ‘길‘들이 출현하기도 한다. 이 책을 통해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도 그렇게 출현한 ‘길‘들 중 하나다.
나의 기억으론 2008년부터였다. 우리에게 아주 낯선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더 디테일하게 말하면, ‘아, 우리가 정녕21세기에 살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된 것은 그즈음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졌다. 그와 동시에 IMF 이후 우리 사회를 추동했던 동력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부동산, 주식, 벤처 등으로 대박을 꿈꾸던 시절이 끝난 것이다. 그때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누려 온 풍요가 대부분 채무경제였다는 것을.
말하자면 우리를 비롯하여 전 세계가 빚더미 위에서 축제를 벌이고있었던 것이다. 오,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바로 이런 것인가? - P14

버블경제의 붕괴와 성공(행복)신화의 몰락. 그때부터인가한국사회에 인문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도서관과 지역공부방을중심으로 명맥을 이어 오던 인문학이 전 사회로 확산되기 시작한것이다. 참으로 뜬금없는 현상이었다. IMF 이후 스펙문화가 확산되면서 인문학은 멸시천대를 받아 왔다. 심지어 인문학의 산실인 대학에서도 인문학을 추방하는 데 열을 올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자기 왜?
솔직히 아무도 모른다.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을 외친 스티브잡스 때문이라는 ‘썰‘도 있고, 외부로 향했던 시선이 내면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썰‘도 있고, 그저 힐링의 대체물이라는 ‘썰‘도있고……. 물론 그 무엇도 답은 아니다. 분명한 건 사람들이이전과는 아주 다른 시선,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기시작했다는 것. 영화 <설국열차>식으로 말하면, 문은 앞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옆에도 있다는 것을 발견한 셈이라고나 할까. 한마디로 프레임이 바뀐 것이다. 프레임이 바뀌면 세상이 달라진다. 과연그렇게 되었다! - P16

요컨대, 생리와 심리, 그리고 물리는 서로 상응한다. 이걸 지도삼아 삶의 윤리를 찾아가는 것, 이것이 양생술이자 ‘도‘다. 이런 오래된 지혜가 우리 시대 인문학과 만나면 새로운 에콜로지가 된다.
인간과 자연의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소통과 융합의 기예로서의 에콜로지! 하여 21세기의 화두는 단언컨대, 몸이다. 몸은 수많은 이분법적 대쌍들의 교차지대다. 거시와 미시, 정신과 물질, 개인과사회, 보편과 개별, 남성과 여성 등등, 한마디로 생명과 우주의 모든양상들이 ‘크로스‘는 실존의 현장이다. 고로, 몸을 보면 세계의흐름을 알 수 있고, 우주의 이치를 알면 내 존재의 심연을 탐사할 수있다. 몸과 우주, 그 대칭성의 눈부신 향연! 우리의 새로운 출발점은 바로 여기다. - P21

야생적 신체성을 동력 삼아 삶 전체가 우주적 순환에 참여할 수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핵가족의 문턱을 넘어야한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성공신화의 핵심기제는 핵가족(혹은스위트홈)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도, 남보다 더 많이소유해야 하는 이유도 다 거기에 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이룬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핵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주적 존재가될 수 있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 다음엔 더 가열차게 달려야한다. 요컨대, 가족이 소유와 증식의 온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가족사이가 가장 위태로운 관계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스위트 홈‘은 더 이상 삶의 윤리적 척도가 될 수없다. 따라서 이젠 혈연과 가족을 넘어선 생명과 우정의 다양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소유를 향한 진격을 멈추고 생명의 대순환에 참여할 수 있는 길도 그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다. 이 ‘스마트한‘ 시대에 자꾸만 야생을 찾아 떠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 P24

그렇다! 바야흐로 집의 시대가 거하고 길의 시대가 ‘래하고‘
있다. 정주에서 유목으로! 집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정주민에겐모든 것이 고정되어 버린다. 그래서 소유와 증식, 서열 및 위계가공고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길 위에선 반대다. 모든 것이 유동한다. - P24

국경, 세대, 성정체성, 노동과 화폐 등등 그 어떤 것도 절대적우위를 점할 수 없다. 가치의 고정성은 물론 척도의 절대성도사라진다. 상이한 방향의 힘들이 각축하고 서로 다른 윤리들이좌충우돌하는 것, 무엇이든 실험할 수 있고 늘 새로운 존재로거듭날 수 있는 것. 그것이 곧 유목이다.
유목은 유랑이나 편력이 아니다. 관광이나 레저는 더더욱아니다. 어디에 있건 그 시공간을 전혀 다르게 바꿀 수 있는능력이다. 유목민에겐 돌아갈 고향도, 도달해야 할 종착지도 없다. - P25

오직 자신이 서 있는 그 시공간이 삶의 전부다. 하여 온전히 누리고 즐기되 시절이 바뀌면 훌훌 털고 떠나간다. 비움과 채움, 머묾과 떠남의 이중주! 따라서 유목을 위해 반드시 초원이나 야생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 시대의 유목은 도심 한가운데가 더 적당하다. 앞서도 밝혔듯이 21세기는 인간과 자연의 대칭성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 대칭적 네트워크는 문명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 문명적 대안이 될 수 있으므로, 문명 안에서 ‘문명의 외부‘를 사유할 수 있는 길, 그것이 곧 유목이다. 따지고보면 디지털 문명은 그 자체로 유동하는 신체다.
인터넷 안에선 모든 경계가 흔들리지 않는가. 또 SNS에선 중심도 방향도 없다. 접속과 변용만이 있을 뿐! 그렇다면 디지털이야말로 유목적 신체 아닌가. 문명의 첨단인 디지털과 야생적 신체인노마드(유목민)가 운명적으로 마주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 P25

그때 깨달았다. 디지털 세대에겐 국경이 없다는 것. 그들에게집을 떠난다는 건 국경을 넘는 곧 ‘월경에서부터 시작된다는것. 그때부터 신체는 전혀 다른 리듬과 강밀도를 지니게 된다는 것.
이를테면, 디지털과 신체, 문명과 야생, 주체와 타자 등 아주 낯선기호들이 융합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길 위에서 ‘길‘ 찾기를해야겠다고 작심한 건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그래서 시작된 비전이MVQ다. MVQ는 Moving Vision Quest의 약자로 고전과 여행을 다양한방식으로 접목하는 프로젝트다. - P27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다. 누군가 걸어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
중국 근대문학의 대문호 루쉰의 「고향」에 나오는 구절이다. 좀다르게 표현하면, ‘길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것이곧 길‘이라는 의미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늘 길 위에서 살아간다.
여기에서 저기로, 청년에서 중년으로, 탄생에서 죽음으로………….
천지만물이 생성소멸을 멈추지 않는 한, 사계절이 끊임없이돌아오는 한, 인간은 늘 길 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선택은 둘 중하나다. 이미 정해진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내가 길을 열어 갈것인가 다시 말해, 길 위에서 ‘정주‘할 것인가 아니면 길 위에서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
길을 떠나려면 지도를 그려야 한다. 지도를 그리기 위해선 - P27

하늘의 별을 보라고 했다. 우리 시대의 별은 바로 ‘고전‘이다.
『열하일기』, 『서유기』, 『돈키호테』, 『허클베리 핀의 모험』, 『그리스인조르바』, 『걸리버 여행기 등등. 인생과 우주의 지혜를 담은 책들을고전이라고 한다면, 고전 자체가 ‘길‘에 대한 탐구인 셈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진짜 여행을 다룬 책들이 있다. 길 위에서 ‘길‘을 찾는 ‘길‘ 자체가 주인공이자 주제인 그런 책들. 이름하여 ‘로드클래식 (여행기 고전)! 위의 작품들이 바로 거기에 속한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작품들은 각 문명권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그야말로 ‘별중의 별‘이다.
- P28

「톰 소여의 모험』의 자매편이라고 생각하면 눈이 확~ 떠질 것이다.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마크 트웨인의 작품이다. 대학 1학년 시절, 이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로드클래식‘을기획하는 순간 바로 이 작품이 떠올랐을 정도니, 이거야말로 ‘내안에 너 있다‘의 진수 아닌가. 어디 나뿐이랴. 이 작품을 읽게 되면누구든 깊이 잠들었던 야생과 탈주의 본능이 되살아날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여정은 한마디로 기상천외다. 무엇을 상상하든그 이상이다! 한데, 어디를 가든 걸리버는 인간의 역사와 본성을향해 지독한 ‘똥침‘을 날린다.
만약 이 ‘로드클래식‘의 주인공들과 여행을 한다면? 아마오대양 육대주를 다 넘나들어야 할 것이다. 연암 박지원, 돈키호테,
삼장법사와 그 제자들, 허클베리핀과 조르바, 그리고 걸리버,
이들은 대체 길 위에서 어떤 삶, 어떤 운명과 마주친 것일까? 그지도를 탐사하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콘셉트이다.
사족 하나, 길 위에서 ‘길 찾기‘를 하려면? 먼저 묵은 것들을흘려보내야 한다. 버블경제와 성공신화, 스위트 홈의 망상 등은말끔히 잊으시라. 비우는 만큼 길이 열릴 것이니. 이 ‘로드클래식‘과더불어 그 길을 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소유에서 자유로,
증식에서 순환으로 이어지는 ‘천 개의 길‘, ‘천 개의 삶‘을! - P29

이렇듯, 이 여행은 시종일관 정주와 질주가 격하게 교차하는이중주였다. 하지만 연암은 이 리듬에 휘둘리지 않았다. 거꾸로 그걸 능동적으로 활용했다. 발목이 묶일 때는 인정물태와 청문명의 저변을 훑고, 질주해야 할 때는 사유를 통해 ‘심연과 산정을넘나들었다. 고담준론과 깨알 같은 에피소드, 화려한 레토릭hetorics수사과 황당한 해프닝, 풍속과 역사 등 아주 이질적인 담론들이 매끄럽게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공간은 시간의 펼침이고, 시간은 공간의 주름이다. 시공의 펼침과 주름, 그것이 곧 리듬이다. 이 리듬에 고유한 강밀도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 여행은 곧 유목이 된다. 연암의 여행이 바로 그러했다. - P37

그렇다! 그들이 장사꾼으로 떠도는 건 스스로 선택한 삶이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천하를 떠돌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 바로장사였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자본의 흐름과는 정반대다. 전자는정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후자는 오로지 자신의 영토를확장하기 위해, 소유와 정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운동을 유목이라한다면 이때 수반되는 윤리가 곧 우정이다. 우정 없는 유목이란
‘앙꼬 없는 찐빵‘, ‘오아시스 없는 사막‘에 다름 아니다. 이들이 왜연암을 그토록 환대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것이 연암이 타자들과 접속하는 기술이다. 탈주는 은밀하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궤도를 벗어난다. 하지만현장은 더할 나위 없이 유쾌하다. 이 매끄러운 리듬 속에서 술과웃음, 예능과 서사, 풍속과 윤리가 자유롭게 교차한다. 은밀하게 유쾌하게! - P42

그 저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장면이 바로 열하로 가는과정이다. 굶주림과 잠 고문 속에서도, 생사를 오락가락하면서도그의 신체와 사유는 더할 나위 없이 명징하였다. 이것이 바로니체가 말한 ‘위대한 건강‘이리라.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존재의무게중심을 잃지 않는 강철 같은 체력! 또 빛나는 명랑성!
예측불허의 상황 속에서 늘 반전을 야기할 수 있는 동력도 거기에있다. 고독한가 하면 왁자지껄하고, 위기인가 싶으면 순식간에 출구가 열리고, 백척간두가 곧 ‘깨달음‘의 현장이 되는 식으로 그렇다. 유목민에게 있어 길은 늘 반전의 연속이다. 여행이든 삶이든 인생도처유 ‘반전‘! - P46

원수라 해도 배울 것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 오랑캐의 나라는저토록 활발한데 중화를 표방하는 조선은 왜 이토록 무력한가?
학맥이나 당파로는 주류적 라인에 속했음에도 연암은 이 불편한진실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 "청문명의 장관은 기왓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다!" "이용이 있은 연후에야 후생厚生이 될것이요, 후생이 된 뒤에야 정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파격적테제들, 수레·온돌·벽돌 등에 대한 생생한 관찰 등은 다 거기에서비롯한다. - P48

무릇 천하의 일이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양쪽에서 줄을 당기는것과 같습니다. 줄을 당기다가 줄이 끊어지면, 끊어지는 곳 가까이처했던 쪽이 먼저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의 힘이대등하게 겨룰 만하기 때문에 천하에는 거스르는 것과 순종하는차이, 즉 밀고 당기는 차이는 있어도 어느 쪽이 옳다든지 어느쪽이 틀렸다든지 하는 것은 없습니다. 박지원, ‘열하일기』 2, 김혈조 옮김,
돌베개, 2009, 419~420쪽.} - P49

천주교가 코스모스라면 티베트불교는 카오스다. 전자가 근대를 향한 빛의 유토피아라면 후자는 근대 ‘너머의 헤테로토피아다. 이 카오스는 기존의 표상에 포획되지 않기에 혼란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황홀하다. 저 요술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이처럼 연암과 열하의 마주침은 18세기 당대는 물론 지금 우리의 시선으로 보아도 낯설고 이질적이다. 카오스이자 판타지아인 세계, 이 매트릭스 위에서 어떻게 길을 찾을 것인가?
여행의 입구였던 저 요동벌판에서 외친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존재일 뿐"이라는 탄식이 열하라는 시공간을 만나 한층 더강렬하게 변주된 셈이다. 결국 연암의 시선에서 보자면, 인생이란 - P50

‘길 없는 대지‘(크리슈나무르티) 위를 걸어가는 여행이다. 길이 있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길이 되는 그런 여행!
이 ‘길 없는 대지‘ 위에서 잠들었던 말들이 웅성거리고 천지의비의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때 길은 글쓰기의 향연이자 전장이 된다. - P51

18세기는 연암과 다산이라는 두 거성의 시대였다. 다산 정약용이양적으로 가장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면, 연암 박지원은 질적으로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연암으로 인해 한문은 ‘갈 데까지 갔다‘고들한다. 대체 어떤 경지이기에?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그의 글에는수많은 문체들이 범람한다. 그것은 고문도 아니고 금문도아니다. 정학正學도 아니고 소품체도 아니다. 고문과 금문, 정학과소품문‘사이‘, 이를테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글쓰기, 곧
‘연암체‘다. 타고난 자질에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하고 젊은 날을유람과 독서로 보내면서 갈고닦은 실력일터, 그 내공이 유감없이발휘된 작품이 『열하일기』다. 그러므로 『열하일기』는 단순한여행기가 아니라, 글쓰기의 ‘로드맵‘이다.
여행이 시작되자 연암은 말 위에서 수많은 ‘썰‘들을 풀어낸다.
"수십만 마디의 말이, 문자로 쓰지 못한 글자를 가슴속에 쓰고,
소리가 없는 문장을 허공에 썼으니, 그것이 매일 여러 권이나되었다."(박지원, 『열하일기 2, 471쪽.) 하여, 그가 가는 곳마다 ‘말과사물‘이 잠에서 깨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때론 화려한 수사와우아한 논리로, 때론 열정의 패러독스와 깨알 같은 유머로. - P55

그럼 이런 글쓰기는 기술지의 영역인가? 아니면 철학잠언인가? 왜 이런 우문을 던지느냐면 흔히 기술지는 글쓰기의 영역이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다. 과학자나 의사들이 글쓰기와담을 쌓는 것도 그런 맥락이리라.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건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과 맺는 관계에 있다. "독서란묘석과의 열광적인 춤이다"(모리스 블랑쇼)는 말도 있듯이,
글쓰기의 역능 또한 사물들과 함께 춤출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솔직히 기술지만큼 글쓰기와 잘 어울리는 것도 없다(좋은예로, 『동의보감』은 의학적 임상을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와 노래로표현한다). 자연의 물리적 법칙이 생활의 현장과 마주칠 때 그것을 일러 소위 기술이라 하고 문명이라 하지 않는가. 기술에도 윤리와철학이 필요하듯, 사물들도 ‘일상의 향연‘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 P66

"글자는 군사요, 글자의 뜻은 장수다. 제목은 적국이요 고사의인용은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다."(소단적치인騷壇) 이것이 연암의 글쓰기 전략이다. 글쓰기가 병법이라면 목표는 간단하다.
적을 제압하는 것. 그걸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지형지물을 적극 활용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연암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가장 흔하게 쓴 전략은 ‘줍는‘ 것. 연암은 길 위에서 틈나는대로 ‘말들‘을 줍는다. 전설과 민담, 야담과 실화 등등, 연암은 닥치는 대로 주워서 한 편의 글로 버무려 낸다. 많은 글이 그렇게 탄생했다. - P67

‘하늘 아래 책을 읽고 이치를 탐구하는 것처럼 아름답고 고귀한일이 또 있겠는가?" 정조대왕의 말이다. 과연 호학 군주답다.
구체적으로 그 과정을 소개하면, 첫째, ‘고전을 통해 진리를 배운다.‘ 둘째, ‘탐구를 통해 문제를 밝힌다. 셋째, ‘호방한 솜씨로 지혜롭고 빼어난 글을 써 낸다. "이것이야말로 우주 사이의 세 가지 통쾌한일"안대회, [정조치세어록 푸르메 2011, 21~22쪽] 이라는 것. 글쓰기의 통쾌함이라! 그것도 ‘우주적 통쾌함‘이라니, 그건 곧 ‘도‘라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 우리 시대야 글쓰기가 한낱 테크닉으로 전락했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글쓰기란 인간의 보편적 활동이었다. 성리학이 통치의 근간이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여, 글쓰기의 비전은 언제나 우주적 이치 혹은 생사의 문제와 연동되어 있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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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더군다나 원자폭탄과 인터넷이 등장하고, 수많은 종들이 지구상에서 급속도로 사라지는 시대에 말이지요. 그렇지만 작가들이 쓰는 글이 ‘문학‘이라는 높은 담장 안 정원에만 갇혀 있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가 영향을 미치고 결과를 낳는다고 가정해보세요. 그러면 상상력의 사제가 자신의 특권이라고 주장하며 무시해왔던 윤리, 책임, 그 비슷한 귀찮은 것들에 대해 논의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제‘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까요. 사제가 단순히 의식을 거행하는 숭배자는 아니지 않나요? 백성의 목자이자 신과 인간의 중재자 아닌가요? 제임스 조이스의 스티븐디덜러스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옮긴이)는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내 민족이 아직 창조하지 않은 양심을 버리기 위해 나아갑니다. "양심", 도덕적 의미로 충만한 단어지요. 만약 작가에게 정말 그런 힘이 있다면, 그 힘을 휘두르는 사람(작가)과 당하는 사람(나머지 사람들)이란 측면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는 게 어떨까요? - P147

누구도 작가만큼 작가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개인으로든 직업군으로든 가장 악랄하고 경멸스러운 작가의 초상을 만날 수 있는곳은 작가들이 직접 쓴 책이지요. 하지만 누구도 작가만큼 작가를사랑하지도 않아요. 과대망상증과 편집증은 작가와 한 거울을 공유하지요. 파우스트로서의 작가는 거울을 보며 거만하고 사악하 - P147

고 초인적인 메피스토펠레스이자, 마술의 대가이자, 운명의 지배자를 마주합니다. 그들에게 다른 인간들은 끈으로 조종할 수 있는인형이거나 자신들의 마음과 내밀한 비밀을 그의 손바닥에 맡긴바보 같은 존재들이에요.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로서의 작가는같은 거울 속에서 떨고 있는 한심한 파우스트를 발견합니다. 영원한 젊음과 끝내주는 잠자리, 엄청난 부를 갈구하는 동시에 자신이 보잘것없는 끼적임과 유치한 말장난(그래놓고 뻔뻔하게 "예술"이라부르지요)으로 이런 바람을 짠하고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한심한망상을 필사적으로 움켜쥔 파우스트 말이에요. - P148

아래는 A. M. 클라인이 현대 시인의 수치스런 존재감 상실에대해 노래한 시입니다.


우리가 현실 사회에서 알 수 있는 건
그가 사라졌다는 것, 중요하지 않다는 것뿐.
흔적이 남아 있다면 고작 통계자료,
이를테면 누군가의 투표, 아마도 갤럽 여론조사에서
누군가 던진 비웃음, 정부 위원회의 점 하나.
하지만 소리치는 군중, 누군가의 한숨에서 그는
느껴지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다. - P150

오, 자신의 두루마리에서, 왕자의 인용문에서연단에 퍼지는 큰 울림에서 우리의 문화를 펼쳐냈던 그,
한 이름으로는 천국을,
다른 이름으로는 일곱 고리의 연옥을 노래하던 그그가 지금도 존재한다면, 숫자이고, 미지수일 것이다.
익명의 길 잃은, 누락된호텔 장부의 어떤 스미스 씨일 것이다.  - P151

참고로, 이런 정신적 상처는 주로 남성들이 입었지요. 여성 작가들은 낭만주의 시대에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으며, ‘천재‘라는메달을 별로 걸어본 적도 없습니다. 사실 ‘천재‘라는 단어와 여성‘이라는 단어는 영어에서 보통 어울려 다니지 않아요. 남성 ‘천재들이 하는 기이한 행동을 여성이 하면 보통 ‘미쳤다‘는 꼬리표가 붙거든요. 심지어 ‘재능 있는‘ ‘대단한‘ 같은 단어들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사회에 실제로 영향을 끼쳐놓고도 수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자신의 야심을 시인하지 않았지요. 그러다 보니 오늘날여성 작가들은 그들의 힘이 감소했다거나 세계 무대에서 위신이낮아졌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잘하고 있다고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렇기에 걸출했던 여자 선배들과 비교해 자신들이 아주 허약하다고 여기지 않지요. - P151

지금부터는 고상하게 예술지상주의를 추구하는 정체성을 대체할 또 다른 정체성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자기 인식의 위기에 대해 논하려 합니다. 그중 하나는 예술과 돈과 권력이 엇갈리는 독특한 교차점과 관련이 있고, 나머지 하나(이것도 앞의 것과 무관하지 않지요)는 ‘도덕적 책임‘ 아니면 ‘사회적 책임‘이라 불리는 것과 관련이 있지요. 사람들이 예술 활동을 통제하며 예술가에게 간섭하는지점은 ‘돈과 힘‘이라고, 예술가가 예술 활동으로 사람들에게 간섭하는 지점은 ‘도덕 및 사회적 책임‘이라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질문은 아주 짧게 압축할 수 있습니다. 시장에 영혼을 팔았는가? 만약 그랬다면 얼마에 팔았고, 누가 샀는가?
영혼을 팔지 않았다면 누가 예술가를 껍질 무른 게처럼 짓밟는가? 영혼을 판 대가로 예술가가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 P152

작가는 도덕적 법 위에 있을까요? 그러니까, 지루하고 우둔하고 재능 없는 지극히 평범한 대중은 지켜야만 하는 평범한 규칙을 작가는 전혀 적용받지 않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인 걸까요? 한편 글쓰기가 예술 작품으로서 그 자체가 아니라 실은 작가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면, 살인을 창조해낸 작가가 드러낸 건 어떤 자아일까요? 별로 훌륭한 자아는 아니라고 생각할 겁니다. 기껏해야 부도덕한 자아, 최악의 경우엔 타인의 고통을 즐거워하는 괴물이라고 여기겠지요.
하이 모더니즘과 하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섬기는 최고 사제인수전 손택은 초기에 쓴 자신의 반전통적 에세이에 대해 훗날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 P154

나는 강렬한 자기 모독을 저질렀다. (...) 그 에세이들은 근엄했을뿐 아니라, 확실히 금욕적이었다. 마치 내가 내 상상력의 관능성을 믿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길을 잃을까봐 두려웠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선한 것들, 사람들을 바로잡는 것들을 지지하고 싶었을뿐이었고, 그건 내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 사고의 틀은 언제나 도덕적이었기 때문이다! - P155

"사람들을 바로잡는 것" 아 그렇습니다. 모든 부모가 예술의 그런 유익한 기능을 간절히 원하고, 북미의 모든 교내이사회가 그기능에 동의하고, 그중 일부는 그런 합의를 검열의 구실로 사용하지요. 하지만 어떻게 "사람을 바로잡는다"는 걸까요? 그리고 어떤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걸까요? 그러니까 사람을 바로잡고, 또 일부 사람들이 유해하다고 여기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는 걸까요? - P155

하지만 예술가의 눈이 차가운 데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감옥에서>의 마지막 부분을 볼까요.


이 눈은
울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시선은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려도
절대 흐려져선 안 된다

그것의 목적은 명징함이다
어떤 것도
잊어선 안 된다  - P176

작가는 보편적 인류와의 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정말로 권력이 주어진다면, 권력의 사다리 어디쯤에 자리 잡아야할까요? 선택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했다시피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몇몇 가능성과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잠재적 위험들, 그리고 난제들은 짚어보았습니다. 그래도 젊은 작가에게 꼭 조언을하라면, 앨리스 먼로의 말처럼 "원하는 대로 하고 결과는 스스로 감수하라"고 말하겠어요. 아니면 "이야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라"고, 혹은 "공들여 쓰다 보면 사회라는 문제는 절로 해결된다"고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에요. 비밀을 말하자면 (아무 토론회에나 가서 써먹어도 상관없습니다), 작품이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지 아닌지를 정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걸 정하는 건 작가가 아니라 독자예요. 그리고 바로 그 독자가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입니다. - P177

그러니 만약 독자들께서 이 작품이 현 시대, 아니 어쩌면 헬리오가발루스 시대에 만들어진 최고의 요리 원칙을 엄격히 고수했다는 걸 알게 되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 그 말인즉, 앞서 언급한 위대한요리사가 나리들의 식욕을 돋우어주었던 것처럼 독자들께서도 이 책을 영원히 읽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게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 헨리 필딩, <톰 존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 곁에 있다. 심지어 이야기를 읽는 사람도 이런 동료애를 나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독자는다른 어떤 독자보다도 고립되어 있다. (..) 이런 고독 속에서 소설의독자는 누구보다 악착같이 책을 붙든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준비가, 이를테면 걸신들린 듯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

데틀레프 폰 릴리엔크론의 운율에는 빈정거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말했다. 시인은 명성을 얻지 못하기가 힘들다. 살아생전 대중의환심을 사지 못하면, 후대가 굶어 죽어간 그의 영웅적 행적을 칭송할테니, 한 마디로, 판다는 것은 영혼까지 전부 팔아치운다는 것을 뜻했다.

- 피터 게이 <쾌락 전쟁>

우리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진술이다. 그렇기에 적은 관객을 기대할수 있다.

-그웬돌린 매큐언, <선택>>

그는 형편없는 대형 신문사의 눈에 띄면서 칭송받고, 성유 부음을 받고, 왕관을 쓰게 됐다. 마치 뚱뚱한 안내원이 지팡이로 꼭대기 의자를 가리키기라도 한 것처럼 공개적으로 왕좌에 배정받았다. (...) 어쩌다 보니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엄청난 파도가 무언가를 휩쓸어버렸다. 그 파도가 내 작은 관습의 제단과 그 위에 놓인 반짝이는 양초와 꽃을 쓰러뜨리고 텅빈 거대한 사원을 세워 올려버렸다.
닐 패러데이가 세상으로 나온다면 그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일 터였다. 그리고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 불쌍한 남자는 끔찍한 시대속으로 쑤셔 넣어질 운명이었다.

- 헨리 제임스, <유명인의 죽음

나는 봉투를 찢는다. 나 지금 방콕이야
(...) 너는 네모난 봉투에서 이 푸른 사절들을 쏟아낸다.
널 세상에 잃었다는 느낌이 들 때,
계속 따라가기 힘들 때,
너의 엽서가 이렇게 말한다
"날 기다려줘."

- 앤 마이클스, <마사에게 온 편지

시인이었던 나의 한 대학 은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작품에나 공통으로 던질 수 있는 진짜 질문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그 작품이 살아 있는가, 아니면 죽어 있는가‘라고요. 어쩌다보니 그 말에 동의하긴 했는데 시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는어떻게 결정될까요? 생물학적 정의를 보면 살아 있는 것들은 성장하고 변화하며 자손을 낳을 수 있는 반면, 죽은 것들은 아무 활동성도 띠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텍스트가 성장하고 변화하고 자손을 낳을 수 있다는 걸까요? 독자가 작가와 시공간상으로얼마나 떨어져 있든 상관없이, 오직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닙니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야한 시를 베끼는 한 우체부가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하는 말입니다. "시는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에요." 그게 정답입니다. - P200

그보단 녹사에게 친근하게 관심을 표하지요. 아래는 러시아 시인 푸시킨 <예브게니오네긴>이라는 시의 말미에서 독자에게 멋지게 작별인사를 고하는 부분입니다.


독자여, 당신이 누구든,
친구든 적이든 간에,
정답게 헤어지고 싶다네.
잘 가시게, 이제 끝이 났으니.
이 조잡한 글에서 무엇을 찾아냈든,
격정적인 추억이든,
고생 끝의 휴식이든,
그냥 문법적 오류든, - P204

생생한 묘사들, 떠들썩한 재담이든.
당신이 이 작은 책에서
감동이나, 재미나,
꿈이나, 잡지의 논쟁에 필요한 것이나,
조금이라도 얻어가기를 바라네.
이쯤에서 헤어지세. 그럼 안녕. - P205

하지만 그는 중요한 사실을 모릅니다. 꿈속의 그 인간들이 바로이라는 것을요. 그들이 책의 인간적인 요소라는 것을요. 그의카에 신의 음성이 들립니다. "여기에 책은 없다." 하지만 그는 그말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후반부가 되면 그가 수집한 모든 책이생명을 얻고 그에게서 등을 돌리지요. 지금까진 그로 인해 죄수처럼 개인 서재에 갇혀 있었으나 이젠 자신들의 메시지를 자유롭게퍼트리고자 하는 거예요. 앞서 말했듯 책은 독자로부터 독자에게로 이동해야 살 수 있으니까요. 이윽고 그는 책에, 그리고 자신의몸에 불을 지릅니다. 화형, 그것이 이단자의 운명이지요. 책이 불타기 시작하자 책 속의 글자들이 그가 창조한 ‘데드 레터 오피스를 탈출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 P208

때로 책은 작가의 개입 없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아래는 제이 맥퍼슨이 쓴 <책>이라는 간단명료한 제목의 시입니다. 여기서의 책은 말하는 책인 동시에 수수께끼이지요. 물론 답은 제목에 있습니다.


친애하는 독자여, 당신 같은 인간이 아니기에나는 그대처럼 사랑할 수 없고, 그대도 나처럼 사랑할 수 없다 - P208

하지만 그대처럼 큰물로 나가서
보잘것없는 배로 사나운 바다를 이기려 하나니.

개울 수면을 젖지 않고 덧없이 떠가는 물방개도
나보다는 가냘프지 않고
흥분된 눈으로 심해를 살피는 고대의 고래도
나보다는 대단하지 않도다.

비록 창조자의 의지로
공기, 불, 물, 땅을 가로지르지만
내 부피가 그대의 손에 짐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꽃피운다. 그대가 보는 데서, 그리고 그대를 위해서.
그를 섬기지만 나는 인간과 씨름하길 주저하지 않으니
붙잡히고 삼켜져도 그를 축복한다. 독자여, 받아주기를  - P209

이 작은 책은 배이며, 고래이며,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에게 축복을 내린 천사입니다. 아울러 성찬식에서 섭취되는 대상으로서,
삼켜지지만 파괴되지는 않는 음식입니다. 또한 축제에 온 손님의영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스스로도 새로이 거듭나게 하는 축제이지요. 천사는 드잡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동화되고 결국그의 일부가 됩니다. - P209

오 위대한 신이여, 밤의 왕자들이여,
빛나는 존재여, 불의 신 기발이여,
지하세계의 장군이라이여 (...)
점을 칠 때 제 곁에 계시길.
제가 바치는 이 양이
진리를 드러내기를 비옵니다!

ㅡ메소포타미아 기도

그런 뒤 죽음의 배를 지어라,
망각으로 가는 가장 긴 여행을 떠나야 하니.
그리고 죽음을 죽어라,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과거의 나와 새로운 나 사이에 놓인 (...)

오 죽음의 배를 지어라, 너의 작은 방주에
음식과 작은 케이크와 포도주를 채워 넣어라
망각으로 내려가는 어두운 항해를 위해

- D. H. 로런스, <죽음의 배>

겨울은 컴컴한 우물 위에 걸려 있고,
내 등은 하늘을 향해 있으니,
그 암흑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지,
반짝이는지, 눈을 깜박이는지 보기 위해서다

아니, 나는 바닥으로부터
잃어버린 모든 것, 빛나는 모든 것과 누워서
하늘의 흰 빛을, 내 눈동자를 올려다본다
나의 겨울은 죽은 자들과 함께다

진리의, 이미지의, 말의 우물.
저 아래 오리온이 놓인 자리극점의 웅덩이가 계단이 되는 게 보인다.
성좌가 뜬다.

-제이 맥퍼슨, 〈우물〉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서
움직이고 살아 있는 것
그들을 건드린 것을 만지는 것은
그들 덕분이니 (…)

영이 된 뼈들과 하나가 된 흙에
무릎까지 박고 서서
고고학의 태양을 받는다 (...)

해질녘 마을,
교차하는 어둠의 강물에
가슴까지 담그고 서 있으니,
말 없는 사냥꾼들과
어두운 불 위로 몸을 숙인 여자들,
나는 그들의 낡은 자음을 듣는다 (...)

- 알 퍼디, <인디언 마을의 유적 > 

내양 손바닥에서 기쁨을 취하라
약간의 꿀과 햇빛을,
페르세포네의 벌이 우리에게 명한 것처럼.

- 오시프 만델슈탐, <내 양 손바닥에서 기쁨을 취하라> 

죽은 자의 땅으로 가서 저세상 사람을 산 자의 땅으로 데려오는것. 이것은 인간의 아주 깊숙한 욕망이자, 아주 엄격히 금지된 행동입니다. 하지만 글을 씀으로써 죽은 자에게 일종의 생명을 부여할 수 있어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단테에 관한 아홉 편의에세이"에서 흥미로운 이론을 제시합니다. 단테가 《신곡》, 그러니까 ‘지옥 편‘ ‘연옥 편‘ ‘천국 편‘ 세 편 전부를, 그 모든 방대하고복잡한 세계를 만들어낸 까닭은 죽은 베아트리체를 어렴풋하게나마 보기 위해서, 그녀를 자신의 시 속으로 불러내기 위해서라는거지요. 그가 그녀에 대해 글을 쓰고 있기에, 그녀에 대해 글을 쓴다는 그 이유만으로, 베아트리체는 작가와 독자의 마음속에 다시살아 숨 쉴 수 있습니다.  - P238

죽은 자들은 피를 구합니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허기와 갈증에시달리지요. 그들에게 피를 제공한 대가로 시인은 천리안을 얻고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성합니다. 오래된 합의 방식대로지요.
모든 작가들은 죽은 자들로부터 가르침을 얻습니다. 계속 글을 쓰는 한, 작가는 앞서 글을 썼던 작가들의 작품을 끊임없이 탐구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들에게 평가받고 질책당한다고 느끼지요. 하지만 작가는 작가로부터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조상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죽은 자들은 과거도, 이야기도, 특정한 진실(지하세계로의 여정을 다룬 윌프레드 오언의 시 <이상한 만남>에서 "감춰진 진실"이라 부르는 것도 모두 통제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이야기를 마음껏 탐닉하려면 결국 지나간 시간에서 온 사람들과 거래를해야 합니다. 그 지나간 시간이 겨우 어제라 하더라도 과거는 과거이지요.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아니라. - P246

가장 믿을 만한 출처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곳에 가는 건 쉽지만 돌아오는 건 어렵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면 모든 이야기를 돌에 새겨야만 합니다. 운이 좋아 올바른 독자를 만나면 돌이 말을할 겁니다. 돌이 혼자 세상에 남아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마지막 말은 시인 오비디우스에게 넘기겠습니다. 그는 쿠마에의 무녀 시빌에게 발언을 허락해주었죠. 그녀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추측컨대 오비디우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모든 작가들의 희망과 운명을 위해서.


하지만 운명이 내게 목소리를 남겨놓아,
사람들이 그 목소리로 나를 알아보게 될 겁니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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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참, 좋. 다.
잘 만들었다.
잘 만든 책을 만나서... 책장을 넘기는 내내
행복해졌다.
오래, 자주 볼 책을 만났다.

사울 레이터 재단은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진실이란, 사울이 슬라이드 하나하나의 존재가치를 믿었다는 것이다. 그는 종이 위에 형태와 선이인화되어야만 가치가 생긴다고 보지 않았다. 사울은언제나 모든 슬라이드를 신중히 살폈으므로, 우리도그렇게 했다. 사울이 원했을 방향을 고민하며 편집작업에 몰두했다. ‘레이터 스타일‘의 상징이 된 사진들을떠올리며 사울의 고유한 미감이 드러나는 사진들을주로 선별했지만, 특이하고 급진적이며 위트 넘치는그의 실험 정신을 따라 의외의 사진들도 추렸다.
우리는 몇몇 특별 손님을 스튜디오로 초대해사울의 사진을 영사해 보여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우리는 그의 사진을 체험하는 새로운 방식에 눈을 떴다.
환등기를 통해 보는 사진은 인화된 사진을 감상하는것과는 사뭇 다른 색다르고 짜릿한 경험이었다. 이책에 실린 76장의 사진은 사울의 시적인 감각을 여실히 증명하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그저 그 사진들을 발견했을 뿐이다 - P16

레이터는 뉴욕 로몽 에디션스의 대표 필리프
‘로봇에게 인화를 의뢰했다. 로몽은 2014년 레이터추모 행사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몸이 살짝 굽은 사람하나가 어깨에 카메라를 둘러 메고 얼굴에는 장난기어린 웃음을 띤 채 조용히 스튜디오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시바크롬 필름을 인화하겠다고 했지요. 그는 별것 아닌 일처럼 말했지만, 거장의 필름을 인화지에 옮기게 되었기에 나는 커다란 희열을 느꼈습니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가라앉은 색채와 그윽함을지닌 사진들이었어요. 강렬한 독창성, 추상과 구상의 상호작용, 여운과 반향, 뉴욕 거리의 일상적 분위기와 날씨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파편적이고 기발한 구성 속에서 색들이 서로 대화하고, 면과 면이 교차하고, 그러면서도 슬라이드 하나하나가 애쓰지않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죠. 이 모든 것은 분명히화가의 시선으로 포착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관찰력이 유달리 뛰어난 산책자가 느긋하게 돌아다니던 와중에 즉흥적으로 발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 P71

얼리 컬러의 성공은 레이터의 삶을 단숨에 바꿔놓았다. 수십 년간 불안정했던 수입도 안정을 찾았다. 하워드 그린버그 갤러리에서는 레이터의 작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1996년부터 2013년까지 이 갤러리에서 레이터를 담당했던 사울레이터 재단 대표 마깃 어브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울과 함께 일했던 시절에 그는 대체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일년에 팔리는 작품 수도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으니, 정말로 미미한 수준이었죠. 전시회가 열리면 신문에 기사가 실렸고 호평이들려왔지만, 장기적으로 이렇다 할 보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책이 나오고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그의 정보를 접하게 되면서 폭발적인 관심이 쏟아졌어요. 그때부터 사람들은 컬러 사진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일하던 작가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한순간에 인정받는 모습을 보는 건 행복한 경험이었어요." - P74

그의 사진에는 ‘불일치‘한 매력이 도사리고 있다. 클래식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옛날 자동차, 미드센추리패션 뿌연 색감은 지나간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시간을 초월한 어떤 순간, 먼 미래의 한순간을 상상하게 한다. 2002년 유대인 박물관 강연에서 레이터는 말했다. "세월이 흐르면 지금 우리를 둘러싼 것들이 머나먼 곳에서 온 것처럼 낯설어 보일 겁니다. 따라서, 참 재미있게도, 시간은 사진작가의 편입니다." - P74

마킷과 나는 2020년 1월 9일 도쿄 분카무라미술관에서 열린 <영원히 사울 레이터> 전시회 개막전에 참석해 전시를 감상했다. 관람객들이 슬라이드를 보는 모습 또한 지켜보았다. 마깃이 책 도입부에서 고백했듯이, 사울의 사후에 그의 사진을 발굴해 세상에 선보인다는 것에 대해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사진들이 모든 의심을 잠재울 만큼 강력하며, 앞서 발표된 초기 작품과 궤를 같이한다고 믿었다. 아울러 레이터 아카이브의 관리인으로서 그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는 것이 특권이자 임무라고 생각했다. 사울은 무언가를 미리 계획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에 유산에 대해서는 넌지시 언급하기도 했는데, 2008년 슈타이들에서 출간한 책 사울 레이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는 내 아카이브 탐사를 후원하고, 최고의 사진들을 마저 편집해줄 사람이 필요할 겁니다."
- P122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회고전 <영원히 사울레이터는 계획보다 훨씬 이른 2020년 2월에 막을내렸다. 마킷과 나는 고향인 미국 북동부에서 전 세계와마찬가지로 길고도 당혹스러운 휴지기를 견뎌야 했다.
마침내 우울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손을건넨 것은 슬라이드 프로젝트였다. 지금 여러분이 들고있는 이 책을 위해 열심히 작업에 매진하면서, 우리는충만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사울의 작품을 아끼는 열렬한 팬으로서 그의 사진을 실컷, 느긋하게 감상했다.
일상의 평범함을 포착한 그의 사진을 통해 아름다움은다른 곳이 아닌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얻기도 했다.
자신이 살던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며 최고의 작품을남긴 사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에요. 아무 데도 안 가고도 내가 해낸 일을 봐요!" 달라진 세상에서 마깃과 나는 더는 새로운 영감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이제 - P122

우리는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거닐던 사울을 추억하며 기쁨에 잠긴다. 그의 사진 속에서 영원한 세상의 한조각으로 남은 익명의 영혼들과 그를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이들이 미처 몰랐을 사울의 모습을 상상하며.
다른 사람은 좀처럼 보지 못하는 초월적이고 어쩌면 덧없는 일상의 순간을 포착해준 사울에게 커다란 감사를 느낀다. 이 책을 통해 수십 년간 깊이 묻혀 있던 76장의 보물 같은 사진을 세상과 나누게 되어 무척이나 기쁘다.
- P122

사울레이터

1923년 피츠버그의 독실한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랍비가 되기 위한 교육을받았지만 1946년 화가가 되기 위해 학교를 중퇴하고 뉴욕에 정착했다. 이후 30년가까이 패션 포토그래퍼로 활동하며 <하퍼스 바자》, 《엘르》, 《에스콰이어》 등에사진을 게재했다. 1940년대 말부터 컬러 사진을 찍었으며, 그가 살던 맨해튼 거리와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을 필름에 담았다. 2006년 첫 사진집 「얼리 컬러 (Steidl)』가출간되며 그의 사진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다채로운 색감을 지닌 그의 사진들은현재 ‘컬러 사진의 시초‘라는 평가를 받는다. 2013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깃 어브


사울 레이터 재단의 설립자이자 대표, 1996년부터 사울 레이터가 사망한 2013년까지 하워드 그린버그 갤러리에서 그를 담당했고 레이터를 도와 아카이브를정리했다. 슈타이들에서 출간된 「얼리 컬러와 사울레이터: 나의 방에서Saul Leiter: Inmy room』 등 레이터의 사진집을 도맡아 작업하기도 했다. 2013년 발표된 다큐멘터리<사울 레이터: 인 노 그레이트 허리>를 공동 제작했다. 2020년 도쿄 분카무라미술관에서 열린 <영원히 사울 레이터> 전시회 기획을 도왔다. 남편 마이클 파릴로와함께 레이터의 방대한 아카이브를 관리하고 있다. 아카이브는 레이터가 생전에머물렀던 뉴욕 이스트빌리지 스튜디오에 마련되었다.

마이클 파릴로


사울 레이터 재단의 부이사장, 2015년 재단에 합류했으며, 20년 넘게 편집자이자음악 및 라이프스타일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영원히 사울레이터(小学館), 사울레이터의 모든 것(靑舍), 『여행하는 눈 뉴욕Travel Eye: New York』(Louis Vuitton), 사울레이터: 나의 방에서」 등 레이터의 책들을 작업했다. 2016년 발표된 단편영화 <보는것은 등한시된 노력이다. 사울 레이터 재단Seeing Is a Neglected Enterprisez The Saul LeiterFoundation>의 총제작자이기도 하다. 현재는 마깃 어브와 함께 레이터 작품의 디지털 카탈로그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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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로 기억의 기술을 고안한 사람은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다. 그는 한 연회에 참석했다가 두 소년이 찾는다는 소식에 밖으로 나갔고, 그 직후 땅이 흔들려 저택이 무너졌을 때홀로 목숨을 건졌다. 이미 자취를 감춘 두 소년이 그가 시에서종종 예찬한 쌍둥이 정령임을 그는 알아보았다. 유일한 생존자가 된 시모니데스에게 파도처럼 사람들이 밀려왔다. 죽은자의 흩어진 몸을 찾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혹은 적어도, 그가있었음을 확인해달라고. 그가 있었어야만, 그를 애도할 수 있기 때문에. - P47

무너진 저택의 폐허에 서서, 시모니데스는 죽은자들이 있었던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저 자리에 연회의 주최자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그의 사랑하는 이가, 저기 맞은편 술잔이깨어진 자리에는 호탕한 웃음을 웃던 이가, 뭉개진 빵 앞에 조용했던 이가, 포크가 나뒹구는 곳에 대화를 이끌던 이가, 꽃잎떨어진 자리에 고개 끄덕이던 이가, 저기 저기 있었던 이가,
있었노라고. 사람들은 그의 말에 따라 흩어진 조각들을 주워들었고, 있었던 이가 없어진 것을 마침내 받아들이고 울었다. - P47

우리가이 되는 순간이야그날 시모니데스는 공간에많은 순간을 장면으로 기억하는과제 장면이 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어 허다한미해져도 장면 당신이 어디에 앉아 있었는데왼쪽 뺨으로 겨울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던 것을 나는 잊을 수가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언제고 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게 된했던 가련한 인류는 가능한 한 많은 순간을 장면으로 만들어야 했고, 존재의 관념을 도울 반한 공간씩 제품들을 받아에게가야 했다. 그것이 시인의 기억술이다. - P48

그리고 이때 기억은 애도를 위한것이다. 장례에 영정 사진이 필요한 까닭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우리는 사진 속 얼굴을 마주할 때 실감한다. 당신이없어졌다는 것을 사진에 대고 절한 뒤 몇 개의 음식을 앞에 두고 우리는 길어낸다. 저마다의 삶 속에서 당신이 있었던 장면들을 당신이 있었던 날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폐허가 된 연회장의 흩어진 잔해를 밟고, 그것이나마 남기려 최초의 정물화를 그렸을 먼 옛날의 화가처럼. 첫 번째 사진가처럼. - P4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확증하는 것은 그 숲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눈앞에 사물이 없더라도 정물화를 그릴 순 있지만 당신이 없었다면 이 사진이 남아있을리 없다. 나는 디지털 시대의 허다한 조작 가능성을 외면하고, 거기 틈입할폭력의 위험만은 잊지 않은 채, 다만 바르트를 따라 조금은 옛날에 서서, 경외하듯이 말을 쓴다. 사진의 근본은 그 대상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데 있다. 사진기의 전신인 카메라 옵스큐라-어두운방 - 의 어둠을 선회하여, 너무도 명백한 것, 그리하여 환하고아픈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바르트가 밝은방』을 쓴 이유다. - P65

사진 속에서는 무언가 작은 구멍 앞에 포즈를 취했고 거기 영원히 머물러 있었다.


사진 앞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믿는다. 어떤 그림 앞에서, 어떤문장 앞에서도 믿지 않는 것을 그리고 이 믿음에 슬픔이 스민다. 있었다. 라는 저 판명한 사실은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마치영원히 있을 것처럼 그때 당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것은 더 이상 그렇지 않음을 확인하는 일과 너무도 가깝기 때문에, 지금 당신이 살아 있더라도, 우리가 손을 잡고 있더라도이는 마찬가지다. 당신의 사진을 볼 때, 나는 당신이 죽을것을동시에 본다. 어느 미래에, 당신이 죽어 없을 것이라고, 사진은끝없이 말하고 있다. - P66

제라르 와이즈먼의 책 『세기의 오브제』는 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지나간 20세기를 상징할 만한 단 하나의 오브제를 꼽는다면 무엇일까. 먼 미래와 교신하며 오늘 모더니티의 끝자락에선 우리가 봉투에 찍을 인장은 뭘까. 로켓, 원자력, 코카콜라병, 피카소가 그린 아이의 초상, 실타래 모양의 염색체, 페니실린정, 풍선껌, 텔레비전, 달에서 본 지구, 아니, 무언가를 헛되어 칭송하는 프로파간다를 제외한다면, 마침내 와이즈먼이채택하는 답변은 이것이다. 20세기,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시대의 오브제, 폐허. - P157

지난 세기는 우리에게 폐허를 남겼다. 그러나 이는 단연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뜻하지 않는다. 당신이 없어진 자리가남았다는 것은, 당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 서서 확인할 수 있음을 뜻한다. 시모니데스가 기억을 길어내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조건이 필요했다. 조각난 그릇일지라도 제자리에 놓인, 잘린 손가락일지라도 제자리에 남은, 장소가 있어야했다. 폐허가 없다면 기억의 기술도 작동할 수 없다. 연회도 사람들도 지진조차도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을 시인은 막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나치의 마지막 전략이었다. 홀로코스트의 흔적을 지우는 것. - P157

그리하여 다시, 폐허마저 사라진 자리에서 와이즈먼은 묻는다. 지난 세기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오브제로 무엇이 남아 있나, 그것은 어쩌면 "결코 기억될 수 없으나 스스로를 잊히게 두지도 않는 10 무언가가 아닐까. 과거의 사물이 아닌, 기억의 말이 아닌, 폐허의 일이 아닌 무언가 가스실이 스민 잔영, 우리를 둘러싼 죽음의 풍경들, 지금 모두의 몸에 침투해 잔존하는그 허다한 홀로코스트, 어떤 예술 속에서 이따금 현재적으로반짝이고 있는 무언가 지워졌으나 지워지지 않는 폐허보다 덜 남은. 침묵하는. - P158

프랑스어로 ‘당신이 집에 도착하면 눈이 그쳤을 것‘이라고 할 때 ‘그치다‘라는동사는 전미래 시제로 쓰입니다. 전미래. 미래보다 하나 앞선 미래.
도착한 미래에서 이미 되바꿀 수 없는 과거.


저는 지금 당신이 죽은 미래에 있습니다. 언제나 과거형인 가혹한 그 소식을이미 들었습니다. 심장이 내려앉고 침묵하고 울고 무너지고 울지 않고 웃지 않고이제는 근근이 살아가지만 도리 없이 영영 없어진 채로, 미래에서 당신에게이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죽고 난 뒤에 이렇게 씁니다.


삶이란 피차 사라지는 것들을 떠나보내며 살아가는 것이겠지만, 당신이 떠난 후에저는 비로소 그것을 견딜 수 없어졌습니다. 사라지는 것들이 사라진 다음,
사람은 어떻게 계속 살아가는가 비로소 아득하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사라져 제가 슬픈 것은 차마 생을 지속하기가 이토록버거운 것은, 당신이 있었다는 증거겠지요.

예고도 없이 떠오르는 고통들이 있지요. 한때의 선연한 아픔, 그때 그 추위,
너무도 육체적인 공포, 절망으로 멈춘 심장 길을 걷다 문득 되살아나는 그것들을당신도 느끼셨습니까. 당신의 몸에게도 그 고통이 언제나 거듭 현재적이었습니까.
그럼에도 그것을 형언할 수 없었습니까. 그 깊은 구멍을 아셨습니까.


그러나 당신, 그 구멍 안에, 우리의 사랑도 있었습니까. 오늘 저의 슬픔이증명하고 있는, 그리하여 분명 존재했던 우리의 사랑이 지금도 현재적으로되돌아옵니까. 당신에게도.


이 책은 그러니까 감히 영원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 실린 사진들을 저는 어느 과거에 누군가의 전미래에 찍었습니다.
삶의 모양을 알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저 떠돌다 장면을 발견하면 그에항복하듯, 실패하듯 셔터를 눌렀습니다. 두고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갖고 오고 싶었습니다. 미래로 없는 당신에게로, 이 답장은 아직 늦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집에 도착하면 눈이 그쳤을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지금 눈이오고 있는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은 집에 도착할 것이고,
그 전에 눈이 왔다가 그칠 것입니다. 눈이 왔을 것입니다. 눈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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